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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의 리걸 에세이

판사에게 형량이란

검사·변호인 사이 중심 잡기

  • |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

판사에게 형량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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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사재판에서 최후변론은 검사와 변호인의 한판 줄다리기와 같다. 

    ‘공동체의 질서’를 중시하는 검사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변호인이 열과 성을 다해 변론을 펼칠 때 판사는
    ‘중립적 심판자’로서 합리적 형량을 정하고자 고심한다.
2014년 방영된 MBC 법률드라마 
‘개과천선’의 한 장면. [동아DB]

2014년 방영된 MBC 법률드라마 ‘개과천선’의 한 장면. [동아DB]

형사재판에서 증거조사 절차가 끝나면 검사와 변호인이 차례로 마지막 변론을 하는데 이를 ‘최후변론’이라 한다. 검사가 먼저 한다. 검사는 다른 때에는 변론을 앉아서 하더라도 최후변론만큼은 서서 한다. 보통은 짧게 구형만 한다.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 앞에 중요한 사정을 덧붙이기도 한다. “피고인이 피해자와 합의한 점을 고려해서 징역 2년을 구형합니다”라는 식이다.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다투는 사건이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서는 법정 드라마에 나오는 검사처럼 유죄 이유를 길게 설명하기도 한다. 

검사의 구형에 판사가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판사는 구형보다 낮은 형을 선고할 수도 있고 더 높은 형을 선고할 수도 있다. 나는 검사가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한 군납비리 사건에 대해 징역 3년을 선고해서 그 판결이 언론에 제법 크게 보도된 적도 있다. 장병들이 먹는 먹을거리에 대한 입찰에서, 관련 중소기업조합 이사장이던 피고인이 조합의 회원사들을 들러리 세우고 자기 처 명의의 회사가 손쉽게 낙찰되도록 조작한 것이었다. 이런 일이 심심찮게 벌어져왔기 때문에 장병들이 먹는 음식, 입는 옷의 품질이 민간의 것보다 조잡한 경우가 생긴다고 보았다.

판·검사의 양형 차이

그러나 이것은 이례적인 일이고 대개는 판사의 선고 형량이 검사의 구형량보다 낮다. 흔히 판사가 검사 구형의 절반 정도 선고한다는 말도 있다. 같은 피고인을 두고, 같은 법 교육을 받은 판사와 검사 사이에 왜 적정 형량에 대한 의견이 다른 것일까. 

그 첫째 이유는 판사의 중간자적 입장 때문이다. 판사는 검사와 변호인 사이에서 결정을 내린다. 줄다리기를 할 때 양측이 줄 양쪽 끝단을 힘껏 잡아당기면 한가운데 묶인 손수건은 양측 사이에서, 양측의 힘이 절충을 이루는 지점에 머물며 승패를 결정하게 된다. 형사재판에서의 양형도 검사와 변호사의 주장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결정된다. 여기서 검사는 공동체의 질서를, 변호인은 개인의 자유를 대변한다. 

검사가 대변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변호인이 대변하는 개인의 자유가 충돌하는 지점을 따라 형사법질서가 형성된다. 공동체의 질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반대로 특정 개인의 자유를 무한정 허용하면 공동체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며 불공평이 초래된다. 그래서 공동체의 질서와 개인의 자유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 법이라는 울타리를 쳐두고 그 울타리를 넘어서는지에 대한 최종 판단을 검사가 속한 정부도, 일반 민간인도 아닌 판사라는 중립적 심판자에게 맡겨놓은 것이다. 



둘째 이유는 같은 피고인이라도 판사가 만난 피고인과 검사가 만난 피고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누구에게나 똑같은 페르소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로서 훌륭한 사람이 직장에서는 비열한 동료가 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의리의 사나이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마찬가지로 같은 피고인이라도 검사가 만난 피고인은 요리조리 도망 다니거나 조사과정에서 발뺌을 하다가 비로소 자백한 얄미운 범인인 반면, 판사가 만난 피고인은 처음부터 죄를 인정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용서를 구하는 염치를 아는 사람일 수 있다. 물론 판사가 보는 사건 기록에 발뺌하던 피고인의 기존 행적과 태도가 기록되어 있지만 몇 줄의 건조한 문장을 읽는 것과 실제 그런 피고인을 만나서 직접 승강이를 벌인 것과는 다르다.

최후변론의 심리 싸움

셋째, 검사가 실제로 판사가 선고할 형량이 더 낮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보다 높은 형량을 구형할 때도 있다. 가령 징역 1년이 선고될 것을 예상하면서도 징역 2년을 구형하는 것이다. 이른바 ‘앵커링 효과’를 의도하는 것이다. 앵커링 효과는 행동경제학 용어로, 배가 닻(anchor)을 내리면 닻과 배를 연결한 밧줄 범위 내에서만 배가 움직일 수 있듯이 최초에 제시된 숫자가 기준점 구실을 해서 이후의 판단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말한다. 

검사가 이렇게 구형하는 것은 우선 앞서 말한 판사의 중간자 입장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즉 징역 1년이 선고될 것을 예상해서 검사가 징역 1년을 구형하면 결국 선고되는 형량은 징역 10개월 또는 8개월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또 한편 검찰이 보기에는 적정 형량보다 낮은 법원 선고 형량의 평균을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법원과 검찰이 제각기 양형 기준을 갈수록 정밀하게 설정하는 추세이므로 장기적으로는 법원과 검찰의 양형 기준의 간극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검사의 구형이 끝나면 변호인이 일어나서 최후변론을 한다. 변호인은 보통 검사보다 훨씬 더 길게 말한다. 변호인의 최후변론은 피고인이 자백하는 경우와 무죄를 다투는 경우가 크게 다르다. 자백하는 경우에는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흔히 ‘정상참작사유’나 ‘양형사유’라고 하는 사정들을 주장한다. 피고인과 피해자가 합의를 하고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거나, 피고인의 처지가 참으로 딱하다거나, 피고인이 초범이라거나, 피고인이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또는 너무 많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를 대면서 “존경하는 재판장님께서 이러한 사정을 참작하시어 최대한 선처해주시기 바랍니다”라며 ‘부탁’ 내지 ‘읍소’하는 어조로 변론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에는 변호인의 최후변론도 좀 더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치밀하다. 검사가 제시한 증거가 부족하다거나, 증인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검사가 전제로 하고 있는 논리가 상식에 벗어난다거나, 피고인에게 알리바이가 있다는 것 등을 주장하면서 피고인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판사에게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무죄 판결은 판사가 보기에 피고인에게 무죄라는 확신이 들 때가 아니라 피고인이 유죄라는 확신이 들지 않을 때 선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원에 전관예우가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관행적, 전반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한다. 가령 이전에 같은 법원에 근무한 선배나 동료 판사가 변호사로 법정에 들어왔다고 해서 당연히 그의 당사자에게 유리하게 판결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판결해주고 판사가 얻을 대가가 별로 없다. 뇌물을 받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고 판·검사가 변호사들과 빈번하게 만나서 밥과 술을 얻어먹는 시대도 끝난 지 오래다. 

그러나 판사에 따라서, 변호사와의 관계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전관예우가 전혀 없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판사의 판단이라는 것은 검은 법복에 감추어진 작은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서 그 판사가 어떤 동기에서 그러한 판단에 이르게 됐는지는 오로지 그 판사만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판결을 전관예우에 따라 한 것이라고 증명하기도 어렵고 그와 꼭 같은 이유로 전관예우가 아니라고 증명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한쪽에서는 지속적으로 전관예우가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전관예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다. 

분명한 점은 전관 변호사나 법조 브로커들 중에서 실제 존재하는 전관예우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전관예우가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방에 근무할 때 어느 변호사로부터 근무 시간에 전화를 받았는데 그는 뜬금없이 나에게 오늘 구속영장을 발부한 사건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았다. 내가 황당해서 “네? 그걸 왜 물어보시죠?” 하니 조만간 식사나 한번 모시겠다고 하고는 뚝 끊었다. 아마도 구속된 피고인의 가족이 그 변호사를 찾아갔는데 그 가족 앞에서 버젓이 나에게 통화를 해보인 모양이었다. 당시에는 경력도 짧고 눈치도 없어서 변호사가 그러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당했는데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나도 “지금 혹시 옆에 당사자가 있는 건 아니죠?”라고 받아치게 되었고, 그러고 나면 대개 다시는 그런 전화가 오지 않았다.

전관예우는 있는가

우리 사회에는 윤리 기준에 대한 이중 잣대가 곳곳에 존재한다. 사회적으로는 공사(公私)를 철저히 구분하는 엄정한 판·검사를 원하지만, 자기와 친분이 있는 판·검사에게는 적극적으로 청탁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그 판·검사가 막상 자기 사건을 냉정하게 처리하면 피도 눈물도 없다거나, 인간미가 없다거나, 예의가 없다면서 비난한다. 내가 초임 판사일 때 법원장님은 반듯하고 공정하고 인품도 높은 분이라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판사가 존경과 흠모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훗날 어느 사석에서 들으니 그 원장님이 집안 친척들 사이에서는 아주 인성이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집안 사건 청탁을 모두 거절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렇다 보니 가령 변호사가 판사와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로 지속적으로 동창 모임에 참석하는 사이라는 등의 친밀한 사적 인연이 있는 경우에는 판사도 그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든, 냉정하게 판단하든 간에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랬다. 나도 10여 년 판사 생활 동안 개인적 인연이 있는 변호사들 사건을 적지 않게 처리했다. 앞서 말한 검사 구형보다 두 배 높은 실형을 선고한 사건도 나와 인연이 깊은, 내가 존경하는 판사 출신 변호사 선배가 변호를 맡은 사건이었다. 존경하는 분이기에 이해해줄 것이라 믿는다. 

나의 사법연수원 시절 교수이던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가 맡은 사건도 기억이 오래간다. 전과 많은 필로폰 사범이라 통상 1년 6월 안팎의 징역형에 처했을 사안이었다. 그런데 피고인이 간암 말기였다. 살날이 6개월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변호인은 여생을 가족과 보낼 수 있도록 선처해달라고 요청했다. 변호인이 나와 개인적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어느 정도의 형을 선고했을지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완벽한 가정적 상상이 불가능했다. 유사한 마약 사범 중에서 말기암 피고인인 선례도 찾기 어려웠다. 판결 선고하는 아침까지 형량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징역 10월을 선고했는데 피고인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다. 법정에서 돌아오면서 그 변호인이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에 철없이 좌충우돌하던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10여 년 판사 생활 동안 내 판단력이 모자라서 오판이나 아쉬운 판단을 한 것은 부지기수이겠지만 적어도 뇌물이나 부정한 청탁을 받고 해서는 안 되는 판결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한 사건만은 아직까지도 과연 내가 그때 좋은 결정을 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 마음이 불편해질 때가 있다.

잊을 수 없는 판결

그것은 도박이 가능한 성인오락실을 운영한 범인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된 사건이었다. 기존에도 이런 사건이 두 차례 있었는데 두 차례 모두 영장을 발부했다. 도망 우려나 증거인멸 우려와 같은 구속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동료이자 선배인 판사가 그와 같은 종류의 사건에 대해서 구속영장을 지속적으로 발부해오고 있었고, 나는 당시 형사단독을 처음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내 판단에 자신이 없어서 선례를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1년쯤 뒤에 그동안 같은 법원에서 일하던 선배 판사가 변호사 개업을 하자마자 어느 성인오락실 관련 사건을 수임한 후 법정에 나와서 구속영장이 기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도 이미 증거가 다 확보돼 있고 피의자가 자백하고 있어서 증거인멸 우려나 도주 우려 등 구속사유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문제는 좀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기존에는 내가 두 차례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는 것이었다. 발부하자니 소신에 반하고, 기각하자니 전관예우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그 두 차례 구속영장을 기각했었어야 했다. 결국 나는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때의 내 판단이 옳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판단이 있은 뒤로는 훨씬 더 신중하게, 그리고 남이 아닌 내 판단을 내리고자 애쓰게 되었다.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 유고유엔국제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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