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맞거나 틀린 것이 없는, 시각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 법인만큼 여러 출제자가 다양한 시각에서 시간을 가지고 문제를 선정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선 문제은행에 ‘문제’가 많다. 대학교수나 전문가가 행정자치부 문제은행에 1문제를 넣고 받는 돈은 7000∼8000원. 이에 비해 사설 고시학원은 모의고사 1문제당 3만원 이상을 지불하고 있다.
또 문제은행에서 시험문제 40문항을 골라 검증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도 9~10시간에 불과하며 그 대가로 받는 돈은 10만∼20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교수들이 학회나 기업체 세미나에 참석해 1시간 남짓 발표하고 받는 거마비가 50만원 안팎인 현실을 감안하면 어이없는 액수다. 행정자치부측은 “최고 엘리트들이 경쟁하는 시험에 출제위원으로 선정된 것을 명예로 생각해야지 돈보고 출제하려 해서야 되겠느냐”고 주장한다.
수당 뿐만이 아니다. 고려대 법과대의 한 교수는 “출제시간이 모자라 늘 쫓기듯 문제를 고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출제위원으로 들어갈 때마다 문제를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법과대의 또다른 교수는 “출제교수를 학교·지역별로 배당하는 방식은 자질이 모자라는 교수를 위촉할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한다. 구조적으로 행정자치부 문제은행의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교수사회에는 ‘문제 오류를 지적하는 소송과 판결이 더 많아져야 출제 수당도 많아지고, 따라서 문제 수준도 높아질 것’이라는 뼈있는 농담이 나돌 정도다.
2월20일 시행한 사법시험 1차시험 출제 및 채점과정은 종전과는 크게 달랐다.
오류 가능성을 사전에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문제 선정위원이 출제한 문제를 재검토위원이 검토하고 이를 출제위원이 재심사했다. 재검토위원은 선정위원이 문제은행에서 문제를 선정하면 직접 문제를 풀어 정답시비를 없애고 선택과목간 난이도를 조절한다. 재검토위원은 과목당 2명이며 문제 선정위원과는 별도의 인력풀에서 뽑았다. 최종 선정된 문제는 합숙소에 들여놓은 컴퓨터에서 타이핑 작업을 마무리한뒤 경찰병력의 삼엄한 경비속에 한 민간 인쇄업소에서 인쇄를 마쳤다. 종전에는 국가고시 편집실에서 자체 인쇄시설을 활용했으나 인쇄 질을 높이기 위해 외부에 맡긴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변화는 수험생들이 시험을 본 뒤 문제지를 가져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국가시험 문제지는 시험이 끝나면 모두 회수해 제지공장에 맡겨 고시과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학품을 넣어 아예 녹여 없애는 것이 관례였다. 이번에 사법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은 문제지를 가져가 정답을 알아본 뒤 출제위원과 전문가 등 5명으로 구성된 ‘정답심사위원단’이 발표한 정답 가안을 보고 2주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기회도 갖는다. 정답심사위원단은 이의제기 내용을 검토한 뒤 3월말경 최종 정답을 결정해 발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정해진 정답으로 채점을 거쳐 5월6일 1차시험 합격자가 발표된다. 주관식인 사법시험 2차시험 문제와 정답은 공개 대상에서 제외했다.
출제시스템의 변화에 대해 법조계와 수험생들은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문제가 공개됨에 따라 이제 수험생들은 시험을 치른뒤 서울 신림동의 고시촌에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문제를 짜맞추고 정답을 만드느라 몸살을 앓을 필요도 없게 됐다. 또 출제와 재검토, 그리고 문제공개 및 이의수렴절차 등 3단계의 검증절차로 시험의 객관성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게 됐다.
행자부의 생색내기(?)
그러나 문제점도 적지 않다. 우선 문제 선정위원 외에 재검토위원 정답심사 위원 등을 위촉해야 하는데 문제 선정위원을 위촉하기에도 부족한 인력풀에서 매년 어떻게 겹치지 않게 위원들을 선발하느냐는게 문제다. 특히 문제선정이나 재검토위원으로 선정되면 10일 넘게 감금상태와 다름없는 합숙을 해야 하는데 턱없이 낮은 수당에 선뜻 위원으로 오겠다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문제지 공개에도 어려움은 많다. 출제했던 문제가 다시 나올 수 있는 문제은행 시스템을 고수하는 한 원칙적으로 문제와 정답은 공개할 수가 없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을 감안, 행정자치부의 호소를 받아들여 “사법시험 1차 시험문제와 정답은 정보공개법상의 미공개 대상에 해당돼 공개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에서도 문제의 유형은 공개해도 문제 자체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게 행정자치부측의 설명이다. 행정자치부측은 법원의 판결까지 뒤집어가며 공개키로 한 이유에 대해 “국민의 알권리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업무나 예산부담은 엄청나게 늘게 된다. 한번 공개한 문제는 다시 쓸 수 없다. 문제은행식 출제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시험문제와 정답을 공개하려면 계속 새로운 문제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사시 관리 책임이 조만간 법무부로 넘어갈 것을 예상하고 행정자치부가 무책임하게 생색내기를 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현재 행정자치부는 내년부터는 사법시험을 법무부로 이관해 치른다는 계산이고 법무부는 ‘노하우’가 없다며 3,4년 유예기간을 달라는 주장이다. 특히 올해는 사법시험 1차를 4번 보면 4년간 응시할 수 없는 4진 아웃제의 당사자가 처음 나온다. 따라서 행정자치부가 부실 출제에 따른 소송 사태를 일단 막고보자는 미봉책을 쓴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폐지되는 사법연수원
행정자치부가 현실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뜻 출제시스템 개선안을 내놓은 것은 현재 진행중인 고시제도 개편작업과도 무관치 않다. 사법시험의 경우 사법개혁추진위원회는 법조인 양성방안이 포함된 사법개혁안 최종안을 지난해말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최종안에 따르면 사법시험이 정원제에서 자격제로 바뀌고 응시 대상도 대학에서 법학과목을 이수한 사람으로 제한하게 된다. 또 사법연수원을 폐지하는 대신 학문과 실무연수를 병행하는 독립법인인 한국사법대학원(가칭)을 설립해 법조인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최종안을 토대로 구체적인 사법개혁안을 만들어 시행하려면 앞으로 5년 이상은 기다려야 하지만 벌써부터 개혁안을 두고 논란이 많다. 우선 절대점수제로 정원을 철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필요없이 변호사를 양산해 과당경쟁을 초래한다”는 반대의견과 “더 많이 뽑아 고시공부의 낭비를 줄이고 법률서비스를 널리 제공해야 한다”는 찬성론으로 나뉘고 있다. 또 법학과목 이수자에게만 응시자격을 준다는 개편안에 대해서도 찬반론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즉 반대하는 쪽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며 의학 과학기술 등 전문분야의 법조인 양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찬성하는 쪽에서는 장기간의 고시공부로 ‘고시낭인’을 양상하는 비뚤어진 현실을 바로잡는 효율적인 대책이라고 맞서고 있다.
선발후 교육기관이 사법연수원에서 한국사법대학원으로 바뀌는 것에 대해 고시에 합격하고서도 학생신분으로 돈을 내고 학교를 다녀야 하느냐는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고 또 선발후 교육기간을 대학원 2년, 연수 1년으로 늘리는 것은 너무 길다는 지적도 많다. 이와 같은 사법개혁안 가운데 정부가 어떠한 방안을 채택할지는 미지수지만 장기적으로 사법시험 정원제는 철폐되는 쪽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참여연대는 지난해 12월 현행 사법시험이 정원제를 택하고 있는 것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참여연대는 사법시험 준비생과 변호사 등 70여명으로 청구인단을 구성해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위헌심판 청구서에서 “현행 사시는 정원제를 통해 합격자수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공무담임권, 직업선택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참여연대는 정원제를 없애는 대신 로스쿨 졸업자 등을 대상으로 기본 자질을 검증하는 시험을 실시해 더 많은 법조인을 길러냄으로써 국민에게 값싸고 질 좋은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사시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한편 중앙인사위원회(위원장 김광웅·金光雄)도 2003년 시행을 목표로 행정 외무 기술 등 국가고시제도 개편작업을 하고 있다. 정부가 고시제도를 개편하게 된 이유는 현행 국가고시제도로는 전문성과 창의성이 중시되는 공직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고시제도 개편안
이에 따라 고려대 정부학연구소는 지난해말 중앙인사위의 의뢰를 받아 4가지 고시제도 개편안이 담긴 최종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에 제출했다. 이에 따르면 제1안은 현행 고시제도의 골격은 유지하되 운영상 문제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즉 고시전담기관을 설립하고 1,2차 시험문제를 개선하며 3차 면접시험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제2안은 현행 객관식 1차시험을 폐지하고 공직적격성검사(PSAT, Public Service Aptitude Test)를 실시하며 2차시험은 현재의 2차시험 과목을 4과목 정도로 축소 조정하고 마지막으로 집중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는 방식이다. 제3안은 2안과 마찬가지로 1차로 PSAT를 치르고 2차는 전문지식을 평가한 뒤 인턴과정을 거쳐 최종선발자를 뽑는다. 2안과 가장 큰 차이점은 최종 선발자의 일정 비율을 총장 추천자로 뽑는다는 것이다. 제2안과 3안 모두 토익이나 토플 점수가 일정 수준 이상인 사람에게만 1차 시험 응시기회를 준다. 마지막으로 제4안은 고급공무원 양성을 위한 국가 공인의 2년제 행정전문대학원을 설립, 이 학교 졸업생들에게만 고시 응시 기회를 주는 것이다.
정부는 제2안을 채택한 뒤 차츰 3안으로 개선하거나 2안과 3안을 통합한 형태의 새로운 개편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 장기적으로는 행정전문대학원을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채택 가능성이 높은 2안과 3안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면 우선 2안과 3안 모두 문법 위주의 현행 1차 영어시험을 폐지하는 대신 토익이나 토플 등의 성적으로 대체했다. 영어는 최소자격요건이어서 영어성적이 일정수준 이상이 되는 사람에게만 응시기회를 준다. 정부는 토플의 경우 580점, 토익은 820점을 커트라인으로 잡고 있다. 한편 100점만점인 텝스도 아직까지는 토플이나 토익처럼 문제은행이 충실하지 않아 성적을 인정해주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고시제도를 시행하는 2003년 상황이 개선되면 성적을 인정할 방침이다.
영어성적이 일정수준 이상인 사람들은 1차시험을 치르게 된다. 2안의 경우 단순 암기위주의 현행 1차시험 대신 PSAT라는 기본 소양평가를 실시한다. 또 헌법 행정학 경제학 등의 관련 전문지식도 평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전문지식을 활용한 종합적 사고력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 매년 시험의 난이도가 달라질 경우를 감안해 PSAT 성적의 유효기간은 1년으로 했다.
다음은 2차시험. 필수과목 위주로 현행 2차 시험 과목을 축소 조정해 실시한다. 일반행정의 경우 행정법 행정학 정치경제학 조사방법론 등으로 간단해진다. 2차 시험에서 최종합격자의 130%를 선발해 마지막으로 3차 면접시험을 치르게 된다.
면접시험은 3일동안 계속된다. 첫째날은 개인면접을 통해 전문지식을 평가하고 이틀째는 집단면접(group presentation)으로 5,6명의 수험생이 한 팀이 되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 개개인의 문제해결능력 보고능력 정보화능력 관리능력 리더십 등을 평가받게 된다. 마지막날은 외국어 회화시험을 치른다.
마지막 면접시험까지 통과한 사람은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교육을 받고 당해부처에서 실무수습을 거친 후 정식 발령을 받게된다.
제3안도 1,2차 시험은 거의 비슷하다. 1차로 PSAT와 같은 기초평가를 하고 2차로 정책방법 정책분야 행정관리 등 영역별로 전문지식을 평가한다. 제2안과 다른점은 인턴과정을 둔다는 것이다. 2차시험에서 최종 합격자의 2,3배를 뽑아 8개월 이상 인턴수료후 당해부처에서 최종 선발되는 사람만 시보로 임용해 실무수습을 받게 한다. 제3안의 또다른 특징은 선발 과정을 공개채용과 총장추천으로 이원화한다는 것이다. 총장추천제를 도입하는 이유는 대학교육을 정상화하고 지방대학 출신 수험생들에게 공직 참여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공채의 경우 1,2차시험을 치른 뒤 면접은 생략하고 바로 인턴과정을 밟는다. 총장추천을 받은 경우에는 1,2차 시험은 치르지 않고 면접시험에서 전문지식을 구술 평가한 뒤 합격하면 공채대상자와 마찬가지로 인턴과정을 거쳐 최종 선발된다. 총장 추천을 받으려면 학점이 4.5점 만점중 4점 이상이어야 한다.
고시제도의 바람직한 개선방향
장기적인 방안으로는 행정전문대학원 설립도 고려 대상이다. 즉 국가공인 행정전문대학원을 설립해 이 대학 졸업생들에게만 공무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준다는 것이다. 행정대학원 입학 자격은 4년제 대학 졸업자로 하되 대학원이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이상의 개편안 모두 공직에 적합한 우수한 인재를 충원하는데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지만 문제점도 없지 않다. 현재 채택 가능성이 높은 2안과 3안 모두 2차 시험 과목을 축소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이 경우 학계의 반발이 예상된다. 현행 고시제도 하에서도 선택과목이 조금씩 조정될 때마다 학계와 학원가가 한바탕 술렁이는 점을 감안하면 고시제도를 개혁하다시피 했을 때 그 반발 강도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특히 면접시험을 강화하거나 인턴제 및 총장 추천제를 도입할 경우 공정성 시비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 또 인턴시험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의 처리도 문제다. 행정전문대학원을 설립해 졸업생들에 한해 응시 자격을 줄 경우 대학원 입학 시험이 또다른 ‘고시’로 변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현행 고시제도를 약간 수정하는 선에서 유지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행 고시제도에 문제가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국가고시의 생명인 공정성 시비는 차단할 수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선발과정에 정실개입을 차단하고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시험점수를 사후 공개하고 감사를 실시하는 등의 보완장치를 마련해서라도 현행 고시제도를 개편한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이번 최종보고서를 토대로 고시제도 개편안을 마련한 뒤 공청회를 통해 최종안을 확정, 올해안에 현행 고시제도를 개편하고 2년 후인 2003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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