2015년 11월호

탈이념·네트워크 공동체 연대와 통합의 시민사회

2045년 정치·사회 비전

  •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2015-10-20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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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100년의 시점에서도 정당정치는 여전히 중요하다. ‘재분배’에 대한 최종 의사결정을 참여민주주의로 모두 해결할 순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불어 자율과 연대의 시민사회를 구현해야 한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현대적 결합은 선진국으로 가는 필수조건이다.
    탈이념·네트워크 공동체 연대와 통합의 시민사회

    국회의사당. 미래에도 정당정치는 여전히 중요하다.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과 공동체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예상해보는 것은 흥미롭지만, 역사가 예정된 경로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예상이 결코 쉽지는 않다.

    광복 100주년을 맞는 2045년 우리 정치와 사회의 상황은 어떨까. 30년 후를 예견해보기 위해선 먼저 30년 전으로 돌아가 지난 30년의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돌아보는 게 유용하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은 1985년이다. 군부권위주의가 퇴조하면서 민주화 시대의 개막으로 나아간 시기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최근까지 우리 정치와 사회를 움직인 세 개의 힘은 민주화, 시민사회, 정보사회였다. 민주화는 군부권위주의를 종식시키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가져왔고, 시민사회는 자발적 결사체인 시민단체와 시민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을 활성화했다. 정보사회는 세계화와 결합해 정치·사회·문화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 반복과 전진이 중첩된 나선형의 과정이라면, 우리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온 이 세 힘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살펴보는 것은 미래 30년 전망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첫째, 민주화는 이제까지 민주화 시대에 누려온 ‘마스터 프레임’으로서의 의미를 서서히 상실해갈 것이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에서 최근까지 진행된 민주화 시대의 기본적인 정치·사회 구도는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의 구도였다. 민주화 세력은 이 구도를 ‘민주 대 반(反)민주’ 구도로 부르기도 했는데, 최근 이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국민 사이에서 더 이상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적지 않은 국민이 민주화 시대가 마감하고 있으며, 민주화를 대체할 새로운 시대정신이 요구된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이념대결은 계속된다?



    민주화 시대를 잇는 ‘포스트 민주화’ 시대에 그렇다고 해서 이념대결 구도가 완화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2015년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핵심적 과제들, 예를 들어 불평등 해소, 일자리 창출, 사회통합 제고 등의 이슈에 대해서는 이념대결 구도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이미 정치사회에서는 보수 대 진보의 대립 구도가 공고해졌고, 시민사회 역시 ‘보수적 시민사회 대 진보적 시민사회’가 팽팽히 맞선 형국이다.

    주목할 것은 이런 이념대립 구도가 지속되는 과정 속에 탈이념적 경향 또한 강화될 것이란 점이다. 오늘날 보수 정치세력이 진보적 정책을 차용하고, 진보 정치세력이 보수적 정책을 수용하는 것은 지구적 경향이다. 사회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적 접근은 더욱 강조되고, 이런 실용주의는 특히 탈정치화하는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이념과 탈이념이 혼돈스럽게 공존하는 흐름이 정치와 사회질서의 한 특징을 이룰 것이다.

    둘째, 정보사회의 진전은 정치와 사회 영역에서 또 다른 변동의 원천이다. 이제까지 정보사회의 진전은 정치적 의사 결정에서 네티즌의 영향력을 강화했는데, 이런 경향은 앞으로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구체적으로 신문과 방송으로 대표돼온 기성 공론장에서 네티즌 영향력이 더욱 커질 뿐만 아니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를 중심으로 한 1인 공론장의 영향력 역시 더욱 증대될 것이다.

    셋째, 정보사회의 진전과 연관해 시민사회 차원에서는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동시 확대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정보혁명에 뒤이어 현재 진행 중인 ‘모바일 혁명’은 시민사회에서 개인 중심적 생활을 강화하는 동시에 느슨한 네트워크들로 이뤄진 공동체 문화를 확산시켜왔다. 정주민적 생활방식과 유목민적 생활방식이 공존하는, 무질서 속에 새로운 질서가 정착돼가는 게 미래의 시민사회가 갖는 자화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2045년 우리 정치와 사회는 정보통신기술을 수단으로 한, 세계화한 정보사회의 만개(滿開) 한가운데 놓여 있을 것이다. 이런 미래 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와 다원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친화적이다.

    강한 국가, 강한 시민사회

    하지만 2045년의 사회가 직면할 과제들을 우리 정치사회와 시민사회가 얼마나 담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세계사적 흐름을 지켜볼 때 불평등 강화, 일자리 감소, 문화의 분절화 등의 문제는 앞으로 더욱 심화할 것으로 보이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국가와 시민사회가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낙관적 전망보다 비관적 전망이 우세해 보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평등에서 문화적 분절화에 이르는 사회문제들은 일종의 구조화된 이슈라는 점에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처방을 요구하는데, 이런 국가적 의제들을 해결하는 데 우리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역량이 크지 않다는 점에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광복 100년의 행복 사회를 열기 위해 앞으로 우리 정치와 사회는 어떤 준비를 해나가야 할까. 30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중·장기적 과제를 추구할 수 있고, 또 추구해야 한다. 정치와 사회에서 두 가지 과제가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 정치사회의 대표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정당정치를 구현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정당에 대한 신뢰는 대단히 낮고, 이런 상황은 앞으로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 정당정치가 중요한 까닭은 정당을 통해 시민사회의 가치와 이익이 정치사회에 제대로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당정치가 약화하는 빈 공간에 들어서는 포퓰리즘으로는 국가의 장기적 과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지난 민주화 시대를 돌아보면 사회운동으로 대변되는 참여민주주의의 확산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정보사회의 진전과 긴밀히 결합된 참여민주주의의 활성화는 정당정치로 대표되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들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하지만 가치와 자원의 재분배에 대한 최종 의사결정이라는 정치 고유의 문제들을 참여민주주의로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광복 100년에서도 정당정치가 여전히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당정치의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발휘되려면 무엇보다 정치인과 관료로 대표되는 정치사회 구성원들의 일대 자기계몽이 이뤄져야 하고, 참여민주주의와 생산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다양한 거버넌스를 더욱 활성화해야 한다.

    둘째, 자율과 연대의 시민사회를 구현해야 한다. ‘강한 시민사회’가 ‘강한 국가’와 함께 선진국의 조건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강한 시민사회란 상반된 가치일 수 있는 자율과 연대가 균형적으로 뿌리내린 시민사회를 말한다. 시민사회의 발전에서 자율을 지향하는 개인주의의 성장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며, 이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거시적으로 보면 광복 100년의 시간은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현대적 개인주의로의 변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문제는 개인주의의 과도한 성장이 가져올 폐해다. 사회는 개인 삶의 차원과는 구별되는 그 자체의 고유한 과제를 갖는다. 연대와 통합이 바로 그것이다. 개인주의만으로는 양극화, 이념, 세대 간 긴장 등이 낳는 사회갈등을 해결하기 어렵다.

    포용의 정치, 포용의 경제

    앞으로 더욱 증폭될 가능성이 높은 이런 갈등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대를 중시하는 시민사회의 구축이 매우 중요하다. 사회양극화, 이념갈등, 세대갈등에 올바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부를 포함한 정치사회의 역할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시민사회 역시 연대와 통합의 가치를 강화해 타자를 존중하는 열린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시민사회에서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현대적 결합은 선진국으로 가는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다.

    광복 100년이 되는 2045년의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합류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선진국 도약이 저절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에 도달하려면 무엇보다 포용의 정치와 동시에 포용적 경제가 요구되며, 시민사회가 성숙해야 한다. 역사에서 비약은 없다. 바람직한 경제성장과 분배에 더해 미래지향적인 정치질서와 시민사회를 일궈나갈 때에만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인간답게 사는 광복 100년의 한국 사회를 이루려면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부단한 혁신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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