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로 휴가 나온 윤기철은 정보기관 요원들로부터 정순미가 당의 지시에 따라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다는 얘기를 듣고 혼란스러워한다. 이혼녀 신이영과 살을 섞고 개성공단으로 돌아온 윤기철에게 정순미는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이봐, 윤 과장.”
컨테이너 뒤에 서 있던 윤기철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법인장 김양규가 다가오고 있다. 눈을 둥그렇게 뜬 것이 무슨 사고라도 일어난 것 같은 표정이다. 다가선 김양규가 말했다.
“허가증 나왔다.”
허가증이 휴가증으로 들렸는데 휴가증도 맞는 말이다. 북한 특구개발지도총국에서 허가증을 발급해주지 않으면 휴가고 뭐고 없는 것이다.
“이것 참, 어제 오후 4시에 신청했는데 오늘 오전에 나오다니.”
김양규가 머리까지 내저었다.
“총국에서 자네를 봐주는 거 같다.”
“수속이 빨라진 겁니다.”
“그런가? 어쨌든 준비해.”
“예, 법인장님.”
몸을 돌렸던 김양규가 머리만 비틀고 윤기철을 보았다. 웃음 띤 얼굴이다.
“어쨌든 자네가 오고 나서 일이 좀 풀리는 것 같아.”
그 말을 박스를 메고 오던 포장반의 남자 근로자들이 들었다. 북한 측 남자 근로자들이다. 윤기철은 심호흡을 했다. 근로자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대표 동지가 뵙자고 하십니다.”
사무실로 들어선 윤기철에게 자재과 보조사원 김현주가 말했다.
“지금 대표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머리를 끄덕인 윤기철이 챙겨둔 가방을 들고 나오다가 멈춰 섰다. 사무실 안에는 선적 때문에 모두 창고로 지원을 나가 김현주뿐이었다. 22세, 둥근 얼굴이 자주 빨개진다.
“나 휴가 가는데 미스 김, 필요한 거 있어? 서울에서 사다줄게.”
“아유, 일 없습니다.”
김현주의 흰 얼굴이 빨개졌다.
“순미 언니나 사다주시라고요.”
“정순미 씨는 날 싫어해.”
“어머나.”
놀란 듯 김현주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럴 리가요? 모르시는 말씀이야요.”
“잘 알잖아? 나하고는 말도 잘 안 해.”
“순미 언니가 과장님을 좋아한다고요.”
그 순간 김현주가 입을 딱 다물더니 상기되었던 얼굴이 굳어졌다. 사람은 흥분했을 때 말실수를 한다. 김현주처럼 어리고 순수한 성품이면 그 가능성이 더 높다. 윤기철은 몸을 돌렸다. 김현주가 무심코 뱉은 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근로자 대표실 위치는 총화실 안쪽이어서 문을 두 개나 열어야 한다. 대표실 앞에 선 윤기철이 노크를 하자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요.”
문을 연 정순미가 말했으므로 윤기철은 잠자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 하나, 소파 한 조가 놓인 방 안에는 둘뿐이다. 조경필은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앉은 윤기철이 정순미를 보았다.
“대표님은?”
그때 정순미가 가방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았다. 검정색 알루미늄제 서류가방이다.
“이 가방 가지고 가시라고요.”
앞쪽 자리에 앉은 정순미가 눈웃음을 쳤다.
“이 가방 드리려고 대표님 사무실을 빌렸어요.”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윤기철이 소파에 등을 붙였다.
“자주 빌려야겠어.”
“왜요?”
“우리 둘이 데이트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어디 있어? 안 그래?”
그때 정순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 볼부터 붉어지더니 금방 눈 주위까지 번졌다. 정순미가 시선을 내린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다녀오세요. 과장님.”
“잠깐만.”
정순미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 이야기 좀 하게.”
“무슨 이야기요?”
주춤거리던 정순미가 다시 자리에 앉았으므로 윤기철은 어깨를 폈다. 할 이야기는 없다.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못해. 대표 동지가 보초를 서줄 것이거든.”
“글쎄,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요?”
“재미있잖아, 대표 동지를 보초 세우고 말이야.”
“장난하지 마세요.”
정순미가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지만 웃음을 참느라고 콧구멍이 조금 벌름거렸다. 정색한 윤기철이 정순미를 보았다.
“난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여기 개성에 오기 전에 헤어졌어.”
정순미는 눈만 깜박였고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내가 차인 거지. 솔직히 개성공단에 발령받으면 좌천이야. 밀려난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보통 여자라면 차는 것이 당연….”
“저기요.”
그때 말을 자른 정순미가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리더니 윤기철을 보았다. 다시 볼이 조금 붉어져 있다.
“그분 좋아하셨어요?”
“응?”
“사랑하셨느냐고요?”
윤기철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내가 엉덩이를 딥다 차인 것도 당연하지. 내 이용가치가 없어졌으니까.”
“…”
“아프리카 출장을 가서도 휴대전화 통화를 하는데 여긴 휴대전화도 안 터지잖아?”
“…”
“그 쌍년은 여기 사정을 두르르 꿰고 있었다고. 그래서….”
“저기요.”
다시 윤기철의 말을 끊은 정순미가 윤기철을 보았다.
“이제 그만요.”
“그러지.”
이제는 윤기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가에 웃음이 떠올라 있다.
“오늘 진도는 이만큼만 나가기로 하지.”
서정아, 26세, 천안전문대 졸, 가구회사 직원,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 168㎝쯤 되었고 살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건강한 체격. 윤기철의 부모는 좋아서 웃음을 참느라고 애쓴다. 배추밭에서 삼을 본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런데 서정아의 부모 쪽도 비슷했다. 우선 윤기철의 키가 185㎝나 되는 데다 건강하다. 그리고 중소기업이지만 이름이 알려진 회사 과장이다. 이들에게 개성공단 파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윤덕수는 초등학교 동창이며 같은 개인택시 운전사인 서정아 아버지에게 박도영한테서 받은 1000만 원도 이야기했을 것이다. 1년에 서너 번 이런 보너스를 받는다고 뻥쳤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 수준이다.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진 윤기철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정순미가 상류층이라고?
대충 밥을 먹은 양가 부모가 후식도 안 먹고 방을 나갔을 때는 30분쯤 후다. 모두 다 생선초밥을 시켰기 때문에 빨리 끝났다. 윤기철이 빈 그릇들을 둘러보고 나서 서정아에게 물었다.
“포장마차에서 소주나 한잔 할까요?”
그 순간 서정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가 바로잡혔다.
“포장마차요?”
“네, 오면서 보니까 근처에 포장마차가 많던데.”
2초쯤 서정아가 시선을 준 채로 입을 떼지 않았는데 윤기철은 기다렸다. 물론 분위기 좋은 카페나 택시를 타면 10분 안에 호텔 바에도 갈 수 있다. 그렇다고 포장마차가 막 내놓은 카드도 아니다. 호의적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때 서정아가 말했다.
“네, 좋아요. 소주 한 병만 마셔요.”
선은 처음 보지만 다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시작이 중요하다. 포장마차 안 가겠다고 했다면 가볍게 끝낼 수 있었다. 그쯤은 중학생도 아는 기본상식이다.
포장마차에 들어가 나란히 앉아 안주가 놓이고 소주잔이 채워지는 동안 분위기는 점점 부드러워졌다. 윤기철이 툭툭 말을 던지고 서정아가 웃는 패턴이 반복되었지만 자연스러웠다. 서정아는 조하나처럼 까탈스러운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같은 개인택시 운전사 자손으로 재고 자시고 할 것이 있겠느냐는 의식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편안했다. 웃는 얼굴을 보다가 몇 번 같이 잔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런데요.”
소주를 둘이 한 병쯤 비웠을 때 서정아가 웃음 띤 얼굴로 윤기철을 보았다.
“양가 부모님은 서로 마음에 드시는 것 같죠? 안 그래요?”
“글쎄올시다.”
윤기철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어머니야 조금 따지겠지만 아버지는 ‘소한테 치마만 입혀 데려가도 니가 살지 내가 사냐?’ 할 양반이다. 물론 서정아가 소는 아니다. 그때 서정아가 말했다.
“제가 애인이 있는데 당분간은 보이지 못할 말 못할 사정이 있거든요?”
“…”
“가만 보니깐 그쪽도 부모님한테 시달리시는 것 같은데 우리 당분간 교제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 어떨까요?”
아주 조리 있고 명료한 대사였다. 감동한 윤기철이 심호흡을 두 번이나 하고나서 서정아를 보았다.
“남북 핵협상도 일방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죠. 서로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하니까요. 난 부모한테 별로 시달리지 않아요. 개성공단으로 들어가면 전화도 불통이거든요.”
말이 술술 나왔지만 긴 말에는 거짓말이 끼어 있다고 믿어온 윤기철이다. 그래서 나중 말은 짧게 줄였다.
“조건을 내놓고 합의합시다. 내 조건은….”
“뭐죠?”
서정아가 짧게 물었으므로 윤기철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그쪽 말 못할 사정이 풀릴 때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자주는 것.”
“…”
“몰론 한 번에 한 시간이면 됩니다.”
“…”
“내가 두 달에 한 번 나올 때도 있어요. 그럼 한 달, 아니, 한 시간 버는 거지.”
그러자 시선만 주고 있던 서정아가 차분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고려해볼게요.”
눈이 마치 시체의 눈 같았으므로 윤기철은 그 말이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갔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선 서정아의 허리에 대고 겨우 말했다.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그냥….”
“아, 당분간 교제해보기로 했어요.”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만난 윤덕수의 시선을 받자 저절로 터져나온 윤기철의 말이다. 계획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뇌가 계산했다고 봐야 옳다. 어젯밤에는 혼자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 것이다. 갑자기 외로워졌다고 아무나 불러젖히는 성품의 윤기철이 아니다. 술 먹다가 신이영 생각이 열 번도 더 났지만 참았다.
“잘 생각했다.”
만족한 표정이 된 윤덕수가 군말 없이 콩나물국을 떠먹으면서 말했다. 다른 때 같으면 내가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웬 놈의 콩나물국이냐고 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윤기철 해장하라고 끓였기 때문이다.
“걔가 아주 살림꾼이란다. 반찬 솜씨도 좋아서 술안주는 다 만든다는구먼.”
“며느리하고 같이 살 것도 아니면서 웬 술안주래?”
어머니가 빈정거렸지만 기분 좋은 아버지는 놔두었다.
“오늘 춘식이하고 한잔 해야겠구먼.”
서춘식은 서정아 아버지의 이름이다. 반찬을 집던 윤기철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서춘식이 그 소리를 들으면 서정아한테 이야기할 것이고 그 다음 과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자, 그냥 놔둘 것인가?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야 도리 아닌가?
개성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소공동 사무실에 들른 윤기철에게 박도영이 가방 하나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검정색 알루미늄 가방으로 컸고 무거워 보였다.
“이걸 가져가시지요.”
내용물을 물을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가방에서 시선을 뗀 윤기철에게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미화 50만 달러가 들었습니다.”
머리를 든 윤기철을 향해 박도영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금씩 아셔야 될 것 같습니다. 아마 가져가시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윤기철의 앞쪽에 박도영이 다시 작은 상자를 놓았다.
“펴보시지요.”
상자를 들고 뚜껑을 연 윤기철이 숨을 삼켰다. 시계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용으로 두 개나, 롤렉스 마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엄청난 고가품이다. 시계에서 시선을 뗀 윤기철이 박도영을 보았다. 얼굴이 굳어 있다.
“정순미한테 주는 겁니까?”
“정순미 어머니한테까지 주는 거죠.”
박도영이 이만 드러내고 소리 없이 웃었다.
“받으면 좋고 받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우리한테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죠.”
“…”
“지난번에는 15만 원짜리 화장품을 사주셨지만 지금은 조금 긴장할 겁니다. 아무리 정순미가 상류층이라고 해도 저건 구하기 힘들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선뜻 대답이 나온 것은 상류층 소리에 자극을 받아서다. 윤기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박도영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윤기철이 손을 내밀었더니 박도영이 의외로 힘껏 쥐었다. 눈빛도 강해져 있다.
오후 2시 반, 박도영이 말한 대로 윤기철은 가방과 시계상자를 들고 개성공장에 도착했다. 한국 측은 물론 북한 측도 윤기철이 탄 승용차는 안에 뱀이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문만 열어놓고는 손을 대려고도 안 했다. 그들은 앞뒤 차의 시선을 의식해서 통과시킬 때 검사하는 시늉은 했지만 뒷자석에 놓인 가방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먼저 가방을 숙소 사물함에 넣어두고 사무실로 들어섰더니 김양규가 반겼다.
“아이구, 어서 와. 오 국장이 자네 찾았어.”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사무실 안의 시선이 모였다. 과장 둘에 여직원 넷이 앉아 있었는데, 정순미만 이쪽에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그래요. 박스 체크 좀 하고 연락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정순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정순미 씨, 선적 파일 갖고 창고로 갑시다.”
사무실 안에서는 존댓말이다. 다가온 오석준과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난 윤기철이 사무실을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와 창고를 향해 천천히 걸었더니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옆으로 다가온 정순미가 웃음 띤 얼굴로 윤기철을 보았다.
“잘 다녀오셨어요?”
윤기철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환해진 정순미의 얼굴을 보았다. 속눈썹 끝이 반짝이고 있다. 귓가의 솜털을 본 순간 윤기철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창고에 들어가 있어.”
윤기철이 정순미의 귀에 시선을 준 채로 말했다.
“전성일 선생한테 드릴 가방을 가져왔는데 꽤 무거워.”
정순미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기다릴게요.”
“그동안 별일 없었지?”
“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이건 억지로 만든 소리다. 박도영이 정순미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런 말 묻지도 않았다. 그때 정순미가 머리를 들었다. 윤기철을 마주 보면서 윤기 있는 입술을 뗀다.
“보고 싶었죠.”
그 순간 윤기철은 숨을 들이쉬었다. 시선을 뗀 윤기철이 몸을 틀어 숙소 쪽으로 발을 디디면서 박도영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사람들이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지 않겠는가? 작전을 하려면 상대를 속여야 하는 것이 필수다.
“고마워.”
윤기철이 창고 쪽으로 갈라지는 정순미의 옆모습에 대고 말했다.
“나도 매일 정순미 씨 생각했다고.”
몸을 돌린 윤기철이 서둘러 발을 떼었다. 그래, 작전이다. 너도 작전, 나도 그렇다. 갈 때까지 가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고 그 순간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죄책감이 사라진 것이다.
창고 안으로 들어선 윤기철이 문을 닫고는 자물쇠까지 채웠다. 이곳은 업무과용 창고로 사무용품, 작업복, 신발, 서류 등이 쌓여 있다. 20평 정도의 면적에 안쪽에는 책상과 의자, 낡은 소파까지 놓였는데 정돈이 잘되었다. 책상 옆쪽 의자에 앉아있던 정순미가 일어섰는데 조금 긴장한 것 같다. 형광등 빛에 비친 흰 얼굴이 굳어 있다. 다가선 윤기철이 먼저 알루미늄 가방을 책상 위에 놓았다. 가방이 무거워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종이백도 옆에 놓았다. 시계다. 윤기철이 의자에 앉자 정순미가 잠자코 앞쪽에 앉는다. 마주 보는 위치다. 거리는 50㎝ 정도, 숨결이 닿을 정도다. 윤기철이 정순미를 보았다. 정순미의 시선이 윤기철의 목에 닿는다. 부드러운 표정이 되어 있고 겸손한 자세다. 그 순간 윤기철의 머릿속에 박도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상류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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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졌다. 오늘은 업무용 회사차를 몰고 나왔는데 통행증을 내밀었더니 북측 관리는 이름과 얼굴만 확인하고 나서 그대로 통과시켰다. 위쪽에서 지시가 내려온 것 같다. 이번 서울행은 휴가다. 5박6일, 일요일까지 끼어서 7일간 휴가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자유로를 달리던 윤기철은 자신의 가슴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느꼈다. 휴가 가는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꼭 뭔가를 떼어놓고 가는 것 같다. 옆쪽 의자 위에 놓인 검정색 알루미늄 가방은 어느덧 잊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앞쪽을 응시한 채 윤기철이 혼잣말을 했다.
“내가 어쩌려고 이러지?”
제 마음속을 읽은 것이다. 정순미다. 정순미가 들어 있다. 무겁고 뜨거운 느낌. 그러나 안정되어서 가슴을 편안하게 만드는 존재, 이건 윤기철이 처음으로 맞는 분위기다.
“할 수 없지 뭐.”
다시 불쑥 말을 뱉은 윤기철이 제 목소리를 듣고는 그 의미를 분석했다. 저절로 튀어나온 말이어서 제 본심을 알아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여건상 불가능하다는 뜻인지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두자는 소리인지.
“수고하셨습니다.”
가방을 받은 박도영이 정색하고 말했다. 이곳은 인사동의 한정식집 방 안이다. 오늘도 방 안에는 셋이 둘러앉았다. 윤기철과 박도영, 이인수다. 가방을 내려놓은 박도영이 내용물을 볼 생각도 않았는데 윤기철도 열어보지 않았다. 그때 박도영이 물었다.
“이번에는 휴가라고 하셨지요?”
“예, 일주일간. 다음 주 수요일에 돌아갑니다.”
“푹 쉬시겠네요.”
“지겨워질 것 같아요. 괜히 휴가를 오래 낸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인수와 시선을 부딪친 박도영이 웃고 나서 물었다.
“보조사원 정순미하고는 잘 지내시죠?”
“아 그거야….”
말을 멈춘 윤기철이 박도영을 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자, 술이나 한잔.”
박도영이 술병을 들어 윤기철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교자상에는 한정식 찬이 가득 놓여 있었지만 셋은 젓가락으로 찔끔거리고만 있다.
“건강을 위해서 한잔 하십시다.”
술잔을 들어 올린 박도영이 한 모금에 술을 삼키더니 윤기철을 향해 웃었다.
“정순미 성분이 좋습니다.”
아까부터 긴장하고 있던 윤기철이다.
잠자코 시선만 준 윤기철에게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당원으로 개성중학교 교감이고 어머니는 개성제1병원 간호부장이죠. 정순미가 개성공단에 오기 전에는 보육원 교사였습니다.”
“…”
“정순미는 저쪽으로부터 교육을 철저히 받겠지요. 아마 정순미의 일거수일투족이 계산된 행동이라고 봐도 될 겁니다.”
일거수일투족이란 말에 윤기철의 눈이 치켜떠지는 것을 본 박도영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 사람들, 아무나 연락원으로 쓰지 않습니다. 사상무장이 철저하게 되어 있고 집안이 좋은 데다 훈련된 요원들을 내보냅니다.”
정순미가 바로 그 주인공이란 말이었지만 윤기철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박도영이 말했다.
“그리고 이것 받으시지요.”
박도영이 눈짓을 하자 이인수가 가슴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봉투를 받은 윤기철이 물었다.
“뭡니까?”
“사례비라고 해야 될까요? 우리는 작전비라고 합니다만.”
박도영이 웃지도 않고 봉투를 눈으로 가리켰다.
“국가를 위한 일을 하고 계시지만 우리도 월급 받지 않습니까? 북한하고 다른 점이죠. 정순미는 이렇지 못할 테니까요.”
봉투에는 100만 원권 수표가 10장 들어 있었다. 1000만 원이다. 거금이다. 윤기철의 급여 넉 달분 실수령액에 해당된다. 1만 달러, 윤기철의 머릿속은 그것이 정순미의 100달분 월급 가깝게 된다는 것까지 계산해낸다. 인간의 뇌는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연상하는 습성이 있다. 잠재의식이 건드린 것 같지만 기계처럼 그쪽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아이구머니.”
봉투에서 수표를 꺼낸 어머니가 비명 같은 외침을 뱉었다. 윤기철의 스물아홉 평생에 어머니의 이런 비명은 처음 들었다.
“아이고, 이게 얼마야?”
수표를 쥘부채처럼 쫙 편 어머니가 다시 외쳤다. 그 서슬에 두 장이 식탁 위로 떨어졌다.
“야, 백만 원짜리다.”
집에 와 있던 동생 윤영철이 수표를 집어 들고 소리쳤다.
“천만 원이야.”
윤기철이 말했을 때 소파에서 TV를 보던 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특별 보너스라고?”
“예, 아버지.”
“아이구, 진짜 천만 원이네.”
어머니의 외침을 배경음악처럼 들으면서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느그 회사가 잘되냐?”
“예, 개성공단 회사가요.”
“공단 직원들 다 받았어?”
“아니, 한국 쪽 파견 직원만요.”
“엄마, 수표 이리 줘봐.”
그때 윤영철이 끼어들었다.
“놔, 놔, 봐서 뭐하게!”
어머니는 수표를 보여주지도 않으려고 한다.
“아, 시끄러!”
버럭 소리를 쳤던 아버지가 곧 입맛을 다시더니 윤기철을 향해 웃었다.
“돈이 저렇게 좋은가?”
윤기철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버지가 그날 벌어온 1만 원권 지폐를 펴고 있던 어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아버지는 그 앞쪽에 앉아 있었는데 대부분 어깨를 펴고 으스대는 분위기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는 그보다 백배는 좋아한다. 1만 원 권 대신 100만 원짜리 수표를 펴고 있는 것이다.
명색이 휴가였지 낮에는 ‘교육’을 받았다. 박도영은 윤기철의 휴가일에 맞춰 완벽한 교육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에 윤기철은 소공동의 빌딩 5층 사무실에서 보안과 안전 교육을 받았다. 편하게 소파에 앉아 ‘김선생’과 ‘최선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두 사내로부터 연락 방법이나 미행을 피하는 방법 등을 교육받았는데 재미가 있었다. 그들은 ‘참고로’ 또는 ‘요원은 아니지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등의 단서를 달고 나서 말해주었지만 진지한 자세였다. 윤기철도 자신은 이미 수렁에 빠진 처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들었다. 멈추면 위험하다. 계속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오후에 중식당의 방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박도영이 말했다.
“알아두시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윤 과장님이 전성일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당 조직비서실 소속의 부부장급 인사요. 당 조직비서는 조기홍이고 조기홍은 김정은의 최측근이지요.”
조기홍은 언론을 통해 많이 듣고 보았다. 화면으로 보았지만 얼굴도 안다. 김정은 옆에 자주 앉아 있었다.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이것은 곧 김정은의 은밀한 메시지라고 우리는 판단하고 있어요. 북한과 공식 비공식 채널이 여러 개 있지만 지금 우리는 가장 강하고 빠르며, 은밀한 통로를 개척한 겁니다.”
“…”
“어제 가져오신 가방에 그 증거가 들어 있었습니다.”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박도영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나는 우연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TV에서 주인공이 여자를 거리에서, 식당에서, 외국에서까지 우연히 만나는 장면이 나오면 꺼버리지요. 이건 유치하다고 표현하기 이전에 협잡이고 사기죠. 시청자 수준을 무시하는 싸구려 농간입니다.”
표현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박도영의 표정은 진지했다.
“벼락 맞아 죽는 사람,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도 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류가 흐르는 곳에 있었든지 차 뒤에 바짝 붙어 있었든지….”
물잔을 들어 한 모금 삼킨 박도영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난 윤 과장님이 연락원으로 선택된 게 우연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
“따라서 윤 과장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숨만 들이쉬는 윤기철을 향해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북측도 준비했고 우리도 준비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이 작전이 즉흥적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때 윤기철이 물었다.
“작전 목적은요?”
불쑥 물었지만 박도영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평화공존.”
사람은 대개 주머니가 든든하면 배포가 커지는 법이다. 물론 그 ‘사람’은 평범한 인간을 말한다. 부자는 그런 감동이 없을 테니까. 오늘 윤기철은 이태원의 그린호텔 17층의 라운지에서 한 병에 30만 원짜리 위스키를 마시고 있다. 오후 8시 반, 어둑한 라운지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감미롭다. 조명과 향기, 그리고 낮게 깔리는 음악이 잘 어울렸다.
“어, 이 자식, 불러내기는.”
하면서 다가온 사내는 선배 임승근. 그런데 뒤에 생글생글 웃으면서 신이영이 따르고 있다.
“내가 연락했더니 두말 않고 달려오는구먼.”
앞쪽에 앉으면서 임승근이 신이영을 향해 이죽거렸다.
“그래, 어쩔래?”
신이영이 윤기철의 옆에 앉으면서 눈을 흘겼다. 윤기철은 숨을 들이쉬어 신이영에게서 풍겨나오는 향내를 맡았다. 그 순간 신이영의 끈적이는 알몸이 떠오르면서 몸이 뜨거워졌다.
“잘 지냈어?”
그제야 신이영이 묻자 윤기철은 웃기만 했다. 반가웠다. 임승근에게만 연락을 했는데 신이영까지 데리고 나온 것이다.
“자식아, 너, 열흘 만에 다시 나온 거지?”
잔에 술을 따르면서 임승근이 묻더니 저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 신이영 씨 보러 온 거야?”
“그것도 그렇고, 회사일로.”
“그것도 그래?”
눈을 가늘게 떴던 임승근이 입만 벌리고 웃었다.
“자식, 빠졌군.”
“자기야, 고마워.”
바짝 붙어앉은 신이영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야, 이번에는 남북경협자금 얼마나 가져온 거야?”
술잔을 든 임승근이 묻자 신이영은 질색을 했다.
“좀 가져왔어.”
시치미를 뗀 얼굴로 윤기철이 임승근에게 대답했다.
“여기도 어려운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입 안 다물래?”
마침내 신이영이 눈을 흘겼지만 임승근은 마무리를 했다.
“좋아. 액자 하나 더 만들어지겠다.”
신이영의 알몸은 뜨겁고 탄력이 강했다. 두 번째 밤이었지만 빈틈없이 엉켰고 리듬이 맞는다. 창문을 열어젖힌 모텔 방 안으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흰 커튼이 날리면서 신이영의 신음도 흩어졌다. 물 튀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방 안 분위기를 더 고조시킨다. 이윽고 신이영이 사지를 힘껏 조이면서 폭발했다. 거침없는 탄성이 터져 나갔으므로 윤기철은 황급히 손바닥으로 막았다. 신이영이 손을 깨물었다. 그 순간 참지 못한 윤기철이 터졌고 그것을 느낀 신이영의 몸이 다시 경직되었다. 밤이 깊었다. 밤바람 속에 도시의 매캐한 냄새가 맡아졌다. 바람이 땀에 젖은 피부를 스치고 지나면서 살이 닿은 부분이 끈적끈적해졌다.
“자기, 나, 뭐하는지 알지?”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이제는 윤기철의 팔을 베고 누운 신이영이 생각난 듯 물었다. 볼을 윤기철의 가슴에 붙이고 있어서 숨결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알아.”
윤기철이 신이영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부자라면서?”
“하지만 그 30만 원, 나에겐 3억보다 가치 있는 돈이었어.”
“비꼬지 말라고.”
“개성공단 발령받고 여친한테 차였어?”
“형이 별걸 다 이야기했네.”
“액자 이야기도 했지?”
“진짜 해놓은 거야?”
신이영이 입을 다물어서 방 안에 잠깐 정적이 덮였다. 흰 커튼이 출렁거리고 있다. 방 안의 불은 환했고 두 알몸의 사지는 아직도 엉켜 있다. 신이영의 다리 한 짝이 윤기철의 하반신 위에 비스듬히 걸쳐졌다. 이윽고 신이영이 물었다.
“내가 자기 왜 좋아하는지 알아?”
“아, 그럼.”
천장을 바라본 채 윤기철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잠깐 시선을 든 신이영이 다시 윤기철의 가슴에 볼을 붙였다.
“알면 이유 말해봐.”
“개성공단에 있으니까.”
신이영이 입을 다물었고 윤기철은 말을 이었다.
“한번 딱 들어가면 휴대전화 통화도 안 되는 놈이니 놀고 뒤탈이 없어서 좋지.”
“…”
“내가 그런 이유로 엉덩이를 차였지만 그걸 좋아하는 상대도 있는 거야. 다 음양이 있는 법이라고.”
그때 신이영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젖가슴이 출렁였다가 바로 섰다. 눈이 부신 것처럼 그 젖가슴을 바라보며 누운 윤기철에게 신이영이 말했다.
“나 갈게.”
“내가 너무 자주 오는 편이야?”
신이영이 침대 밖으로 나오면서 커다란 엉덩이가 윤기철 쪽으로 펼쳐졌다. 숨을 들이쉰 윤기철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엉덩이를 보았다. 그때 신이영이 윤기철에게 몸을 돌렸다.
“가기 전에 언제라도 전화해.”
시선이 부딪치자 신이영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실컷 회포 풀고 가.”
“어, 거기 앉아.”
지도총국 국장 오영환이 웃음 띤 얼굴로 앞쪽 의자를 가리켰다. 오전 10시 반, 중앙특구개발 지도총국은 섬유단지 아래쪽에 위치해 있어서 ‘용성’에서는 걸어서 10분 거리밖에 안 된다. 그러나 정순미는 차로 왔기 때문에 5분도 안 걸렸다. 정순미가 잠자코 자리에 앉았을 때 오영환이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급해?”
“네.”
짧게 대답한 정순미가 똑바로 오영환을 보았다. 눈빛이 또렷했고 입술이 야무지게 닫혀 있다.
“윤기철이 휴가에서 돌아오면 근로자 충원을 요청할 겁니다. 제가 그렇게 시킬 테니까요. 그럼 조경필 동무가 요구서를 보낼 테니까 100명만 충원해 주세요.”
“100명이나?”
오영환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섬유에 할당된 인원이 250명인데 용성에 100명을 떼어주면 나머지 10여 개 공장은 어떻게 하고?”
“윤기철한테 힘을 실어줘야 됩니다.”
정순미가 차가운 표정으로 오영환을 보았다. 얼굴 피부가 창백했고 핏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시선을 준 채로 정순미가 말을 이었다.
“그래야 본인도 의욕을 낼 것이고 회사에서도 인정받게 될 테니까요.”
“할 수 없군.”
어깨를 늘어뜨린 오영환이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알았어. 조처하지.”
“그리고 국장 동지.”
자리에서 일어선 정순미가 머리를 조금 기울였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것 또한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오영환의 시선을 받은 정순미가 말했다.
“평양 백화점에서 남자용 실크 스카프 하나만 구해주세요. 윤기철이 휴가에서 돌아오면 선물하려고 그래요.”
“아, 그래. 내가 평양에 연락하지. 그런데 언제까지 필요한가?”
“다음 주 수요일에 돌아오니까 월요일까지는 제가 받으면 좋겠네요.”
“그러지.”
자리에서 일어선 오영환이 웃음 띤 얼굴로 정순미를 보았다.
“지난번에 구해준 수제 손지갑은 받고 좋아하던가?”
정순미는 슬쩍 웃기만 했고 오영환은 그것으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도 회사에서 3교대로 철야 근무를 했기 때문에 정순미는 오후 10시 반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개성 시내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나와 한 시간이면 집에 닿는다.
“저녁 먹을래?”
TV를 보던 어머니가 물었으므로 정순미는 머리를 내저었다.
“회사에서 야식 먹었어.”
“떡이 있는데, 줄까?”
“됐어.”
아버지 정동호는 아직 귀가하지 않은 모양이다. 세 식구가 모두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같이 식사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생활 수준은 상류층이다. 자가용만 없을 뿐이지 40평 아파트에 없는 것이 없다. 피아노는 정순미가 일곱 살 때 샀고 TV도 2대나 된다. 인민군 대좌였던 할아버지에 이어서 아버지도 결혼 전부터 당원인 혈통이다. 어머니 쪽 외가도 성분이 좋아서 외삼촌은 평양에서 산다. 정순미가 씻고 나왔을 때 어머니가 물었다.
“그 과장이란 놈, 서울에서 안 왔어?”
“다음 수요일에 온다고 했잖아.”
앞쪽에 앉은 정순미가 TV를 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보는 거야? 도대체 몇 번을 봐?”
“한 스무 번 될 걸?”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어머니가 웃었다. TV에서는 한국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이 방영되고 있다. 물론 비디오테이프다. 어머니 따라서 보는 바람에 정순미도 대사를 외울 정도가 되었다. 그때 리모컨으로 비디오를 끈 어머니가 머리를 돌려 정순미를 보았다.
“그 과장놈, 아버지가 택시운전사라고 했지?”
“그래, 개인택시.”
“벌이는 어때? 개인택시.”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일당 노동자나 같아. 쉬는 날에는 돈을 못 벌거든.”
“남조선에서는 노동자가 하류층이라던데 그놈은 출세했구나.”
소파에 등을 붙인 정순미가 두 다리를 쭉 뻗으며 웃었다.
“출세한 것도 아냐. 남조선에서는 개성공단으로 좌천을 보내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놈이 너한테 화장품도 사다주는걸 보면 좋아하는 것 아니냐?”
“서울에서 엉덩이 차이고 개성에서 만회하려고? 어림없지.”
“그게 무슨 말이야?”
정색한 어머니 김영화의 얼굴을 본 정순미가 피식 웃었다.
“개성으로 좌천되고 나서 제 애인한테 엉덩이를 차였다는 거야.”
“누가 그래?”
“제 입으로.”
“과장놈이?”
“그렇다니까?”
그러자 두어 번 눈을 깜박인 김영화가 말했다.
“너한테 그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널 좋아하는가보다.”
“글쎄, 내가 대역이냐고? 난 싫어.”
“대역되는 것이?”
“아니, 괜히 부잣집 자식처럼 티를 내는 것이. 겸손한 척, 모른 척 시치미를 떼지만 다 드러나.”
그러고는 정순미가 머리까지 내저었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촉하는 거야.”
어머니에게 그 일 내용을 말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평양에서 온 전성일 동지한테 직접 지시를 받은 후부터 정순미는 사명감으로 벅차 있는 상태였다. 개성공단 근로자로 채택되었을 때보다 10배는 더 큰 감동을 얻은 것이다. 조국을 위한 일이다. 정순미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기억해두셔야 할 일이 있는데.”
오전 교육이 끝났을 때 박도영이 말했다. 소공동의 사무실 안에서 둘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정순미가 북측의 준비된 연락원이라는 말씀은 드렸지요?”
“예, 들었습니다.”
“정순미 집안이 좋아요. 아버지가 개성중학교 교감으로 당원이고 어미니는 개성 제1병원 간호부장입니다.”
“…”
“북한에서는 상류층이죠. 개성 시내의 40평짜리 아파트에서 사는 건 방배동에서 60평짜리에서 사는 것과 같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
“북측도 윤 과장님 주변 조사를 다 했겠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죠.”
그때 문득 윤기철의 머릿속에 신이영의 알몸이 떠올랐다. 어젯밤 행적을 북측이, 그리고 박도영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때 박도영이 물었다.
“정순미 성품이 어떻습니까?”
“수줍음을 많이 타고 얼굴이 잘 빨개졌는데, 처음에는 모든 걸 다 근로자 대표한테 일러바쳐서 저하고 원수가 되었는데….”
“요즘은 나아졌어요?”
“그런 셈이죠.”
“선물 같은 건?”
“지난번에 화장품세트를 사다줬더니 저한테 이걸 선물로 주더군요.”
윤기철이 상체를 들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보였다. 수제 지갑이다.
“어디 봅시다.”
손을 내민 박도영이 지갑을 받아 들더니 앞뒤와 안을 살피고 나서 말했다.
“이거 평양에서 파는 겁니다. 수제로 150달러쯤 되는 건데 비싼 선물 받으셨는데.”
“아니, 그건.”
숨을 들이쉰 윤기철이 아직도 지갑을 살피고 있는 박도영에게 말했다.
“정순미가 제 손으로 만들었다고 하던데요?”
“그래요?”
퍼뜩 눈을 치켜떴던 박도영이 지갑 안쪽을 헤집더니 윤기철에게 보였다.
“여기 상표 떼어낸 자국 보이시죠? 잘 뜯어냈지만 실밥이 벌어져 있지 않습니까? 몇 년 전 평양에 간 한국 측 대표단원 하나가 이걸 10여 개 사서 나눠 준 적이 있지요. 우리 직원도 하나 받아서 내가 잘 압니다. 똑같구먼요.”
윤기철이 마치 지갑에 뭐가 묻은 것처럼 조심스럽게 받았을 때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잘 하시겠지만 모른 척하세요.”
밤 12시가 다 되어서 들어온 윤덕수가 윤기철을 보더니 밝은 얼굴로 말했다.
“됐다.”
“뭐가요?”
윤기철은 되묻고 윤덕수한테서 돈가방을 받던 이정옥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정말요?”
이제는 윤기철이 이정옥을 보았을 때 윤덕수가 말했다.
“내일 저녁 7시에 사당동 사거리에 있는 일식당에서 만나기로 했어.”
윤기철은 입을 다물었고 윤덕수가 저고리를 벗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쪽도 부모가 나와. 딸하고 셋이지. 우리도 셋. 여섯 명, 방으로 예약까지 해놓고 왔어.”
“내일 오전에 미장원 가야겠네.”
이정옥은 1000만 원을 받더니 아버지 말대로 간이 부었다. 어제는 냉장고를 바꾸더니 오늘은 세탁기를 바꾸려고 돌아다니다 왔다. 윤기철은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30평형 아파트여서 목소리만 높이면 안방의 소리도 다 들린다. 내용은 모르지만 어머니의 밝은 목소리가 울리고 있다. 내일 약속이란 아버지의 친구 딸과 ‘선’을 보는 것이었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구닥다리 ‘선’이 무슨 말이냐고 웃겠지만 놀랍게도 윤기철 주변 인물들 대부분은 그렇게 결혼했다. 침대에 누운 윤기철은 문득 자신이 아버지의 말에 전혀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12시가 되었을 때 박도영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매트리스를 깐 사무실 바닥에서 ‘호신술’ 교육을 받았는데 교관은 제 성도 가르쳐주지 않고 두 시간을 교육시켰다. 이제 막 교관이 나간 후여서 윤기철은 창가에서 땀을 말리는 중이다.
“교관이 윤 과장님을 현장 요원으로 활용해도 되겠다고 합니다.”
웃음 띤 얼굴로 말한 박도영이 윤기철과 창가에 나란히 섰다. 앞쪽은 건너편 빌딩의 창문도 없는 벽이다.
“좀 혼란스럽죠?”
팔짱을 끼고 선 박도영이 앞쪽을 향한 채로 불쑥 물었다. 윤기철은 힐끗 시선만 주었고 박도영의 말이 이어졌다.
“북한은 간단한 나라가 아니죠. 저 체제로 70년 가깝게 차곡차곡 굳어진 나라란 말입니다. 일순간에 허물어질 경우도 있겠지만 기득권 세력의 반발은 대단하다고 봐야 됩니다.”
“…”
“정순미가 기득권 세력 중 하나죠.”
“…”
“이번에 개척된 이 루트는 가장 확실한 비밀 루트가 될 것 같습니다. 북한 집권자와 직통 라인이 만들어진 셈이지요. 남북관계에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러고는 박도영이 윤기철을 보았다. 웃음 띤 얼굴이다.
“이렇게 선택되신 것이 부담이 되는 것만은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어깨를 떨군 윤기철이 마지못한 듯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그러나 박도영이 다시 앞쪽을 향한 채로 말을 잇는다. 차분한 얼굴이다.
“정순미는 연락원으로 선발된 것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 그럴 겁니다.”
박도영이 혼자서 머리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배우고 자랐으니까요. 우리하고는 다릅니다.”
“…”
“더구나 정순미는 북한의 상류층, 기득권층이죠. 정순미는 이미 윤 과장님의 환경에 대해서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이쪽에서 말도 해주었다. 이제 윤기철이 팔짱을 끼었다. 팔짱을 낀다는 것은 몸이 무의식중에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학창시절 일진이었던 윤기철은 싸우는 상대가 앞에서 팔짱을 끼었을 때는 백발백중 다 죽였다. 겉으로는 으르렁거렸지만 속으로 떨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이번 교육을 마치면서 주의하시라고 충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윤기철은 대답 대신 길게 숨을 뱉었다. 그것으로 족했는지 박도영은 가만히 있었다. 정순미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일하는 반면 대한민국의 나는 격려금 1000만 원을 받고 기운을 낸 셈이다. 그것이 남북한의 차이가 되었다. 어깨를 부풀렸던 윤기철이 팔짱을 풀었다.
“반갑습니다.”
먼저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나서 윤기철이 여자한테 그렇게 말했다. 시선을 받은 여자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