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 수업에 필요한 태블릿 PC
코로나 이후 온라인 취미생활
브랜드 소유하는 심리적 만족감
“비싼 값이지만 질 좋은 제품으로”
“음료수 값 아끼고 술자리도 안 나가”
김민규(24) 씨는 ‘애플 마니아’다. 맥북, 에어팟 프로, 아이패드에 애플워치까지 사용하고 있다. [진현준]
대학생 류인산(21) 씨는 스스로 벌어 생계를 이어가는 ‘독립청년’이다.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친구조차 멀리한다. 편의점부터 고깃집까지 다양한 곳에서 일을 했다. 힘들게 번 돈을 통장 쪼개기로 차곡차곡 저축해 지난해 말 200만 원을 모았다.
이렇게 모은 돈의 행선지는 유명한 맛집도, 온라인 패션 쇼핑몰도, 비행기 표 예매 사이트도 아니었다. 류씨는 200만 원을 모두 최신형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구매하는 데 썼다.
자정까지 하루 8시간 일해 6개월을 아껴 모은 돈이지만 류씨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이렇게 의식주에 투자하는 돈을 아껴서라도 전자기기에 투자하려는 20대 대학생이 많다. 예전엔 노트북과 휴대폰 정도가 소비 생활의 전부였다면, 이젠 태블릿 PC, 블루투스 이어폰에 스마트워치까지 구매한다. 대학생들이 얇은 지갑을 열어 전자제품에 거액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상과학 영화 한 장면처럼
대학생 김태희(21) 씨의 삶으로 들어가 봤다. 김씨는 2020년 입학한 ‘코로나 학번’이다. 김씨에게는 대학 진학 전에도 노트북과 태블릿 PC가 있었지만 입학과 함께 모두 새로 구매했다. 대학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에 내린 결정이다. 구매한 노트북과 태블릿 PC의 진가는 온라인 수업을 들을 때 발휘된다. 김씨에게 노트북은 칠판이고, 태블릿 PC는 필기 노트이자 수업 자료집이다.수업 시작 전, 김씨는 일단 책상 오른편에 노트북을 펴두고 왼편에는 태블릿 PC를 세워놓는다. 노트북에는 수업 화면만 크게 띄워두고, 태블릿 PC로는 수업 자료를 내려받아 띄워둔다. 발표할 때 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블루투스 이어폰 연결은 필수다. 수업이 시작되면 터치 펜슬을 잡고 태블릿 PC에 수업 내용을 필기하기 시작한다. 중간중간 수업에 필요하거나 궁금한 정보는 바로 화면을 전환해 웹서핑을 통해 찾아본다. 수시로 전환되는 화면은 마치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전수현(20) 씨도 지난해 대학 입학 후 비대면 수업을 들으며 태블릿 PC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수업 자료조차 종이 교재가 아닌 PDF 형식의 파일로 제공되다 보니 태블릿 PC 없이는 과제조차 수행하기 어려웠다. 구매를 망설이다 지난 설에 친척들에게 받은 용돈으로 태블릿 PC를 구매한 전씨는 “1년간 학교를 다녀보니 태블릿 PC 없이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계속되는 비대면 수업에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전했다.
대부분 학생들이 고액의 전자기기를 구매하는 목적은 두 사람처럼 코로나19로 인해 시작된 비대면 수업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다. 몇몇 실습 수업의 경우 학생들에게 ‘듀얼 모니터’ 활용을 권장하기도 했다.
이에 전자기기 시장은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기간에 호황을 맞았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2019년 국내 노트북 출하량은 234만 대였으나, 2020년 293만 대, 2021년 367만 대로 고공 행진했다. 태블릿 PC 출하량도 2021년 470만 대로 전년 대비 22.3% 급증했다.
팬데믹의 나비효과
최인범(23) 씨는 취미 생활을 위해 태블릿 PC, 데스크톱 PC는 물론 고급 모니터, 게임기까지 구매했다(왼쪽). 오동재(23) 씨가 중고 거래를 통해 구매한 전자기기들. [진현준]
최인범(23)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을 몰입감 있게 시청하고 싶어 고가의 장비를 사 모았다. 데스크톱 PC, 태블릿 PC에 품질 좋은 무선 마우스와 복고 감성으로 디자인된 키보드, 오디오인터페이스, 마이크, 헤드폰까지 구비했다. 모니터도 60만 원 상당 고가 제품으로 샀다. 일부는 가족들의 도움으로 구매했지만, 최씨 본인도 100만 원 이상 투자했다.
최씨는 모아둔 돈에 월 과외비 48만 원을 보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모아둔 돈 잔고가 이젠 바닥 수준이다. 그렇다고 소비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남들과 기준은 다르지만 제 생각에 정말 필요하다 싶은 걸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있게 사려고 해요. 나중에 어렵더라도 현재의 만족을 얻고 싶은 마음이에요.”
오동재(23) 씨는 전자기기를 구매하는 것 자체가 취미 생활이 됐다. 오디오 기기와 휴대폰에 관심이 많은 오씨는 잦은 중고 거래에 기기별 시세까지 꿰고 있다.
“음악 듣는 귀가 예민한데 제대로 된 음색을 즐기고 싶어 이어폰과 헤드셋에 아끼지 않고 투자하는 편이에요. 휴대폰도 일부러 중고로 사고팔며 다양한 제품을 사용해 봤어요. 다 같아 보여도 조금씩 특징이 있는 게 재밌더라고요.”
일부 학생은 주위 권유나 주변의 소비에 구입을 결정하기도 한다. 류인산(21) 씨는 유행의 영향으로 아이폰을 구매했다.
“너도나도 구매하니까 저도 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솔직히 한순간의 유행에 혹한 거죠.”
김보승(22) 씨는 전역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복학생 필수템’이 무엇인지 물었다. 돌아온 답은 ‘아이패드’였다. 김씨는 친구들의 말을 따라 아이패드를 구매했다. “주변 조언을 듣고 샀지만, 정말 잘 샀다는 생각이 들어요.”
브랜드 충성도가 높아 특정 회사 제품을 사 모으는 학생들도 있다. 성능만큼이나 제품 디자인이 주는 감성에 만족감을 느낀다는 게 구매자의 설명이다. 김주영(24) 씨는 아이폰, 애플워치, 아이패드, 맥북, 에어팟까지 자비로 구매한 애플 충성고객이다. 가격이 부담되긴 하지만 애플 시리즈를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만족감을 느낀다.
“먹고 입는 데 돈 쓰는 것보다, 배는 대충 채우고 아낀 돈으로 갖고 싶은 걸 살 때 큰 행복감을 느껴요. 만약 애플이 다른 제품을 만든다면 돈을 모아서 언젠가는 살 것 같아요.”
높은 호환성도 한 회사 제품을 소비하는 이유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대학생 김민규(24) 씨도 맥북부터 아이패드까지 애플에서 출시한 전자기기를 사 모은 ‘애플 마니아’다. 전자기기를 구매하는 데만 자비로 430만 원을 썼다. 휴학하고 인턴 활동을 하는 동안 차곡차곡 모은 돈이다. 김씨는 “호환성이 좋은 애플 제품이 개발에 유리하다”며 “편의를 목적으로 장비를 샀다”고 설명했다.
“S급, A급, B급 있다면 A급 이상을 사죠”
대학생들이 이렇게 과감하게 돈을 쓸 수 있는 건 한번 사두면 최소 2~3년은 쓸 수 있는 전자기기의 특성 때문이다. 고장이 나더라도 A/S를 받으면 더 오래 쓸 수 있다. 이에 일부 학생들은 성능과 디자인이 더 뛰어난 브랜드의 고가 제품을 구매하려 한다.황준혁(22) 씨는 최신형 노트북, 스마트폰을 구매하는 데 300만 원을 썼다. 적지 않은 돈임에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싸게 많은 제품을 사기보다는 비싼 값에 사더라도 질 좋은 제품을 사겠다는 생각으로 구매를 결정했어요.”
적은 소득으로 생활하는 대학생들에게 전자기기 가격은 부담스럽다.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사려고 발품을 판다. 가장 쉽게 발품을 파는 방법은 중고거래 플랫폼을 이용하는 것이다. 검색창에 ‘노트북’ ‘아이패드’만 검색해도 거주지 근처에서 올라온 중고 거래 물품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중고 거래 애플리케이션에 ‘노트북’을 검색해 봤더니 20분 사이에 5개 제품이 올라와 있었다. 스크롤은 끝없이 내려갔다. 200개가 넘는 노트북이 반값에 새 주인을 기다렸다. 모두 20분 내외 근거리에서 거래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실제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전자기기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중고 거래 애플리케이션 ‘당근마켓’에 따르면 2020년 1월~2021년 9월 품목별 검색 건수 통계에서 노트북이 2위, 컴퓨터가 6위, 아이패드, 아이폰, 모니터, 에어팟이 7위부터 10위까지를 차지했다. ‘노트북’ 검색량은 2348만 회에 달했다.
조양희(23) 씨도 중고 거래 플랫폼으로 전자기기를 구매한다. 그 덕분에 데스크톱 PC, 노트북, 최신형 스마트폰, 블루투스 이어폰, 아이패드까지 사고도 200만 원밖에 쓰지 않았다. 자주 거래하다 보니 중고 거래 노하우도 생겼다. 부담스러운 비용을 아끼기 위해 사용한 뒤 되팔 수 있는 상태 좋은 제품을 골라 구매하는 전략이다.
“S급, A급, B급이 있다면, A급 이상을 사죠. 가격 방어가 잘 되는 제품을 사야 나중에 판매 가치가 안 떨어져요.”
사전 구매도 최신 제품을 비교적 저렴하게 사는 방법이다. 2021년에 전역한 황준혁(22) 씨는 군 월급 2개월분으로 140만 원 상당 최신 스마트폰을 사전 예약으로 구매했다. 출고가보다 30만 원 정도 싼 금액에 살 수 있는 데다 요금제 약정도 필요 없고, 제품을 제작한 회사에서 출시한 신형 무선 이어폰까지 증정품으로 받았다.
생활비 아껴 모니터 구매하다
그럼에도 일부 학생들은 전자기기 구매 과정에서 경제적 부담에 직면한다. 윤영률(25) 씨는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학교에 갈 일이 없어진 후 강의자료 인쇄가 어려워지자 태블릿 PC를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자비로 100만 원 상당 태플릿 PC를 샀는데 구매 후 경제적 부담을 느꼈다.“학생 입장에선 솔직히 큰맘 먹고 전자기기를 구매하게 되죠. 태블릿 PC 살 땐 앞뒤 안 재고 일단 사고 봤는데, 꽤 부담됐어요. 노트북은 자비로 살 엄두가 안 나네요.”
오민섬(23) 씨도 생활에 필요한 돈을 아껴 중고로 28만 원 상당 모니터를 구매했다. 배달 음식을 사 먹지 않고 필요한 물건들은 생활 잡화 판매점에서 가성비 제품 위주로 구매했다. 옷차림도 저렴한 티셔츠를 여러 개 구매하는 식으로 해결했다.
“음료수 사 먹는 것도 아끼고 술자리도 많이 안 나갔어요. 부모님께 용돈 받을 일이 있으면 쓰기보다는 항상 조금씩이라도 더 저축했습니다.”
이처럼 전자기기를 구매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맛있는 밥, 예쁜 옷쯤은 기꺼이 절약한다. 친구와 한 약속도 마다한 채 5000원으로 오른 학식 대신 3500원짜리 김밥으로 기꺼이 점심을 때울 수 있다. 전자기기는 이제 대학생들에게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다. 많은 학생이 식사 품질보다 전자기기 성능과 디자인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200만 원 상당의 노트북을 자비로 구매한 한 학생은 구매를 후회해 본 적 없느냐는 물음에 웃으면서 답했다.
“후회하죠. 더 빨리 살걸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