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춘향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영화 ‘방자전’의 한 장면.
이번에는 이런 시도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이기심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그걸 인간성의 핵심으로 용납하는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 공자와 그의 어록(‘논어’)은 어떤 의의를 갖는 것일까. 과연 이 속에서 혁신적 경영 모델이나 새로운 문명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고작 심신이 지친 현대인에게 도피처(마약)를 제공하는 데 불과한 것일까. 마치 옛날 봉건시대에 도교사상이 죽림칠현식 은둔의 쾌락을 제공하던 것처럼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오늘날 이 냉혹한 자본주의 시대에 인문고전으로서 ‘논어’의 쓰임새는 과연 무엇인가.
창의력의 샘 ‘논어’
우선 ‘논어’는 창의성의 샘으로서 가치가 있다. 지난해 겨울, 빌 게이츠는 우리의 미래를 ‘창의력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라고 명명한 바 있다. 최근의 아이폰, 앱스토어, 구글과 같은 첨단제품들을 보노라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상상해서 창조할 때만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창의력 자본주의’를 몸소 보여주는 아이폰의 주역 스티브 잡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
“애플은 언제나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 있다.”
인문학과 첨단기술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외려 인문학이야말로 창의력을 기르는 힘이라는 주장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스티브 잡스가 청년시절 심취한 분야가 한자의 서체, 곧 서예(書藝)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자와 인문학이 가진 창의성과의 관련성을 귀띔해준다.
아! 물론 한자와 인문학을 아이폰과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억지처럼 여겨질지 모르겠다. 한데 현대 추상화가인 피카소가 한자의 세계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던 이력은 창의력과 한자, 혹은 동양사상과의 관계를 좀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중국인으로 태어났더라면 화가가 아닌 작가가 됐을 것이다. 나는 그림을 ‘쓰고’ 싶다.”
더욱이 피카소가 우리더러 “당신들은 보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보지만 말고, 생각하라!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어 있는 놀라운 속성을 찾으라! 눈이 아니고 마음으로 읽어라!”(루트번스타인, ‘생각의 탄생’, 116쪽)라던 요구는 상형문자로서의 한자, 그리고 인문학으로서 동양사상의 속성과 근사하다. 눈에 비친 표면을 모사하던 기존의 회화(구상화)를 벗어나 새로운 패턴, 곧 추상의 세계를 창조해낸 힘의 근원이 자연 속 사물을 추상해 ‘상형’한 한자의 속성에서 비롯됐을 법하지 않은가.
그런데 창의력이란 결코 천재에게만 주어진 우연한 자질이 아니요 또 상상력이란 백일몽과 같은 환상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니다. 여기에 인문학의 의의가 있다. ‘태양이 처음 떠오른 이래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서양 속담은 ‘오래된 미래’로서의 인문고전(‘논어’)의 의의를 되새기게 하는 금언이다.
창의력을 기르는 데에 ‘논어’의 용도는 인간사회의 ‘경영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여기에서 경영이란 국가경영이든 기업경영이든, 사회단체(NGO)든, 가족이나 개인의 삶이든 간에 모든 ‘관계 맺기 기술’을 포괄한다). 인간의 역사 가운데 최악이었던 춘추시대의 환란 중에 짐승으로 타락하는 인간의 꼴과 정글로 추락하는 사회를 구출하기 위한 모델이 ‘논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논어’ 속에는 인간다운 사회·문명의 기본 틀(모델)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