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호

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노태우 의리 테스트’ 술상 뒤엎은 김복동

  • 김충립 | 前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입력2016-08-23 10:3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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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7 계엄확대는 계획된 거사…전두환 政敵 제거
    • ‘부정축재자’에 박정희 끼워 넣은 사연
    • 정호용이 사양한 보안사령관 자리, 노태우에게
    • 사령관 축하연에서 盧에 상석 권한 정호용
    • 고건 靑 수석 “건설부 장관 하고 싶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1979년 10·26사건 40일 후인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임시정부 대통령’인 셈이었다. 이틀 뒤 긴급조치 위반자 68명에 대한 형 집행을 면제하고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다. 그리고 1980년 2월 29일 김대중(DJ) 등 시국사범 687명을 복권하고 학생 373명의 일괄 복학을 허가했다.

    복권된 DJ가 주도하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하 국민연합)과 재야세력은 복학생들과 연계해 3개월간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1980년 4월 29일에는 민주화촉진운동 전개를 선포하고 장외투쟁을 본격화하는 등 최규하 정부와 정면 대결로 치달았다.

    5월 1일 서울대 복학생대회를 시작으로 6일까지 대학생 수만 명이 모여 시위와 철야농성을 하며 계엄 해제를 요구했고, 7일에는 30여 명의 내외신 기자를 모아놓고 민주화촉진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튿날 전국 총학생위원장단이 반정부 시위를 결정하자 전국 39개 대학에서 일제히 이를 결행했고, 정부와 군부는 긴급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5월 15일에는 전국 80개 대학에서 10만여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서울시내는 치안 공백 상황에 이르렀다. DJ의 국민연합은 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고 19일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할 것을 요구하면서 22일 정오를 기해 대정부투쟁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다. 사실상 대정부 최후통첩이었고, 곧 새 정부가 들어설 것 같은 분위기였다.





    폭풍전야, 1980년 5월

    정부와 군부는 이 같은 상황을 방치할 경우 무법천지의 무정부 상태로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고 특단의 대책을 궁리했다. 정치권도 혼돈스러웠다. 여당인 공화당은 집권당이 아니라 야당이 됐고, 김종필(JP) 총재의 대망론도 수그러들었다.

    이에 앞서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하면서 정치권은 전두환 사령관에게 장악돼갔고, 군 내부에선 DJ가 정권을 잡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확고해졌다.

    시국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자 최 대통령은 4월 27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학원 소요사태에 강력 대응해 국가기강을 바로잡으라고 지시했다. 장외투쟁이 격화되자 군부대가 서울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이 계엄사령관은 인천 부평에 있던 특전사 9여단을 서울 지역 수도군단에 배속했다. 5월 7일에는 전방 특전사 13여단을 서울 거여동으로 이동시켜 대학가 소요 진압을 준비했다. 강원도에 있던 특전사 11여단은 경기 김포로 이동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5월 14일 김종환 내무장관은 경찰 능력으로는 학생시위에 대처할 수 없으니 군 병력을 투입해줄 것과 국가 주요시설 경계를 군부대가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학원소요 근절 대책 수립을 지시했고, 권정달 정보처장에게는 시국 수습 방안을 수립해 보고하라고 했다. 4월 말에 특전사 예하 여단들이 폭동 진압을 위해 서울 근교로 출동한 것 말고도 5·17 계엄확대조치가 사전에 이미 준비됐음을 보여주는 단서들이 있다.



    계획된 5·17 비상계엄확대

    가령 이런 것이다. 특전사 소속의 한 중위가 DJ의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전화를 해 “특전사 군인들의 광주지역 출동이 임박했다. 군인들이 광주로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는 전화를 한 것이 보안사령부 감청에서 드러났다. 보안사는 필자에게 “동교동에 전화를 건 장교를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예하 여단의 광주 출신 장교가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특전사 부대 내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모두 폐쇄했다.

    필자는 1980년 5월 17일에 DJ를 검거한다는 사실도 미리 알았다. 5월 초 토요일 필자는 충남 홍성지원 박상선 판사의 초청으로 친구 8명과 부부 동반으로 1박 2일 충남 온양의 도고호텔로 여행을 갔다. 아내를 동반하지 않은 필자와 친구 P회장이 같은 방을 썼다.

    그런데 1972년 대선 때 DJ의 홍보 비서를 맡은 바 있는 P회장이 “다음 대통령에 DJ가 당선될 것을 확신한다. 내일 찾아가 인사하고 500만 원을 드려야겠다”고 했다. 5월 17일 DJ가 구속될 것을 알고 있는 필자는 P회장을 말렸으나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우리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친구들이 우리 방으로 몰려왔다. 필자는 “P회장이 500만 원을 들고 DJ를 찾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건 죽느냐, 사느냐 생사가 걸린 문제다. 너희들이 좀 설득해봐라”고 한 뒤 호텔 방을 나왔다. 친구들의 간곡한 설득에 P회장은 뜻을 접었다.

    5·17 계엄확대조치 1주일 전 특전사 작전참모 장세동 대령과 박중환 작전과장, 병사 등 5명이 광주에 출동했다. 필자의 방에 들른 장 대령에게 지갑에 있던 용돈 5만 원과 보관 중이던 비상식량을 챙겨줬다. 군부 핵심 인사들이 5·17 계엄확대조치에 대비해 광주지역 폭동진압 작전계획을 세우기 위해 작전팀을 출동시킨 것이다. 이는 특전사령부 작전 실무팀들이 전투교육사령부 광주지역 계엄사령부로 작전 배속이 됐다는 의미이고, 특전사령관 정호용 장군은 광주 사건에 작전지휘권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이 3가지 사례는 5·17 계엄확대조치가 사태 수습을 위해 당일 군 지휘관회의 결의에 따라 이뤄졌다는 군부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조치가 100% 집권 욕망에 의한 ‘의도적 시나리오’라고 매도해선 안 된다. 국가 보위를 위해 언제쯤 어떤 사태가 일어날 것인지를 사전에 예상하고 필요한 대책을 세우는 것은 정부와 군이 해야 할 당연한 임무다. 따라서 5·18에 대한 평가는 모두가 한발씩 양보하면서 총체적인 화해와 용서에 나서야 한다.


    박종규 “나를 제물 삼아라”

    5월 13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이학봉 수사국장은 학원 시위 근절을 위해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국민연합 및 복학생 조직 민주청년협의회, 전국총학생회장단 핵심 간부에 대한 사법처리를 단행한다. 5월 15일에는 권정달 정보처장과 협조해 학생 소요 배후인물인 ‘국기문란자’와 3공화국 정부 ‘부정축재자’ 명단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했고, 다음 날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했다.

    5월 15, 16일 시위 주도 학생들에게 군이 출동할 것이라는 정보가 전해지자 학생들은 시위를 자제했다. 군부는 5월 17일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소집해놓고 있었다. 학생 소요가 잠잠해지자 계엄을 확대할 명분이 사라졌지만, 학생들의 동향을 예의 관찰하면서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역 앞에서 학생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경찰 2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5월 17일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5월 17일 오후 10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청와대로 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국비상계엄 확대, 국기문란자와 부정축재자 검거,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 등을 건의했다. 최 대통령은 국기문란자와 부정축재자에 대한 조사는 재가하고, 국회 해산 안건은 부결했으며, 국보위 설치 안은 보류했다. 이에 따라 DJ는 오후 11시경 자택에서 체포됐고, 김상현 전 의원은 다음 날 오전 4시 제주도의 친지 집에서 체포됐다. 김영삼(YS) 신민당 총재는 5월 20일 가택 연금을 당했다.

    보안사는 JP와 이후락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10여 명을 연행했고, 중앙정보부는 국기문란자로 DJ, 예춘호, 문익환, 김동길, 인명진, 이영희 등 26명을 연행 조사한 후 이들 중 24명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관련자’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전두환 정권 수립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여야 인사들을  5·17 계엄확대조치로 정치권에서 제거해버린 것이다. 이후 5·18의 진행 과정은 잘 알려진 대로다.



    ‘부정축재자 박정희’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국기문란자와 함께 검거한 것은 반정부 시위자들의 요구를 들어준 측면도 있지만, 유신 정권 권력자들을 심판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더 깊숙이 들어가면, 차기 정권 수립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려는 목적이 컸다. 당시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전 보안사령관 측에 유신정권 인사인 자신을 제물로 삼아 JP와 이후락을 사법처리한 뒤 전두환이 정권을 잡도록 조언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로 확인됐다. 1981년 1월, 북한에서 석탄을 싣고 인천항으로 들어온 재일교포 나카야마 야스지(한국명 박영수)가 박종규 전 경호실장과 접촉하는 과정에서다. 박영수는 북한에서 산 석탄을 중국을 경유해 인천항으로 들여와야 했으나, 박 전 실장의 힘을 믿고 곧장 인천항으로 입항했다.

    이 문제를 예의주시하던 필자는 박 전 실장과 수차례 만났고, 그 과정에서 그로부터 앞에 기술한 얘기를 듣게 됐다. 박영수는 이후 한국프로사이클연맹 회장으로 있으면서 한국에 경륜사업을 도입하려고 하다가 무산되자 1994년 한국 정·관계에 50억 엔 로비를 했다고 폭로한 인물이다.

    당시 정치권에선 5·17 계엄확대조치가 일종의 ‘무혈 쿠데타’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전 보안사령관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계엄사는 3공 시절 권력형 부정축재 조사 대상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을 포함시켰다. 박 대통령을 부정축재자로 조사한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필자가 “새로운 지도자를 부각하려는 의도로 이미 서거한 전직 대통령을 조사한다는 것은 인륜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실제로 조사할 경우 (큰딸인) 박근혜 양을 조사하겠다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니 즉각 시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다음부터는 박정희 대통령을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1년 어느 날, 필자는 이학봉 당시 수사국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거론한 경위를 물었다. 그는 “언론에서 의도적으로 박 대통령을 추가한 것이지 우리가 발표한 것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발표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유가족에게 큰 충격을 줬고,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측근들에게 배신감을 갖게 된 것은 확실해 보였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6월 18일 “5월 17일 검거한 부정축재자 처리 결과, 이들은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정치 활동을 일절 하지 않을 것이며, 국회의원직을 자진 사퇴한다는 조건으로 형사처벌은 유예하고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헌납한 금액은 JP 216억 원, 이후락 194억 원 등 총 853억 원이다. 이들은 공직 및 국회의원직 사퇴서가 수리된 후인 7월 2일, 구속된 지 46일 만에 석방됐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최규하 대통령은 7월 중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사의를 표한 뒤 8월 16일 하야했다. 정치권에서는 전 사령관의 압박으로 최 대통령이 물러났다는 여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광주 시민과 학생들은 DJ 등 재야인사를 구속하고 YS를 가택 연금시킨 데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정부와 군부의 예상대로 이들이 5·17 계엄조치에 항거해 DJ를 석방하라며 거리에 나서자 특전사 병력이 투입됐다. 진압 과정에서 퇴로를 열어주지 않고 모조리 검거하려는 특전사 병력의 과잉 진압에 광주 시민들은 예비군 무기를 들고 맞섰고, 전남도청은 학생과 시민군에 의해 점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광주 연락 임무라도…”

    한편 서울 거여동 특전사령부에는 정적이 흘렀다. 예하 여단이 광주 등 예하 부대로 작전 배속된 후 사령부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보안반장(필자) 등 일부 지원부서가 남아 있었다. 상황실에는 예하 여단의 일일 상황보고만 있을 뿐 작전 상황은 결과만 보고됐다.

    5월 18일 아침 상황실에 “어젯밤 행방불명된 병사의 시체가 인근 하수도에서 발견됐는데,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러한 인사 사고는 작전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정호용 사령관이 대처해야 했다. 필자는 “이 사건은 광주사태 수습과 부대 사기를 위해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급부대 지휘관(중대장, 대대장)이 상급부대(여단장, 사단장, 지역관할 계엄사령관) 지휘관의 승낙을 받아 병사 개개인의 생명보호 차원에서 실탄을 지급했고, 군인들은 실탄 지급을 발포 명령으로 인식해 5·18의 희생이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앞서 5월 10일 특전사 작전참모 장세동 대령과 작전과장 박중환 중령 등 작전팀이 광주로 떠나고, 5월 16일 예하 모든 여단이 타 부대로 작전 배속되자 정호용 사령관은 아무 임무 없이 특전사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병사 실종 사건’ 발생 3~4일이 지난 시점에 ‘북한의 광주 사건에 관한 방송을 보고 유무선이 감청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겼다.

    필자는 정호용 사령관에게 육군의 유무선 통신을 억제하고, 광주에 연락 임무를 띠고 헬기로 현장을 다녀와서 계엄사령관과 보안사령관에게 상황을 보고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권을 잡는 것이 사실상 확정된 데다, 정 사령관은 1979년 12·12 때도 이렇다 할 역할이 없었으며, 광주 사건과 관련해서도 아무런 역할 없이 사무실을 지켰다가는 후일 곤란을 겪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마침 북한군의 보안 감청이 우려됐기에 정 사령관이 군의 유무선 통신을 중단시키고 광주 현장과 계엄사·보안사 간에 연락 임무라도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정 사령관은 육군항공대에서 헬기 2대를 지원받아 광주를 다니면서 연락 업무를 하게 됐다.

    그런데 사건 발생 8년 후 노태우 대통령 집권 시기에 국회에서 광주 청문회가 열리자 5·18의 책임자로 정호용 장군이 지목됐다. 이후 그는 ‘발포자’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하지만 그는 5·18 당시 작전 지휘를 할 자격과 권한도 없었을 뿐 아니라 광주 현장에 머물지 않고 헬기로 광주 현장에 다녀오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정호용 사령관은 당시 31사단장이던 정웅 소장의 증언에 의해 광주 사건의 원흉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대권 물려받을 수도 있는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매우 밀접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군인 시절 노태우 장군은 전두환 장군의 책사(策士) 노릇을 했고, 1978년 노 장군이 전 장군의 뒤를 이어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물려받았으며, 12·12 때 협력했고, 1980년 8월 후임 보안사령관, 1988년엔 후임 대통령이 돼 정권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들은 내면적으론 불편한 관계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두 사람은 특히 노태우 장군이 대통령이 된 뒤부터 적대적 관계로 변했다. ‘신동아’ 6월호에 실린 전두환·이순자 인터뷰에 따르면 이순자 여사는 “대통령직을 마친 후 백담사로 들어갈 때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생명의 위험을 느꼈다”고 한다. 전-노의 사이가 실제로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두환은 단순하면서 외향적이고 선이 굵은 보스 기질로 신의를 중시하는 반면, 노태우 장군은 두뇌가 비상한 조조 같은 인물이었다. 이기적이고 내성적인 성품으로 명예욕과 시기, 질투심이 강해 손위처남인 육사 동기 김복동 장군에게도 경쟁의식을 가졌다. 이에 대해서는 전두환뿐 아니라 동기생 손영길, 정호용 장군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김복동 장군 가족 역시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최근에 확인할 수 있었다.

    1980년 6월 중순 전두환 장군은 후임 보안사령관 자리를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제안을 받은 정 사령관은 “노태우가 있지 않으냐”며 사양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자리는 매우 중요하다. 대권을 이어받을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호용 사령관은 이 제안을 받은 후 고심하면서 필자와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다. 정 사령관은 노태우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군인의 길이 아닌 옆길(정보부대)로 나가지 않겠다는 소신이 있었다. 필자는 “의리보다는 국가 장래를 생각해 더 중요한 보직을 맡아 헌신하는 게 바람직하고, 보안사령관이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자리가 아니다”고 설득했다. 한 번은 작심하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들이댔다.

    “정 사령관이 이 자리를 거절하면 보안사령관이 된 노태우는 앞으로 당신의 앞길을 막으면서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거다. 계속 당신을 견제할 것이다. 이건 생사가 달린 결정이고 이 자리가 다음 대권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하시라.”


    鄭, 보안사령관직 사양

    3주쯤 지난 1980년 7월 초, 정 사령관은 마지막 제안을 또 거절했다. 다음 날 아침 정 사령관은 필자에게 “어제 전두환 장군과 보안사령관직에 대한 결말을 냈는데, 보안사령관 후임을 노태우에게 양보했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토록 여러 번 간청했는데 정말 섭섭하다. 이젠 나도 죽고 사령관도 다 끝났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필자의 언행에 놀란 그가 옷깃을 붙잡았다. 정 사령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전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저와 이야기했던 것 어떻게 조치가 되었습니까.”

    “당신이 안 하겠다고 해서 노태우에게 통보했는데 왜 그러지요?”

    “….”

    “아, 왜 그러냐니까….”

    “알겠습니다. 그냥 여쭤본 겁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필자는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정 사령관이 “노태우 장군이 내게 그렇게 나쁘게 할 사람이 아니야. 당신이 잘못 생각했어”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필자는 그에게 “그럼 노태우를 ‘의리 테스트’로 확인해보자”고 제안했다.

    ‘테스트’에는 김복동, 노태우, 정호용 장군과 김윤환 전 의원 등 경북고 동기생들이 참여했다. 이 모임의 최상급자는 1973년 준장으로 진급한 김복동 장군이었다. 그의 여동생 김옥숙 씨는 노태우 장군의 부인. 따라서 손위처남이자 최상급자인 김복동 장군이 상석에 앉는 게 당연했다. 필자는 정 사령관에게 노태우 장군의 우정과 의리를 테스트하기 위해 이렇게 해보라고 조언했다.  

    “정호용 사령관이 노태우 보안사령관 취임 축하를 위해 4명의 동창생을 음식점으로 초대하고, ‘오늘은 노태우 보안사령관 영전을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으니 노 사령관이 김복동 장군보다 상석에 앉는 것이 좋겠소’라고 제안하라. 이때 노 사령관이 김 장군에게 상석을 양보하면 필자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고, 만약 김복동 장군을 무시하고 상석에 앉는다면 필자의 말이 맞는 것이다.”



    술상 뒤엎은 김복동

    정 사령관은 “노태우가 보안사령관이 됐다고 김복동 장군을 제치고 상석에 앉을 리가 없어”라고 했다. 주말 저녁 서울 한남동 ‘향교’에 정호용, 김복동, 노태우, 김윤환 4명이 앉았다. 정 사령관이 노 사령관에게 상석을 권하자 그는 두말없이 상석에 앉았다. 상관인 김복동 장군이 하석에 앉게 된 것을 확인하고 나는 음식점을 떠났다.

    김복동 장군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전두환 사령관보다 군번이 빨라 정규 육사 출신 중 제일 상관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전 사령관에게 한 번도 ‘형님’이라고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몇 시간 후 밤 늦은 시간에 음식점 마담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김복동 장군이 상을 뒤엎는 바람에 술자리가 난장판이 돼버렸어요. 실장님(김충립)이 오셔서 정리를 좀 해주세요….”

    다음 날 아침 정호용 사령관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는 보안사령관직을 노태우 장군에게 양보한 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기미도 역력했다. 이 술자리가 있은 지 3주 뒤 노태우 사령관은 10·26사건의 책임을 물어 김복동 장군(10·26 당시 경호실 작전차장보)을 전역시키려 했지만, 정호용 사령관이 나서 김 장군을 육사 교장으로 승진 발령나도록 도왔다. 2012년 봄 정호용 장군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당시 노태우를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것을 후회한다. 그때 당신(필자) 권유대로 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비슷한 시기, 기억에 남는 인물이 고건 전 국무총리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내각을 구성하고 있을 때 필자는 정 사령관에게 “국민통합과 5·18사건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차원에서 내각을 짤 때 호남 인사 3, 4명을 장관으로 임명하도록 건의하라”고 조언했다.

    며칠 후 정 사령관은 “좋은 분이 있으면 찾아보라”고 했고, 필자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어 고건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을 추천받았다. 그의 경기고 동창인 조내벽 라이프그룹 회장이 자리를 주선해 정 사령관, 김윤환 전 의원과 함께 음식점에서 상견례를 했고, 고 수석은 입각에 동의하면서 건설부 장관을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정 사령관은 전 보안사령관과 의논한 결과 그를 교통부 장관에 임명할 것이라고 했고, 필자는 이를 고 수석에게 전달했다. 이외에 필자는 목포 출신 박성철 씨 등의 추천을 받아 최영철, 이도선 씨 등을 추천했는데, 최영철 전 의원은 5공화국 시절 국회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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