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두 유아 사건을 보도한 ‘신동아’ 1933년 7월호 기사와 수사본부가 설치됐던 1930년대 당시의 서대문경찰서.
제보가 접수되자 경성시내 전 경찰서에 비상이 걸렸다. 선발대 30여 명이 허둥지둥 오토바이, 자동차를 몰아 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현장에는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이미 구경꾼 수십명이 운집해 있었다. 경찰은 즉각 비상경계선을 긋고 금화장 앞길과 마포 가는 전차선로에 기마경관을 배치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이어 기무라(木村) 서장 이하 서대문경찰서 간부 전원이 현장에 나타났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요다(依田) 검사의 지휘하에 현장조사가 시작됐다. 경기도 경찰부 노무라(野村) 형사과장은 사진반을 데리고 와서 사건현장 곳곳을 누비며 수십장의 증거사진을 찍었다. 시내 각 신문사와 통신사는 기자를 급파하고 서둘러 호외를 발간했다.
사건현장은 참혹했다. 잘린 머리의 뒤통수는 두치 반이나 깨어져 뇌수가 흘러내렸고, 매립지 곳곳에 핏자국과 뇌수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깨어진 두개골 안쪽으로는 날카로운 칼로 뇌수를 파낸 흔적이 역력했다. 치마폭, 종이, 낡은 수건 세 겹으로 감싼 머리는 쓰레기 매립장 귀퉁이에 깊지 않게 묻혀 있었다. 머리를 옮기는 도중에 흘린 것으로 추측되는 피가 전찻길 건너 마포 방향으로 이어졌다.
경찰견 여러 마리를 풀어 도주한 범인을 추적했지만, 핏자국이 끊긴 프랑스 대사관 부근에서 맴돌 뿐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 못했다.
정오쯤 현장조사가 끝났고, 아이 머리는 곧장 경성제대 의학부로 옮겨져 부검에 들어갔다.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 기무라 서장은 사건 개요를 짤막하게 언급했다.
“아직도 혈색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서 범행은 금일 새벽에 있었다고 봅니다. 원한이나 치정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경성에서는 근래에 없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만전을 다하여 범인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범행 현장은 딴 곳인 것 같습니다. 아직 수사 중이므로 더 자세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동아일보’ 1933년 5월17일자)
범행은 대체 어디서 일어났을까? 피해자는 누구인가? 흉악한 범죄의 동기는 무엇인가? 모든 게 오리무중이었다.
동요하는 민심
사건이 알려지자 경성은 일시에 술렁였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혹시 자기 아이가 희생되지나 않았을까 해서 놀러 나간 아이를 찾느라 미친 듯 골목을 누볐고, 나병환자, 걸인, 막벌이꾼들은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숨을 죽였다. 복덕방, 다방, 카페, 빨래터 가릴 것 없이 사람 모인 곳에는 온통 흉악무도한 사건 이야기였다.
“아마 문둥병자의 짓일 걸세. 머리는 갖다 버리고 골과 몸뚱이는 삶아 먹은 게야. 나는 꼭 그렇게 보이는 걸.”
“아니야 그렇다면 왜 골을 내어 먹나? 나는 등창병자가 그랬거나 아니면 간질쟁이 범행인 것으로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데 그래.”
“그도 그럴듯하지만 내 생각에는 모진 여자의 소행이라고 보이는 걸. 무슨 남편에게나 본처에게 원한을 가지고서 하늘이 노할 범행을 한 거야.”
“제 자식은 그리 못해. 어찌 산것의 목을 베냐 말이야.”
(‘단두 유아 사건의 전모’, ‘신동아’ 1933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