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니는 무욕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직업도 집도 아이도 없고 가구, 텔레비전도 없다. 자본주의의 3대 무기라는 신용카드, 주식, 보험이 다 없다. 신용카드의 편리성, 주식의 수익성, 보험의 보장성은 모두 데니가 지향하는 삶이 아니다. 은행 통장 자체가 없다. “나는 보험 대신 신을 믿고, 카드 대신 현금을 사용합니다”라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히히 웃는 데니. 그에겐 아이 같은 천진이 있다. 아이 같은 천진? 그건 질문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단순성, 선입견에 오염되지 않은 눈, 새로움에 이끌리는 호기심과 온몸 가득 넘치는 활력과 장난기다.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을 때 데니는 맑은 눈으로 나를 봤다.
“일과요? 우린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요. 시간에 맞춘 일과 같은 건 없어요, 하하. 모든 걸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합니다. 마음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해요. 몸과 마음과 영혼이 원하는 장소에만 가고 원하는 사람만 만나요. 그 반대의 일은 해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요.”
동시대를 살면서 이런 대자유가 있었다니. ‘어른이 된다는 건 하기 싫은 일도 할 줄 알게 되는 것’이란 슬픈 정의를 가진 나 같은 사람의 머리를 꽝 울리는 말을 데니는 아무렇지 않게 한다.
“이런 삶을 선택하고도 오랫동안 ‘식사는 시간 맞춰 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불편하게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젠 그것도 벗어났어요. 딱히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어도 우리는 배고프지 않아요. 식사가 꼭 밥이어야 하나요? 고구마로도 차로도 과일로도 얼마든지 식사를 대신할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에게 시간에 맞춰 해야 할 일은 거의 없는 거죠. 몇 해 전부터는 메모장을 버렸어요. 기억나는 건 약속이고 기억나지 않는 건 약속이 아닌 거예요. 그래도 문제 될 게 없던데요. 꼭 필요한 약속이라면 생각이 안 날 리 있나요?”
하긴 내가 전화 걸어 인터뷰 시간을 잡자고 했을 때도 데니는 “언제든 오세요. 우리 집은 24시간 개방체제예요”라고 했었다. 그래도 굳이 시간을 못박아둬야 안심하는 내가 “그래도 몇 시쯤?” 하며 자꾸 안달을 해도 “아무 때나 편할 때 문 열고 들어오라”고 했었다. 그게 바로 이거였구나.
기차의 맨 끝자리인 양 콤팩트하고 포근한 방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데니와 젬마 그리고 나는 새벽이 훤하게 밝아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과연 그들의 삶은 충만이었다. 다 버리고 사는 그들 곁에 앉으니 ‘충만을 느끼기가 아주 쉽구나’라고 나는 생각했다.
7평짜리 ‘마운틴’
데니와 젬마의 집은 북한산 아래 7평짜리 비닐하우스다. 정확히 말하자면 7평짜리 컨테이너 박스에 양옆으로 2.5평, 1.5평짜리 비닐하우스가 하나씩 덧붙여진 형태다. 집 앞 사각형 나무판 위엔 ‘마운틴’이란 그림 같기도 하고 글씨 같기도 한 간판이 걸려 있고, 비닐창문 앞엔 대나무가 열 그루 자라고 있다. 창 안으로는 겨울인 데도 자스민 줄기가 푸른 잎을 넘치게 피워 올렸다. 마운틴은 생명이 싱그럽게 자라는 집이다. 그들은 이 집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오면가면 들러 차 한 잔 마시고 갈 수 있는 장소로 개방해뒀다. 이곳이 데니와 젬마의 일터이고 집이다.
집을 평수로만 계산하는 짓이 얼마나 졸렬한 수작인지를 마운틴에 가보면 안다. 마운틴은 욕망과 물신과 자본주의의 해방구다. ‘행복과 충만은 손에 쥔 물질의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되풀이된 선언, 그러나 사람들의 욕망과 이기심 앞에 언제나 맥 못 추던 그 선언의 원형이 마운틴엔 생생하게 실재한다.
쉰넷의 데니와 마흔일곱의 젬마는 관청에 신고한 이름 지동암과 김미순 대신 천주교 세례명으로 서로를 부른다. “어디 있어? 젬마!” 하면 하이 톤의 젬마가 “왜 그래요, 데니?”하고 달려온다. 니키라는 노래 부를 줄 아는 개가 한 마리 있어 식구는 모두 셋. 이 셋은 똘똘 뭉쳐 서로 맹렬하게 사랑한다. 집이 만약 넓었더라면, 30평, 40평, 50평 집에 온갖 가구와 가전제품, 여분의 옷과 장식구를 가득 채웠더라면, 그들은 그토록 밀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