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 회담의 주역들. 1943년 11월 25일 카이로에서 환담 중인 장제스 중국 총통,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와 장 총통의 부인 쑹메이링 여사(왼쪽부터).
조선의 완전 독립을 주장한 장제스는 카이로 선언문 조항에 ‘조선의 독립’이 들어가게 했는데, 이 사실은 지금까지도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장제스의 일기에 흥미를 가졌다. 2010년부터는 거의 매년 여름 스탠퍼드대학의 후버연구소를 방문해 장제스의 일기를 읽었다. 장제스 유족으로부터 이 일기를 빌려온 후버연구소는 2006년 4월 일부를 처음 공개한 이래 세 번에 걸쳐 전부를 공개했다.
그러나 사진 촬영은 물론이고 복사도 금지했기에 손으로 베껴 쓸 수밖에 없었다. 필기도구와 종이는 연구소가 제공하는 것만 써야 했다. 참고로 1999년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에서 낸 ‘백범 김구 전집’ 제4권에 실려 있는 장제스 일기는 진본이 아니다. 그것은 진본 장제스 일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장제스는 28세가 된 1915년부터 85세가 된 1973년까지 57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1926년의 북벌전쟁과 8년간(1937~1945)의 항일전쟁기는 물론이고 4년 이상 이어진(1945~1950) 내전기에도 빠뜨리지 않았다.
장제스 일기는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주목을 받았으나, 일기 진본 전부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제스 일기를 읽고 쓴 논문이나 책이 더러 나오긴 했으나 2006년 이전에 나온 것들은 진본 일기를 보고 쓴 것이 아니었다.
장제스의 일기는 시기에 따라 형식 면에서 조금씩 변화를 보이지만, 57년을 변함없이 매일 붓으로 300자 이상을 단정한 행서체로 적어놓았다. 갈겨썼기에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으나 알기 쉬운 문체라 전체 뜻을 파악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는 12 내지 14개의 세로 행이 있는 B5 용지 크기의 일기장에 한 행에 23자 정도씩을 써 내려갔다.
그는 제일 먼저 ‘제요(提要)’라는 제목을 붙여 그날의 주요 사건과 그것을 알게 된 과정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예정(豫定)’이라는 제목하에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적고, ‘주의(注意)’란 제목으로 국내외 형세에 대한 평가와 판단, 유념해야 할 점을 열거했다. 이어 ‘기사(記事)’라는 제목으로 그날 한 일을 적어놓았다.
주말에는 그주에 대한 반성과 다음주에 예정된 업무의 내용을 적어놓았다. 월말에는 그달의 반성록과 그달에 있었던 주요 사건을 적은 대사표를 정리했다. 연말에는 그해 적어놓은 일기를 점검해 빠진 것과 미흡했거나 확실하지 않았던 기록을 보충했다. 물론 그해를 반성하는 글도 길게 서술해놓았다.
장제스 일기는 글자 수가 제한돼 있어 기록하지 않은 사실은 있을 수 있으나 꾸며서 적은 것은 없다고 판단된다. 제요, 예정, 주의, 기사 식으로 일기를 간략히 적은 데다 주말과 월말, 연말에 반성록을 적어 거짓말을 적으면 전후 모순이 발생해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이 이렇다보니 사실과 다른 말을 적으면 찾아내기가 쉽다. 그가 역사 기록으로 남길 목적(보여주기 위해)으로 일기를 적은 것은 틀림없으나, 진실을 적으려고 애쓴 흔적은 분명히 보인다. 주위 사람에 대한 인물평이나 쌍욕을 적은 부분도 있고 성욕에 대한 내용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