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5일 중국인 배척 폭동으로 폐허가 된 평양 중국인 거리와 사건의 발단이 된 ’조선일보’ 1931년 7월3일자(위).
“복수하자!”
“이대로 당하고만 살 수 없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성을 듣고, 여기저기서 군중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군중은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성난 군중은 돌과 각목을 들고 동승루 안으로 밀려들어가 가구와 집기를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허름한 목조건물에 수백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기둥이 흔들리고 마룻바닥이 갈라졌다.
“집주인은 조선인이다. 집은 부수지 말자!”
선두에 선 장정이 외치자 군중은 썰물처럼 동승루를 빠져나왔다. 군중이 휩쓸고 지나간 가게에 성한 물건이라곤 2층 한 귀퉁이에 걸린 전화 한 대뿐이었다. 군중은 여세를 몰아 대동강변 중국집과 중국요정을 모조리 파괴하고 대동문통 대로로 몰려나왔다.
대동문통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중국인이 경영하는 포목점과 잡화점이 밀집한 서문통이었다. 군중은 200~300명씩 떼를 지어 중국인 상점으로 몰려가 돌을 던졌다. 몇몇은 전봇대만한 통나무를 둘러메고 ‘영치기 영차’ 소리에 장단을 맞춰 굳게 닫힌 문을 부쉈다. 기관총을 난사하듯 수백 군중이 일제히 돌을 던지자 제아무리 튼튼한 문도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죄다 박살났다.
문이 열리자 수십명의 장정이 상점 안으로 뛰어들어 불난 집에서 물건을 집어내듯 닥치는 대로 상품과 집기를 길 밖으로 내던졌다. 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길 밖으로 내팽개쳐진 상품을 밟고 찢고 뜯었다. 횃불을 든 사내들은 깡그리 파괴된 중국인 상점에 불을 놓았다.
중국인 대학살
어느덧 군중 숫자가 1만을 훌쩍 넘어섰다. 남문정에서 종로통까지 평양시내 전역을 성난 군중이 점령했다. 시내 교통은 완전히 마비됐고, 인파에 치여 걸어 다니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길 위에는 주단, 포목, 잡화 등 찢어지고 깨진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갔고, 중국인들은 성난 군중을 피해 도망 다니며 흐느껴 울었다.
밤 11시, 폭동이 시작된 지 세 시간이 흘렀다. 평양 시내 웬만한 중국인 상점과 가옥은 거진 파괴됐다. 더 이상 파괴할 것이 없어 중국인을 향한 폭력도 끝나는 듯했다. 그때 군중 사이에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