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호

“삶은 폭탄을 맞았고, 깨진 파편에 나는 만신창이가 됐다”

대법 ‘무죄’ 선고 받은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3-11-2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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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만난 박유하, 그리고 친일파라는 낙인

    • 전혀 예상치 못한 대법원 선고

    • 원고들은 사라지고 피고만 남은 재판

    • 고발당한 건 책 때문이 아니었다

    • 버팀목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

    • “나는 태생적으로 평화주의자”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지 8년 만인 10월 26일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은 박유하 교수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그간의 심경을 담담하게 밝혔다. [지호영 기자]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지 8년 만인 10월 26일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은 박유하 교수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그간의 심경을 담담하게 밝혔다. [지호영 기자]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일본인을 통해서였다. 아사히신문 전 주필이던 와카미야 요시부미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와카미야 전 주필은 ‘동아일보’ 객원 논설위원으로 정기 칼럼을 장기 연재하고 있었는데 2014년 7월 31일자 칼럼에서 ‘제국의 위안부’가 한국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된 소식을 ‘우울한 뉴스’라고 안타까워하며 “박 교수를 우익으로 부른다면 나도 우익으로 부르라”라는 주장을 칼럼에 실었다.

    10년간의 고통, 그리고 무죄판결

    일본에서 우익은 제국주의 침략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독도를 한국에 양보해 우정의 섬으로 하자”는 도발적인(?) 주장을 아사히신문 칼럼에 실었던 와카미야 주필은 일본 사회 내부에서 ‘매국노’ 공격까지 받았던 진보적 지식인으로 우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박 교수가 우익이라면 나도 우익이라고 옹호하면서 그가 자신보다 훨씬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한일관계에 관한 한 자유로운 주장을 펼치기가 한국이 훨씬 좁다. 나는 이 책으로 할머니들의 명예가 손상됐다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 (…) 다른 의견도 좋고 논쟁은 장려해야 하지만 사법에 호소해 자유로운 언로를 막는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플러스가 아니다.”



    일본의 대표 진보 지식인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박 교수는 1년 뒤인 2015년 검찰에 의해 결국 기소되면서 학문의 자유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의 한복판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를 직접 만나 인터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그즈음이었다.

    당시 인터뷰를 준비하며 관련 기사들을 검색하면서 나는 두 번 놀랐다. 우선 국내 언론들이 ‘제국의 위안부’가 막 나온 2013년 8월 당시에는 8대 2 정도로 호평이 많았다는 것에 놀랐고, 두 번째 놀란 것은 박 교수와 책이 곤경에 처하자 변호하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10년 전 출간된 ‘제국의 위안부’. [지호영 기자]

    10년 전 출간된 ‘제국의 위안부’. [지호영 기자]

    책을 정독하면서 평생 글을 써온 기자 입장에서 볼 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상처를 주려거나 폄훼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오히려 그동안 잊고 지내던 할머니들을 더 깊게 이해하고 해결책을 위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됐다.

    무엇보다 저자 주장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학자의 연구 결과와 주장에 학계 내부 평가가 아닌 법의 잣대를 들이민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박 교수를 직접 만나 두 시간여에 걸쳐 대화를 나눴다. 그의 학자적 양심과 진지함, 한일관계를 보는 진정성에 공감하게 됐고, 그로부터 얻은 또 다른 책 두 권도 꼼꼼하게 읽고 난 뒤 2015년 12월 동아일보에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다. “학자의 양심에 법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내용의 칼럼도 실었다.

    이후 기자는 박 교수와 같은 배를 탄 동질감을 느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함께 ‘친일 기자’ ‘위안부 할머니에게 상처를 준 기자’에서부터 ‘고발하겠다’는 내용의 메일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이성과 논리를 앞세우는 목소리가 이렇게 매도되는가 싶어 착잡했다. 새삼 박 교수가 처한 상황이 이해되면서 연민의 감정까지 느낀 기억이 있다.

    박 교수와의 만남은 인터뷰 이후로도 간간이 이어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긴 재판 과정에서도 그는 차분함을 잃지 않았고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나 서운함을 말하기보다 도와주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우선했다.

    3년 전 2020년 ‘윤미향 사태’가 터졌을 때도 나는 그의 입장을 듣는 인터뷰를 ‘신동아’에 실었다. 그때도 박 교수는 윤미향 사태가 불러올 자신의 재판 결과에 대한 관심보다는 마지막까지 우정을 나누며 ‘나눔의 집’에서 나오고 싶어 했던 고(故) 배춘희 할머니를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

    2심 패소 판결 후 무려 5년 2개월여가 흘렀다. 송사를 경험한 사람은 안다. “지연된 재판은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법정다툼 자체도 스트레스지만, 판결이 부지하세월로 늘어지면 피고의 일상은 엉망진창이 된다. 해결해야 할 법정 싸움이 늘 머릿속에 걸려 있을 때 당사자가 겪는 심적 고통은 크다.

    대법원 선고에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나는 아침에 날아든 무죄 결정 문자에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박 교수와 다시 마주 앉았다. 표정이 밝았다.

    유죄와 무죄, 모두 대비한 성명서

    선고를 앞두고 조마조마했겠어요.

    “당일 아침까지 긴장의 끈을 놓칠 수가 없었죠. 제 앞의 사건들 판결을 들으니 대부분 2023년 사건에 ‘기각’이 많이 나오니까 기분이 묘했어요. 저만 2017년 사건인 데다 나도 기각 처리가 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어요. 전날 유죄가 나왔을 경우와 무죄가 나왔을 경우를 모두 대비한 성명서를 준비했어요.
    유죄라고 생각하면서 쓰려고 하니 뭐라고 쓸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와서 일단은 안도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물론 기뻤지만 오랜 기간 저를 응원해 주신 분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고 그분들의 명에를 지켜주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대법원 선고가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갑자기 나왔다”고 했다.

    “이번 정부에서도 거의 포기 상태였다고나 할까요. 2심 패소 후 대법 주심 판사가 지금의 노정희 판사로 바뀌면서 5년 2개월이 흘렀습니다. 노 판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분인데 사실 저는 지난 정권에서 제대로 된 판결이 나오기를 바랐습니다.

    보수 정권으로 바뀌어 제게 우호적 판결이 나오면 ‘정권이 바뀌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거든요. 노 판사는 ‘이재명 무죄’를 선고한 분이어서 제 판결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어떻든 결과가 빨리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2심 패소 후 3년, 4년이 흐르면서부터는 어쩌면 문재인 정부가 끝날 때까지 판결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선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노 판사 임기가 내년에 끝나는데 이분 임기 내에도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유죄라고 판단했으면 진즉 결론을 냈을 텐데 안 내리고 있다는 것은 심사숙고하는 것 아닌가’ 등등 정말 생각이 많았지요.

    정년퇴임 전에 결정이 나오기를 바랐는데 이제 학교도 퇴임했고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시간을 허송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내년에는 미국에라도 가서 공부할까 마음이 심란했죠. 그런데 판결 1주일 전에 갑자기 선고 날짜를 통보받았습니다. 보통은 한 달 전에 알려준다고 듣고 있었는데 이것도 너무 의외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태 판결을 미루던 대법원이 왜 그렇게 빨랐을까요.

    “저야 모르지요. 10월 말이면 2심 패소한 지 만 6년째인데 6년은 넘길 수 없다는 판단이 든 걸까요(웃음).”

    기자가 반농담식으로 “재판부가 그렇게까지 세심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하자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엇보다 결정이 너무 늦어지면서 사건이 잊히는 게 걱정됐어요. 1인 시위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으니까요. 그러다 작년 ‘법률신문’에 이인복 전 대법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인터뷰하신 분이 내 사건을 물어봐 준 게 반가웠어요.

    더 고마웠던 것은 이 전 대법관이 ‘내 임기 중에 ‘제국의 위안부’ 건이 안건으로 올라왔으면 했고, 만약 올라왔다면 박유하 교수는 무죄’라는 말을 하신 거예요. 아무리 전임이라고는 해도 대법 선고 전인데 그런 의견을 밝힌다는 것 자체가 참 감사했죠.

    제 입장에서는 재판관들 안에 그런 분위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저도 얼마 후 법률신문과 인터뷰했는데 결과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고 간곡히 호소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갑작스러운 선고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지난해에는 기자회견도 했지요.

    “사실은 학교를 위해서라도 퇴임 전에 선고가 내려졌으면 했는데 그러지 않았지요. 퇴임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제 사건이 이대로 잊히는 게 싫어서 ‘지금 내가 싸우는 사람은 위안부 할머니가 아니라 지원 단체’라는 말을 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이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사건이 너무 오래전 일이다 보니 젊은 사람들은 아예 내용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으니까요. 검찰 기소로부터 따지면 8년, 고발받은 시점부터 거슬러 가자면 9년 4개월이 흘렀으니까요.”

    아직 남은 재판들, 사실상 피고만 남아

    참으로 긴 시간인데요.

    “2014년 6월에 가처분, 민사, 형사 고발을 한꺼번에 당했습니다. 이 중 첫 판결은 이듬해 2월 나온 가처분 재판이었는데 책 내용 중 34곳을 삭제해야만 유통시킬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와 그해 6월에 삭제판을 내야 했습니다. 이듬해인 2016년 1월 민사에서 9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고 형사에서는 1심에서 무죄가 나왔지만 곧 2심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면서 민사는 잠정 중단됐고요.

    이번 대법 선고가 나와도 끝난 게 아닌 것이 고법 판단이 남아 있습니다. 2, 3개월 걸릴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 기일을 받지 못했어요. 민사는 이번에 선고가 내려진 날 바로 기일이 잡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11월 22일입니다.”

    민사의 원고는 누군가요.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들입니다. 원래 아홉 분이셨는데 여섯 분이 돌아가시고 세 분이 생존해 계십니다. 이 중 두 분도 건강 문제로 외부에 나오지 못하는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이 사건의 당사자는 저 혼자 남은 거나 다름없어요. 저를 고발한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감옥에 있고, 정대협 윤미향 의원도 재판 중이고 할머니들도 한두 분밖에 남아 계시지 않으니까요.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버려 저 홀로 남겨진 재판이 됐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다가 이번에 선고를 받은 겁니다.”

    재산상 손해도 많았을 텐데요

    “변호사 비용도 사비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1심 민사에서 지자마자 2016년 1월 급여 압류가 들어와서 두 달 급여 압류도 당했고요. 변호사와 상의 끝에 4500만 원을 법원에 공탁을 맡긴 상태입니다.”

    다른 목소리 불쾌해하던 사람들의 고발

    박유하 교수는 “고발 이후 10년에 이르는 시간을 보내며 송사에 에너지를 쓰느라 하고 싶은 연구를 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지호영 기자]

    박유하 교수는 “고발 이후 10년에 이르는 시간을 보내며 송사에 에너지를 쓰느라 하고 싶은 연구를 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지호영 기자]

    평생 공부만 하던 분이 너무 예기치 않은 일에 휘말려 10년을 보냈네요.

    “인생이 아무리 예측 불가능하다 해도 저의 50대 후반이 이렇게 흘러갈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제국의 위안부’ 책을 낸 것이 2013년 8월인데 그때만 해도 많은 언론이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주목했어요. 그로부터 10개월 뒤 고발을 당했습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고발을 당한 것이 책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요.

    “책을 내고 나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러 다니고 심포지엄을 통해 나눔의 집이나 정대협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할머니들 의견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 고발을 촉발했다고 생각해요. 수감 중인 나눔의 집 안 소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자꾸 이렇게 할머니들과 접촉하고 다른 목소리를 낸다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말을 제게 직접 했으니까요.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정말 고소장이 날아왔습니다. 제가 나눔의 집을 가지 않고 심포지엄을 열지 않고 저와 마음을 나누던 배춘희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사태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발당한 이후 삶을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우군이 돼줄 것이라 믿었던 지식인들이 깊은 상처를 주었어요. 어떻든 재판이 시작됐으니 여기에 대응해야 하잖아요. 일상이 완전히 깨졌죠. 가처분 고발에 대응하느라 그해 여름방학을 고스란히 반납했어요. 이재명 대표는 ‘같은 하늘에서 못 사는 친일파’라고 페이스북에 총칼을 들이대고…. 가장 험난했던 시기가 2015년까지였어요. 언론계, 학계에서 제 이야기를 들으려는 분은 극소수였으니까요.”

    검찰 조사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더구나 사실관계의 진위를 떠나 자구의 해석을 둘러싸고 주장을 다투는 일이라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경찰·검찰 조사, 재판 과정은 정말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형사재판은 국가가 개입하는 일이라 무섭기도 했어요. 경찰 조사는 세 번 불려갔는데 다행히 경찰관이 친절했고 ‘이런 일로 벌을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며 무죄로 결론을 올려서 걱정을 안 했어요.

    이후 검찰 조사가 2016년 1, 2월에 있었는데 40대 젊은 검사 태도가 정말 위압적이었어요. 제 옆에는 오랏줄로 묶인 범죄자가 앉아 있고, 저는 수사관으로부터 조사를 받는데 검사가 저쪽에 앉아서 제가 항변하면 인터넷 기사 프린트물을 휙 던지면서 ‘이런 걸 알고나 있냐. 웬 딴소리냐’며 윽박지르는데 정말 참담하더군요. 그때가 한겨울이었는데 검찰청사 오가는 길이 얼마나 춥던지….

    그런데 담당 검사가 2개월 만에 또 바뀌어버려서 거의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어요. 두 번째 검사는 그래도 태도는 젠틀했지만 고압적이긴 마찬가지였지요. 가처분 소송에서 지적한 서른다섯 곳을 적시하며 저를 마치 서른다섯 개의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대했으니까요.

    매일 아침 10시부터 저녁 6, 7시까지 이어지는 재판을 받다 보면 녹초가 됐지요. 그나마 1심 재판관은 제게도 발언 기회를 주었고, 2017년 1월에 승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전혀 바뀌지 않았어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온갖 비난을 쏟아냈고 급기야 2017년 11월 2심에서는 패소하게 된 거죠. 그러는 과정에 학교 수업도 해가면서 재판에 대비하느라 심신이 정말 약해졌어요. 위안부에 관한 모든 연구서, 자료를 다 읽으며 반박 자료를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그 덕분에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웃음).”

    그는 재판 과정에서도 거대한 힘에 맞서 혼자 싸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학계까지 퍼진 ‘너 죽고 나 살자’

    “(상대 쪽) 변호인은 저를 악녀로 취급하는 감정적 발언을 쏟아내고 휠체어 탄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세워 심리적으로 위협하기도 했어요. 2014년 여름에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나눔의 집 사람들이 할머니들을 모시고 학교 정문으로 몰려와 ‘박유하를 파면하라’고 시위를 두 번이나 했어요. 집으로 찾아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습니다. 밖에 나갈 때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2심 패소 후 대법원 선고까지 5년여가 흘렀는데 그동안 뭐 하고 지냈나요.

    “쉬어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세간의 비난에 제가 일일이 반응하지 않으면 ‘박유하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고 매도하는 거였어요. 학문의 길을 걷는 분들이 저를 마녀 취급하고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제 뜻을 곡해하고 맹공하는 걸 보면서 절망했습니다.

    특히 저야말로 페미니스트 학자인데 여성학자들까지 제 의도를 오해하고 공격하더군요. 결국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 법정에서 겪은 일들을 책으로 묶어내어 알리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그렇게 뭔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나날의 연속이었죠. 지난 10년은 기본적으로 가라앉고 우울 상태라고 할까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던 그녀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박 교수를 만난 이후 눈물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한마디로 만신창이가 돼버린 것 같아요. 제 삶이 폭탄을 맞는 바람에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파편이 튀어 일상이 깨진 일이 일어난 거니까요.”

    힘든 시간을 버틴 동력은 뭐였을까요.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죠.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믿음도 있었고요. 일본에서도 오에 겐자부로 선생, 일본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학자 우에노 지즈코 선생 등 정말 고마운 분이 많아요.”

    한국 사회가 이념의 내전 상태라는 느낌이 드는데 친일이냐 반일이냐 하는 문제는 친북, 반북과는 또 다른 프레임인 것 같아요.

    “‘학문의 정치화’가 심한 것 같아요. 언론도 그렇고 학문도 그렇고. 생각하고 말하기 전에 진영에 불리한지 유리한지를 먼저 사고하면서 이해득실을 따지는 문화가 굳어졌어요.

    제 사건에 대해서는 보수조차 ‘이건 한국에 불리한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문학하는 사람이어서 유불리를 따지기보다 민족이나 국가에 적용되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틀이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선악을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복잡함을 가졌다고 보는 사람이라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해 주더군요.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처벌하자, 고발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안타까워요. 각자 다 생각이 있으니 어느 정도 대화로 풀고 접점을 찾아야 하는데 ‘너 죽고 나 살자’ 분위기가 너무 팽배해요. 조금 논리가 비약일 수 있겠지만 저는 ‘저출산’도 사회 전반적으로 사랑의 에너지가 줄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봐요. 남녀도 사랑하지 않고, 여유와 배려의 에너지가 너무 낮아 사회 분위기가 정말 각박해요. 그래도 이번 대법 재판부가 저의 집필 동기와 문장과 문맥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해 줘서 기뻤습니다.”

    역사 문제에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복잡함을 주장하는 일이 위험한 주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나요.

    “전혀요. ‘제국의 위안부’가 나오기 전에도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주장을 해왔기 때문에 방심했는지도 모르죠(웃음).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일관되게 식민지주의, 제국주의를 비판해 온 학자입니다.

    저는 태생적으로 평화주의자이고 폭력을 싫어합니다. 고발이나 기소는 폭력이었고 그것 때문에 수많은 주변 사람이 피해를 보는 상황을 보는 게 견디기 힘들었어요. 대법 선고가 났지만 사실 제 명예회복은 힘들지 않나요. 10년 전만 해도 한국과 일본 학회에서 멀쩡하게 활동하던 학자였는데 지금 한국 학회에서는 불러주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저의 관심 영역을 계속 확장해 나갈 것이었는데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 명예는 산산조각이 난 거죠. 노년을 앞둔 60대 중반을 빡세게 맞고 있습니다(웃음).”

    작은 체구에 유약해 보이는 그녀는 대화 중간에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어려운 순간을 지나오면서도 그것에 지지 않는 강인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진 ‘위엄’이 느껴졌다.

    광복 전후 조선에 살던 일본인 연구하고파

    이제부터는 연구에 더 몰두하셔야죠. 하고 싶은 테마가 있나요.

    “많지요. 고발당하기 전부터 식민지 시대 연구, 그중에서 소테마로 광복 전후 조선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를 연구하고 있었어요. 갑작스러운 광복으로 북한에 살던 일본인 3만 명이 아사, 동사,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이건 팩트입니다. 소련이 갑자기 38선을 막는 바람에 평양, 원산에서 걸어오다가 죽은 사람도 많고요.

    당시 10대 소년으로 그 참혹함을 경험한 일본인 중에 훗날 작가나 시인이 된 사람들의 기록이 남아 있어요. ‘귀환 문학’이라고 하죠. 이렇게 거친 역사를 살았던 개인의 삶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자다, 피해자다 딱 규정할 수 없는 삶의 복잡함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징용공으로 일본에서 살던 조선인과 결혼한 뒤 광복 후 남편을 따라 건너온 일본인 여성들의 삶도 비극적인 경우가 많아요. 이제 우리도 한일관계를 이렇게 서로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는 공감과 배려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 아닐까요, 아직 이른가요?”

    기자는 선뜻 답을 내지 못했다. 우리 사회가 아직 얼마만큼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에 열려 있는지 가늠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2007년 국내 학자로는 처음으로 일본 내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심사하는 아사히신문사 논단상을 받았는데 앞서 소개한 와카미야 주필도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와카미야 주필은 몇 년 전 기자에게 직접 “일본에서 상을 받으면 혹여 박 교수가 친일파 낙인이 찍히지 않을까 걱정도 있었지만 책 내용이 워낙 탁월해서 수상을 결정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인으로서는 처음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일본의 과거사 침략을 질책해 온 이리에 아키라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심사평에서 “학문적 수준이 높고 시사문제 해설서로도 균형이 잡혀 있다. 게다가 읽기 쉬운 문장으로 쓰인 보기 드문 수작이다. (…) 이런 책이 한국과 일본에서 출판됐다는 것은 양국 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기뻐해야 할 것”이라는 평을 내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기자는 그가 하루빨리 에너지를 얻어 한일관계와 양 국민을 더 깊이 이해하는 연구 결과물을 내는 데 집중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학문의 자유를 옹호한 대법원의 결정에 박수를 보내며 박 교수의 남은 삶도 이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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