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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은 있어도 장애인의 삶은 없는 나라

한국의 ‘오체불만족’ 윤봉근의 현장고발

장애인은 있어도 장애인의 삶은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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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돕는다고 전국을 누비다 보니 나도 재활에 관한 한 돌팔이 수준을 넘어섰다. 그래서 가끔 장애 관련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받는 영광도 누린다. 연아와 그 어머니를 만난 것은 3년 전 인천 연세대 재활병원에서 주최한 세미나에서였다. 내 일은 세미나가 끝난 뒤 참석한 사람들(주로 장애아를 둔 부모)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연아 어머니는 누구보다 열심히 질문을 했고 꼼꼼히 받아적는 성의를 보였다.

연아는 뇌성마비 장애에 재생 불량성 빈혈증세가 있는 열세 살 소녀였다. 게다가 청각과 시각이 모두 손상돼 잠시도 혼자 내버려둘 수 없는 중증이었다.

연아네 집은 아버지가 IMF사태로 일자리를 잃은 데다 연아 치료비로 전세금까지 모두 써버려 월세방에 살고 있는 극빈자였다. 하지만 딸을 살리려는 연아 어머니의 의지는 강했다. 차비가 없을 때는 연아를 업고 서너시간씩 걸어 무료진료 병원을 오갈 정도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지극 정성도 부질없이 지난해 연아는 감기 합병증세 때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연아네가 좀더 빨리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되도록 도와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연아가 죽은 후 연아 부모는 또 한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딸의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망가진 연아의 몸에서 기증할 수 있는 장기는 안구뿐이라는 말에 그들은 다시 절망했을 것이다.

그후로도 연아 부모는 딸이 다니던 학교에서 모아준 성금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고 고스란히 내게 보내왔다. 나는 그중 절반은 길벗봉사회에 보내고, 나머지는 우리 ‘해처럼 달처럼 사랑의 집’ 운영비에 보탰다. 연아는 먼저 하늘나라로 갔지만 아직 이 세상에 남은 우리에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떠났다.



세상에 온 지 일주일만에 버려진 아이

그 힘들다는 하사훈련을 함께 받고 같은 군대에서 동고동락한 유영준 하사가 안타까운 사연을 들고 나를 찾아온 것은 3년 전이다. 유하사는 군대에서도 나의 고마운 동료였지만, 사회에 나와서도 장애인이 된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진정한 친구다.

그가 전한 소식은 지방의 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버려진 기형아를 보았다는 것이다.

자기 일도 아닌데 내게 부탁하면 무슨 방법이 있을 거라 믿고 연락을 해준 그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원래 아이를 좋아하던 나는 장애인이 된 후 유달리 장애아들이 귀엽다. 아무리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라도 어딘가 한 군데는 예쁜 구석이 있다. 내게는 항상 예쁜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유하사는 나만 믿고 저녁 9시가 다 되어 아이를 안고 왔다. 조산인 데다 한쪽 팔은 없고 그나마 남은 팔에는 손가락 3개가 꼬물거리며 달려 있었다. 또 합병증이 있는 듯 전반적으로 건강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이미 나 때문에 장애에 익숙하지만 아기가 너무 안타까워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마냥 눈물만 흘릴 수는 없었다. 제일 급한 것은 아기를 돌볼 용품들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유하사는 아이를 돌보는 데 써달라며 10만원을 맡기고 돌아갔다. 나는 아내를 데리고 부랴부랴 유아용품 가게로 가서 젖병, 속옷, 기저귀, 장난감, 분유 등을 챙겼다. 문득 내 딸이 태어났을 때는 40일 동안 사경을 헤매느라 이런 것 하나 챙겨주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그 아쉬움에 분풀이라도 하듯 나는 이것저것 사들고 돌아와 내 옆에 아기를 눕혔다. 그날밤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뜬 눈으로 지샜다. 그리고 이 아이를 낳고 아기엄마는 얼마나 놀라고 고통 받았을지 생각했다.

아이는 시설로 보내는 것보다 가정을 찾아줘야 한다는 확신이 섰다. 그때 선뜻 입양 의사를 밝힌 것이 오상식씨다.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오씨는 한때 미8군에서 하니보이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던 가수였다. 하지만 버거씨병으로 핏줄이 졸아붙어 팔다리가 썩어들어가자 손가락 열 개를 모두 자르고, 다리는 무릎 위까지 잘라내는 대수술을 했다. 아내와는 이혼을 하고 대학입시를 앞둔 딸과 어렵게 살고 있는 상식이 형님이 입양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뜻밖이었지만 아이는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대로 추진했다. 아이는 오믿음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세 살이 된 믿음이는 이제 아버지 집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잘 자라고 있다. 팔이 없어 중심이 잡히지 않아 자주 넘어지다보니 머리에는 항상 상처자국이 남아있지만 얼마나 씩씩하고 사랑스러운지 그 동네에서 인기 스타가 됐다.

이제 믿음이는 남은 손가락 3개의 기능을 강화하는 수술을 할 것이다. 또 일곱 살이 되면 요도장애를 제거하는 수술도 할 예정이다. 이 모두 믿음이를 아끼고 도와주는 분들의 후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남은 것은 교육이다. 씩씩한 믿음이를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키울까 생각하는 것도 나의 행복한 고민이다.

차라리 법대신 주먹을

복지에 관련된 일을 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부딪히는 것이 ‘법’이다. 적용되는 법은 하나인데 적용하는 사람의 양심과 복지에 대한 관심 정도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그러면서 늘 느끼는 것은 무슨 법이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가라는 점이다.

사회복지법은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면 담당자들은 마치 동냥 주듯 고자세를 취하며 가뜩이나 주눅든 장애인들에게 법을 들이민다. 게다가 복지법이 개정되어 시행되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직이 자주 바뀌어 미처 업무파악이 안됐기 때문이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두번 세번 관공서를 드나들며 통사정을 해야 하는 장애인들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이다.

그날은 급한 장애인들을 돌보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오던 상수형님을 돕기 위해 D군 사회과를 찾아갔다. 먼저 형의 어려운 생활을 설명하고 생활보호대상자로 선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담당자의 대답을 듣기 위해 눈치를 보며 한참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선처를 부탁한다고 몸을 조아렸지만 움직이는 병원인 내 몸은 점점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좀 빨리 처리해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들은 직원이 다가와 “안된다면 안되는 줄 알지, 당신이 뭔데 안되는 것을 해달라고 하느냐”며 깔보는 듯한 자세로 시비를 걸었다. 순간 대답할 말을 찾아 머뭇거리자 그의 표정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나는 곧 “당신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고 합시다. 지나가던 사람이 팔만 내밀면 구할 수 있는 상황인데 법 절차대로 한답시고 구조대에 신고한 후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느냐”고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이내 사무실 안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소란 속에서 상수형님 가족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더욱 몸을 움츠린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더 속이 상해 결국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라고 당신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야.”

그제서야 쳐다보지도 않던 과장이 나서며 부하직원을 나무랐다. 그것도 내게는 못마땅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법보다 주먹을 앞세우면 일처리가 조금은 빨라질까?

신문가판대만 당첨됐어도…

오상식씨는 장애인이 된 뒤 과천에 ‘빛과 사랑 선교회’를 만들어서 거의 매일 기도회를 열었다. 오씨는 여기서 자신의 장기인 노래와 간증으로 장애인들을 위로했다. 마침 기도회에 참석한 30대 중반의 김기석씨를 만났다.

큰 키에 당당한 체격을 지닌 청년이었지만 7년 전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목발에 의지해도 중심이 잡히지 않아 걸을 때마다 심하게 뒤뚱거리는 편마비 증세가 있었다. 덩치가 커서인지 흔들리는 걸음걸이가 더욱 불안해 보였다. 그 광경을 보노라면 사고 전 건실한 대기업 사원이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더욱이 돌봐줄 가족도 없이 외롭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차에 김기석씨가 집으로 찾아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항상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고마운 이들 속에 있는 행운아이기도 했다. 아버님이 화재로 불행하게 돌아가시기 전 거동이 불편한 아들을 위해 자동차 한대를 사주셨고 300만원에 선뜻 집을 빌려준 고마운 집주인도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소박한 꿈이 있다면 적게나마 고정적인 수입을 마련해 결혼을 하는 것이다. 이미 같은 연립주택 위층에 살고 있는 천사표 아가씨가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주고 청소며 빨래도 도와주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건은 딱 하나. 그가 적은 돈이라도 고정적으로 벌게 되면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얼마 전 지하철공사에서 모집한 신문가판대 추첨에 당첨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나를 찾아온 것도 어떻게 하면 추첨에 붙을 수 있느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는 나는 다음 기회에 응모해 꼭 붙으라는 격려밖에 할 수 없었다. 아쉬움만 더한 채 삐뚤빼뚤 걸어 차에 올라타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의 소원이 참 소박하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거리에서 불안정한 걸음걸이에 어눌한 말투로 물건을 파는 장애인들을 만난다. 그런 행위가 동정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강동수씨는 서울 근교 상가를 돌며 공업용 본드를 판다. 그는 한때 직업군인으로 남다른 체력을 자신하던 사람이다. 그날도 위병소를 나서다 뺑소니차에 치여 심한 편마비에 언어장애를 갖게 됐다. 실제로 그가 하는 말은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어눌해서 본드를 팔 때는 자신의 처지를 종이에 써서 말을 대신하곤 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돈을 버는 강동수씨가 못마땅했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처지도 못 됐다. 직업군인으로 당당하게 살던 그가 본드 하나만 사달라고 쓴 종이를 사람들에게 돌릴 때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의 장애가 조금만 경미했다면 좀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강동수씨가 사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자살로 한 많은 생을 마친 김영배씨의 유언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고 실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인지 아는가’라는 대목이 늘 머리 속을 맴돈다.

조금이라도 운동능력이 있는 장애인이라면 결코 빵을 입에 넣어달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한된 능력이나마 활용하면서 이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일자리’인 것이다. 요즘 자녀를 키우면서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탈무드’의 말씀을 실천하는 분이 많은 것 같은데, 왜 장애인 정책은 항상 물고기 주는 수준(그것도 충분치 않지만)에 머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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