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직장인이 ‘석사 학위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라고 느낀다. 만학(晩學)의 꿈을 안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더러는 박사 학위에도 도전한다. 대학원 생활을 통해 인간관계의 폭도 넓혀보고자 한다. 그런데 대학원, 만만한 곳이 아니다. 알지 않는가. 학교는 ‘정치가 난무하는 곳’이다.
‘시사저널’이 2009년 12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내 20대 기업 임원 1611명 가운데 박사 학위 소지자는 207명, 석사 학위 소지자는 355명이었다. 학사 출신이 1010명으로 다수를 이루지만, 석박사 출신 비율이 점차 높아지는 것으로 봐야 한다.
무엇보다 기업에서 경영 주체로 떠오르는 오너 3, 4세의 학력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한겨레’의 분석을 보면, 30대 대기업 오너 3~4세의 53%가량이 외국에서 대학을 다녔고 대학원 출신 가운데 65%는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이 CEO가 될 즈음에는 석사 학위가 임원 승진에 필수요건이 될지도 모른다.
고학력=고소득?
학력 인플레이션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2012년 미국 내 석사 학위 소지자는 2000년 대비 63%나 늘었다. 좀 더 높은 급여를 받으려는 욕구 때문이었다. ‘높은 학력=높은 급여’ 등식이 어느 정도 성립된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술직이나 연구직에서는 석사 학위를 기술력 또는 경력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더 많은 연봉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무직에서는 아직 석사 학위에 대해 연봉을 더 얹어줄 정도의 경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하지만 사무직 중 전문직에서는 일부 인정을 해준다. 전문직의 경우 박사 학위를 가져야 제대로 된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석박사 학위가 취업에 반드시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직의 경우 석박사 학위가 연봉에 직결되다보니 오히려 학사 학위 소지자보다 석박사 학위 소지자가 취업에 더 어려움을 겪는 현상도 나타난다. 고액 연봉을 줄 수 없는 중소기업으로서는 이들의 채용을 꺼릴 수밖에 없다. 반면 대기업의 석박사 학위 소지자 채용 시장은 제한적이다. 그래서 하향 지원 현상이 나타나고, 그러다보니 학력 인플레이션이 더 심해지는 악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사무직의 경우에도 전반적으로 입사 경쟁률이 높아지면서 신입사원 가운데 석사 학위 소지자의 비중이 상승하는 추세다. 취업 재수생이나 삼수생이 늘면서, 그 사이에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사람이 증가한 탓도 있다. 석사 학위 소지 신입사원이 늘어남에 따라 기존 경력사원도 석사 학위를 따려고 열을 올린다. 대학원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은 실존적 고민이다.
대학원에 가는 세 가지 이유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마음먹었다면 그때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어떤 대학원에 갈지 선택해야 한다. 국내 대학원이냐 해외 대학원이냐, 일반 대학원이냐 특수 대학원이냐, 어느 대학에서 개설한 대학원이냐, 선택지는 다양하다. 그래서 더 고민스럽다.
직장인이 대학원 진학을 고려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업무 전문성 제고, 둘째 인적 네트워크 강화, 셋째 퇴직 이후 대비. 어떤 경우냐에 따라 진학 전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일타삼피’ 전략도 가능하겠다.
대체로 중하위직 직장인은 업무 전문성 제고 차원에서 대학원 진학을 고려한다. 당연히 이들은 일반 대학원 또는 특수 대학원 중에서도 전문교육이 강한 MBA 과정 같은 것을 선호한다. 실력을 갖추어 놓으면 현재 직장에서는 물론 어느 회사에서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머리가 더 굳기 전에 하자는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다.
반면 고위직은 인적 네트워크 강화 차원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향이다. 그래서 특수 대학원 중에서도 사교 목적이 강한 고위정책 과정 같은 것을 선호한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실무 역량보다는 인간관계망이 중요해지는 점을 고려한 선택이다. 아울러 머리를 쓰는 공부를 기피하는 현상도 작용한다고 봐야 한다.
고위직 또는 중상위직 가운데 더 이상의 승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 특히 퇴직을 앞둔 직장인은 은퇴 이후를 대비한 대학원 진학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이들 가운데 그래도 나이가 젊은 세대는 재취업에 대한 기대를 안고 학력 스펙을 올릴 수 있는 일반 대학원이나 전문성이 강한 특수 대학원을 선택한다. 그러나 재취업 가능성도 낮고 두뇌 회전도 예전 같지 않은 고령층은 인맥으로라도 버텨보고자 사교 목적의 대학원으로 향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박사 학위를 받은 나는 후배들에게 먼저 이런 조언을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공부해두라”는 것이다. 가능한 한 빨리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말해준다.
첫째 이유는 역시 뇌의 물리적 한계와 관련이 깊다. 뇌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수록 머리가 굳는다는 것을 잘 안다. 암기력도 떨어지고 두뇌 회전 속도도 떨어진다.
둘째 이유는 체력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원 수업을 소화하려면, 특히 논문을 쓰려면 주경야독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밤을 새우는 일이 하루가 다르게 힘들어진다. 20대 때에는 새벽까지 술도 잘 마셨고 하루 이틀 밤새우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30대에 들어서면 하룻밤만 새워도 다음 날 거의 인사불성이다.
셋째 이유는 대학원 수업에서 비로소 종합적 사고 능력을 익히기 때문이다. 대학 때에는 선택한 개별 수업에서 학점을 따면 그만이다. 그 개별 수업 간에 상관관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이것저것 배우는 것이 사고의 확장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대학원에서는 내가 정한 전문 분야로 수업은 물론 개인 학습이 모아져야 한다. 특히 논문을 쓰는 과정은 기획, 자료 수집, 자료 분석, 관점 정립, 보고서 작성까지 종합적 사고가 없이는 해낼 수 없다.
인간의 두뇌에서 종합적 분석 부분은 가장 나중에 성장하는 영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종합적 사고력이 좋아지는 것인데, 대학원 수업은 바로 이 종합적 사고력을 조기에 성장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다. 종합적 사고력은 임원 승진에 필수적인 전략적 판단력 또는 통찰력과 맞닿는다.
목적에 따라 어떤 대학원에 진학할지 결정하고 나면, 그 분야에서 가장 정평이 난 대학원을 순위별로 나열한 다음 위에서부터 차례로 문을 두드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해외로 갈지도 이 시점에서 결정해야 한다. 회사에 특별한 제도가 없는 한, 월급 받으며 유학 가는 건 불가능하다. 사표를 내거나 휴직을 하고 가야 한다.
원우회 활동 열심히!!
대학원은 ‘직장 밖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 좋은 기회다.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다. 공부하기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가방만 들고 왔다갔다 하기보다는, 원우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좋다. 원우회 회장단에 들어가서 각종 행사를 주관하고 또 수료 이후에 동창회 활동도 주도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그것이다. 시간적 여유가 없는 일반 직장인은 이런 자리를 일부러 피한다. 하지만 대학원 원우회 회장 자리는 선거에 출마하려는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노리는 자리기도 하다.
업무 전문성 강화를 목적으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엔 상대적으로 대학원 수업의 강도가 높다. 또 본래 목적 달성에 치중하는 관계로 공부 이외의 활동에는 관심을 덜 기울인다. 그러다보면 다른 학우와의 만남이 별로 없어서 ‘인적 네트워크 강화’라는 또 다른 토끼를 놓치고 만다. 이 토끼,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자주 오는 기회도 아닐뿐더러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이 토끼 절대 놓치면 안 된다
대학원에서 학우 몇 명 사귀었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될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과장 때 사귄 회사 밖 사람 한 명은 임원 때 사귄 회사 밖 사람 10명 이상의 확장성을 지닌다. 더욱이 자신이 대학원을 다닐 정도로 열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열의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 열의를 가진 사람은 성공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 ‘미래의 동반성장 파트너’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맥 확장의 중요한 매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직장에서 제도적으로 지원해주면 문제가 없겠지만 자비로 등록금을 내야 한다면 만만치 않은 부담이다. 분유 값이냐 학비냐를 고민해야 한다. 이때 전자를 택하는 아빠, 엄마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 피 같은 돈을 들여 대학원에 진학했다면 본전을 뽑아야 한다. 회사 비용으로 진학했더라도 마찬가지다. 회사에 그만큼 더 기여해야 하지만 내 성공에도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본전은 기본, 본전 이상을 뽑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배우는 것만으론 부족
뭔가를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사람’이다. 특수 대학원 대부분이 바로 이점을 지향한다. 이런 차원에서 재학 중엔 원우회 활동을, 졸업 후엔 동창회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게 좋다. 선후배와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직장생활에도 활용해야 한다. 승진에도 활용하고 사업 수주에도 활용하고 전직에도 활용하라는 것이다.
누구나 가까운 친구 대부분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만난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학교 같은 학과 동창은 그만큼 자주 만나지 않는다. 각자 놀기 바빴던 시절의 친구였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레 추정해본다. 대학원 동창 역시 비슷하기는 한데, 대학 동창보다는 자주 얽힌다. 일단 종사하는 업종이 유사하다. 이익을 공유하거나 나눌 것도 많다.
사교를 전제로 한 특수 대학원 출신들은 어울리는 것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그러다보니 아주 끈끈한 유대감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해관계 카르텔’쯤이라고 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실제 우리나라 민·관·정은 특수 대학원 동창회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대학정보공시 사이트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국내엔 2013년 기준으로 모두 1170개 대학원이 있다. 이 가운데 69.0%인 807개가 특수 대학원이다. 2012년 기준 특수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은 무려 3만9698명에 달한다.
학비 부담에서 자유로운 일부 직장인은 특수 대학원을 여러 곳 섭렵한다. 특정 지역 내 특수 대학원들을 섭렵한 결과, 이 지역 주요 인사 대부분과 인맥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 대학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를 저 대학원 동창회에서 만나는 식이다. 정치인 가운데 이런 사람이 많다.
요즘 여러 회사는 고위직에게 특수 대학원 진학을 지원한다. 그 이유도 따지고 보면, 회사 돈을 들여서라도 정·관·재계 인사들과 인맥을 만들어두라는 것이다. 이렇게 밀어주는데 밀려야지 별수 있겠는가?
은퇴 아닌 제2의 인생 위해
요즘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은퇴가 주된 관심사다. 친구들을 만나면 온통 은퇴 후 대책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몇 해 전 나의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은 박사 학위를 받는다면서 “이 나이에 박사 학위가 무슨 소용일까마는”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다.
“예순 살밖에 못 살던 때엔 서른 살이 중간이지만, 백 살까지 사는 요즘엔 쉰 살이 중간이다. 제2의 인생을 앞두고 박사 학위를 딴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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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앞두고 대학원 진학을 고려 중인 1차 베이비붐 세대는 물론, 명예퇴직의 기로에 서 있는 2차 베이비붐 세대 모두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일본에서도 단카이 세대의 대학원 진출은 흔한 일이다. 미국에서도 은퇴 연령층의 현업 잔류가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은 직업 전문성 유지 차원에서 다시 학교를 찾기도 한다.
고위직 또는 중상위직 직장인은 임원 승진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면 퇴직에 대비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 나이에 빡센 MBA를 ‘신의 한 수’로 삼아 은퇴 준비도 끝내면서 임원 승진 가능성도 오히려 높이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정말 빡세게 공부할 각오는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