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하이 망명 시절의 김상옥, 1923년 투탄 사건이 발생할 당시의 종로경찰서, 종로경찰서 폭탄 폭발 현장 사진이 실린 ‘동아일보’ 1923년 1월14일자.
“이보게들, 내일도 윤전기 옆에서 기름 냄새 맡아야 하니 이쯤해서 그만 일어나세.”
선임 사원 홍인순이 기름때 묻은 외투를 챙겨 입으며 말했다.
“초저녁인데 벌써요?”
“자. 자. 어디 오늘만 날인가. 전차 끊어지기 전에 어서 일어나자고.”
후임 사원들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홍인순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다섯 사내는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종로경찰서 담벼락을 따라 어깨를 맞대고 걸어갔다. 겨울밤 섬뜩한 한기가 외투 속까지 파고들어 뼛속까지 저려왔다. 다섯 사내는 세운 옷깃 아래로 얼굴을 파묻고 몸을 웅크린 채 꽁꽁 얼어붙은 땅만 바라보며 걸었다.
종로경찰서에 날아든 폭탄
쾅! 와장창.
오후 8시10분, 다섯 사내가 동일당 간판점 앞길을 통과할 때 종로경찰서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연이어 둔탁한 물체가 날아와 다섯 사내의 다리를 강타했다. 폭탄 파편이었다. 다섯 사내는 비틀거리다 차례로 쓰러졌다. 홍인순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우리 다섯 사람은 술을 마신 후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이런 말 저런 말을 나누며 무심히 종로경찰서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돌연히 ‘쾅!’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무슨 돌조각 같은 것이 날아와 우리 발목을 칩디다. 우리는 그때 정신을 잃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도저히 알지 못하지요. 정신없이 두어 걸음 걸어 나가다가 그만 땅에 꺼꾸러졌습니다. 그때 광경이라든지 누가 무엇을 던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참말 우리는 신수가 사나웠습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동아일보’ 1923년 1월14일자) |
폭탄은 종로경찰서 서편 담벼락과 인접한 교통실(交通室) 벽면 상단부에 맞고 튕겨 나와 공중에서 폭발했다. 유리창 세 장이 산산이 깨지고, 창 옆에 걸어둔 경찰복이 벌집이 되었지만, 퇴근시간 이후에 벌어진 일이라 경찰 측 인명 피해는 전무했다. 하지만 때마침 부근을 지나가던 매일신보 기계부 사원 다섯 명과 기생 원산월(元山月), 기생의 아홉 살배기 몸종 정하영 등 민간인 일곱 명이 파편에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폭탄을 던진 사람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해는 경미했지만, 경찰의 심장부에 폭탄 세례를 가한 중차대한 시국사건이었다. 사건 직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오하라(大原) 검사, 경기도 경찰부 우마노(馬野) 경찰부장이 부리나케 달려와 전조등을 비추고 현장검증에 나섰다. 그렇지만 시야가 어두워 대충 훑어보고 자세한 검증은 이튿날로 미뤘다.
폭음을 듣고 종로경찰서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종로사거리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경찰은 시내 곳곳에 경계망을 치고 행인들의 몸수색까지 벌였으나 용의자 검거에는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