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동양학
어렵고 고리타분한 학문 아냐
한중일 舊怨 극복이 관건
자국 문제 해결엔 주관 배제해야
인문 분야 진흥은 국가 생존 위한 문제
이재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원장은 8월 9일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동양학은 낡고 고루한 학문이 아니라 한국의 현재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역설했다. [김도균 객원기자]
8월 9일 경기 용인시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이하 동양학연구원)에서 만난 이재령(61) 원장의 말이다. 이 원장은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2년 동양학연구원의 전신인 동양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시작해 연구실장, 연구교수를 지내며 동양학 연구에 힘썼다. 중국 근현대사 전문가다. 지식인·교육·언론 분야를 주로 연구했다. 단국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한중관계 연구소장을 겸하고 있다. 동양사학회, 중국근현대사학회 등에서도 활동했다. 올해 3월 동양학연구원 16대 원장이 됐다.
이 원장은 “동양학연구원은 황무지와 같던 한국 동양학계에 꽃을 피운 씨앗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동양학연구원은 국제적으로 전통과 명망 있는 연구기관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 9월 28일 당시 장충식 총장(현 명예이사장)의 발의로 한국 문화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됐다. 연구실·편찬실·번역실 3실로 구성됐으며 산하에 역사문화연구소, 한중관계연구소,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소를 뒀다.
2008년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은 총 16권에 달하는 한한대사전 편찬을 완료했다. 한한대사전은 세계 최대 규모의 한자 사전이다. [동양학연구원]
이외에도 매년 국내외 석학이 참여하는 동양학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등 학술 교류에 힘쓰고 있다. 학술지 ‘동양학’과 연구·번역과제 수행 결과를 담은 ‘동양학총서’ ‘동양학연구총서’ ‘동양학학술총서’ ‘동양학문화총서’ ‘동양학번역총서’ ‘사전학총서’ ‘동아시아문명교류사 시리즈’ 등을 발간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번역본도 빼놓을 수 없다. 국내 번역본 중 가장 원본에 가깝다.
이재령 원장은 인터뷰하는 동안 동양학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동양학은 ‘중국학’이 아니다. 주변국과의 관계를 통해 한국의 정체성을 찾는 학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 사회의 지식권력 형성 과정을 보면 한국 사회의 지식권력 역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동양학연구원이 낸 성과에 자부심을 보이면서도 갈수록 어려워지는 연구 환경에 대해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 원장은 “단국대는 부도 위기를 맞으면서도 동양학연구원 사업에 300억 원을 투자했다. 작금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대학·연구소가 얼마나 있겠나. 국가 차원의 지원책을 마련해야 하지만 갈수록 ‘암흑’”이라고 역설했다.
한국학, 동양학으로 확대돼야
2017년 3월 19일 중국 톈진에서 단국대 동양학연구원과 중국 난카이대학이 공동 국제학술회의를 마치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동양학연구원은 동양학 연구 활성화를 위해 활발히 국제 학술 교류를 진행한다. [동양학연구원]
“한마디로 말하자면 언어·역사·사상·문화 등 한국인의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한국학’이라 하면 인문학적 범주에 제한돼 과거의 전통, 조상의 삶을 연구하는 데에 편중된 경향이 강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한국학이 되려면 과거를 연구할 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현재의 문제도 연구해야 하죠. 하지만 학문이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쪼개지다 보니 이는 사회·정치·외교학 등에서 다뤄지고 있죠. 그렇다고 사회과학 분야에 국한돼서도 안 되는 것이, 사회과학은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에 접근할 뿐 정답을 내리진 않거든요. 따라서 한국학은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통합해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학문이 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지역학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아시아학, 즉 동양학입니다.”
동아시아는 한자 문화권에 속합니다. 동양학은 실질적으로 ‘중국학’과 다름없다는 시각이 있는데.
“오해입니다. 동양학연구원이 발행하는 학술지 ‘동양학’만 봐도 선비족의 언어나 몽골어, 만주어 등을 연구하고 있거든요. 중국학에 국한된 게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을 아우르는 것이죠. 이 역시 동양학연구원의 설립 목적과도 연결되는데, 한국을 중심으로 놓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한국학을 더 튼실하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한국학과 동양학의 연결고리는 무엇입니까.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조건과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순 없습니다. 대륙문화, 해양 문화로부터 모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수용할 수 있음과 동시에 어느 쪽으로든지 쉽게 종속돼 버릴 수 있기도 하죠. 따라서 한국의 문제는 한국의 것만을 연구해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동양학을 익힘으로써 좀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문제 해결 방식에 접근할 수 있죠.”
동양학에 대한 오해가 더 있습니까.
“어렵고 고리타분한, 과거의 학문이라는 인식입니다. 고루해서 극복해야 할 과거의 유산처럼 여기고요. 더 큰 문제는 왠지 신비롭게, 비과학적으로 보는 시각이에요. 한때 주역, 역술 등에 대한 연구가 유행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동양학의 본질은 이런 것이 아니라 한문 텍스트를 통한 불교·유교 등 동아시아의 사유체계 연구와 분석입니다. 이를 통해 아시아 문화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죠.”
동양학 연구로 종속의식 벗어나
이재령 원장은 이 대목에서 ‘동양학의 세계화’를 말하며 동아시아 안에서의 교류부터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동양학국제학술회의는 이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1971년 시작됐다. 2010년부터는 ‘동아시아 문명교류’를 대주제로 해 한중일 문명교류사에 대해 논했다. 2018년부터는 10개년 계획으로 ‘동과 서, 문화의 교류와 경계’를 대주제로 논의 영역을 확장했다. 이 원장은 “동양학 연구를 통한 동아시아 정체성 확립으로 세계사의 한 범주 안에서 동아시아 지역학의 틀을 정형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동양학 연구에서 국제 학술 교류는 어떤 의의가 있습니까.
“코로나 팬데믹 이전엔 해외 교류를 참 활발히 했습니다. 중국,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 미국 등 서구 국가와도 협업했죠. 얻어낸 성과물이라 한다면, 대개 한국에서 ‘중국’ 하면 ‘대국’을 떠올립니다. 또 중화 의식의 영향을 받아 오랜 기간 중국은 우월한 국가, 한국은 종속된 국가라는 인식이 생겨 있었죠.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20세기 이후 한중관계는 우열에서 연대로 변화했습니다. 일제강점 시기엔 함께 공동 항일이라는 역사적 유산도 남겼죠. 이러한 인식 변화가 모두 학술 교류를 통한 동양학 연구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중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상호 동등에 입각한 관계가 강화됐고, 이는 점차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동양학 연구의 변화상은 어떻습니까.
“연구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직접적인 대외 교류는 대부분 멈춘 상태죠. 학문적 교류 분야에선 인적 접촉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구자 내면에 깔려 있는 ‘들숨’과 ‘날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직접 만나야 하거든요. 화상으로는 느낄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깊이 있는 학문 연구가 어렵습니다. 현상 유지만 할 뿐 학문적 진보는 불가능했어요.”
타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동양학 연구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합니까.
“근대 이전에는 일방적으로 중국의 문자와 학문을 그대로 적용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근현대 시기에 접어들며 변화가 시작됐죠. 이 당시 동양학이라는 것은 서양 학문의 유입을 특징으로 합니다. 당시 동아시아는 제국주의 깃발 아래 식민화됐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서구화에 급급했습니다. 일본이 가장 앞섰던 게 사실이죠. 중국, 한국은 일본을 통해 한 차례 ‘일본화’된 서양을 재번역해 수용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와는 상이한 서양의 학문·문화를 받아들여야 했죠. 1980년대 중반부터 서양의 것을 ‘직수입’하게 됩니다. 이때부터야 한국은 중역(重譯)을 거치지 않은 나름의 시각으로 일본과 중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거죠. 마치 유럽이 그리스·로마 문화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동아시아는 한자 문화권이라는 공동의 문화와 불교·유교라는 공통 사유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을 겪었기에 더더욱 제3자적인, 객관적 시각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동양학은 자국사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의미한 학문이었고, 1990년대부턴 학계의 새로운 화두가 됐습니다.”
한국, 중국, 일본은 수많은 구원(舊怨)으로 얽혀 있습니다. 동양학 연구에 장애로 작용하지는 않습니까.
“장애가 됩니다. 학자 간의 학술적 대립이라기보다는 정치 때문이죠. 현실 정치에선 과거의 사실 중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할 것인가, 즉 기억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권력 집단에 의해 좌우되죠. 학문은 집권 세력의 지향에 따라 영향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민족주의나 국수주의가 심화되면 올바른 동양학 연구를 할 수 없죠. 현재 중국의 대국 지향주의나 일본의 제국주의 시대로의 회귀 양상, 한국의 뉴라이트와 같은 ‘자학(自虐)사관’은 정치권력과 연계돼 동양학 발전을 저해합니다.”
한국 지식권력 자기검열에 스스로 발목 잡혀
권력 집단의 의지가 학문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자연스레 집단의 ‘지식권력’ 형성으로 옮겨갔다.중국 근현대사 전문가로서 중국의 지식권력 형성 양상에 대해 어떻게 바라봅니까.
“지식권력 형성과 확산 과정을 본다면 크게 선교, 번역, 유학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서양의 근대 지식을 유입하는 통로가 됐죠. 명(明)시대에 선교사를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청(靑)말기엔 서양의 책이 활발히 번역됐습니다. 서양으로 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의 경험도 큰 영향을 미쳤고요.”
각 요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선교에 의한 지식 유입은 지극히 단선적입니다. 1920년대 중국에서 대대적인 반(反)기독교 운동이 벌어지면서 제약이 심해졌으니까요. 하지만 선교사를 통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이 중국 근대 지식의 모태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번역 작업의 특징은 ‘의역(意譯)’입니다. 앞서 말했듯 초기 번역 작업은 일본에서 한 번 번역된 서양의 지식을 재번역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번역가들은 스스로의 자유도를 높이기 위해 의역을 택했어요. 원문을 그대로 살리기보다는 중국식 사고방식을 반영해 특유의 근대 지식을 형성했죠. 1900년을 넘어설 때부턴 유럽과 미국을 다녀온 유학생이 급증합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서양 조기 유학을 통해 근대 역군을 만든다는 ‘유미유동(留美幼童)’ 운동이 전개되고, 중국 근대화의 맹아(萌芽)가 됩니다.”
이재령 원장은 중국의 본격적인 지식권력 형성 시기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무너진 이후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인 중화민국이 세워지지만 당시 총통이던 위안스카이가 제제(帝制)운동을 통해 군주제 복귀를 시도합니다. 혁명이 성공했음에도 공화정 수립이 실패할 위기를 맞이하자 중국의 젊은이와 지식인 중심으로 근대 지식에 대한 열망이 폭발하게 됩니다. ‘지도부만 바꿔서는 안 된다, 의식을 바꿔야만 진짜 혁명이다’라는 인식이 퍼져 신문화운동(1916년 베이징대를 중심으로 시작된 지적 혁명운동부터 1921년까지 일어난 모든 사상적·문화적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를 주도한 세력이 주류가 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천두슈(陳獨秀)·리다자오(李大釗)·타오싱즈(陶行知)를 꼽을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이후 이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중심으로서 정치 세력화되거나 교육·과학 영역으로 나아가 학계의 중추가 됩니다. 현 중국의 지식권력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죠.”
이재령 원장은 “중국의 지식권력은 문화대혁명, 천안문 사건 등 국가 탄압에 의한 자기 검열 경향이 강하다. 한국의 경우도 유사하다”고 했다. 사진은 홍위병에게 지침을 내리는 마오쩌둥을 그린 문화대혁명 당시 포스터. [동아DB]
“조심스러운 문제네요(웃음). 중국의 지식권력부터 좀 더 이야기하자면, 공산당이 지배하게 되면서 백가쟁명 운동,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천안문 사건 등 끊임없이 지식인에 대한 검증이 이뤄졌습니다. 마음껏 자신의 지식을 발산하라고 해놓곤 결국 핍박했죠. 1970년 대 이후 개혁·개방 시기를 거치며 외형적으로는 자유로운 풍토가 형성됐다곤 하지만 그러한 전례로 중국 지식인은 자기검열에 철저합니다. 강요당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도록 체화한 거죠. 한국도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쳤고, 광복이 된 이후엔 냉전 질서 속에 선택을 강요받았어요. 반공 이데올로기가 절대 기준이 될 수밖에 없던 현실을 마주해야 했죠. 사회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국의 지식권력은 편협하게 한길로만 걷게 됐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지식권력은 자기검열에 스스로 발목을 잡혔다고 봅니다. 물론 1990년대 이후부터 한국 사회의 지적 풍토가 자유롭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현실은 녹록지 않죠. 색깔론만 봐도 어느 지식인이 ‘나는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과제 중심 연구에서 탈피해야
학문 연구에 어려움을 끼치는 건 권력 집단만이 아니다. 동양학은 인문학의 한 갈래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 이래 20년 넘게 지속되는 인문학 위기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성과’와 ‘생산성’이 평가 기준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된 환경에서 동양학 연구는 점점 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경제적·사회적으로 인문 분야 연구의 어려움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가장 힘든 점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동양학도 해당되는 문제인데, 현재 한국 인문학은 국가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자연스레 국가로부터 실적을 평가받고 요구 기준을 맞춰야하는데, 그러다 보니 연구비 수주를 위한 과제 중심의 연구가 ‘지향점’이 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장기간 천착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죠. 정치적 이슈에 따라 조변석개하는 국가 정서도 문제입니다. 중국을 예로 들자면 ‘애국주의’라는 기치 아래 모든 학문적 자유를 뭉개버리거든요. 일본 역시 자민당 치하에서 과거사 정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내각 구성에 따라 방침을 수시로 바꾸죠. 연구자로서는 그러한 풍파에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치권력의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의도로 인문학을 육성하고 지원해야 하지만 금액 자체도 적을뿐더러 제약도 많은 상황이죠. 국가가 ‘어젠다’를 던져주고 이외에는 연구하기 어려운 환경을 개선해 주지 않으니 대학은 국가 의지에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직한 동양학 활성화 방향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강조하건대 한국의 문제를 한국만의 관점으로 바라봐서는 결코 답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국과 함께하는 주변국과의 현실 문제를 함께 고려해야죠. 역사든 학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뿌리를 중심으로 보되 주관성을 배제해야 합니다. 인문학, 사회과학 등으로 학문을 분절할 것이 아니라 통섭을 통해 함께 연구함으로써 국가가 제시하는 것이 아닌, 현실 문제에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양학연구원 원장으로서 한국학·동양학을 연구하는 기관과 인력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1970년대와 1980년대 국가 주도 프로젝트가 지금처럼 쏟아지기 전에는 각 대학과 연구소마다 고유의 색깔이 있었습니다. 동양학연구원의 경우 번역 작업과 사전 편찬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았습니다. 성균관대는 유학을 근간으로 해서 세워진 학교이기에 유교 경전 분야에 특화돼 있었고, 고려대는 민족문화연구원 등을 통해 사회과학 분야에 강점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 이후 국가 프로젝트 중심으로 연구 기조가 바뀌면서 이러한 개성이 엷어졌습니다. 이것이 국가경쟁력에 도움이 될까요. 인문학이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처럼 된다면 이는 ‘인문학의 죽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문학 연구소와 연구자가 인문학의 존재가치와 비전에 대해 발상의 대전환을 이뤄내야 하는 시기예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프로젝트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인류 문화의 공존과 번영 등 진정 인문학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학문의 외연을 넓히고 인적 구성과 연구 방향도 쇄신해야죠. 국가 차원의 각성도 필요합니다. 인문학은 ‘어쩔 수 없이’ 지원해야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국가 생존과 학문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라는 인식으로 접근해 지원책을 마련해 주면 좋겠습니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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