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침몰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선원과 관료는 우리에게 분노와 수치심을 안겼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매체도 비판의 표적이 됐다.
- 특히 방송이 그렇다. 진보 성향 방송엔 “눈물·감성팔이” “이념 선동”이라는 비난이, 친(親)정부 성향 방송엔 “권력 외압” 비난이 일었다.
자유청년연합 회원들이 5월 7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다이빙벨의 성능을 과장해 구조작업을 방해했다며 손석희 JTBC 사장, 이상호 기자, 이종인 씨를 검찰에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욕의 민낯 드러내”
세월호 보도가 문제투성이였다는 점은 한국기자협회(기협)가 4월 20일 소속 회원사 기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 기협은 “일부 언론이 국가적 재난인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일련의 취재 보도 과정에서 희생자 가족과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며 신뢰를 잃는 오욕의 민낯을 드러냈다”고 했다. 이어 “왜곡된 속보 경쟁, 부정확하고 자극적인 내용 전달, 예의를 벗어난 취재 행태 등으로 국민적 불신을 초래했다”고도 했다.
재난 발생 시 현장의 영상을 전달하는 TV 뉴스는 주목을 받는데 이번 세월호 참사의 경우 특히 TV 뉴스에서 여러 난맥상이 드러났다. TV 재난보도의 가장 큰 문제는 희생자의 명예나 생존자의 안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선정성이다.
사태 초기 JTBC의 한 앵커는 구조된 안산 단원고 여학생을 인터뷰하면서 “혹시 알고 있습니까? 한 명이…”라면서 이 학교 2학년 정모 군의 사망 소식을 이 여학생에게 전했다. 이에 대한 반응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 여학생은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당시 기자들은 스스로 보도준칙을 만들었다. 여기엔 ‘피해자와 가족에 대한 인터뷰 강요 금지’ ‘생존자 및 사상자의 신상공개 자제’ 조항이 들어 있다. 이렇게 애써 마련한 준칙은 별 소용이 없었다. 속보 경쟁에 파묻혀 작동하지 않았다. 생존 학생들은 정신적 충격을 치유할 틈도 없이 담요를 덮고 카메라를 피해 다니기 바빴다.
기협은 “재난 보도 시 자극적 영상이나 선정적 어휘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방송은 상습적으로 정반대로 간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당시 NHK는 희생자와 유족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데 무게를 뒀다. 속보를 전하는 이 방송사 기자들은 감정을 절제한 채 사실관계만을 전달했다. 이때 정작 흥분한 쪽은 한국 방송사들이었다. 자극적 표현을 남발하며 ‘재난 포르노’를 연출했다. 한일 방송의 재난 보도를 야구경기에 비유한다면 일본의 콜드게임 승이었다.
이번 세월호 참사 보도 때도 이러한 버릇이 어김없이 나타났다. 시청자의 눈물을 있는 대로 짜내려는 감정적 언행, 선정적 어휘가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난무했다. 앵커들과 기자들은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 감정이입형 기사를 양산해냈다. 특히 JTBC의 손석희·정관용 앵커는 이런 형태의 보도를 선도했다는 평가를 들었으며 생방송 도중 눈물을 보여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반응은 이들에 대한 평판만큼이나 엇갈렸다. 비판론자들은 이들의 눈물이 상업적으로 연출된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반면 이들을 지지하는 진영은 인간미의 발로로 해석했다.
하지만 인간적 본성이 직업윤리에 우선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자신의 목숨을 먼저 챙긴 세월호 승무원들도 변호받을 수밖에 없다. 승무원이 승객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 하듯 앵커는 객관적 사실의 전달을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기자 자질 하향평준화
생방송 중에 눈물을 흘렸다면 그나마 우발적 사태로 이해해줄 여지라도 있다. 하지만 4월 26일 공중파TV인 SBS의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선 저널리즘 이론을 재정립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 벌어졌다. 진행자인 탤런트 김상중은 해경의 녹음파일 조작 의혹을 제기한 뒤 희생자들에 관해 클로징 멘트를 하면서 눈물을 보였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이 프로그램은 편집·녹화돼 방송되므로 얼마든지 새로 녹화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는 장면을 그대로 내보냈다. ‘시사프로그램을 울면서 진행하겠다’는 의도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김상중은 현역 배우로 이런 설정을 탁월하게 소화해낼 인물이다. 이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꽤 높았다고 한다.
해경 측은 이 방송이 제기한 의혹에 대해 허위라며 법적 대응 방침을 밝혔다. 이성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 시사고발뉴스를 눈물과 감정에 휩싸여 다룬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당사자인 해경이 방송 내용이 허위라고 주장하는 마당이면 진행자의 눈물은 오버도 이런 오버가 없다. 우리는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 공중파TV 시사프로그램인 ‘PD수첩’의 과장된 보도로 엄청난 사회적 손실을 입었다. 공중파 TV 시사프로그램이 아직도 사실관계의 확인보다 사회적 선동에 앞장선다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SBS의 간판 뉴스인 ‘8시 뉴스’를 진행하는 김성준 앵커도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태도로 뉴스를 진행했다. 그는 4월 28일 클로징 멘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부 당국자와 정치인 여러분, 저 줄을 똑똑히 보시기 바랍니다. 겉모습은 애도의 행렬이지만 줄 선 이들 가슴속에는 분노의 행렬입니다.”
이 발언을 듣고 몇몇 사람은 속이 후련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발언은 공공의 자산인 전파를 사적으로 남용한 데 지나지 않는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것은 언론인의 기본 사명이다. 김성준 앵커가 ‘관심법(觀心法)’으로 줄지어 선 사람들의 마음을 다 들여다봤으면 누구도 이 보도문을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그랬을 리 없다. 그는 보도문을 작성한 것이 아니라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소설 내지 대자보 격문을 썼다. 김 앵커는 사실적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은 채 공연히 정부에 대한 분노를 부추긴 셈이다. ‘기자는 개인적인 감정이 반영된 즉흥적인 보도나 논평을 자제해야 한다’는 기협 보도준칙 조항과도 맞지 않다. 방송사의 얼굴과도 같은 메인 뉴스 앵커가 이렇게 부실한 발언을 남발한다면 젊은 기자들이 무엇을 배울 것인가. 똑같이 선동적으로 보도할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MBN은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는 출연자에게 낚인 전무후무한 사례를 만들었다. 홍가혜는 인터넷 세계에서 이미 적잖은 유명세를 치르며 화제를 몰고 다닌 인물이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는 일본 거주 교민을 자처하며 MBC와 인터뷰를 한 것으로 알려져 허언증 환자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런 인물이 MBN과의 인터뷰에선 자격을 갖춘 잠수사로 둔갑했다. 침몰한 세월호 속 승객과 잠수사가 바닷속에서 대화했다는 그의 발언이 전파를 탔다. 역대 최악의 오보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인터넷 언론이 우후죽순 등장한 이후 기자의 자질이 떨어졌다’는 평가가 나온 지 오래다. 그러나 이젠 ‘전통 있는 신문사를 모기업으로 둔 종편마저 하향평준화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언론인이 시청률과 속보 경쟁,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에 매몰돼 실제 잠수사도 아닌 사람의 도저히 믿기 힘든 비상식적 주장까지 뉴스로 내보낸 것이다. 말이 안 되는 내용을 걸러주는 게이트 키핑 기능도 내부에선 작동하지 않은 모양이다. 언론의 기본을 망각한 결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여기엔 ‘취재원의 무책임한 폭로를 그대로 뉴스에 방영해도 언론사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평소 의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울고 욕하면 정의로운 언론?
MBC 출신 이상호 기자는 4월 24일 진도 팽목항에서 고발뉴스와 팩트TV로 생중계를 진행하는 도중 “오늘 낮에 연합뉴스에서 지상 최대의 구조작전이라는 기사를 봤다. (연합뉴스) 기자 개XX야. 너 내 후배였으면 죽었어”라며 연합뉴스 기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일반인도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특정인을 모욕하는 욕설을 해선 안 된다. 누구나 인간적 존엄성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기자가 뉴스를 진행하면서 특정인에게 욕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터넷 세계에선 손석희와 정관용의 눈물처럼 이상호의 욕설에 대해서도 정의감의 발로 정도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직업윤리보다 감정적 대응을 높게 평가하는 우리의 풍토가 언론 발전을 저해한다.
3월 말레이시아 여객기 실종 사건 당시 말레이시아 정부는 잔해를 찾기 위해 주술사들을 고용했다. 막스 베버는 이런 주술적 세계관으로부터의 탈피를 근대성의 특징으로 꼽았다. 우리 중 상당수가 말레이시아를 비웃었겠지만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합리적인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대다수 언론은 한쪽으론 ‘골든타임’을 언급하면서 다른 쪽으론 열흘이 지나도록 ‘에어포켓(생존자가 존재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둘은 양립하기 힘든 개념이다. 생존자를 구할 최적의 시기인 골든타임을 놓친 순간 이미 생존의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든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 보름이 지나서 생존자가 구조된 사례가 있다. 해상사고는 저체온증과 산소량 부족으로 생존기간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어떤 언론도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론이 눈치 보기에 급급하면서, 언론에 의한 이런 희망고문이 실종자 가족을 더 자극했다. 아직 아이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정부 구조작업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다른 이의 희생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한국형 재난사고의 또 다른 패턴은 희생이 또 다른 희생을 낳는 점이다. 무능한 탁상행정과 빗발치는 비난 여론 사이에서 현장 근무자들은 엄청난 하중을 받는다. 잠수사의 희생은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잠수인력의 탈진 소식이 간간이 들리던 중 결국 사태 발생 20여 일 만에 한 사람이 사망했다. 충분히 예상된 희생을 막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해경은 무능했다. 언론 또한 책임을 방기했다.
YTN은 방송인 이경규가 세월호 사태 열흘 뒤 전남에서 골프를 친 사실을 보도했다. 이경규의 소속사는 신중치 못했다는 사과 성명을 냈다. 그러나 YTN의 보도가 합당했는지 의문이다. 보는 이에 따라선, ‘이경규가 공인이긴 하지만 골프를 쳤다고 비난받는 건 심하지 않은가’라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리 언론은 대체로 슬픔을 과도하게 강요한다. 9·11테러와 동일본 대지진 당시 미국과 일본의 방송은 차분하게 속보를 전했지만 정규 프로그램을 큰 차질 없이 방송했다. 반면 우리 방송사들은 상당수 프로그램을 장기 결방하면서 시청자에게 엄숙주의를 요구했다.
하나 된 보수·진보 언론
KBS 기자들이 5월 12일 세월호 사건 관련 공영방송의 독립성 문제를 논의했다.
사이비 전문가로 인한 혼란은 대형 사고에 수반하는 새로운 유형의 양상으로 꼽아야 할 것 같다. 홍가혜와 함께 세월호 사태가 만든 유명인사가 이종인 알파잠수 대표다. 그는 2010년 천안함 사태 당시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당시 그가 보인 언행은 크게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JTBC의 손석희 앵커는 그를 여러 번 인터뷰하면서 그를 화제의 인물로 만들어놓았다. 다이빙벨을 안 쓰면 안 될 것처럼 여론을 형성했다. 이상호 기자가 여기에 가세하면서 다이빙벨 투입 논란은 광우병 논란이나 천안함 논란 같은 거대 논쟁으로 번졌다. 결국 현장 투입 결과 다이빙벨은 부적절한 장비로 밝혀졌고 구조에 큰 혼선만 초래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언론은 얼치기 전문가가 득세할 필연적인 구조를 갖췄다.
미국의 심리학자 필립 테틀록은 쟁쟁한 사회학자의 예측이 형편없이 빗나가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테틀록은 여기에 흥미를 갖고 전문가 284명의 의견을 장기적으로 검증했다. 그 결과 흥미로운 결론이 도출됐다. 의견의 적중률은 진보냐 보수냐 같은 이념 성향과는 상관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높은 적중률을 보인 전문가는 자신감이 부족하고 가설을 끊임없이 보정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자신의 이론에 경도된 전문가일수록 적중률이 떨어졌다. 이념적으로 극단적인 인물은 가장 형편없는 적중률을 보였다.
한국은 2008년 미네르바라는 희대의 사이비 전문가를 경험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를 향해 저주의 언사를 늘어놓으면서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떠올랐다. 김태동이라는 경제학자가 그를 가장 뛰어난 경제스승으로 치켜세움으로써 권위를 더했다. 하지만 그는 전문대 졸업 학력의 백수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자 대중은 그가 진짜 미네르바일 리가 없다는 설을 유포하며 인지부조화 증세를 보였다.
다이빙벨 논란은 미네르바 사태의 재판이다. 이종인은 보통 수준의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충분히 경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인에겐 그런 상식적 수준의 식별력도 기대할 수가 없다. 이미 이념적으로 경도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로부터 멀어 보일지라도 과격한 반정부 발언을 내뱉는 이가 인터뷰 대상자로 우선 선택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반정부 정서는 생래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고가 터지든 분노가 곧장 정부로 향한다. 언론이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건지, 이러한 분위기에 언론이 편승하는 건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격이다. 보수와 진보 언론은 참으로 오랜만에 하나가 되어 정부를 비판했다.
KBS의 ‘아사리판’
사고 첫날 ‘전원 구조’ 오보가 터져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긴박한 상황에서 왜곡된 정보가 큰 지장을 초래했다. 이 책임의 적지 않은 부분은 야당 소속 교육감을 둔 경기도교육청에도 있다. 해경 자료를 받은 교육청이 사실과 다른 내용을 문자메시지로 발송한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 오보에 대한 책임을 오직 정부 쪽으로만 돌린다. 한 방향으로 소위‘야마(핵심주제)’를 잡아 ‘한 놈’만 물고 늘어지는 건 우리 언론의 오랜 관행이다.
진보 성향 오마이뉴스는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팔걸이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은 것을 황제 컵라면으로 언급하며 특종 보도했다. 실제론 서 장관 바로 옆에 박준영 전남도지사도 컵라면을 먹고 있었고 더구나 박 지사의 거듭된 권유로 서 장관이 먹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언론은 마치 사진의 나머지 절반을 도려내듯 서 장관 부분만 보도했다. 이 보도는 인터넷에서 일파만파의 파장을 불렀고 박 지사 부분은 한참 뒤에 알려졌다. 하지만 이미 정부를 향한 대중의 불신이 극에 달한 뒤였다. 한쪽 눈을 감고 한쪽 사실을 지운 이념 편향 보도의 대표 사례다. 정부 비판은 언론의 사명이므로 그것은 그것대로 적극 장려되어야 하지만, 이런 식의 비판은 정도(正道)가 아니다. 일부 네티즌도 이 보도에 대해 “완전 악질” “선동의 전형적 사례”라고 비판한다.
KBS의 젊은 기자들은 사내 게시판을 통해 KBS가 더욱 강하게 정부 비판을 하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자 이 방송사 간부는 자사 뉴스의 정부 비판에 양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다면서 다이빙벨 보도 같은 것을 하자는 것이냐고 반박했다. 이런 가운데 KBS 보도국장이 사석에서 세월호 사고와 교통사고를 견주어 발언한 것으로 진보 성향 ‘미디어오늘’에 보도됐다. 보도국장은 미디어오늘이 자기 발언을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했다고 주장했다. 유족은 청와대로 몰려가 KBS 보도국장의 파면과 사장의 사과를 요구했다. 청와대의 요청으로 KBS 사장은 국장을 경질했고 유족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해당 보도국장은 “사장은 정부에 불리한 뉴스가 크게 실리는 것을 막아왔다”면서 “사장도 사퇴해야 한다”고 했다.
신문들은 프레임 전쟁
재난방송 주관 방송사인 KBS의 이 ‘아사리판’을 보면, KBS는 재난보도와 관련해 내부 구성원 간 합리적 토론도, 권력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도 요원한 상태인 것으로 비친다. 특히 KBS의 정치적 독립과 관련해, 법적 측면이든 언론자유 측면이든, 청와대는 KBS 기자 인사에 관여해선 안 된다. KBS 보도국장의 파면을 청와대에 요구한 유족의 행위도, 이를 듣고 KBS 사장에게 보도국장에 대한 인사 조치를 요청해 바로 관철한 청와대 정무수석의 행위도 비정상이긴 마찬가지다.
정상적인 권언(權言)관계라면 청와대가 KBS 사장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도 없고 사장이 들어줘서도 안 된다. 더구나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은 자신이 KBS 사장에게 보도국장 경질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야당 원내대표와 언론에 공개하기까지 했다. ‘박 수석이 KBS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아니냐’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방송계에선 나온다. ‘KBS의 참사’가 아닐 수 없다는 거다.
이번 사고 과정에서 신문에 대한 비난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 신문이 치열한 ‘프레임(사건을 보는 주된 관점) 전쟁’을 벌인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사고 초기 모든 신문은 현장 상황 전달에 주력했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이 구조된 직후 5만 원권 지폐를 말리고 있었다’는 동아일보 보도는 단연 압권이었다.
사건 발생 수일이 지나자 보수지와 진보지 간 프레임이 뚜렷이 갈렸다. 조선일보는 ‘유병언 비리’ 프레임을 전면에 걸기 시작했다. 반면 한겨레는 ‘정부 책임론’ 프레임으로 몰아갔다.
조선일보는 “세월호 구조비용 ‘청해진 일가’가 모두 물어내게 해야”라는 4월 26일자 사설로 포문을 열었다. 자매방송인 TV조선은 ‘이용욱 해경 정보수사국장이 특채되기 전 세모 직원이자 구원파 신도였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또 유병언의 최측근이었던 이청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구원파와 관련된 의혹을 제기했다. 이를 통해 국민의 분노를 상당 부분 유병언과 청해진해운 쪽으로 돌렸다.
반면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정부 책임론을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두 신문 모두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한 달이 되도록 세월호 참사란을 유지했다. 이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사태 20여 일이 지나면서 홈페이지 구성을 정상화한 점과 비교된다. 한겨레는 정몽준의 막내아들이 SNS에 “국민이 미개하다”고 쓴 것을 물고 늘어졌다.
어떤 큰 사건만 나면 우리 신문은 자신의 이념적·정치적 성향에 부합하는 프레임을 세워 대립적으로 사건을 다룬다. 이번 세월호 참사 보도에서도 거의 법칙처럼 이런 행태가 재확인됐다. 신문 보도는 TV 보도만큼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이런 점에선 씁쓸함을 남겼다.
‘기레기’와 초심
인터넷에선 기자를 비하하는 ‘기레기(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추정)’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기자는 정치인만큼이나 혐오의 대상이 됐다. 여기엔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의 구분도 없다. 선출직 공직자는 정기적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기라도 하지만 언론인은 이런 견제도 받지 않는다. 만일 불매운동이 언론에 대한 유일한 심판이라면 지금 거의 모든 언론은 불매운동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
누구나 기자가 되는 세상에서 오히려 기자에 대한 염증이 심해지는 것은 흥미롭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는 직업윤리의 회복을 절감한다. 언론은 누군가를 비판하는 데 익숙하지만 비판받는 데엔 익숙지 않다. 지금 많은 사람은 언론인의 직업윤리에 회의감을 드러낸다. 언론인은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