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 채무조정 프로그램에 1년간 청년층도 포함
이자 30∼50% 감면, 최장 3년간 원금 상환 유예
‘빚의 악순환’ 끊고 경제 시스템 정상화 위한 방안
금융위 “가상자산 투자 실패자 지원 대책 아니다”
논란이 시작된 건 이 한 문장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7월 14일 ‘금융부문 민생안정 과제’를 통해 서민을 위한 채무조정 등의 지원 방안을 내놨다. 금융위는 이 자료에서 가계·기업 대출과 취약 부채 현황을 제시했다. 경제주체들의 상황이 이렇게 위험하니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설명하기 위해서다.
특히 청년층과 관련해 “주식, 가상자산 등 청년 자산투자자의 투자 손실이 확대했다”고 설명한 점이 눈에 띄었다. 금융위에 따르면 2030세대가 주요 10개 증권사에서 빌린 신용융자 잔액은 2020년 6월 말 1조9000억 원가량에서 1년 만에 3조6000억 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금융위는 이들을 위한 방안을 내놨다. 기존에 정부가 저신용 연체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채무조정 프로그램을 ‘청년층’으로 1년간 한시적으로 확대하겠다는 내용이다. 기존 제도에선 신청 자격이 미달하는 연체 발생 이전 채무자라도 이자를 감면해 주고 상환을 유예해 준다는 방안이 포함됐다.
재산을 고려한 채무 과중 정도에 따라 이자를 30∼50% 감면해 주고, 최장 3년간 원금 상환을 유예해 주며 이 기간 연 3.25%의 낮은 이자율을 부과한다는 계획이다.
청년층 한시적 이자 감면에 비판 봇물
이 방안이 발표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금융위가 청년층 부채 현황을 제시하기 위해 ‘투자’를 가장 앞세웠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무분별하게 빚을 내 주식이나 코인 투자를 한 일부 젊은 층을 세금을 들여 도와준다는 내용에 많은 이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그러자 정부는 부랴부랴 해명에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은 7월 15일 이런 논란에 대해 “완전히 부실화돼 정부가 뒷수습하기보다 선제적으로 적기 조치하는 게 국가 전체의 후생과 자산을 지키는 데 긴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더해 빚 자체를 탕감해 주는 건 아니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대통령실은 7월 19일 “금융위가 발표한 청년층 신속채무조정은 대출 만기를 연장하고, 금리를 일부 낮춰 채권의 일체가 부실화하는 것을 막는 제도”라며 “원금 탕감 조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원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채무조정은 기존에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운영해 온 제도”라며 “이번 조치는 추후 사회경제적 비용 증가를 선제적으로 방지하기 위해 취약 청년층을 대상으로 지원을 일부 확대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설명이 틀린 건 아니다. 선제적으로 취약 계층 지원 방안을 추진해 경기 연착륙을 유도하는 건 정부가 꼭 해야 할 역할 중 하나다. 지나치게 많은 빚을 갚지 못하는 이들의 재기를 도와 ‘빚의 악순환’을 끊어주는 게 장기적으로 경제 시스템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필요성을 인정받는 제도다. 또한 이런 프로그램은 그동안에도 지속해 운영돼 오기도 했다. 이번 대책을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하면 사실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더욱이 청년층의 대출 문제가 최근 들어 부쩍 심각해지는 모양새다. 7월 31일 금융연구원이 내놓은 ‘금융권 다중 채무자 현황 및 리스크 관리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30대 이하 청년층의 다중 채무액은 4년 4개월간 32.9% 증가해 올해 4월 158조1000억 원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중 채무란 금융사 3곳 이상에서 대출받았다는 걸 의미한다. 은행뿐만 아니라 저축은행과 카드사 등을 통해 돈을 빌려 금리 부담은 더 클 수밖에 없다.
투자 실패 청년 위한 빚 탕감으로 오해
비판의 목소리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이른바 ‘빚투(빚내서 투자)’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은 저금리 시대 나타난 현상이다. 저금리로 시장에 돈이 넘쳐나니 주식과 부동산 등에 돈이 쏠렸고, 투자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이 급증했다. 당장 현금이 많지 않은 2030세대 청년층의 경우 대출을 해가며 이 투자 열풍에 뛰어들었다.이후 금융위 설명처럼 최근 들어 금리가 인상하는 데다가 시장이 침체하면서 그간 급증해 온 대출이 부실화할 위험이 커진 건 사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대출을 받아 투자해 거금을 벌어들인 성공 사례가 곳곳에서 들리는 분위기였다. 착실하게 돈을 벌어 저축하고 있지만 주변에서는 너도나도 빚을 내 투자로 자산을 늘리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빗대 ‘벼락거지’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그런데 정부가 ‘그들’을 위해 빚까지 탕감해 주겠다니 여론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7월 18일 긴급 브리핑을 열어 이번 방안과 관련해 “가상자산 투자 실패자 지원 대책이 아니다”라며 진화에 나서야 했다.
김 위원장의 언급에서 이번 방안의 어떤 점이 문제를 초래했는지 읽을 수 있다. 그는 “현실을 좀 더 생동감 있게 표현하다 보니 발표 자료에 ‘투자 손실’ 얘기가 들어갔다”며 “해당 표현이 도덕적 해이 논란을 촉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시인했다. 결국 채무조정 제도 자체가 문제가 됐다기보다는 정부가 정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초래된 셈이다.
문제는 정부의 정책적 실책은 한 번의 실수로 넘어가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정부 정책에 불신이 쌓이기 시작하면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추진하는 정책이라도 제동이 걸리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청년들을 위한 지원 정책도 마찬가지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장혜영 정의당 의원에 따르면, 신용회복위원회가 2015년부터 운영하는 ‘대학생 및 미취업 청년 특별지원 프로그램’ 현황을 살펴보니 투자 실패로 채무 연체가 발생한 경우는 전체의 0.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생계비가 늘어나 어려움을 겪은 경우는 30%, 실직은 21.3%로 나타났다. 실제 도움이 절실한 ‘청년’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번 ‘빚투’ 논란으로 이런 청년들에 대한 지원까지 자칫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정책 역시 신용평점 하위 20%의 만 34세 이하 청년 가운데 상환이 어려운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정도 신용등급이라면 신용카드 발급은 물론 대출 등 정상적 금융거래를 할 수 없다. 단순히 투자 실패자가 아닌, 실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더해 재산과 소득이 충분할 경우 채무조정에서 제외되는 등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이들을 걸러내는 과정도 있다.
이벤트式 빚 탕감 정책, 재고할 때
이처럼 좋은 정책 취지와 도덕적 해이를 방지할 절차에도 정치권의 ‘보여주기식’ 정책 발표 탓에 잊을 만하면 논란이 불거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대적 채무조정 방안을 선심 쓰듯 내놓고 있어 논란을 자초하곤 했다.이명박 정부는 신용회복기금을 만들어 저신용자들을 구제해 줬고, 박근혜 정부의 경우 신용회복기금을 국민행복기금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58만 명의 빚을 탕감해 줬다. 문재인 정부 역시 62만 명의 장기소액연체자 채무를 면제해 주거나 감면해 줬다.
이런 식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벤트식으로 이른바 ‘빚 탕감’ 정책을 내놓으니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에서 내놓은 대책도 사실 큰 틀에서는 기존 제도와 크게 다를 게 없는데 차별화를 하려다 보니 규모를 늘리고 표현을 과하게 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며 “새 정권이 선심 쓰듯 빚을 탕감해준다는 식의 발상보다는 채무조정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운영될 수 있도록 국민을 이해시키는 게 우선시돼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