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아는 2014 소치 패럴림픽 알파인스키 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오스트리아 선수다. 대학에 진학해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 앞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어 보였다. 적어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하반신 장애를 안게 되기 전까지는.
아마도 그녀는 깊은 좌절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큰 사랑으로 그녀를 지켜주는 어머니와 든든한 후원자인 도펠마이어 씨 부부는 클라우디아를 알파인스키라는 스포츠로 이끌었고, 그녀는 두 번의 동계대회 출전에서 메달을 획득하며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녀를 마주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케냐 출신의 다니엘 사파리 카데케우(Daniel Safari Kathekeu)가 떠올랐다. 그는 지난 1월 강원도가 주관하는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선수, 아니 소년이었다. 다니엘은 드림프로그램을 통해 난생처음 스키를 타보고는 2주간의 훈련이 너무나 행복했다며 옆자리에 앉아 내게 간절히 부탁했다.
“한 번의 훈련으로는 대회에 나갈 수 없어요. 내년에 한 번만 더 저를 초청해주세요.”
그 순수하고 투명한 까만 눈망울 속에서 나는 그의 절박함, 그리고 꿈을 보았다. 기회! 그동안 그에게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막 붙잡은 기회를 제대로 잡아보려는 진지한 모습에서 나는 그의 열정을 읽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하는 프로그램 규정상 쉽지 않은 일이기에, 선뜻“그렇게 하마”고 말하지 못하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만 답했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스스로도 미웠다. 스키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그에게 단순히 어떤 스포츠를 경험하는 것 이상의 의미일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 소년의 삶을 다른 궤적으로 이끌고 싶어 실무진과 미팅 후 열심히 후속조치를 검토하고 있다.
스포츠가 장애인에게 주는 의미는 비장애인과는 사뭇 다르다. 바로 ‘기회’인 것이다. 장애인은 훈련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을 뿐 아니라 사람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리더십을 배운다. 스포츠가 더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런던올림픽 참여국 숫자는 264개국인 데 비해, 패럴림픽 참여국 숫자가 164개국에 지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또한 참여국의 절반 이상은 선수단 규모가 한 명 내지 두 명이다. 대부분의 저개발국에서 스포츠는 장애인에게 여전히 사치인 것이다.
먹고사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스포츠를 생각할 여유가 없지 않겠는가. 축구화 한 켤레만 있으면 마음껏 공을 차고 싶다는 아프리카의 발달장애 어린이! 결국 어떤 기회도 가져보지 못하고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기는커녕 도움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 빈곤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좀 먹고살 만해졌다는 대한민국은 어떠할까? 이번 소치 패럴림픽에 참가한 우리나라의 아이스슬레지하키 선수들은 승리를 자신하고 경기를 관전하러 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얼굴을 굳어지게 한 주인공들이다.
사실 소치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김연아 선수의 은메달로 우리 국민 모두 마음이 편치 않았지 않은가. 패럴림픽 개막식장에서 푸틴 대통령이 “빅토르 안을 보내주어서 고맙다”고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으며 인사할 때 나 또한 속이 쓰리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0대 2로 뒤지던 아이스슬레지하키 경기를 우리 선수들이 연장전까지 무승부로 끌고 가 승부차기에서 개최국 러시아에 3대 2 역전승을 거두었을 때, 나는 푸틴 대통령을 향해 가벼운, 그러면서도 진짜 신 나는 미소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아이스슬레지하키 선수들조차 처음에는 경기장 하나 제대로 빌릴 수 없어 연습조차 하기 힘들었다. 이번 소치 동계대회 출전 직전에야 겨우 하루에 두어 시간씩 빙상장을 빌려 연습한 것이 전부다. 패럴림픽 국가대표 선수들의 현실이 이러하니 다른 장애인들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장애인 전용 운동시설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경우가 많고, 가까운 동네 운동시설은 장애인의 사용을 기피하는 것이 현실이다. 학교에서도 장애인 학생 가운데 운동 능력이 떨어지는 친구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보다는 체육시간에 아예 쉬게 하는 경우도 아직 왕왕 있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스포츠 현실도 장애인에게 녹록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3월 14일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패럴림픽에서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 대표선수들이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첫 골을 성공시킨 기쁨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일할 ‘기회’다. 일하면서 그들의 자존감을 찾고, 자아를 실현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되고 싶은 것이다. 땀 흘려 일하고 그 경제적 대가를 받는 것에서 성취감을 얻는 것은 장애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나는 그것을 지난 평창 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를 치르며 직접 체험했다. 지적 장애인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조직위원회 관계자들조차 반대했다. 하지만 111명의 지적 장애인 자원봉사자가 참여했고,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발달장애인 청년이 “저는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이 일이에요” 하며 씩씩하게 움직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루에 몇 번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을 자원봉사 업무로 배정했느냐고 비난하던 언론도 나중에는 장애의 특성에 맞춰 각자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업무를 할당한 것에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회다.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경험해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보는 것이다. 장애인을 위해 특별히 무엇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조금 더디더라도 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효율 지상주의’에 매몰돼 있다. 남보다 더 빨리, 더 좋은 자리에 가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주위를 둘러볼 여유 따위는 없다. 뭔가 기다려야 하고, 조금 손해 보는 것 같으면 선뜻 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한 효율 지상주의가 지난 산업화 과정에서는 성장의 큰 동력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것이 우리 사회의 성숙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장애인 문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곳곳의 이러한 생각이, ‘효율’과 ‘경쟁’을 위해서라면 다른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서로에 대한 배려나 존중보다는 오로지 속도와 경제성만을 강조해온 것이, 지금 대한민국을 이렇듯 큰 슬픔에 잠기게 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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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지만 함께 가는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아름다운 사람이 모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 누가 해주겠거니 생각하지 말고 나부터 작은 실천을 시작해보자. ‘함께’는 옆집에 사는 장애 아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고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거는 것에서 시작된다. 관심을 갖고 보면 나와 조금 다른 모습까지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가짐이, 나로부터의 작은 실천이 우리 사회를 다르게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