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을 통해서가 아니어도 우리는 일상에서 다양한 갑질을 목격한다. 식당에서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종업원에게 언성을 높이는 손님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손님 처지에서는 자신이 그렇게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손님이 반드시 부자거나 재벌 3세일 필요도 없고 ‘사회지도층’일 필요도 없다. 술에 취해 택시에서 난동을 부리고 택시기사를 폭행하는 손님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도 그런 갑질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 아니, 그런 합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그건 갑질이 아닐 수 있을 것이다.
기상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하거나 취소될 때 한국인의 대체적 반응은 외국(최소한 선진국) 사람들과 차이가 있다. 청주공항에 새롭게 취항한 중국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중국 여행을 가려 할 때의 일이다. 탑승시간이 지나도록 기다리던 승객들에게 비행기 운항이 결국 취소됐다는 안내가 방송됐다. 안개로 인해 비행기가 청주공항에 착륙할 수 없어서 취소됐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더구나 다른 비행기들이 착륙하고 이륙하는 것이 빤히 보여 사람들은 더욱 격렬하게 항의했다. 공항에 새로 취항하는 비행기는 이미 그 공항에 취항한 다른 항공사 비행기보다 시계거리(착륙할 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서 몇 배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되고, 항공기 안전을 위해 세계적 안전기준을 적용한다는 부연 설명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상사를 데려와라, 책임져라, 고객을 뭘로 보느냐 등 갖가지 항의를 하며 순간적으로 대책위원회(더 큰 보상을 받아내기 위한 협상위원회?)까지 만들어내 순발력을 보였다.
이렇듯 외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이 갑질을 한다고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를 찾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 안개를 어찌할 수도 없고, 세계 공통의 안전규정을 위반할 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결정권 없이 매뉴얼대로 따르는(사실 매뉴얼보다도 더 열심히 일할지도 모르는) 직원들에게 소리 지르는 모습이 땅콩회항 사건의 조현아 전 부사장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물론 한국인 중 위에서 언급한 일상의 갑질을 실제로 저지르는 사람이 다수는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누구나 매일 갑의 위치를 경험한다. 그래서 현재 한국 사회가 경험하는 갑을 관계의 문제는 ‘갑을 관계’ 자체가 아니라 ‘갑질’의 문제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갑질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한국 사회, 특히 언론은 마치 갑을 관계 자체가 문제인 양 담론을 이끌어가고 갑을 관계를 없애야 할 악의 축인 것처럼 논의한다.
그러나 갑을 관계를 없애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서비스 산업의 중요성이 커지는 산업구조 변화 추세에 발맞춰 강조되는, 서비스 산업 육성이라는 국가정책에도 맞지 않는다. 서비스업은 갑과 을이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을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든지, 아니면 (지나치거나 나쁜) 갑질은 하지 말라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갑을 관계 자체까지 부정적으로 강하게 표현한다고 이해해본다.
한국인의 수직적 집단주의
하지만 없앨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없애지 않을 것, 결국 없어지지 않을 것을 싸잡아 얘기하는 것은 길게 보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그런 의미에서 적절한 갑을 관계, 건전한 갑을 관계, 산업적으로 키울 갑을 관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처벌할 갑질의 범위를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합의를 이끌어내기에는 한국 사람들의 문화심리적 특성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갑을 관계의 내용과 정도는 그 사회 구성원의 문화심리적 특성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는 그냥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집단주의가 아닌 수직적 집단주의의 특성을 가졌다. 문화적 특성을 묘사하는 요인으로 ‘개인주의’ ‘집단주의’가 제시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요인으로 설명하기에는 각 나라의 문화적 차이가 너무 다양하다는 논란이 벌어졌다. 그래서 비교문화심리학자들은 ‘수평적’ ‘수직적’이라는 새로운 요인을 제안했다.

비뚤어진 인식 갑을 관계.<br>“밟고 올라야 살아남는다” vs “갑질 막아줄 우산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