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br>손병석 지음, 바다출판사
화를 안으로만 삭이는 이에게는 우울증이라는 꼬리표가, 화를 시도 때도 없이 엉뚱한 대상에게 표출하는 이에게는 분노조절장애라는 낙인이 찍히곤 한다. 분노를 분노의 원인이 되는 대상에게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게 이 모든 문제의 뿌리일 것이다. 분노의 뿌리가 되는 문제 자체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선량한 사람을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각종 정신질환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을 괴롭고 아프게 만드는 사회구조에 있다.
남녀노소의 분노를 자극하는 모든 문제는 실상 우리 사회의 잠재적 화약고다. 이 분노의 씨앗은 이미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이 분노는 억울한 사람, 상처 입은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싹을 틔워 언제 마법의 콩나무처럼 미친 듯이 자라나 하늘 높이 치솟는 무서운 불길이 될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극심한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힘들게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대란에 내던져지고, 결혼적령기에는 전월세 대란을 겪으며, 결혼해 아이를 가지면 또 그 아이를 이 힘든 세상에서 키워내느라 육아 스트레스에 짓눌리며, 중년부터 일찍이 노후자금을 걱정해야 하는 한국인. 우리의 이 분노를 진정한 공동체의 문제로 사유하지 않는 한, 분노를 개인의 문제로만 한정하는 한, 분노를 발생시키는 사회의 근본 문제는 전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건강 척도 ‘분노’
이 책은 한 사회의 건강을 측정하는 척도를 바로 ‘분노’로 바라본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에서 세네카의 ‘분노론’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분노라는 감정의 원인과 결과, 그 해결과 통제의 방식에 따라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요동쳐왔는지를 고찰한다. 나아가 분노가 개인과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분석하고, 분노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통치방식이 달라져왔음을 증언한다.
무엇보다도 분노의 통제와 실현은 영웅이 지닌 최고의 미덕 중 하나였다. 예컨대 오디세우스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 집에 돌아와, 자신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온갖 감언이설로 구혼한 남자들,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그 모든 남자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오디세우스의 분노가 매우 잔인하게 표출된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분노를 침착하게 통제하고 전략적으로 이용해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놀라운 이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분노를 인간을 향한 이타적 분노로 승화시키고, 마침내 자신이 제우스의 분노를 온전히 감당함으로써 불멸의 영웅이 되었다. ‘분노를 어떻게 통제하고, 활용하고, 더 커다란 목적으로 승화시키는가’가 영웅의 위대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특히 마음을 끄는 대목은 ‘정의로운 분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의 문제다. 분노를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복수의 쾌락을 향한 눈먼 질주로 이끌지 않고, 개개인의 사적인 분노를 공동체의 더 나은 삶을 향한 분노로 승화시키는 사례가 있다. 그중에서도 ‘뤼시스트라테’의 분노 해결법은 사회적으로는 절대적 약자였던 여성이 사적 분노를 공적 분노로 지혜롭게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현대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늘 소모적인 전쟁에 빠져 일상을 돌보는 일을 등한시하는 남편들에 대한 분노로 똘똘 뭉친 아테네 여성들은 ‘가정’이라는 최소단위의 공동체 운영을 파업함으로써 남성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남편과의 성관계를 거부하는 여성들의 집단 파업으로 유명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전쟁과 경쟁과 지배에 몰두하는 남성적 권력’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다. 남성의 분노는 사회를 통제하고 유지시키는 생산적 감정으로, 더 나아가 ‘남성성’을 증명하는 강력한 징표였다. 그런데 여성들의 분노는 ‘비여성적’이며, ‘여성답지 못한 것’이며 나아가 억제하고 제거해야 할 쓸데없는 감정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서로 치고받고, 복수하고, 죽이고, 단죄하는 남성적 정치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녀들은 서로 챙기고, 감싸주고, 보듬어주는 치유의 정치를 제안한다.
아테네 여성들의 ‘잠자리 파업’
전쟁에만 몰두해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들을 향해 집단 파업으로 맞선 여성들에게 남편들은 복수의 칼을 갈며 그녀들을 몰살시키자는 극약 처방까지 내놓지만, 그녀들은 그런 남편들에게 또 다른 폭력으로 맞선 것이 아니라 사랑과 공감의 논리를 내세운다. 그녀들은 자신들에게 통치의 권한이 주어진다면 모든 일을 ‘양털 다루듯이’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대들이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모든 나랏일을 양털 다루듯이 했을 거예요. 먼저 양털을 물에 담가 양의 오물을 씻어내듯, 그대들은 도시에서 악당들을 털어내고 엉겅퀴들을 가려내야 해요. 그리고 함께 들러붙는 자들과 관직을 노리고 모전처럼 응결되는 자들은 빗어내고 그 끄트머리들은 뽑아버려야 해요. 그런 다음 모두를 상호간의 선의라는 바구니 안에 빚어 넣되 재류외인들과 동맹자와 나라의 친구도 한데 섞어야 하며, 누가 나라에 빚을 졌더라도 이들도 섞어 넣어야 해요. 그리고 제우스에 맹세코, 이 나라의 식민지인 도시들도 여기저기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대들을 위한 양털이라는 걸 알아두시오. 이들을 전부 모아 가지고 여기에 한데 쌓아놓으세요. 그런 다음 큰 양털실뭉치를 만들어 거기서 백성들을 위해 외투를 짜도록 하세요.
-아리스토파네스, ‘뤼시스트라테’중에서
양털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사려 깊게, 천천히, 그 짜임새와 섬세한 결들, 양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몸짓. 한때는 양의 털이었던 것이 탄탄한 털실이 되고 언젠가는 외투가 되려면 정성스러운 손길과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오래전 읽은 ‘뤼시스트라테’는 아테네 여성 모두가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사상 초유의 ‘사랑의 파업’으로 진정 원하는 삶을 쟁취해낸,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재치와 기지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동력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녀들의 재치는 분노와 슬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음이 더 아프게 다가온다. 함께 결정하고 함께 만들어가야 할 세상에서 ‘그건 너희들의 소관이 아니다’고 말하는 사람들. 정작 위기에 처했을 때는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복지부동, 무사안일주의를 일삼으면서 권력의 중책만을 맡으려 하는 남편들의 행태는 오늘날 국민의 목소리는 안중에도 없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권만을 고집하는 권력자들을 너무도 닮았다.
세상을 바꾸는 혁명의 에너지
뤼시스트라테와 그녀의 동지들은 단지 ‘남편에게 입막음을 당해야 하는 부인들’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핍박받는 약자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존재들이다. 위급할 때일수록 하고 싶은 말이 눈덩이처럼 늘어나지만, 위급할 때일수록 더욱 서슬 퍼레지는 남편들의 폭압에 숨죽여야 했던 여성들의 분노가 표출되는 순간. 오랫동안 삭여왔던 분노가 세상을 바꾸는 혁명의 에너지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전에는 전시인 만큼 그대들 남자들이 무슨 짓을 하든 우리는 꾹 참았지요. 여자들이란 원래 얌전한 법이니까요. 그대들은 우리더러 불평도 못하게 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대들이 우리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그대들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고, 집안에서 가끔 그대들이 중대한 일을 잘못 결정했다는 소문을 듣곤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마음이 괴로워도 웃음을 지어 보이며 물었지요. (…) “여보, 왜 자꾸 그런 어리석은 정책을 고집하시오?” 그러면 그이는 대뜸 나를 노려보며 말하곤 했지요. “실이나 짜. 머리를 얻어맞아 크게 비명을 지르고 싶지 않거든! 전쟁은 남자들의 소관이야.”
-아리스토파네스, ‘뤼시스트라테’중에서
저자는 말한다. 분노는 폭력과 테러, 그리고 살인을 저지르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감정이기도 하다고. 이 책은 분노의 이중성, 즉 사회를 파괴시키는 에너지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에너지에 모두 주목하면서, 인류가 행복해지기 위해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모색한다.
분노는 통제가 어렵기에 부정적으로 평가받기 쉬운 감정이지만 그것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발산된다면 분노는 구원의 첫 번째 발걸음일 수도 있다. 그러니 아픔을 안으로만 삭여왔던 사람들이여. 화를 어디에다 표출할 줄 몰라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했던 사람들이여. 우리 더 정확하게, 더 지혜롭게, 더 커다란 행복을 위해 날카롭게 분노하자. 정의를 위한 분노, 공동체의 더 나은 삶을 향한 지혜로운 분노만이 이 깊은 슬픔의 강을 건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