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회에서는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기도 힘들지만, 받기도 힘들다. 관계주의적이고 심정주의적인 한국인의 특성 때문이다. 행위 자체를 중요시하는 서구에 비해 한국은 행위보다 마음을, 그 행위의 진의를 더욱 중요시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4월 29일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를 방문해 애도의 묵념을 한다.
이 사건은 아마 사망자의 규모나 사건의 내용을 떠나 가장 비극적이고 가슴 아픈 사건으로 국민에게 기억될 것 같다. 고등학생인 두 아들을 둔 필자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 아들 딸 같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비통함에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마음 한쪽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난다.
경주에서 건물이 붕괴되면서 꽃다운 나이의 대학생들이 생명을 잃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수많은 청소년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단 말인가. 게다가 사건에 대해서 새로운 정보가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속된다. 침몰사고가 일어나게 된 과정이나 그 후 구조과정에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연속으로 벌어졌고 황당한 실수와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건 단지 어떤 개인이나 집단, 어떤 회사의 탐욕이나 실수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국가 시스템의 총체적인 침몰이라고까지 표현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과 질책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대통령의 사과에 대한 논란이 있다. 야당이 국정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진 대통령의 즉각적이고 진솔한 사과를 날마다 요구하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대통령의 사과가 미흡하다는 주장이 있다. 동시에 대통령은 사고수습이 종결되면 추후 대책을 가지고 사과하겠다고 밝혔고, 일부는 이번 사건은 대통령의 직접적인 잘못이 아니니 이 정도의 사과면 충분하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사과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만약 어쩔 수 없이 사과할 일이 벌어진다면 도대체 누가, 언제, 얼마나, 어떻게 사과하는 것이 적절할까?
누구의 사과가 필요한가
해양경찰청이 세월호 침몰 당시 촬영한 동영상 한 장면.
일반적으로 세월호 침몰과 같은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사고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모두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도대체 왜 이런 사고가 일어나나, 어떻게 이런 사고가 일어날 수 있나?’와 같은 질문은 바로 원인을 찾으려는 자동적인 귀인과정이다. 인간의 귀인과정에서 중요한 원리 중 하나는 ‘유사성(correspondence)’이다. 원인과 결과는 서로 닮았다는 원리다.
우리는 긍정적인 사건은 긍정적인 원인, 부정적인 사건은 부정적인 원인, 작은 사건은 작은 원인, 큰 사건은 큰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이런 원리는 합당하고 그래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결과를 닮은 원인을 찾게 된다.
수백 명이, 그것도 억울하고 불쌍하게도 수백 명의 고등학생이 사망한 이런 어마어마한 사고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뭔가 어마어마한 필연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원인을 찾는다.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이 그냥 우연이나 아주 자그마한 기계적 오류나 개인적인 실수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설명한다면 대다수는 믿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뭔가 큰 구조적인 결함, 총체적인 문제, 거대한 음모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 물론 많은 경우에 이런 결론은 타당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기에 더 큰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비행기 사고나 선박 사고, 전장에서의 사고는 그 규모에 상관없이 한두 사람의 실수, 물론 치명적인 실수에 의해 일어나기도 한다. 비행기, 선박, 전쟁 등과 같이 보통 최종결정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특수 상황에서는 그 결정권자의 실수가 결과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
실제로 세월호 사고에서도 선장이 승객들에게, 잘못된 선내방송을 너무나 잘 따르고 있었던 단원고 학생들에게 퇴선명령만 일찍 내렸어도 승객 대부분이 살고 이 사건은 이렇게 큰 사회적 파장을 가져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구조과정에 많은 오류와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만 대다수 학생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기만 했다면 이렇게 큰 규모의 사상자를 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선장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은 행동이다. 그런데 선장의 행동이 그냥 단순한 판단착오였고, 그 작은 판단착오로 3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는 결론은 더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절대 동의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지금 그 선장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갖가지 의혹과 음모론이 판치고 있다. 나아가 선장의 행동 이외의 다양한 원인을 찾아서 한국인의 심리는 열심히 돌아간다. 그래서 선박회사, 선박회사의 주인, 세월호의 선체 변경, 과적, 재난구조 시스템, 해경, 언딘, 정부, 대통령까지 죄다 동원한다.
사람에 대한 집착
언제까지? 국민이 납득할 때까지, 만족할 때까지. 만약 똑같이 유병언 소유의 청해진해운 배가 선체 변경을 하고 과적으로 침몰하고, 엉망인 재난구조 시스템과 우왕좌왕하는 정부의 대응이 모두 똑같이 일어났는데도, 진짜 운이 좋아서 승객 대부분이 살았다면 (실제 그럴 수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싹 뒤집어서 너무나도 열심히 원인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 그냥 작은 실수, 작은 원인에 만족했을 것이다.
원인 규명 과정에서 유사성의 원리가 큰 사고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합리적인 대처를 더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우리 문화의 ‘관계주의’적 특성이 더해진다는 데 있다. 관계주의적 특성은 인간의 행동이나 현상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데 인간 간의 관계나 사회적 맥락 요인을 중요시하는 성향을 얘기한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나 물건, 행동의 잘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본질보다는 맥락과 관계에 따른 본질의 변화에 더 관심을 가진다.
한국 사회와 한국어에 발달해 있는 존대어 체계는 이런 관계주의를 잘 보여준다. 외국에서는 부모나 연장자, 상사의 이름을 불러도 이상하지 않고, 회사나 공적 조직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직책과 역할에 따른 호칭과 대우를 전혀 이상하지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아무리 직책이 높아도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이름보다는 직책에 맞는 호칭을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는 최우선으로 빠른 시간 내에 호구조사를 실시한다. 먼 친인척, 학교 선후배, 친구의 친구, 동생이나 형의 친구와 같은 사적인 관계를 빨리 알아내고 그에 맞게 적절히 행동할 때 우리는 싸가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관계주의 문화의 특징은 바로 사람에게 관심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환경이나 공적인 역할보다는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니 사람에 대한 파악이나 이해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한국 문화는 대부분의 비극적 사건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특히 나쁜 사람에게서 찾는다. 어떤 사고가 일어나면 언론은 거의 자동적으로 ‘예고된 인재’였다고 얘기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건은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부분적으로 인간이 원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우연일 수도, 기계적이거나 시스템적인 원인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런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상호 작용한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사고의 원인을 사람에 초점을 맞춰 분석하고, 설사 기계나 시스템의 잘못이라고 밝혀져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찾는 데 더 집중한다. 사고가 더 비극적일수록 그냥 사람의 간단한 실수보다는, 굉장히 나쁜 사람이나 조직적이고 악의적인 거대집단 수준의 잘못이 반드시 개입됐다고 믿는다. 그러니 원인을 밝히려는 체계적인 조사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성급하게 갖가지 사람과 관련된 원인을 상상한다. 그리고 특히 누구의 잘못인지, 나쁜 사람이 누구인지 찾는다.
현재 선장, 선원, 유병언,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언론과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날마다 그들과 관련된 새로운 비리성 제보가 기사화된다. 또한 구조과정에서 해경의 책임이 연일 보도되고, 얼마 전에는 한때 구원파 신도였다는 해경의 간부가 인사조치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 해경 간부가 어떤 잘못을 구체적으로 저질러서 처벌받았는지에 대한 얘기는 없다. 세월호의 구조변경이나 과적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 승인과 점검 시스템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얘기보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정부에 대한 비난도 정부의 행정과정이 어떻게 문제가 있는지, 장비나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보다는 누가 더 나쁜 놈이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고민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과가 꼭 필요하다. 운이나 시스템, 기상, 조류, 부족한 재원과 같은 어쩔 수 없는 요인이나 환경적 요인에 귀인하면 사과할 사람이 없어진다. 하지만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거나 실제보다 그 사람의 잘못을 과대 지각하면 받아야 할 사과의 양은 커지고 질은 심화되며, 그들이 하는 어떤 사과에도 만족하기 힘들어진다.
얼마 전 재난에 대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사과와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를 비교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물론 사과를 할 때 이들의 속마음이 어떤지에 대해 알 길은 없지만 이들이 책임을 통감한다고 할 때의 그 책임의 의미는 문화적으로 다르다. 또한 국민이 그들에게 사과를 요구할 때나 받을 때 그 사과의 의미도 다르다. 오바마가 하는 사과는 자신의 잘못이라는 얘기가 아니고 국민도 그 사과를 오바마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사람은 상대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진짜 잘못에 대한 사과를 받는 것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있다. 이게 바로 문화의 차이다.
진심 어린 사과의 조건
단지 누가 사과를 하는지를 넘어, 그 사과를 할 때 진심이 얼마나 담겼느냐에 대한 논란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관찰된다. 미국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는 다른 아이에게 해를 입힌 아이는 반드시 사과하도록 만든다. 그 행위가 고의든 우연이든 상관없고, 더구나 그 사과가 그리 진심으로 반성하는 듯한 모양을 띠지 않아도 된다. 그냥 행위의 결과가 다른 이에게 해를 입히고, 그 행위와 결과에 대해 형식적으로라도 사과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이면 그걸로 넘어간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다르다. 다른 아이에게 해를 입힌 아이에게 사과하라고 하면 많은 경우에 “일부러 한 거 아니에요”라고 항변하며 사과하기를 거부한다. 사과를 받을 사람이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럴 바에는 받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때로는 사과를 안 한 사람보다 형식적으로 한 사람이 더 나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사과를 하기도 힘들고 받기도 힘들게 하는 이유가 바로 관계주의와 함께 존재하는 한국인의 심정주의적 특성이다.
심정주의적 특성은 인간관계나 사회적 사건에서 사람을, 특히 사람의 마음을 중요시하는 심리적 특성을 얘기한다. 보통 행위 자체를 중요시하는 서구에 비해서 한국은 행위보다 마음을, 그 행위의 진의를 더욱 중요시한다.
사과에 대한 비교문화적 심리학 연구는 이런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서구 사회와 동양 사회의 사과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서구 사회에서는 사과문에 일반적으로 원인 규명과 설명이 들어간다고 한다. 즉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내용이 사과의 주를 이루고, 일반적으로 피해자의 이해를 구하는 측면이 강조된다고 한다.
하지만 동양, 특히 한국의 사과에는 정서적 공감, 슬픔과 보상,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이러한 문화의 차이는 우리 사회에서 왜 사과할 때 정서적인 슬픔과 눈물이 더 진심으로 느껴지고 같은 처지라는 표현이 중시되는지 잘 설명한다. 또한 사과하면서 원인을 설명하는 듯한 내용을 잘잘못을 따지는 행위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이유와 무조건적인 사과를 더 선호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사과하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얼마나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하는 사과는 항상 타이밍을 놓친다. 왜? 사과할 때는 잘잘못을 따지면 안 되고 무조건적인 사과를 해야 진심이 어린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박근혜 대통령이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가지고 사과하겠다고 한 표현이나 국무회의에서 한 사과는 국민에게 그리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바로 한국의 관계주의적 문화와 심정주의적 문화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 진심을 표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렵다. 원래 남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타인이 내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도 무리가 있다. 원래 마음은 속에 깊이 감춰져 있기에 타인이 알면 안 되는 내 욕망도, 미움도, 나쁜 생각도 감추며 무난히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타인의 그런 마음을 알 길이 없기에 우리는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본성적으로 드러나기 힘든 진심을 타인에게 알리는 방법은 심리학적 원칙을 따른다.
심리학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타인의 행동이 얼마나 의도된 것인지, 즉 우연이 아니라 개인적 의지가 반영된 행위인지를 가늠할 때,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몇 가지를 고려하게 된다. 첫째, 다른 행동을 할 선택의 여지 유무다.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행동은 더 의도적으로 보인다. 둘째, 어떤 행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판단되면 그 행동은 더 의도적이라고 판단된다. 쉬운 행동보다는 역경을 이겨낸 행동에 더 진심이 담겼다고 생각하는 원리다. 셋째, 그 행동에 집중한다고 느껴지면 더 의도적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원리를 종합해보면 어떤 사과가 진심이 담긴 마음에서 우러난 사과로 보이는지는 가늠할 수 있다. 우선 안 해도 되는 사과를 할 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어도 사과를 할 때 사람들은 그 사과를 진심으로 여긴다. 반대로 몰릴 대로 몰려서 더는 여지가 없어 보일 때 하는 사과는 말짱 도루묵이다. 이왕이면 가기 어려운 곳에서 하기 어려운 형태로 하는 사과가 진짜 사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까지의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는 진심을 떠나 긍정적으로 평가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또한 때로는 미안한 마음에 사과하느라 다른 일에서 실수하는 모습도 진심 어린 사과로 보이게 도와준다. 물론 이런 원리를 역이용해 영혼 없는 사과를 진심 어린 사과로 둔갑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일반적으로 진심 어린 사과는 자연스럽게 이런 요소들을 띠게 된다. 하지만 한국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는 방법을 현명하게 선택하는 것은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매뉴얼의 가치
우리 사회의 관계주의적이고 심정주의적인 심리적 특성은 자연스럽게 나쁜 사람을 찾게 만들고, 가능하면 더 중요하고 강한 사람을 비난하고 그들의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게 만든다. 이러한 성향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나쁜 사람에 대한 집중이 지나치면, 자연스럽게 다른 원인들은 잊힌다. 우리는 나쁜 사람을 잡고 그들을 벌주고 높은 사람으로부터 사과를 들으면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고, 비극적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착각한다. 그래서 항상 뉴스는 몇 명이, 누가 구속되는지를 얘기하지, 제도나 시스템에서 어떤 대책이 고안됐는지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다. 사실 경주 붕괴사건 이후에도 누가 구속됐는지는 보도됐지만, 어떤 제도나 시스템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 없었을 것이다.
이번의 세월호 침몰사고도 벌써 그런 방향으로 흐른다. 특검을 주장하는 사람은 많아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위원회에 대한 논의는 적다. 조금 과장하면 지금까지 나온 대책이라고는 수학여행 취소다. 수학여행을 안 가면 고등학생이 수학여행 중에 사망하는 사건은 한동안 안 일어날 것이다. 그건 문제가 해결돼서가 아니라 그냥 안 가니까 그런 거다. 수학여행을 영원히 없애지 않는 한, 이것은 전혀 해결방법이 아니다. 수학여행의 교육적 가치를 고민하고, 안전하고 즐거운 수학여행이 되기 위한 원칙과 제도를 합리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선박 운항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개선을 고려해야 한다. 선박사고 시 합리적인 대피 절차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매뉴얼 개발과 교육이 따라야 한다. 인내력과 끈기를 가지고 이런 모든 원인 규명과 그에 대한 합리적인 대책과 개선안 마련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대책의 일환으로 재난 상황에 대비한 다양한 매뉴얼 개발과 훈련이 필요하다. 세월호 사고에서와 같이 선장과 선원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행동과 같은 오류를 예방하고 구조과정에서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체계화하기 위한 국가적 수준의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데 전문가의 의견이 모아진다.
우리 문화의 심리적 특징을 고려하면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관계주의와 심정주의적 특성은 사람 요인을 중시하고 진심을 드러내기 힘든 상황에서 오히려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고에서 해경이나 구조 회사,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 많은 실수가, 어쩌면 구조적 비리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 조사해야 객관적인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공무원이나 구조요원 중에 피해자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나 적은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니, 없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이들의 구조과정은 내내 피해자 가족과 국민의 질타를 받아야 했다. 왜? 진심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 같다고. 물론 더 노력하라는 국민의 질타와 격려로 이해할 수 있다면 좋지만, 그들의 진심이 의심받을 때 하게 되는 일은 때로는 오히려 멍청한 대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쓸모도 없는 해상크레인을 여러 대 구조 초기부터 대기시키는 것, 다이빙벨이라는 구조장비를 둘러싼 논란도 바로 이런 진심이 의심받을 때 아무 것이나 비록 쓸데없는 것까지 다 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저질러진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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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목숨까지 걸면서 진심을 보여주다가 결국 잠수부가 사망해야 진심이 전해지는 비극도 경험하게 된다. 우리에겐 진심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는 혼란을 막아줄 매뉴얼이 필요하다. 구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닌, 마음이 없어서가 아닌, 그것이 합리적으로 만들어졌기에 최선으로 따라야 하는 매뉴얼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매뉴얼을 만드는 일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부단한 홍보와 훈련을 통해 그 매뉴얼을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모든 과정에는 바로 우리의 문화 심리를 고려한 지혜가 담겨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사과의 매뉴얼도 필요한 시점이다. 과연, 누가, 언제, 얼마나, 어떻게 사과하면 진심이 전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