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기쇠왕설은 현대에 와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밑바닥 정서에 깊숙이 깔려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집안에 우환이 발생했을 때 ‘터의 기운’으로 돌려 말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터의 기운이 좋지 않거나, 이미 그 기운이 다해 재수가 없다는 식이다. 반대로 살고 있는 터의 기운이 좋아 일이 잘 풀린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2014년 현재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땅심은 유효할까. 더 노골적으로 말해 서울이라는 터의 약발은 여전히 진행형인가, 아니면 이미 약발이 다했을까. 혹자는 서울에서 집행되던 정부의 행정기능 일부가 세종시로 넘어가고 유력한 공공기관들이 지방으로 이전하는 것에서 보듯이 서울의 지기가 쇠했다고 말하고, 혹자는 명당인 서울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중심 수도로서 굳건한 지위를 잃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더욱 과격하게는 남북통일 시대에 대비해 서울 자체를 교하 지역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자리 잡은 조선의 궁궐터.
현재 서울의 지기쇠왕설을 논하자면, 고려 말 조선 초 지식인 사이에 논의가 분분했던 풍수도참 사상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시기에 정도전 같은 골수 유교 사대주의자들은 주자의 논리를 빌려 풍수도참 사상을 허황된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했지만, 다수 지식인은 유교 사상을 내세우면서도 풍수도참 사상을 굳이 배격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고려 출신의 무장 이성계 역시 조선을 건국할 때 지기쇠왕설을 한양(서울) 도읍지의 주요 근거로 활용했다. 고려 수도 개경(개성)의 지기가 이미 쇠했으니 땅심이 왕성한 새 터에서 새로운 국가를 열자는 논리였다. 개경 고수론자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는 정서가 더 큰 호응을 얻어 한양이 최종적으로 낙점됐다.
그렇게 해서 한양은 1394년 정도(定都) 이래 조선왕조와 운명을 같이했을 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수도로서 굳건한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왕조국가에서 그 최초 도읍지는 집권층, 특히 절대 권력자와 천생연분을 지녔음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야만 쿠데타나 무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고, 민심을 수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한국 풍수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는 도선국사를 끌어들여 개경 도읍의 정당성을 부여했듯, 고려를 멸한 이성계 역시 풍수에 밝았던 무학대사와 도참설 등을 끌어들여 한양 도읍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는 조선의 건국주 태조 이성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무덤 앞에 세운 ‘건원릉신도비명(建元陵神道碑銘)’에도 나타난다.
“어떤 이인(異人)이 글을 바치며 이르기를, ‘지리산(智異山) 암석(巖石) 가운데서 얻은 것이다’고 하였는데, 거기에는 ‘목자(木子)가 다시 삼한(三韓)을 바로잡으리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시켜 이인을 맞이하게 하였더니,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고려 서운관(書雲觀)의 옛 장서(藏書)인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란 것이 있는데, ‘건목득자(建木得子)’라는 말이 있다. 조선(朝鮮)이 곧 진단(震檀)이라고 한 설(說)은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지금에 와서야 증험되었으니,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은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