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의 간판 뉴스인 ‘8시 뉴스’를 진행하는 김성준 앵커도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태도로 뉴스를 진행했다. 그는 4월 28일 클로징 멘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부 당국자와 정치인 여러분, 저 줄을 똑똑히 보시기 바랍니다. 겉모습은 애도의 행렬이지만 줄 선 이들 가슴속에는 분노의 행렬입니다.”
이 발언을 듣고 몇몇 사람은 속이 후련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발언은 공공의 자산인 전파를 사적으로 남용한 데 지나지 않는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것은 언론인의 기본 사명이다. 김성준 앵커가 ‘관심법(觀心法)’으로 줄지어 선 사람들의 마음을 다 들여다봤으면 누구도 이 보도문을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그랬을 리 없다. 그는 보도문을 작성한 것이 아니라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소설 내지 대자보 격문을 썼다. 김 앵커는 사실적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은 채 공연히 정부에 대한 분노를 부추긴 셈이다. ‘기자는 개인적인 감정이 반영된 즉흥적인 보도나 논평을 자제해야 한다’는 기협 보도준칙 조항과도 맞지 않다. 방송사의 얼굴과도 같은 메인 뉴스 앵커가 이렇게 부실한 발언을 남발한다면 젊은 기자들이 무엇을 배울 것인가. 똑같이 선동적으로 보도할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MBN은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는 출연자에게 낚인 전무후무한 사례를 만들었다. 홍가혜는 인터넷 세계에서 이미 적잖은 유명세를 치르며 화제를 몰고 다닌 인물이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는 일본 거주 교민을 자처하며 MBC와 인터뷰를 한 것으로 알려져 허언증 환자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런 인물이 MBN과의 인터뷰에선 자격을 갖춘 잠수사로 둔갑했다. 침몰한 세월호 속 승객과 잠수사가 바닷속에서 대화했다는 그의 발언이 전파를 탔다. 역대 최악의 오보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인터넷 언론이 우후죽순 등장한 이후 기자의 자질이 떨어졌다’는 평가가 나온 지 오래다. 그러나 이젠 ‘전통 있는 신문사를 모기업으로 둔 종편마저 하향평준화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언론인이 시청률과 속보 경쟁,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에 매몰돼 실제 잠수사도 아닌 사람의 도저히 믿기 힘든 비상식적 주장까지 뉴스로 내보낸 것이다. 말이 안 되는 내용을 걸러주는 게이트 키핑 기능도 내부에선 작동하지 않은 모양이다. 언론의 기본을 망각한 결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여기엔 ‘취재원의 무책임한 폭로를 그대로 뉴스에 방영해도 언론사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평소 의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울고 욕하면 정의로운 언론?
MBC 출신 이상호 기자는 4월 24일 진도 팽목항에서 고발뉴스와 팩트TV로 생중계를 진행하는 도중 “오늘 낮에 연합뉴스에서 지상 최대의 구조작전이라는 기사를 봤다. (연합뉴스) 기자 개XX야. 너 내 후배였으면 죽었어”라며 연합뉴스 기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일반인도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특정인을 모욕하는 욕설을 해선 안 된다. 누구나 인간적 존엄성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기자가 뉴스를 진행하면서 특정인에게 욕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터넷 세계에선 손석희와 정관용의 눈물처럼 이상호의 욕설에 대해서도 정의감의 발로 정도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직업윤리보다 감정적 대응을 높게 평가하는 우리의 풍토가 언론 발전을 저해한다.
3월 말레이시아 여객기 실종 사건 당시 말레이시아 정부는 잔해를 찾기 위해 주술사들을 고용했다. 막스 베버는 이런 주술적 세계관으로부터의 탈피를 근대성의 특징으로 꼽았다. 우리 중 상당수가 말레이시아를 비웃었겠지만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합리적인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대다수 언론은 한쪽으론 ‘골든타임’을 언급하면서 다른 쪽으론 열흘이 지나도록 ‘에어포켓(생존자가 존재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둘은 양립하기 힘든 개념이다. 생존자를 구할 최적의 시기인 골든타임을 놓친 순간 이미 생존의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든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 보름이 지나서 생존자가 구조된 사례가 있다. 해상사고는 저체온증과 산소량 부족으로 생존기간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어떤 언론도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론이 눈치 보기에 급급하면서, 언론에 의한 이런 희망고문이 실종자 가족을 더 자극했다. 아직 아이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정부 구조작업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다른 이의 희생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한국형 재난사고의 또 다른 패턴은 희생이 또 다른 희생을 낳는 점이다. 무능한 탁상행정과 빗발치는 비난 여론 사이에서 현장 근무자들은 엄청난 하중을 받는다. 잠수사의 희생은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잠수인력의 탈진 소식이 간간이 들리던 중 결국 사태 발생 20여 일 만에 한 사람이 사망했다. 충분히 예상된 희생을 막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해경은 무능했다. 언론 또한 책임을 방기했다.
YTN은 방송인 이경규가 세월호 사태 열흘 뒤 전남에서 골프를 친 사실을 보도했다. 이경규의 소속사는 신중치 못했다는 사과 성명을 냈다. 그러나 YTN의 보도가 합당했는지 의문이다. 보는 이에 따라선, ‘이경규가 공인이긴 하지만 골프를 쳤다고 비난받는 건 심하지 않은가’라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리 언론은 대체로 슬픔을 과도하게 강요한다. 9·11테러와 동일본 대지진 당시 미국과 일본의 방송은 차분하게 속보를 전했지만 정규 프로그램을 큰 차질 없이 방송했다. 반면 우리 방송사들은 상당수 프로그램을 장기 결방하면서 시청자에게 엄숙주의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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