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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韓日 역사의 터부를 부수는가

김옥균·광개토태왕비 그리는 만화가 야스히코 요시카즈

나는 왜 韓日 역사의 터부를 부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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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韓日 역사의 터부를 부수는가
‘조선인을 교육시키는 데 가장 유용한 도구는 한글’이라는 점을 간파한 후쿠자와는 당시로서는 파격인 ‘조선은 국한문 혼용(混用)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추천했다. 사재를 털어 한글 활자 주조 비용도 지원했다. 국한문 혼용은 ‘한성순보’의 후신인 ‘한성주보’에서 이루어졌다. 1884년의 갑신정변도 후쿠자와의 사상적·물질적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끝나고, 김옥균을 비롯한 소수의 망명자를 제외한 주동자들은 멸족을 당했다. 이 참상으로 ‘큰 기대’가 ‘큰 실망’으로 바뀐 것일까. 후쿠자와의 아시아관(觀)은 일변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의 참변을 “인간 사바세계의 지옥이 조선의 경성에 출현했다”고 비난한 후쿠자와는 1885년 2월 ‘시사신보’에 ‘탈아론’이란 제목의 사설을 기고했다. 야만적인 조선·청국과 절교하고 서구열강에 합류하자는 ‘탈아입구’의 논리를 내놓은 것이다. 나아가 그는 “조선의 멸망이야말로 조선 국민을 위한 것이다”라는 극언까지 내뱉었다.

이 주장에 대해 안티테제로서 존재한 것이 ‘흥아론(아시아주의)’이다. 흥아론에는 동양문명의 고결함을 내세우며 국수주의 우익단체인 ‘현양사’를 설립한 도야마 미쓰루와 도쿠가와 막부에서 해군봉행(장관), 메이지 정부에서 초대 해군경을 역임해 ‘근대 일본해군의 아버지’로 불리고, 메이지유신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스승이기도 한 가쓰 가이슈(勝海舟)가 있었다.

흥아론의 중심세력인 ‘흥아회’(훗날의 아시아협회, 김옥균, 박영효도 관여) 후원자이기도 했던 가쓰는 근대화에 적극적이지만 일본 단독으로 서구에 대항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판단했다. 한중일 3국의 연대와 공조가 정답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만연한 조선 멸시 여론에 대해 “조선은 비록 지금은 약소국이나 과거에는 일본에 문명의 종자를 전파한 스승이었다”고 강조하고, 대원군을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동급의 인물로, 조선을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나라로 만들 인물로 평가했다.





김옥균 암살로 촉발된 청일전쟁

일본 망명 후 김옥균은, 후쿠자와와의 관계는 소원해지는 대신 아시아주의자들과의 관계는 깊어졌다. 그들은 한중일 3국의 연대와 근대화로 서구에 대항하자는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제창했다. 그러나 김옥균과 가쓰 가이슈와의 접촉은 ‘왕도의 개’에 묘사된 것처럼 1회로 끝나버린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옥균은 결단을 한다. 갑신정변을 진압한 이홍장과 담판해 청국의 조선 간섭을 중지시키고,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해 한중일이 대등한 연합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한일 관계의 장애물로 보고, 홋카이도나 ‘태평양의 고도(孤島)’인 오가사와라 제도 같은 벽지로 유배 보내기에 급급했다. 민비가 보낸 자객은 끊임없이 김옥균의 뒤를 밟았다. 그런 상황에서 김옥균이 이홍장과의 담판을 추진한 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1894년 3월 그는 주변 만류를 뿌리치고 홍종우의 안내를 받아 상하이(上海)로 향했다. 그러한 그를 맹우(盟友)인 나카에 초민과 도야마 미쓰루가 성공을 빌며 배웅해주었다. 상하이에 도착하자 홍종우가 바로 자객으로 돌변해 김옥균을 암살했다. 청국은 조선 정부의 환심을 사려고 김옥균의 시신을 ‘외교적 선물’로 제공했다. 민비는 민씨 일족의 원수이기도 한 그의 시신을 부관참시해 양화진에 효수했다.

잊혀가던 망명자의 비극적인 최후가 일본에서는 좋은 기삿거리가 되었다. 일본 언론은 부관참시를 한 조선왕조의 조처를 ‘전근대적인 야만’이라고 비난했다. 김옥균 암살을 방조한 청국도 한통속이라고 규탄했다. 그 때문에 야만적인 조선·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서구 제국주의에 합류하자는 후쿠자와의 탈아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흥아론을 지지하던 도야마 미쓰루의 현양사 같은 과격파 단체들도 “김옥균 복수”를 외치며 조선과 청에 적극 개입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일어난 사건이 ‘민비 시해’다. 저들이 자행한 ‘국권능욕’적인 행위 때문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한일 관계사는 터부의 영역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아시아주의는 변질돼 탈아입구(脫亞入歐)적 우월감과 융합되면서 후일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기형아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여론 격변을 반기고 환영하며 획책한 이가 당시의 외무대신인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였다. 그는 서구열강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길은 ‘군사적으로 조선과 청을 제압해 그 힘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군부와 결탁해 조선이란 먹이를 두고 경쟁자인 청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옥균이 상하이에 가게 된 것은 전쟁 빌미를 만들려는 그의 연출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망명자인 김옥균의 일거수일투족을 외무대신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전쟁 여론을 조성하려면 살아 있는 김옥균보다 무참하게 살해당한 김옥균의 시신이 더 가치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왕도의 개’는 김옥균 등이 제창한 삼화주의를 왕도의 상징으로, 무쓰 무네미쓰의 행위를 대외침략노선, 즉 패도(覇道)의 상징으로 그렸다. 상황은 무쓰의 의도대로 흘러가는데 때마침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다. 현양사의 과격파들은 ‘김옥균 복수’와 ‘조선 개혁’을 외치며 동학군 합세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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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림 | 일본 통신원, 군사평론가 c45ac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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