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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첨정 ‘단두 유아(斷頭 乳兒)’ 사건

거리에 나뒹군 뇌수 빼낸 아이 머리, 그 23일간의 대소동

죽첨정 ‘단두 유아(斷頭 乳兒)’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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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굶은 거지가 아이를 유괴해 병자에게 팔아먹은 것이다, 시체를 파다가 몸은 먹고 머리만 갖다 버린 것이다…. 시정에는 구구한 억측이 난무했다. 유례없는 흉악범죄를 접한 치안당국은 관할 서대문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경성시내 경찰을 총동원해 수사에 나섰다. 전화벨이 울리고, 오토바이가 내달리고, 수사대가 출동했다. 경찰서와 파출소는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단서는 네 가지뿐. 아이 머리, 치마폭, 종이, 낡은 수건이었다. 당시는 DNA 검사가 개발되기 이전이었고 피해자의 몸통이 없어 지문을 감정할 수도 없었다. 그렇듯 열악한 조건에도 하루 만에 부검결과가 나왔다.

“성별 남아. 연령 만 1세 내외. 살아있는 아이의 목을 벤 것. 범행시간은 발견시각부터 10시간 이내.”

경성제대 법의학부 구니후사(國房) 교수는 송곳니가 났으니 만 1세 내외이고, 핏자국이 마른 정도로 보아 범행시간은 10시간 이내이며, 머리를 짧게 잘랐으니 사내아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담당형사는 머리를 싼 치마폭이 고급 제품임을 근거로 가난한 집 아이는 아니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사건 발생 다음 날에는 머리를 싼 종이가 쌀 봉투임을 밝혀내는 ‘개가’를 올렸다.

사건발생 하루 만에 경찰서 인원을 총동원하여 불면불휴로 활동하여 그 두부(頭部)를 싸서 버린 종이주머니의 출처를 알아낸 서대문경찰서에서는 그것을 유일한 단서로 삼아 가지고 한층 더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종이주머니의 출처는 알았으나 이것을 사용하는 집이 쌀집, 과자점, 가루집 등 무척 많으므로 종이를 사가지고 간 인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일일이 인상을 기억하기 어려워서 경찰이 수사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일보’ 1933년 5월18일자)



경찰은 마포 일대 쌀집과 과자점을 샅샅이 뒤진 끝에 범행에 사용된 쌀 봉투가 ‘최춘홍쌀집’에서 쓰는 봉투라는 사실까지 밝혀내고, 쌀집 고객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추궁했다. 그러나 별다른 혐의점은 찾지 못했다.

경찰은 ‘과학적 수사’를 통해 그밖에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뇌수를 파낸 흔적으로 보아, 범인은 나병, 매독, 간질, 등창병 따위의 치료에 쓸 뇌수를 얻을 목적으로 아이를 죽였다, 쌀 봉투에 묻은 흙과 사건현장의 흙이 다른 것으로 보아 아이는 다른 곳에서 살해된 후 유기됐다, 목과 뒤통수에 남은 칼날의 흔적으로 보아 범인은 칼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경찰의 수사망에 걸리지 않고 교묘하게 자취를 감추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매우 ‘영리한 자’다….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자랑하는 일본경찰도 부실한 단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은 미궁 에 빠져들었고, 경찰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커져갔다. 사건 발생 사흘째 되던 날, 기무라 서장은 동요하는 민심을 의식해 이렇게 말한다.

“아직 범인을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사건이 오리무중으로 들어간다고 꾸지람을 해도 하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수사방법은 있습니다. 하여튼 보십시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좋은 결과를 볼 겁니다. 언제쯤 잡히겠느냐고요? 그것은 아직 확언을 못하겠습니다.” (‘동아일보’ 1933년 5월18일자)

백주에 아이 머리가 나뒹군 지 한참이 지나도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의 보호자가 사건에 관련됐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사악한 인간이라도 부모로서 제 자식의 목을 베었을 리는 없고, 아이의 보호자와 범인의 ‘음험한 거래’ 아래 범행이 자행됐을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이러한 추리대로라면 아이의 보호자는 친부모가 아니라 팔아먹을 목적으로 아이를 얻어와 기르는 사람일 개연성이 컸다. 이렇듯 어설픈 추리로 인해, 개구멍받이를 기르는 가난한 사람이 애꿎게 수사의 표적이 됐다.

아기무덤 수난시대

서대문경찰서 형사대는 사건 발생지를 중심으로 죽첨정, 중림동, 합동 일대에 흩어져 거의 모든 가정을 호구조사했다. 개구멍받이를 키우는 사람이 발견되면 마치 범인 취조하듯 조사했고,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점이 발견되면 가차없이 유치장에 가뒀다. 아이 머리 탓에 애매한 개구멍받이 보호자들이 수난을 겪은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실속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믿었던 호구조사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잔뜩 독이 오른 경찰은 난데없이 삽자루를 들고 나섰다.

18일(사건 발생 사흘째)부터는 최근에 죽은 어린아이를 매장한 공동묘지를 파보기 시작했다. 제일착으로 용산경찰서 공덕리주재소에서는 그 관내에서 최근에 죽어 매장된 아이가 셋이 있으므로 순사를 파견하여 아현리 467번지 이창호와 공덕리 252번지 최용석 두 명을 염리공동묘지로 데리고 가서 묘지관리인 송태식을 입회시키고 지난 16일(사건 당일)에 매장한 이씨의 딸 영애의 무덤과 15일에 매장한 최씨의 아들 동식의 무덤을 파보았다. 그러나 모두 다 머리가 확실히 붙어 있으므로 결국 헛물이었다. 또 한 명은 부모가 출타하고 없어 19일에 다시 데리고 가서 무덤을 파보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범죄의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 가엾게 죽은 어린아이 무덤의 수난시대를 연출하고 있다. (‘조선일보’ 1933년 5월19일자)

경찰은 무덤이 아니더라도 의심 가는 곳이면 어디든 일단 파고 보았다. 한동안 경성시내에서는 ‘삽질’하는 경찰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런 삽질은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5월18일 오전, 서대문경찰서 수사대 최태준 순사는 봉래정 부근 언덕을 순찰하다가 파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애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진 경관들은 이것이 사라진 아이의 몸뚱이일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매장된 시체를 파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체에는 머리가 붙어 있었다. 한 살가량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시체였다. 단두 유아 사건과는 무관하지만 혹시 또 다른 살인사건이 아닐까 하여 부검해본 결과 병을 앓아 죽은 아이를 암매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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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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