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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조선족 항일투사 李敏여사의 ‘60년만의 증언’

  • 이원섭 한겨레신문 논설실장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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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측과 연락이 없는 상태에서 월경했기 때문에 소련군에 억류되어 취조를 받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주보중 2로군 총사령과 이조린 3로군 총사령이 신분을 보장해 풀려난 것으로 중국측 자료에 나와 있다. 주보중의 2로군과 이조린의 3로군 주력부대도 그뒤 국경을 넘게 되는데, 3로군 가운데 북만주의 김책은 한참을 더 버티다 1943년 말 국경을 넘어 1944년 1월에 하바로프스크에서 합류한다.

소련령에 들어온 동북항일연군은 한때 ‘동북항일연군교도려’란 이름으로 있다가 ‘88특별저격여단’이란 이름으로 소련 赤軍에 편입한다.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과 벌일 일전에 대비하고 향후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펼치기 위해 일본군에 쫓겨 국경을 넘어온 항일투쟁 세력들을 지원했던 것이다.

88여단의 위상을 놓고 동북항일연군과 소련측 사이에는 큰 갈등이 있었다. 소련측은 동북항일연군 조직을 해체해 소련군 각 부대에 나누어 편입시키려고 했던 반면에, 항일연군측은 중국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독자적인 조직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기 때문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형식상 소련 적군에 편입해 각종 지원을 받되, 항일연군 조직을 그대로 유지해 독자적 위상을 갖도록 결정됐다. 항일연군측의 주장이 많이 반영된 셈이다. 이 과정에 소련측의 대표자였던 왕신림(王新林·일종의 암호명으로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사람이 바뀔 때마다 제2대 왕신림, 제3대 왕신림으로 불렸다)이 교체되는 혼란을 겪기도 했다.

88특별여단의 주요 지휘부는 여장 주보중 소좌(후에 중좌로 승진), 정치 부여장에 이조린 소좌, 부여장 시린스키 소좌, 참모장은 샤마르첸코 소좌, 부참모장은 최용건 대위로 사령부가 구성됐다. 단위 부대로 제1교도영은 1로군을 기초로 편성돼 영장 김일성 대위, 정치 부영장 안길 대위, 부영장 마리체프로 구성됐고, 제2교도영은 2로군 2지대를 기초로 편성돼 영장 왕효명, 정치 부영장 강건 상위(후에 대위로 승진), 부영장 아다모프였다. 제3교도영은 3로군을 중심으로 편성돼 영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허형식, 정치 부영장은 역시 도착하지 않은 김책, 부영장은 사포지니크였다. 그리고 제4교도영은 2로군 5지대를 중심으로 편성돼 영장 시세영, 정치 부영장 계청, 부영장은 지레노프였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이른바 부(副) 자리를 소련군인들이 차지했다.

그러나 88여단은 오랜 투쟁을 통한 단결력을 과시해 제2로군 총사령이던 주보중의 지휘 아래 제3로군 총사령이던 이조린이 함께 이끌었고 부참모장이던 조선인 최용건이 이들과 주로 논의했다고 한다. 이조린은 부인이 죽자 조선족 김백문과 재혼했는데, 김백문은 아직 생존해 있으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한다. 최용건은 주보중과 중국 운남 군관학교를 같이 나온 인연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항일투쟁 때도 줄곧 주보중 밑에서 참모장으로 일해 부대 안에서 각종 실무를 관장하고 조정하는 실력자였다고 한다.



제1교도영장을 맡은 김일성은 직속 부하가 많은데다, 제1로군 지도부가 모두 일본군에 잡혀 죽고 살아남은 지휘자 가운데 직책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사실상 1로군을 대표하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1·2·3로군을 고루 배려하고, 정치적으로 중국·조선인 간 갈등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주보중은 김일성을 각별히 대우했다. 주보중은 중요한 문제를 이조린, 최용건, 김일성과 주로 상의했는데, 조선족과 상의할 민감한 일이 있으면 김일성과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들은 김일성이 소련군에 의해 갑자기 세워진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밖에 조선인 가운데 간부급으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김책이 거물급이었고, 김일성과 함께 생활한 안길 대위, 주보중 부하로 신임이 각별했던 강건 상위가 어린 나이에도 중책을 맡았으며, 김일성과 보천보 전투를 함께 치른 최현 상위가 두각을 나타냈다.

김정일 백두산 출생설의 내막

이민은 88여단에서 생활하면서 김일성의 부인으로 여성 빨치산 대원 중 맏언니 격인 김정숙을 친언니처럼 따르면서 매우 가깝게 지낸다. 이민은 김정숙과 같은 소대에서 생활하고 장백지구에 지하공작도 같이 다니고 학습과 연예활동도 함께 했다. 여성 대원들은 낮에는 사격 총검술과 함께 주로 무전교육을 받았으며, 스키훈련 낙하산훈련도 받았다. 부대 생활에서 여성 대원들은 막사를 따로 썼기 때문에 밤에도 김정숙과 한 막사에서 같이 지냈다. 김정숙처럼 대원 가운데 결혼한 사람이 있더라도 남녀가 각기 막사를 따로 쓰며 헤어져 생활했다.

김정숙은 조용한 편이었으나 매우 자상한 성격이어서 어린 이민에게 잘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민은 김일성의 첫째아들 유라(김정일의 어릴적 소련식 아명)와 둘째아들 슈라(1947년 멱감다 익사) 형제의 어릴 적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김정숙이 낮에 훈련받으러 갈 때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겼다가 일과후 데리고 오곤 했다는 것이다. 이민은 김정일이 어릴 때부터 군사놀이를 즐겼다고 회상했다.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나 연구가들은 김정일 신비화 우상화 작업의 하나로 치부하며 무게를 두지 않는다. 김정일이 태어난 1942년이면 김일성이 소련령 하바로프스크 훈련기지에 있을 때인데 어떻게 백두산에서 탄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 여사는 다르게 말한다. 김정숙이 41년 초여름 여대원들과 함께 백두산 밀영에 가서 조선국내와 장백지구 혁명조직들을 지도하는 공작사업을 했는데, 다음해인 42년 2월 그곳 귀틀집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훈련기지에서 통신원을 통해 전해 듣고 다같이 환호성을 올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당시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민은 김정숙을 직접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전해 들었다는 김정일 백두산 출생이야기가 어느 정도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지 가늠하기는 힘들다. 이민은 이듬해인 43년 봄 훈련기지에서 김정일을 품에 안고 온 김정숙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하바로프스크 생활은 이민에게 중대한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왔다. 인생의 동반자로, 정치적 동지로 50년 이상 해로하면서 일생을 함께 지낸 남편 진뢰를 그곳에서 만나 결혼했기 때문이다. 진뢰는 이민보다 7살 위였다.

이민 준위와 중국인 진뢰 소위가 연애한다는 소문이 부대에 퍼졌다. 항일투쟁을 하는 부대에서 남녀간 문제는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자칫하면 혁명열기와 군기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비밀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이민이 진뢰 소위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쫙 퍼지자 이민은 상사에게 불려가 엄한 추궁과 비판을 받았다. 상대가 중국인이어서 더욱 설명하기가 난처했다.

김일성의 후원으로 진중결혼

한때 이민의 소학교 교장이던 최용건도 이민을 불러 크게 꾸중하면서 마음을 되돌리려고 애를 썼다. 조국이 광복하면 다같이 고국에 돌아가 함께 지내야 할 텐데, 중국인과 결혼해 혼자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느냐고 간곡히 말렸다고 한다. 막상 최용건 본인은 중국인 왕옥환과 결혼했는데, 이처럼 간곡히 말렸던 것은 이민의 나이가 스물밖에 안돼 진뢰와 차이가 나기도 했지만, 진중생활에서 군기를 확립한다는 뜻이 컸을 거라고 이민은 설명한다.

더욱이 진뢰는 중국공산당 내부 노선투쟁에서 소수파인 조상지파에 속한 거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주위의 반대가 컸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압력과 추궁을 받으며, 이민과 진뢰는 일제가 패망하면 그때 자유롭게 만나자고 약속하고 교제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녀 관계가 무 자르듯 되는 것이 아니어서 상심이 매우 컸다.

그런데 이들의 결합에 김일성·김정숙 부부가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진뢰와의 관계가 젊은이들이 흔히 지나가듯 무책임하게 연애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아는 김정숙이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김일성에게 말해 곤경을 벗어나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 한다. 김일성이 이 문제를 다룬 간부회의에서 동지간의 진정한 사랑은 혁명열기를 더욱 높일 수 있으며, 중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조·중우호에도 도움이 된다고 적극 감싸준 덕분에 이례적으로 진중결혼 허락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마침 진뢰는 김일성 밑에서 정치교양원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양쪽 모두를 잘 아는 김일성이 적극 나섰을 것이다.

1943년 섣달 그믐날 진뢰와 이민은 갑자기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민의 회고에 따르면, 당에서 부르더니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로 결정했으니 그날로 당장 혼례를 치르라고 했다. 이날 함께 결혼 명령을 받은 것이 최광·김옥순 부부와 다른 한쌍이었다. 조선과 중국의 유격대원들이 참석해 축복하는 가운데 세 쌍의 유격대원들이 군복 가슴에 꽃을 달고 한날 한시에 결혼식을 올렸다. 김일성은 축사를 통해 어려운 투쟁 속에서 맺은 사랑은 길고 영원해야 한다면서 사랑이 깊을수록 투쟁을 더 잘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최광은 광복 후 조선인민군에 들어가 계속 군생활을 했으며, 1988년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다. 한때 실각했다가 오진우가 사망하자 95년 10월 인민무력부장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1년여만에 사망했다. 김옥순은 같은 유격대원이던 첫남편이 죽자 최광과 재혼했는데, 성격이 활달하고 똑똑해 북한 여맹위원장을 지냈다. 진뢰-이민 부부는 같은 날 결혼식을 올린 인연으로 최광-김옥순 부부와 특히 가깝게 지냈다. 이들은 식을 올린 뒤 부대에 하나뿐인 병실로 가서 신방을 꾸몄는데, 방이 하나 뿐이어서 방 가운데 줄을 매달고 천을 늘어뜨려 방을 둘로 나누어서 첫날밤을 보냈다.

김일성과 최용건·김책의 위상

최광의 처 김옥순은 김정숙과도 매우 가까웠다. 1949년 김정숙이 해산하다 죽고, 김일성은 공무가 바빠서 가정을 돌보기 어려웠을 때, 김정숙의 부탁을 받아 김정일을 돌봐준 것이 김옥순이었다고 이민은 증언한다. 김정일이 유치원에 다닐 때도 김옥순 집에서 다녔기 때문에 사이가 각별했다는 것이다. 한때 숙청됐던 최광이 재기해 인민무력부장이 됐을 때 김정일과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할 것으로 알았는데 일찍 죽고 말았다고 이민은 아쉬워했다.

김일성이 광복 후 나이나 투쟁경력으로 볼 때 한참 선배인 최용건이나 김책을 제치고 무리의 대표로 떠오른 데 대한 이민여사의 분석은 시사하는 바 크다.

김일성이 1937년 보천보 전투를 통해 국내에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고, 성격이 활달해 리더십이 있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독립된 부대를 오래 거느리고 있어서 직계 조선인 부하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일성이 동포들이 많은 동남만주(1로군)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길동지역(길림성 동쪽 북만주 지역·2로군)에서 활약한 최용건이나 더 북쪽인 북만주(3로군)지역의 김책에 비해 부대원 가운데 조선인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김책이나 최용건은 중국인 부하들이 많았으며 참모 역할을 많이 했기 때문에 직계 부하들이 적었다고 한다.

당시 88특별여단의 조선인은 많을 경우 300명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180명 가량이 김일성 부대원이거나 김일성 부대와 합동 군사작전을 자주 폈던 1로군 소속이었다. 이민 여사는 김일성이 김책·최용건을 제치고 떠오른 또다른 이유로 이들 각자와 소련 및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도 작용했으리라고 추측했다. 항일혁명 투쟁에 일찍이 뛰어들고 중국공산당에도 앞서 입당한 최용건과 김책은 독자적 군사활동을 주로 펴온 김일성보다 훨씬 중공당과 가까웠다고 한다. 이에 소련군이 최용건이나 김책을 꺼리고,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비슷한 서열로 리더십이 있는 김일성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증언했다. 더욱이 김책은 소련이 강력히 권하는데도 88여단에 합류하기를 거부하다 가장 뒤늦게 들어와 껄끄러운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김책은 김일성에 비해 9살이 많은 1903년생인데, 사리판단이 공정하고 신중해 특히 중국공산당 내에서 신망이 높았다. 그는 중국인들이 많은 북만주의 3로군 지역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며 항일투쟁을 벌였는데, 평소 언행이 신중해 중국인들도 매우 어려워했다. 3로군 내부에서 투쟁노선 등을 놓고 갈등이 생기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 김책이 조정역을 훌륭히 해내며 처신을 바로 해서 중국공산당 안에서 평가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당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연안 중국공산당 본부와 긴밀한 연락이 안 되는 상태에서, 초기에 3로군 총지휘를 맡았던 조상지가 중국공산당 본부의 노선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행동을 하려고 해서 이조린 김책 등과 마찰이 심각했는데, 김책이 이조린을 지지하면서도 일을 무난히 수습해 위기를 넘기게 됐다는 것이다. 이민 여사는 굳이 비유하자면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총리와 성격이나 역할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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