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 세상에서 모든 콘텐츠는 평등하다’는 망중립성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접속 빈도에 따라 인터넷 사용료가 달라지는 세상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통신기업들은 “더 이상 공짜 점심은 없다”며 콘텐츠업계를 압박하고, 콘텐츠업계는 “이제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IT혁명은 끝났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망중립성을 유지하느냐 폐지하느냐, 이는 분명 쉽지 않은 문제다.
그렇다면 이번 소송에서 문제가 된 망중립성이란 어떤 것일까.
망중립성은 ‘인터넷망에서 모든 콘텐츠가 동등하게 취급받아야 하며 부당한 차별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원칙이다. 네트워크를 가진 통신사들이 트래픽 유발 등을 이유로 특정 콘텐츠사업자에게 추가 과금하거나 서비스를 차단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 장치다. 쉽게 말해 유튜브나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해서 인터넷 서비스업체가 이들 기업에 비싼 인터넷 사용료를 물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003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팀 우 교수가 처음 사용했으며 현재 일반적인 개념으로 쓰인다.
그동안 IT업계의 혁신은 모두 이 망중립성 원칙의 혜택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개인의 창작물이 세계적으로 히트상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나 자유롭고 저렴하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용량에 비례해 인터넷 사용료를 내야 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인터넷망을 깔아야 하는 기업 처지에서 보면 이 원칙은 그야말로 족쇄이자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가 아닐 수 없었다. 통신기업들은 “우리가 돈을 들여 깔아놓은 인터넷망에서 콘텐츠 업계가 공짜 점심을 먹는다”며 줄곧 불만을 토로해왔다.
이번 소송에서 버라이즌은 망중립성 원칙을 고수하고 기업에 강제해온 FCC에 대해 “권한을 남용한다”고 비판했다. “인터넷서비스업자는 정부의 기간통신사업자(Common Carrier)가 아니고, 단지 정보서비스 제공자이므로, FCC의 규제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항소법원은 필요한 범위 내에서는 FCC가 규제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며 버라이즌의 주장을 일부 기각했다. 다만 기간통신사업자에 적용되는 차별금지 및 차단금지 규제는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인터넷네트워크 사업자는 엄격한 규제의 대상이 되는 기간통신사업자가 아니라 규제가 거의 없는 정보서비스 제공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판결이 나오자마자 콘텐츠업계에서는 강하게 반발했다. “콘텐츠 기업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허용함으로써 IT업계의 혁신을 방해할 것”이란 우려, “더 이상 페이스북 같은 혁신적인 상품을 볼 수 없을 것”이란 비판이 터져 나왔다.
망중립성 원칙의 무력화
세계 최대 IT 시장인 미국에서 망중립성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진 건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2007년경 미국의 최대 케이블 TV사업자이자 제2 인터넷사업자인 콤캐스트(Comcast)가 P2P 서비스인 비트토랜트를 이용한 데이터 업로드를 방해해 FCC로부터 시정조치를 받은 일도 있었다. 당시 콤캐스트는 시정 조치를 받은 뒤 “FCC가 권한을 남용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소송에서도 미국 법원은 콤캐스트의 손을 들어줬다. FCC는 이 판결 이후 새로운 인터넷 규칙을 만들어 시행했는데, 이번 판결로 이 규칙마저 무효화된 것이다.
페이스북 설립자인 마크 주커버그.
인터넷 강국인 우리나라에서도 망중립성을 둘러싼 논란은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다. 2006년에 이미 통신서비스 기업인 LG파워콤과 케이블TV 업체 등이 TV포털서비스를 제공하는 하나TV를 차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통신업체들은 하나TV 측이 트래픽 부담에 따른 추가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몇 년 동안에도 KT의 삼성스마트TV 전격 차단사건(2012년), 카카오톡(보이스톡)에 대한 이동통신사들의 추가과금 요구(2012~2013년) 같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졌다. 통신사들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추가과금은 물론 통신망 설비 비용도 콘텐츠업체가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콘텐츠 사업자들이 수익만 가져가는 프리라이딩(Free riding)이 돼선 안 되고 망 사용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통신 사업자들은 주장해왔다. 반면 카카오톡 같은 콘텐츠나 서비스 사업자는 인터넷망 통제가 혁신과 프라이버시를 모두 위험에 빠뜨린다고 강변한다. 인터넷 접속에 빈부 격차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혁신과 창의성 지켜야
이번 미국 법원의 판결은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점점 증가하는 인터넷망 사업자와 콘텐츠 사업자 간의 분쟁에도 앞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소개한 LG파워콤의 하나TV 차단 사건, KT의 삼성스마트 TV 차단 사건 등을 보면 우리나라는 그동안 엄격한 망중립성의 원칙을 채택하기보다는 이를 완화한 합리적인 트래픽 관리를 인정하는 방향을 택해왔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이미 2011년 망중립성 및 인터넷 트래픽 관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정해 시행했다. 그럼에도 망 설비에 대한 투자비를 누가 부담할 것인가, 인터넷 생태계를 위해 어떤 정책이 필요한가, 공정경쟁의 측면에서 바람직한 정책방향이 무엇인가, 나아가 정부의 개입 내지 규제는 어느 정도가 바람직한가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계속된다.
망중립화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정리되는지에 따라 인터넷 산업은 요동칠 것이 분명하다. 망중립성이 강화된다면 인터넷서비스가, 망중립성이 약화된다면 인터넷콘텐츠 업계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추가비용을 내는 인터넷 콘텐츠 사업자에게 좀 더 빠른 인터넷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전면 허용된다면 이는 업계의 지도를 바꾸는 일이 될 것이다. 인터넷 세상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망중립성을 강제하는 쪽으로만 정책이 집중되면 통신사는 인터넷망 인프라에 대한 설비투자 의욕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IT산업의 기반을 흔드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인 것이다.
필자는 이 논란과 관련해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은 ‘창의와 혁신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믿는다. 망중립성 원칙보다는 공정성 측면이 강조되어야 한다. 물론 일부 기업의 지배적 지위남용은 통제되어야 할 것이다. 당사자 간의 자율적인 협상과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정부의 규제와 기존의 규칙이 혁신과 창의성을 저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사회적인 낭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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