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고 재미없는 사과라고?
2020년 ‘사흘’ 2021년 ‘금일’
언어가 가지는 권력과 위계
무지함에 대한 인정 필요한 때
서울 마포구 한 카페가 8월 20일 올린 공지문에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이 있다. [트위터]
8월 20일 서울의 한 카페가 올린 공지문이다. 해당 장소를 대관해 치러질 예정이던 웹툰 작가 사인회가 취소돼 사과한 것이다.
이 통상적 문구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발칵 뒤집었다. 불이 처음 붙은 곳은 트위터다. 문제의 공지가 올라온 SNS였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반응이 쏟아졌다.
“심심한 사과? ** 난 하나도 안 심심해 지금 어 ** 재밌어^^ 니네 대응이 아주 *같게 재밌다^^ ㅎㅎㅎ 그러고 끝이냐 **?” “심심한 사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심이라면에 이어 심심한 사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앞으로 공지 글은 생각 있는 사람이 올리는 게 어떨까요 ㅎㅎ”
‘심심한 사과’ 논란이 불거진 뒤인 8월 21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가 다시 올린 공지문. 이번에는 ‘진심으로 사과’라는 표현을 썼다. [트위터]
이 사안에 대한 대응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논의될 수 있다. 첫째, 이 문제 핵심은 ‘무식함’에 있다. 한자를 가르치고 문해력 교육을 강화하는 등의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둘째, ‘심심한 사과’에 반발한 누리꾼을 탓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낯선 한자어를 일부러 섞어 쓰는 사람이야말로 모종의 엘리트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셋째, 이 일은 단순한 무식과 유식, 지식 권력과 엘리트주의 같은 차원을 넘어 ‘앎과 모름’에 대한 근원적 고찰을 요구하는 사안이다.
‘금일’ ‘작일’ ‘명일’
8월 2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국무회의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은 안건 중 ‘디지털 인재 종합 양성 방안’을 언급하며 “전 세대에 걸쳐 디지털 문해력을 높일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들도 체계적으로 제공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문해력을 ‘낮추자’는 것이 국무회의 주제나 결론일 수는 없으니 관점에 따라서는 그냥 뻔한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저 말이 나온 맥락이다. 콕 짚어서 ‘문해력’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대통령이 ‘심심한 사과’ 논란을 우회적으로 지적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할 듯하다.이 발언은 ‘심심한 사과’ 논란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루 지지받는 첫 번째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한자 교육을 등한시하면서 특히 젊은이들의 어휘력이 떨어졌으며, 그것을 문제로 바라보고 해결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어휘력 논란은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다. 2020년으로 돌아가 보자. 정부는 8월 17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했다. 8월 15일 광복절이 토요일이므로 월요일인 17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함으로써 3일에 걸쳐 이어지는 연휴를 즐기게 하겠다는 배려 차원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정책이 발표되자 일부 누리꾼이 보인 반응이다. “3일 연휴인데 왜 사흘이냐”며 ‘기레기’가 오보를 냈다는 반발이 등장했다. 물론 사흘은 ‘4흘’이 아니라 3일이며, 4일에 해당하는 표현은 ‘나흘’이다.
이듬해인 2021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금일’ 논란도 비슷하다. 한 대학교수와 학생이 나눈 카카오톡 대화를 캡처한 이미지가 논란의 시발점이다. 교수가 ‘어제 자정 이후로 과제물을 제출하면 하루에 과제점수가 20점씩 깎인다’고 하자, 학생이 되묻는다. “과제 제출 금요일까지 아니에요? 금일 자정까지라고 하셨는데.” 문제는 “금일은 오늘이라는 뜻입니다. (...) 금요일이 아니에요”라는 교수 설명에 대한 학생의 반응이었다. “학생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으시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저 말고도 금요일이라 이해하신 분들 분명 있을 텐데 제 말이 틀렸나요?”
이런 논란 덕분에 잘 알려진 것처럼 사흘은 ‘4흘’이 아니라 3일이라는 뜻이다. 4일에 해당하는 우리말 표현은 ‘나흘’이다. ‘금일’은 금요일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뜻이며 한자로 ‘今日’이라고 쓴다. 어제는 ‘작일’(昨日), 내일은 ‘명일’(明日)이다. 이 외에도 한자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단어와 숙어, 표현 등에 있어서 청년층 이해도가 낮은 경우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한다.
앞서 말했듯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 자체를 문제로 여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학교에서 한자를 더 가르쳐야 한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글 전용 표기 정책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대통령의 ‘문해력 증진’ 발언은 그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어 단어의 80%가량이 한자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자를 잘 모른다면 고급 한국어를 구사할 때 곤란한 일을 겪기 십상이다. 대한민국은 국민들의 지식과 교양 수준을 높이고 언어생활을 풍성하게 가꾸어나갈 의무가 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로 이어지는 날짜 세는 법, ‘금일’ 같은 초보적 한자어, 더 나아가 ‘심심한 사과’ 같은 약간의 격식 있는 표현이 국민 상당수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언어가 가지는 권력과 위계
이러한 관점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 무지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식함’이 곧 권력이 되고 고압적 태도가 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주로 진보 성향 언론을 통해 등장하는 견해인데, ‘신동아’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으므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보도록 하겠다.‘심심한 사과’라는 문구를 듣고 오해한 이들의 편에 서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우선, 다양한 어휘를 습득해 정교하고 복잡한 언어생활을 하는 것 자체는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깊은 사과’라고 해도 되는 맥락에서 굳이 ‘심심한’이라는 한자어 표현을 쓰는 행위를 전적으로 두둔하기도 어렵다. 만화가 김태권은 경향신문 8월 26일자에 기고한 ‘존중하되 두려운, 변화’라는 글에서, 조지 오웰의 ‘정치와 영어’라는 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논지를 전개한다.
“‘심심한 사과’ ‘우려’ ‘유감’ ‘통석의 념’처럼 지나치게 품격 넘치는 말은 ‘우리가 잘못했다’는 말을 하기 싫을 때 쓰는 말일 수 있다. 이도저도 아닌 상황을 만들고 싶을 때 일부러 어정뜬 말을 쓴다. ‘정치적 언어는 거짓을 사실처럼 만들기 위해 고안된다’고 조지 오웰은 말했다. 자기도 남도 헛갈리게 하려고 글을 꼬아 쓴다는 거다.”
김태권은 문제의 카페 사장이 ‘사과하기 싫었는데 사과문을 썼다’고 단정 짓는 게 아니다. 다만, 맥락에 맞지 않게 품격 있는 한자 어휘를 쓰는 행위가 일으키는 효과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어휘력 향상’이나 ‘문해력 증진’ 등이 부정할 수 없는 당위적 힘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김태권의 주장에도 곱씹어볼만한 측면이 존재한다.
개인적 경험을 예로 들어보겠다. 필자가 처음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 교과서를 펼친 2001년, 당시까지만 해도 법학 교과서는 별도로 음을 적어두지도 않고 곧장 한자를 병기할 때가 많았다. 게다가 거의 사어가 되다시피 한 한자 단어는 한층 더 읽기가 곤란했다. 가령 내가 처음 읽은 민법총칙 교과서 저자는 스위스를 서서(瑞西)로, 오스트리아를 오지리(墺地利)로 표기했다.
분명 ‘심심한 사과’나 ‘금일’은 ‘서서’나 ‘오지리’처럼 머나먼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한자어가 아니지만 우리가 ‘격식’을 갖추려고 할 때, 평상시 입말과 다른 표현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낄 때 택하는 종류의 단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때로 예절바른 행동이 될 수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예의와 격식을 빙자한 공격이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카페 주인이 쓴 공지문에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을 비난하는 이들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공지문에는 잘못된 게 없다. 그럼에도 언어가 가지는 권력과 위계의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가 좀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턱대고 어휘력을 키워야 한다며 사람을 다그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적’으로 목숨 잃은 소크라테스
‘심심한 사과’ 논란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문제의 본질은 결국 ‘권력’이다. 위에서 인용한 김태권 같은 이는 짐짓 어렵고 복잡한 단어를 써가며 남을 우롱하는 행동이 권력자의 그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내가 잘 모르면서도 당당하게 화낼 권리’를 주장하는 것 역시 일종의 권력이다. 온라인에서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억압하는 것이 일상화한 대중독재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다.무언가 배우고자 한다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즉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해야 진정한 배움이 가능해진다. 고대 그리스 델포이 신전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를 떠올려 보자. 신 앞에서 한낱 인간인, 아는 게 없고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서 스스로를 깨달으라는 소리다. 그래야 신탁을 통해 내려오는 지식과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자신의 무지를 언제나 겸허히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가 델포이 신전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인정받은 것도 그래서다.
‘심심한 사과’ ‘금일’ ‘사흘’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의 현실이 정반대로 향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저 정도로 간단한 어휘라면 클릭과 스크롤 몇 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는 대신, 내게 친숙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며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누군가를 응징하려 든다. 청년들을 현혹시킨 죄를 지었다며 ‘민주적’으로 재판당하고 목숨을 잃은 소크라테스를 문득 떠올릴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구성원이 스스로의 무지와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더 나은 지식과 교양을 추구할 때만 온전히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