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만큼 풍수지리에 관심 많은 집단도 찾기 힘들다. 땅을 통해 부(富)를 일군 사람이 많아서일까. 부의 원천이 자신이 사는 터에 있다는 전통 시대의 믿음은 우리나라 부자들 사이에 여전히 유효하다. 부를 부르는 지리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전남 구례의 운조루 연못.
탈신공개천명(脫神功改天命)! 신의 뜻을 거스르고 천명마저 바꾸겠다는 인간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풍수지리의 세계에서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부귀론을 외면할 순 없을 터. ‘명당에 들어가면 지옥문도 바꾼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사실 전통 시대엔 풍수지리를 부귀를 누리기 위해 연마해야 하는 ‘필수 과목’으로 여겼다. 스스로 공부할 여건이 못 되면 아예 실력 있는 지관을 집안 풍수 전담용으로 모시기도 했다.
한국의 전통 부자로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경주 교동 최부잣집의 경우를 보자.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해 경상도를 대표하는 부자로 첫손에 꼽히는 최부잣집은 ‘재산을 만 석 이상 모으지 말라, 흉년에 남의 논과 밭을 사지 말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 6개의 가훈(六訓)을 대대로 실천해온 명문가로 유명하다.
그런데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최부잣집의 가훈엔 바깥에 알려진 육훈 외에 내밀히 전해온 가훈이 하나 더 있다는 구전도 있다. ‘명지(明地)가 있으면 값은 고하(高下) 간에 구해 쓰라’는 것이다. 좋은 명당이 있으면 땅값에 구애하지 말고 구해 쓰라는 의미인데, 사실 여부를 떠나 최부잣집이 경주 교동에 터를 잡은 내력이나 이 집안 사람들이 묘를 쓴 자리를 보면 명당 길지를 애써 구했음직한 흔적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비단 최부잣집뿐 아니라 한국 전통 부잣집들의 경우 저마다 풍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과 사연을 갖고 있다.
풍수에서 말하는 부자 혹은 부의 조건은 뭘까. 이에 대한 언급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2)이 지은 ‘택리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은 재록(財祿)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는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 비록 산중이라도 시내와 계곡물이 모이는 곳이라야 여러 대를 이어가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터가 된다”고 씌어 있다. 터에서 물을 봐야 부를 누릴 수 있다는 ‘택리지’의 논리는 조선 사대부들이 집터를 고를 때 빠뜨리지 않은 지침이었다. 중국 당나라 때 인물인 복응천(卜應天)이 지은 풍수지리서 ‘설심부(雪心賦)’도 ‘많은 물이 모인 곳이 명당(衆水聚處是明堂)’이라는 말로 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재물 기운은 물에서 나온다?
물이 왜 부와 연결되는 걸까. 이는 풍수의 기본 원리와도 그 맥락이 이어지므로 잠시 짚어보기로 하자. 흔히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로 이해되는 풍수는 ‘바람길을 갈무리하고 물길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조건을 갖춘 곳에선 부귀나 무병장수 같은 좋은 생기(生氣)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게 풍수의 원리다. 문제는 득수, 즉 강가나 해안가 등 물길과 가까운 곳에서 사는 것과 장풍, 즉 바람길을 막아주거나 갈무리해주는 산속 혹은 산기슭에서 사는 것은 삶의 질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전통 시대부터 물가는 물자의 교역과 교통 요충지 구실을 해왔다. 물길을 따라 도로망이 펼쳐지면서 사람이 모여들고 자연스레 교역과 상업이 발달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된 것이다. 물길은 이처럼 부를 창출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유리하다. 반면 산속은 감추거나 막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교통과 교역이라는 측면에선 상대적으로 물길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해변 개가 산골 부자보다 낫다’는 말이 생겨났다. 강가나 바닷가에 비해 산골은 빈궁하므로 아무리 산골에서 부자라 하더라도 실상은 사는 게 보잘것없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물길을 재물 기운의 확보 수단으로 보는 관념은 더욱 ‘진화’해 나중엔 아예 물 자체를 부와 한 짝으로 묶어 취급하기도 했다. 양택(陽宅)이나 음택(陰宅) 앞으로 물웅덩이나 연못, 저수지 따위가 형성돼 있으면 그 물만큼 재물이 보장된다는 중국의 풍수이론도 물을 재물과 동일시한 것에서 생겨난 사고다.
한편으로 풍수에서 말하는 수(水)는 물길 같은 외형적 측면 말고도 터에서 형성된 생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제어하는 내부적 기능도 갖고 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대표적 풍수 고전인 ‘장서(葬書)’에선 생기가 ‘물을 만나게 되면 멈춘다(界水則止)’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명당이 되려면 사람에게 부귀(富貴)의 기운을 전해주는 생기를 보호하는 역할로서의 물 또한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를테면, 살고 있는 터를 향해 물길이 휘감아 들어오는 형상이면 생기가 보호돼 재물이 쌓이고, 터에서 물길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이면 그 물길을 따라 생기 또한 빠져나간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물길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일 경우 터 앞에다 키 큰 나무를 심어 물길이 보이지 않도록 차단하기도 한다.
물에 대한 이 같은 풍수적 관념을 염두에 두고 한국을 대표하는 부잣집들을 살펴보자. 먼저 재물 기운을 갖춘 생기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물을 이용한 풍수 조형물은 전남 구례의 ‘운조루(雲鳥樓)’(중요민속자료 제8호) 가옥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에 지어진 운조루는 지리산 서남단 지역에 위치하는데, 지리산 노고단에서 이어지는 형제봉(일명 삼태봉)이 주산(主山)을 이루고 넓게 펼쳐진 들 앞으로는 섬진강이 환포(環抱)하며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재물 명당 터로 일찌감치 명성을 누려왔다. 일각에선 운조루를 처음 지은 유이주(1726~1779)가 집 자리를 닦을 때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왔다고 해서 금구몰니(金龜沒泥)형 재물 명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구례 운조루의 풍수 비보
아무튼 호남의 대표적 부잣집 중 하나인 운조루의 주인은 베풂과 나눔의 미학을 실천해왔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운조루의 쌀독이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공간엔 나무로 만든 쌀독이 있는데, 쌀독 하단에 한 주먹만큼 들어갈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고, 거기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는 의미로, 주변의 배고픈 사람들이 아무 때나 와서 쌀을 퍼가도록 하고 가을에 추수를 하면 다시 되돌려놓을 수 있도록 한 장치다. 게다가 쌀독이 있는 곳은 쌀을 가지러 온 여인네들이 안채의 주인집 여자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중문을 잠가놓는 세심한 배려까지 해놓았다.
이처럼 진정한 재물 명당은 터의 주인뿐 아니라 그 주변 사람에게도 넉넉한 기운을 베푸는 특징이 있다. 또 그래야만 재물의 명당 기운이 오래도록 유지된다. 부자나 귀족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그 가문의 영속성을 위해서도 필요한 행위인 것이다.
운조루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운조루엔 재물 기운을 누리려는 목적으로 조성한 풍수 비보(裨補) 장치가 여럿 있다. 풍수적 안목을 갖추고 바라보면 운조루 주인의 재치 넘치는 풍수 감각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먼저 운조루가 있는 오미동 마을의 뒷산인 병풍산에서 내려오는 지기(地氣)는 1000여 평에 달하는 운조루 터를 둥그렇게 감싸면서 커다란 재물 기운을 이룬다. 이러한 재물 기운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운조루는 매우 교묘한 비보 장치를 마련해놓았다. 운조루에 강하게 깔린 재물 기운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사라지지 않도록 일단 수십 칸에 이르는 집들이 처마가 다닥다닥 붙을 정도로 밀집돼 조성된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할 만큼 배치한 것은 집과 집 사이의 처마를 이용해 지기가 공중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고려한 것이다.
또 집의 솟을대문 바로 앞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물이 흐르도록 인위적으로 꽤 깊은 도랑을 만들었다. 얼마 전 필자가 답사할 당시에도 도랑엔 물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이를 풍수에선 ‘계류수’라고 하는데, 정확히 운조루의 재물 기운은 이 계류수까지 뻗쳐 멈추는 형국이었다. 즉 물을 만나 생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계수즉지’의 풍수이론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운조루 주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계류수가 흐르는 도랑 더 바깥쪽(남쪽)으로는 아예 연못(동서 45m× 남북 15m)을 조성했다. 연못 가운데엔 조그만 섬 형상을 만들고 소나무, 배롱나무 등을 심어 아름다운 수경 공간을 연출했다. 언뜻 보면 관상용 공간으로 치부됨직한 이 연못엔 연출자의 풍수적 계산이 깔려 있다.
그 하나는 운조루의 뒷산, 즉 북쪽에서 뻗어 내려온 지기가 혹여 1차 경계선인 물 도랑을 넘어설 경우 2차 경계선인 남쪽의 연못에서만큼은 완벽히 차단하겠다는 계산이다. 다른 하나는 운조루의 안산이라 할 수 있는 오봉산 쪽에서 내려온 살기(殺氣)가 운조루를 향해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형국인데, 이를 연못의 물 기운을 이용해 막아주고자 한 것이다. 물을 이용한 비보 풍수로 운조루만큼 지혜롭게 사용한 경우는 다른 곳에선 찾기 힘들다.
현재 운조루는 과거의 재물 명당이라고 하기엔 다소 쇠락한 느낌이 든다. 운조루의 후손은 운조루를 출입하는 관광객의 관람요금으로 옛 명성을 잇는 듯하다. 사실 운조루의 재물 명당은 ‘돈’이 아니라 ‘곡식’의 기운이다. 전통 시대엔 곡식이 부의 원천이었기에 부자로서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화폐의 시대요, 금융의 시대이기에 곡식의 명당 기운으로는 옛날과 같은 부를 이루긴 힘겹다고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최부잣집 곡간의 비밀
한편으로 지나친 재물 기운은 그 터에 사는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기 십상이다. 특히 재물 기운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부분까지 감안해 터를 조성한 부잣집이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이다.
최부잣집은 원래 신라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했던 터라고 전하는데, 사실이라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신라의 대문장가 설총의 탄생지가 된다. 이 터를 풍수적으로 살펴보면 집 앞으로는 문천이라고 불리는 물길이 흘러 임수(臨水)의 모양새는 갖췄는데, 집 뒤를 받쳐주는 배산(背山)은 엉성하다. 뒤쪽이 야트막한 둔덕으로 거의 평지에 가깝다. 대체로 경주 시내가 다 이런 모양새다.
경북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 곡간.
그런데 최부잣집 사랑채와 안채 등 사람이 거주하는 곳의 풍수적 기운은 생기(生氣)가 머무는 명당 터이긴 하지만, 그 명성에 어울릴 만큼 특출하다고 평가하기엔 부족한 느낌이다. 더욱이 재물 기운과는 별 상관없는 곳이다.
당초 이 터를 고른 최언경(1743~1804)은 이전에 살던 곳(흔히 게무덤이라고 함)에서 5대째 엄청난 부를 축적한 뒤, 새롭게 부를 확장하려는 목적으로 요석궁터와 이 일대를 사들여 99칸에 이르는 대저택을 지었다고 한다. 최언경은 요석공주가 머물던 궁으로 권력의 기운을 가졌으면서도 설총 같은 대학자를 배출한 학문의 기운을 갖췄다고 믿어지는 이곳을 왜 선택했던 것일까. 대를 이어오는 최부잣집 가훈 중에 ‘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고 경계한 것을 보면 집터의 기운을 이용해 권력이나 학문 등을 추구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 터는 재물을 원하는 목적으로 선택한 자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 터를 잡은 후 내리 7대 만석꾼의 부를 유지한 걸 보면 분명 이곳을 재물 명당이라고밖에 달리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재물 명당이라고 하기엔 사람들이 거주하는 터의 재물 기운이 굳세지 못한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필자는 최부잣집을 살펴보면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한 채의 곡간(穀間·뒤주)에서 그 풍수적 괴리감의 실체가 풀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마당 한 켠에 자리한 이 창고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인데, 개인집 곡간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이런 곡간이 몇 개 더 있었는데 다 없어지고 남아 있는 건 이것뿐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최부잣집의 안산(案山) 구실을 하는 도당산에서 뻗어오는 재물 기운은 사랑채도 안채도 부엌도 아닌 곡간으로만 그 기운이 집중되고 있었다. 즉 최부잣집 부의 원천 기운은 곡간에 있었던 것이다.
권력과 재물 기운을 품고 있는 ‘독화로사도’.
물론 최부잣집에서도 ‘물=재물’이라는 등식은 작동한다. 그것은 집 앞을 흐르는 시냇물이라기보다 안채 마당에 조성해놓은 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우물은 물맛 좋기로 유명했고, 또 이 물로 최씨 집안 전통의 ‘경주법주’를 빚었다. 이 우물이 최씨 집안의 부를 유지하는 데 한 구실을 했음은 분명하다.
현대에 와서도 물은 부자 혹은 재물과 연결된다는 풍수적 믿음은 여전하다. 이는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앞에 설치된, 물을 담는 돌확 장치나 서울 서린동 SK사옥의 물을 찾는 거북형 풍수 장치를 비롯해 서울 주요 빌딩들 앞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풍수적 장치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지에서 더욱 유행한다.
부자는 누드화를 좋아해?
최근 필자가 방문한 중국 베이징의 주요 신축 건물에서도 물이 흐르게 하는 분수나 물레방아 등 재물 기운을 끌어당기려는 비보 풍수 장치들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한편 화교가 많이 모여 사는 싱가포르나 홍콩에선 부자들이 여성 누드화를 서재 등 사적 공간에 즐겨 비치한다고 한다. 이 역시 재물 기운을 끌어들이려는 일종의 ‘명리풍수’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사주팔자로 개인의 길흉을 예측하는 명리학에선 남성의 경우 재물 기운과 여성을 같은 기운으로 해석한다. 그러니까 여성 그림은 그 자체가 재물 기운을 대표하는 것으로, 부자들은 누드 그림에서 재물 기운을 얻으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풍조가 일부 부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이는 누드화의 관능적인 여성 신체가 역동성과 생동감의 기운을 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양의 기운을 증강시키기 때문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효과가 있는 걸까. 누드화가 재물 기운을 북돋우는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선 필자도 경험한 바 없어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긴 힘들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에선 그림에다 생동하는 기운을 담고자 했고, 그것이 보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을 최상으로 쳤다. 동양 예술사를 살펴보면 풍수에서 소중히 여기는 산(山)과 수(水)를 화폭에 담아 표현한 산수화는 풍수를 연원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옛사람들은 그림을 단순한 감상용에 그치지 않고 그 그림의 기운까지 취하길 원했던 것 같다. 최소한 중국의 송·금·원나라 시대, 그리고 우리의 고려시대 산수화에서는 노골적으로 그림 기운을 이용하려 했음이 분명히 나타난다. 이는 고려 산수화로 공개된 ‘독화로사도(獨畵鷺圖)’의 권력과 재물 기운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집에다 재물 기운을 북돋울 그림 한 점쯤 걸어둬도 좋을 성싶다. 비싼 그림이 아니라도 좋다. 마음에 드는 산수화를 하나 장만해 집에 걸어두고 자주 그 기운을 느껴보자. 혹 산수화의 물에서 재물 기운이 어디선가 쑥 날아올지도 모를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