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식이는 은행에서 1억원을 연리 12%로 빌리고 이자는 매월 1일에 내기로 했다. 이자를 연체할 경우 연체이자는 연 24%. 그런데 2010년 5월1일은 토요일, 5월2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삼식이가 5월4일 화요일에야 이자를 내러 은행에 갔다면 삼식이는 며칠치의 연체이자를 내야 할까?
우리나라의 주택담보대출 총액은 2009년 9월 기준 341조원이 넘었고 가구당 평균 주택담보대출금은 2400만원가량이라고 하니 집 가지고 있는 사람치고 담보대출 없는 사람이 없지 않을 듯싶다. 이쯤 되면 은행이자 계산법 정도는 전 국민의 상식이 되어 있을 법도 한데 주위에 물어보면 대부분이 이자나 연체이자 계산법에 대해 무관심하다.
푼돈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 푼돈을 전국 단위로 합산하면 연간 수십억원이라는 큰돈이 된다. 다소 골치 아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활 주변의 작은 것부터 꼼꼼히 챙긴다는 의미에서 첫 번째 주제를 이자 계산법으로 골랐다.
우리 민법 제161조는 기간(期間)의 마지막 날이 토요일이나 공휴일이면 그 기간은 공휴일 다음날에 만료한다고 정하고 있다. 빌린 돈의 변제기, 이자의 납기는 모두 기간에 해당하므로 민법 제161조에 따라 그 기간의 마지막 날이 토요일이나 공휴일인 경우에는 공휴일의 다음날 그 기간이 만료한다.
기간 만료 여부는 보통의 이자율이 적용되느냐, 연체이자율이 적용되느냐의 기준이 되고 보통은 연체이자율이 통상적인 이자율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만료일을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은행에 내야 하는 돈의 액수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채무자의 기한의 이익이 부당하게 상실되어 채권자인 은행이 대출기간 내 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게 되고, 연체기간 역시 부당하게 늘어나 억울하게 신용불량자가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삼식이의 경우를 보자. 삼식이의 2010년 4월분 이자의 납기인 5월1일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삼식이의 이자납기는 월요일인 5월3일에 만료한다. 그러므로 삼식이가 5월3일 이자를 낸다면 4월분 이자에 5월3일까지의 연 12%의 이자를 더해 내면 된다. 그런데 삼식이가 하루 늦은 5월4일에 이자를 냈다면 하루치 연체이자만 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민법이 정한 연체이자 계산법이다.
◆ 민법 제161조
(공휴일 등과 기간의 만료점)
기간의 말일이 토요일 또는 공휴일에 해당한 때에는 기간은 그 익일로 만료한다.
민법 규정도 무시하는 은행들
그런데 놀랍게도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금융기관들은 이 기본적인 민법 규정을 무시해왔다. 즉 위와 같은 예에서 삼식이는 하루치가 아니라 5월2일부터 5월4일까지 3일치 이자에 대해 연체이자율을 적용해 내야 했던 것이다. 삼식이는 원칙대로라면 약 6만6000원을 내면 되는 것을 무려 19만8000원의 연체이자를 내야 했다.
최근 언론보도에 의하면 금융감독원은 국내 금융기관들이 이러한 수법으로 지난 5년간 부당하게 징수한 이자가 125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금융감독원은 상사 소멸 시효인 5년간의 부당징수액만을 계산했기 때문에 과거 수십년간 은행들이 부당하게 받아간 돈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돈 계산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집단인 은행이 그동안 이러한 문제를 몰랐다고 항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가 있음을 뻔히 알고도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부당하게 이득을 챙겨왔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도둑놈 심보’라 해도 할 말 없게 됐다.
더 한심한 것은 은행이나 금융감독원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잘못을 시정한 게 아니라 모 시중은행이 고객이 제기한 부당 연체이자 반환소송에서 패소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소송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판결까지 간 것을 보면 은행이 원고의 주장에 승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것으로 보인다.
옳지 않은 관행에 대해 대형 은행을 상대로 포기하지 않고 싸워 이겨 자신 외에 수많은 피해자의 권리를 찾게 해준 이름 모를 원고에게 경의를 표한다.
2 소멸 시효
금융감독원은 상사 소멸 시효를 들어 과거 5년치의 피해액만을 돌려주라고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소멸 시효에 대해 간단히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소멸 시효는 일정한 기간 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때 그 권리가 소멸된 것으로 보는 제도다.
자기 재산에 관한 권리를 행사하든 말든 그것은 권리자의 자유에 속하는 것인데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권리가 소멸된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소멸 시효 제도는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되지 않는다’라는 서양의 오래된 관습에 따라 입법화된 제도로서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권리자보다 행사되지 않는 권리를 기초로 형성된 사회질서를 우선해 보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소멸 시효 제도가 존속하는 한 ‘내 권리는 내 마음대로 행사한다’는 생각은 다소 수정되는 것이 옳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 동안 권리 행사를 하지 않으면 권리가 소멸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일까.
# 채권의 소멸 시효
10년(민법 162조) : 일반적인 채권의 소멸 시효는 10년이다. 여기서 ‘일반적인 채권’이라 함은, 순이 엄마가 돌이 엄마에게 돈을 빌려준 경우와 같이 개인과 개인 사이에 발생한 채권을 말한다. 순이 엄마가 은행에서 돈을 빌린 경우에는 일반 채권이 아니라 상사 채권이 되어 5년의 소멸 시효가 적용된다.
그리고 아래에서 보는 5년, 3년 또는 1년짜리 단기 소멸 시효에 걸리는 채권이라도 그 채권이 소송을 통해 판결로 확정된 경우에는 판결이 확정된 날로부터 10년의 소멸 시효가 다시 진행된다.
5년(상법 64조) : 상사 채권의 경우 5년의 소멸 시효에 걸린다. 여기서 말하는 ‘상사 채권’은 상거래에서 발생한 채권을 말하는데 거래 당사자 중 한쪽이 상인이면 상사 채권에 해당된다. 요즘은 개인 간 돈거래보다는 대부분 금융회사와의 돈거래가 많기 때문에 돈거래에서 민사 채권이 오히려 예외가 된 듯하다.
여기서 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상사 채권 중에서도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생활밀착형 채권은 5년보다 더 짧은 3년 또는 1년짜리 소멸시효가 적용된다는 점이다. 장난하는 것이냐고 묻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필자에게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현행 민법이 이러하므로 어쩔 도리가 없다. 조금만 더 읽어보시기 바란다.
3년(민법 163조) : 이자, 임금, 각종 물건의 사용료 채권은 3년의 소멸시효에 걸린다. 또 아파트 관리비, 부동산 월세 등 1년 이내의 기간으로 정해 내기로 한 채권의 소멸 시효도 3년이다.
이뿐만 아니다. 의사나 약사가 치료 또는 조제를 하고 갖게 된 채권, 공사를 도급받은 자가 공사에 관해 갖는 채권, 변호사·변리사·공인회계사 및 법무사가 직무에 관해 갖는 채권, 생산자 및 상인이 판매한 생산물 및 상품의 대가, 제조자의 업무에 관한 채권이 모두 3년의 소멸 시효에 걸린다.
앞에서 상사 채권은 5년의 소멸 시효가 적용된다고 했는데 상인이 판매한 상품의 대가는 3년의 소멸 시효에 걸린다니 소멸 시효 규정은 정말 헷갈릴 만하다.
1년(민법 164조) : 여관이나 음식점 등의 숙박료, 음식료 채권, 의복·침구 등의 사용료 채권, 연예인의 임금과 연예인에게 공급한 물건의 대금채권, 학생의 교육에 관한 학교 또는 교사의 채권은 1년의 초단기 소멸 시효에 걸린다. 그러니까 외상으로 먹은 술값은 1년의 소멸 시효가 적용되는 것이다. 술집 주인들은 외상 술값 회수에 너무 여유를 갖지 않는 것이 좋다.
# 금융회사의 소멸 시효 주장, 타당한가?
금융감독원은 상사 소멸 시효가 5년이므로 5년치의 부당이득금을 고객들에게 돌려주라고 지도했다고 한다.
1973년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는 중에 숨진 최종길 전 서울대 교수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금청구소송에서, 2004년 2월14일 서울고등법원은 “국가가 소멸 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원칙에 어긋나므로 허용될 수 없다”며 국가는 원고에게 18억여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 외에도 다수의 판례에서 우리 법원은 과거 군사정권이 강제로 사유재산을 강탈한 경우 국가가 소멸 시효를 주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법원 판결은 이번 사례에도 중요한 참고사항이 될 수 있다. 돈에 관한 한 한 치의 빈틈이 없는 금융회사가 민법상 기간을 잘못 계산한 것은 다분히 고의적인 위법행위인데도, 그렇게 부당한 이득을 취한 금융회사가 고객의 무지를 탓하며 소멸 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또 금융회사들이 이 같은 부당이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을 감독해야 할 금융감독원이 감독을 소홀히 한 것도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원인을 일부 제공한 금융감독원이 나서서, 그것도 단기 시효인 상사 시효 5년을 운운하는 것은 대단히 부절적하고도 부도덕한 처사다.
사실 필자는 2년 전부터 금융회사들의 이자 부과 행태에 법률적인 문제가 있음을 주목하고 법적 대응책을 찾던 중이었다. 다행히 한 선각자의 용기로 인해 필자의 수고를 덜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금융회사들이 스스로 잘못을 고치지 않고 있다가 금융감독원의 지도를 받은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느끼며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법이라는 것이 아는 자에게는 모르는 사람의 등을 치는 수단으로, 일반인에게는 몰라서 당하는 설움을 주는 ‘횡포’의 다른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자신을 지키는 수단은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는 원론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독자께 든든한 방어수단을 돌려드리기 위해 앞으로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