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man을 친근감을 표하기 위해 썼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77세(1924년생)의 노인이고, 부시 대통령은 54세(1947년생)의 장년이다. 격식을 따지지 않는 미국이라고 하더라도, 스물 세 살이나 많은 이를 this man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반대로 김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이 양반’이라고 했다면, 미국의 조야는 어떻게 나왔을 것인가?
“이 양반의 리더십에 찬사를…”
this man은 3월7일 양 정상이 기자회견을 하러 백악관의 오벌 오피스로 나온 후, 부시 대통령이 기자단을 향해 인사하는 과정에 나왔다. 기자는 미국측이 녹취한 이 기자회견록을 입수했다. 이 녹취록에서 this man이 포함된 부시 대통령의 인사말을 우리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기자단을 향해) 모두 들어오셨나요? 김대중 대통령을 오벌 오피스에 모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훌륭한 토론을 했고, 양국 사이의 굳은 유대를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의제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제 그 의제들에 대한 질문에 성심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저는 북한 주민에게까지 도달한 이 양반의 리더십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but first let me say how much I appreciate this man’s leadership in terms of reaching out to the North Koreans). 그(김대통령)는 지도자이고 그는…, 그리고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향한 그의 비전을 놓고 매우 솔직한 토론을 가졌습니다.”
지난해 6월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고, 12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까지 받는 김대통령을 부시 대통령은 왜 this man으로 호칭한 것일까. this man은 한·미 관계가 악화될 것을 예언하는 조짐이 아닐까? 현대사는 한·미 관계가 악화되면, 그 피해는 언제나 한국이 입어 왔음을 보여준다.
한·미 관계가 특히 나빴던 것은 이승만(李承晩)·박정희(朴正熙)·김영삼(金泳三) 정권의 말기였다. 이대통령은 6·25전쟁 말기 미국 몰래 반공포로를 석방해, 북한·중국과 정전협상을 벌이던 미국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끊임없이 북진통일을 외치며 이승만식 ‘벼랑끝 전술’을 구사했다. 미국으로서는 이 위험한 노인을 달래기 위해 많은 당근을 제시했는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60만 한국군을 현대화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외교에서는 귀신’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대통령도 국내 지지기반이 약해진 후, 미국이 가해온 보복에는 맥없이 무너졌다. 1960년 3·15부정선거를 기화로 전국적으로 학생 시위가 일어나자, 매카나기 주한미국 대사는 이대통령을 만나 단도직입으로 하야를 거론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대통령은 경무대(청와대)를 떠났는데, 훗날 이 사건은 ‘4·19 학생의거’에 의한 승리로만 기록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카터 미국 대통령과 아주 사이가 나빴다. 카터 대통령은 미국의 CIA가 부정한 공작을 한다고 보고, 정보기관 업무에 빛을 비추는 ‘햇볕정책(sunshine policy)’을 구사했다. 정보기관의 민주화를 추진할 정도로 도덕주의자였던 카터는, 유신 강권 정치를 펼치고 있던 박대통령을 아주 싫어했다. 반대로 박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카터를 국제정치가 뭔지도 모르는 애숭이로 취급했다. 이로써 한미 관계가 나빠지자 79년 들어 산업화 초기 단계를 걷고 있던 한국 경제에 먹구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한미관계와 경제위기
그 와중에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와 가까이 지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대통령을 저격(10·26사건)함으로써 박정권은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까지도 한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한·미 관계의 악화가 경제 위기를 초래한다는 사실은, 4·19와 마찬가지로 10·26이라는 엄청난 사건 때문에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한다며 중앙청을 때려부수고,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동북아에는 4강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을 포함해 5강이 있다”고 기염을 토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외교에는 가장 무능했다. ‘버르장머리’ 발언으로 한·일 관계가 삐걱거리고 외교관 맞추방으로 한·러 관계가 나빠졌다. 여기에 오락가락한 대북정책으로 한·미 관계마저 나빠진 상태에서 맞은 것이 바로 IMF 경제위기다.
때문에 새로 들어선 김대중 정부에서도 한·미 관계가 나빠진다면, 실업자가 100만명을 돌파한 지금 한국은 또다시 경제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한미 관계가 꼬일 것’같은 전조(前兆)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48)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미 드러났다. 방한 일정을 하루 더 늘리기 위해 2월26일 밤 서울에 도착한 푸틴 대통령은 다음날 한·러 정상회담을 갖고 7조로 구성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공동성명에서 가장 문장이 긴 것이 5조다. 5조 문안에는 문제가 된 ‘탄도탄 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을 거론한 부분이 있는데, 옮기면 이렇다.
대한민국과 러시아 연방은 1972년 체결된 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 핵무기 감축 및 비확산에 대한 국제적 노력의 중요한 기반이라는 데 동의하였다. 양측은 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가운데 전략무기감축협정-Ⅱ의 조기 발효와 완전한 이행, 그리고 전략무기감축협정-Ⅲ의 조속한 체결을 희망하였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조약(이하 ABM 제한조약)을 ‘전략적 안정의 초석(cornerstone of strategic stability)’이라 한 부분과, ABM 제한조약을 ‘보존(preserving)’하고 ‘강화(strengthening)’키로 했다는 부분이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패트릭 타일러(Patrick E. Tyler) 기자는 이 표현에 주목해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가 1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 한국 정부는, 미국이 추진 중인 NMD를 둘러싼 논쟁에서 공개적으로 러시아 편을 들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뉴욕타임스’가 이렇게 보도하자, 국내 언론들도 한국이 NMD 문제와 관련해 러시아를 지지해 파문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말로 한국은 러시아 편을 든 것일까? 이 의문에 답하려면 ABM 제한조약과 NMD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고, ABM 제한조약과 NMD를 소재로 미국과 러시아가 펼치는 국제정치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ABM은 Anti Ballistic Missile의 약어다. 우리말로는 탄도탄 요격미사일로 번역되는, 적 미사일을 요격하는 미사일이다. 이러한 미사일에는 미국이 개발한 패트리어트와 러시아가 개발한 S-300이 있다. 날아오는 적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미사일이라면 그보다 속도가 느린 적기는 더욱 쉽게 요격할 수가 있다. 적 미사일과 적기는 하늘로부터 날아오는 위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한국은 ABM을 하늘로부터 날아오는 위협을 막는 미사일이란 뜻으로 ‘방공(防空) 미사일’로 부르고 있다.
한국 공군은 미국이 패트리어트와 러시아의 S-300를 비교해 이중 하나를 도입하는 차기 방공미사일 도입 사업을 추진했는데, 이를 SAM-X 사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가 입찰을 포기해 현재 SAM-X 사업은 패트리어트만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 공군이 SAM-X 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ABM은 더이상 세계 초강대국만 보유하는 최첨단 무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일본과 대만은 이미 패트리어트를 도입했고 유럽은 ‘유로-SAM’으로 명명된 패트리어트를 능가하는 ABM을 독자 개발해오고 있다.
그러나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ABM은 미국과 소련만이 개발할 수 있는 최첨단 무기였다. 냉전이 첨예하던 1960년대 중반 미국과 소련은 군비경쟁을 치열하게 벌였다. 그 와중에 어느 한쪽이 실수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면 상대 또한 곧바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므로 양쪽 모두가 공멸(共滅)하게 된다. 그래서 양국은 과도한 군비 경쟁을 줄이는 협상에 들어갔는데, 이를 ‘전략무기 제한 협상(Strategic Arms Limiation Talks)’, 줄여서 ‘SALT’라고 한다.
1972년 양국은 전략무기 보유 숫자를 제한하는 SALT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때 하부 조약으로 체결한 것이 ‘ABM 제한조약’이었다. ABM 제한조약은 ‘양국은 수도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대 반경 150㎞ 이내에만 100기 이하의 탄도탄 요격미사일(ABM)을 설치한다’를 주내용으로 했다. 수도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대 반경 150㎞에 들어오지 않는 지역에는 ABM을 설치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양국은 ABM 제한조약의 유효기간은 무기한으로 하되, 어느 한쪽이 이 조약을 파기하고 싶으면 파기 6개월 전에 상대에게 통보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합의를 도출해 놓고 29년이 지나는 사이, 세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는 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다. 소련 붕괴는 ABM 제한조약을 포함한 SALT 협정 전체가 무효화할 수도 있는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소련에서 분리돼 나온 러시아가 ‘소련 승계’를 선언함으로써 이 조약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소련을 대체한 불량국가
둘째는 ‘불량국가(rogue state)’의 등장이다. 불량국가란 북한·이라크·리비아 등 미국의 통제를 무시하고 장거리 미사일 등을 수출하거나 보유하는 나라를 말한다. 불량국가는 ‘반미(反美)’ 노선을 견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개발 또는 수출하는 미사일은 정확도가 크게 떨어진다. 그런데 러시아가 보유한 미사일은 SALT 협정과 SALT를 이은 START 협정 등을 통해 줄일 수 있으나, 불량국가와는 협상 자체가 불가능해 줄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미국은 불량국가들이 보유한 핵이나 미사일 등을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 줄여서 WMD로 부는다. 미국은 조약이나 다자(多者)가 참여한 기구를 통해 불량국가가 보유한 WMD를 통제하려고 했다. WMD를 통제하는 대표적인 조약이 핵무기의 확산을 금지한 핵비확산(NPT) 조약이다. 사정거리 300㎞ 이상 되는 미사일의 수출을 금지하는 미사일 기술통제체제(MTCR)는 다자가 참여한 기구를 통한 WMD 통제에 해당한다.
그러나 북한은 이러한 조약과 기구를 보이콧했다. 미국과 대립이 첨예해지자 과거 소련의 강요로 가입했던 핵비확산 조약의 탈퇴까지 선언하면서 미국에 저항했다. 때문에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은 스타일을 구겨가며 ‘조그만 나라’ 북한과 쌍무협상에 들어갔는데, 그것이 바로 강석주 북한 외교 부부장과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의 회담이다. 이 회담의 결과물로 미국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만들어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지어주고 북한은 핵이 없다는 것을 완벽히 증명한다는 것을 주내용으로 한 ‘제네바 합의’가 탄생했다.
러시아 같은 초강대국도 아닌 조그만 ‘불량국가’ 북한과 쌍무협정을 맺은 것은 미국으로서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차에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자 바로 미국에서는 제네바 합의 파기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작금의 미·북간 긴장은 이러한 배경에서 생겨났다.
독자적으로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했으니만큼, 개발비를 뽑아내려면 불량국가는 이 무기를 수출해야 한다. 실제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해 8월12일 평양을 방문한 한국 언론사 사장단을 향해, “로켓을 개발해서 몇억 달러씩 벌고 있는데, 그것을 안할 수 있느냐. 로켓을 발사하는데 많은 돈이 들어 이란 등에 (로켓을) 판매하고 있다”며 미사일 수출의 필요성을 ‘당당히’ 강조했다.
이라크와 리비아처럼 군사력이 약한 불량국가가 대항하면, 미국은 민주-공화 정부를 막론하고 강력히 응징해왔다. 예컨대 클린턴 정부도 이라크가 북위 17도의 비행금지선을 위반하면 가차없이 전투기를 동원해 이라크를 공격했다. 리비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서만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불량국가 북한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미국이 당면한 딜레마 중 하나다.
셋째 변화는 한국 공군의 SAM-X 사업처럼, 이제 ABM은 세계 15위권의 국가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ABM 제작 비용이 크게 낮아졌다는 뜻이 된다. 가격이 낮아졌으니 미국은 더 많은 지역에 ABM을 배치할 수가 있다. ‘불량국가가 쏘는 미사일은 정확도가 떨어져 ABM을 설치하지 않은 곳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니 미국 전역에 ABM을 배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미국은 ‘국가 미사일 방어(National Missile Defense)’, 줄여서 NMD라는 것을 구상하게 되었다. NMD는 3단계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는 발사 단계에 있는 적 미사일을 요격하는 ‘발사단계요격(BPI)’이다. 불량국가나 가상적국 주변에 B747을 개조한 대형 비행기를 띄워 놓았다가, 이들 나라에서 장거리 지대지미사일을 발사하면 레이저 빔을 발사해 파괴한다. 이 방어책의 장점은, 파괴된 미사일의 탄두가 적국에 떨어져, 피해는 오히려 미사일을 발사한 적국이 본다는 것이다.
발사단계에서 요격하지 못해 적 미사일이 높은 고도까지 올라오면, ‘전구(戰區) 고고도 공역 방어’ 미사일로 요격한다. 전구 고고도 공역 방어 미사일은 영어로는 ‘THAAD(Theater High Altitude Air Defense) 미사일’이라고 한다. 전구고고도 요격미사일 망도 뚫리면 저고도 방공미사일로 요격하는데, 이것이 바로 패트리어트 미사일이다. 그런데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적 미사일을 요격하면 적 미사일 탄두 안에 들어 있던 핵과 화학성분, 그리고 파편은 미국에 떨어진다.
현재까지 나온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날아오는 적 미사일 부근에서 자폭해, 이때 생긴 파편으로 적 미사일을 파괴하는 유형이다. 따라서 이때 생긴 낙진과 파편은 미국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 미사일과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엄청난 ‘운동 에너지’로 인해 핵과 화학 성분 그리고 파편까지 다 타버려, 미국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 미국은 이러한 능력이 있는 패트리어트 PAC-Ⅲ ERINT 탄을 개발하고 있다.
3단계 방어책 중에서 1단계는 아직 페이퍼워크 수준이고, 2단계는 초기 시제품을 만드는 단계, 3단계는 마지막 시제품을 만드는 단계다. 이러한 방어수단을 개발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때문에 미국은 NMD가 완성되면 이와 똑같은 TMD를 만들어 동맹국가들도 보호해주겠다며 동맹국들에 NMD 개발 참여를 권유했는데, 현재는 일본만 참여를 약속했다. 중국과 북한 미사일의 위협 아래 있는 대만과 한국은 아직 의견을 밝히지 않은 상태고, 유럽에서는 영국만 긍정적인 의사를 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럽 국가들은 미국이 NMD를 개발한 후 과연 TMD까지 만들어 유럽을 보호해줄까 하는 의구심, 그리고 개발에 참여할 경우 개발비 부담이 과중할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지, 러시아·중국·북한처럼 NMD의 완전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美 민주-공화 모두 NMD 찬성
적잖은 독자들은 ‘미국의 공화당 정부는 NMD 구축에 찬성하고 민주당 정부는 반대한다’고 알고 있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두 정당의 차이점은, 민주당은 NMD 개발과 배치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니, NMD는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알래스카에만 주로 배치하자는 것이고, 공화당은 미국 본토에도 구축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NMD망을 구축하려면, 우선 러시아(구 소련)와 쌍무협정으로 맺은 ABM 제한조약을 개정해야 한다.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는 무너졌지만 군사적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다. 러시아가 계속해서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아직도 미국의 협상 파트너가 될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을 만방에 보여주어야 한다. 미국과 끊임없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기 위해서는 미국이 원하는 것은 일단 “노”하고 보아야 한다. 미국이 NMD망을 구축하면 러시아는 군사면에서 최강국 지위마저 놓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는 NMD에 반대하고 ABM 제한조약 개정에도 반대한다. 여기에 중국이 지원 세력으로 참여했다.
중국은 군사강국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가진 무기 중에서 미국 본토를 때릴 수 있는 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18기뿐이다. 그런데 미국이 NMD망을 구축하면 18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그 의미가 없어진다. 중국은 이런 사정 때문에 ‘숙적(宿敵)’ 러시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으면서까지 NMD 반대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력한 후보들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세불리기’를 한다. 이렇게 해서 가장 큰 세력을 굳히면 셋째로 큰 세력을 형성한 후보가 ‘한 자리’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투항해 오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15대 대선에서 나타난 ‘DJP 공조’다. 김대중(金大中)씨가 이끄는 민주당은 국무총리 등의 자리를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김종필(金鍾泌)씨가 이끄는 자민련을 끌어들여 대권을 차지했다. NMD 구축과 ABM 제한협정 개정을 소재로 한 미국·러시아 갈등이 바로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이 일찌감치 NMD 참여를 선언한 것은 강력한 우승후보인 미국에 먼저 가담함으로써 얻을 이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프랑스 등은 끝까지 “노”를 외치며 몸값을 올린 후 마지막에 가담하는 전술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
NMD망 구축 문제를 계기로 세계가 양분될 때, 세계 15위 권인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없는 우리로서는 최대한 몸값을 올려 강력한 우승후보에게 가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엉뚱한 선택을 한다면, 그 순간 강력한 우승후보로부터 엄청난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 2월27일의 한·러 공동성명과 3월7일의 한·미 공동발표문은 이런 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공동성명은 대개 회담이 있기 한두달 전부터 방문을 하는 나라의 외무부와 초청을 하는 나라 대사관이 창구가 돼, 초안을 주고 받으며 문구를 다듬는다. 한·러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러시아 외무부와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이 이러한 창구가 되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러시아는 처음부터 ABM 제한조약 개정과 NMD망 구축에 반대하는 문구를 넣은 초안을 들고 왔다고 한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2000년 7월19일부터 20일 사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갖고 11개 항으로 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러시아는 이 때 발표한 조·로 공동선언 수준으로 NMD와 ABM제한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문구를 한·러 공동성명에도 넣자고 주장한 것이다.
조·로 공동선언은 2000년 7월21일자 노동신문 등에 실렸는데, ABM 제한조약과 NMD에 대해 북한과 러시아가 합의한 사항(6항)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는 전략적 및 지역적 안정을 강화하는 것과 함께 국제 관계에서 힘의 사용 요소를 보다 약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 전략공격무기를 가일층 축감(縮減)하기 위한 기초인 1972년 요격미싸일 제한조약(ABM 제한조약의 북한식 표기)을 유지 강화하면서 전략공격무기축감조약(START의 북한식 표기)-2가 조속히 효력을 발휘하여 완전히 이행되도록 하며…
이 대목에서 눈여겨볼 것은 북한과 러시아가 ABM 제한조약을 ‘전략적 안정의 초석’으로 인정하고, 이를 ‘유지·강화’하기로 했다는 부분이다. 계속해서 6항을 옮겨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는 국제적 현실에 대한 분석 결과가 1972년 요격미싸일 제한조약 수정 계획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일부 국가들의 이른바 ‘미싸일 위협’을 구실로 삼는 것이 완전히 무근거하다는 것을 확증한다고 간주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기의 미싸일 강령이 그 누구도 위협하지 않으며 순수 평화적 성격을 띤다는 것을 확언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쁠럭형의 폐쇄적인 전역미싸일방위(NMD) 체계를 배비(配備)하는 것이 지역적 안정을 심각하게 파괴할 수도 있다고 간주한다.
이 대목의 첫째 문장은, 미국이 불량국가(공동선언에는 일부 국가로 표기)의 미사일 위협을 구실로 ABM 제한조약을 개정하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데 대해 북한과 러시아가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둘째 문장은 북한은 미국이나 한국을 위협하기 위해 미사일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순수 평화적인 목적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러시아가 인정해주었다는 뜻이 된다. 셋째 문장은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NMD망을 구축하려는 것은, 이 지역에 전쟁을 포함한 기타 불안정 요소를 불러오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경고다.
‘strengthen’과 ‘preserve’ 의미
정상회담을 제안한 러시아가 이러한 수준의 초안을 들고와 합의하자고 드니 한국 외교부는 고민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이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에 응한 이유 중 하나는 ‘경의선을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까지 잇는다는 명분을 만들어, 북한이 복구 작업에 나선 경의선 공사를 훗날 중단시킬 명분을 차단하자’는 데 있었다. 그리고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 가스전에서부터 북한을 거쳐 한국으로 이어지는 파이프 라인을 건설해, 북한을 한국 및 국제 사회와 연결시키겠다는 복안도 깔고 있었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것’이 외교인 만큼, 외교부는 줄 것의 한계에 대해 장고에 들어갔다. 묘안을 찾기 위해 외교부는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이 과거 러시아와의 회담에서 발표한 공동선언문을 구해, 분석에 들어갔다.
그중 하나가 2000년 6월4일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발표한 ‘전략적 안정에 관한 공동성명’이다. 이 성명 5조에는 “미국과 러시아는 ABM 제한조약을 이행하는 것이 전략적 안정을 이루는 초석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란 문구가, 8조에는 “미국과 러시아 대통령은 ABM 제한조약을 강화하고, 이 조약이 미래에도 존속하고 또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노력을 계속한다는 것을 재확인했다”는 문구가 있었다.
불량국가를 제압하기 위해 ABM 제한 조약 개정을 노리는 미국의 대통령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하며 ABM 제한조약 이행을 ‘전략적 안정을 이루는 초석’으로 인정하고, 이 조약을 ‘강화’하기로 합의한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2000년 9월6일 미국과 러시아는 양 정상이 합의한 ‘전략적 안정에 관한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도 “양국은 ABM 제한조약을 유지하고 강화하기로 했다”와 “전략적 안정의 초석으로 ABM 제한조약을 이행할 것을 재확인했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전략적 안정의 초석’을 뜻하는 영문은 cornerstone of strategic stability이고 유지는 preserving, 강화는 strengthening이다. NMD 구축을 노리는 미국은 왜 이러한 문구를 사용하는데 동의한 것일까. 이유는 미국과 러시아가 이 문구를 각기 다르게 해석하는 데 있었다.
먼저 우리 말로는 강화(强化)로 번역되는 strengthen부터 살펴보자. 러시아는 이 단어를 말 그대로 강화로 사용한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미국은 NMD망 구축을 미사일 방어를 목적으로 한 ABM 제한조약의 정신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때문에 NMD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 조약을 강화하는 쪽으로 개정하자는 뜻에서 strength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니까 미국은 ABM 제한조약을 개정할 목적으로 강화란 단어를 사용했고, 러시아는 강화를 ‘유지’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러시아는 이러한 미국측 주장에 동의해주는 대신, 이 단어가 개정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preserve라는 단어의 삽입을 주장했다.
그런데 preserve에 대한 미국의 해석은 또 다르다. 미국은 ABM 제한조약이 영구 조약이라 이 조약을 유지하는 데는 동의할 수밖에 없어 preserve란 단어를 넣는데 동의했다. 이렇게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양국은 ‘이 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라는 사실도 인정한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오보
어쨌든 미국과 러시아가 단어에 대한 타협점을 찾아내자, 2000년 7월23일 미국과 러시아 정상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G8회담은 “ABM 제한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 되도록 유지하고 강화하기로 했다”는 문구를 공동 코뮈니케에 집어넣었다.
남북한이 군사적인 대치관계에 있듯이, 일본과 러시아는 전통적인 라이벌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러시아를 꺾고 남(南) 사할린을 할양받은 바 있다. 그러나 1945년 2차대전에서는 러시아가 포함된 연합국에 굴복하면서, 남 사할린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일본이 영유해온 북방 4개 섬마저 러시아에 빼앗겼다. 때문에 두 나라는 오래 전에 국교를 맺었으나, 평화협정은 아직도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평화협정이란 양국이 싸울 의사가 전혀 없을 때 맺는 것이다).
2000년 9월5일 일본과 러시아는 ‘국제문제 협력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도 “ABM 제한조약을 유지 강화한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숙적관계인데도 ABM 개정조약을 유지·강화하는 데 합의한 것이다. 2000년 12월18일 이뤄진 러시아와 캐나다 간의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도 ABM 제한조약을 유지 강화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무대에 명함을 내밀 수 있는 나라라면, 미국과 러시아가 합의한 수준에서는 ABM 제한조약에 대해 언급해도 된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외교통상부는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한·러 공동성명에 “대한민국과 러시아 연방은 1972년 체결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라는 문구와 “양측은 ABM 제한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하는…”이라는 문구를 넣는데 동의했다.
그런데 이 성명이 발표되자, 그 날로 ‘뉴욕타임스’의 타일러 기자는 ‘한국이 NMD 문제와 관련해 러시아를 편들었다’는 기사를 날렸다. 타일러 기자의 보도는 오보임이 명백한데도, 한국 언론은 오보라는 사실을 명시하지 않았다. 한 전문가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추론했다.
“첫째는 한국 언론의 무지다. 한국 언론은, 미국은 ABM 제한조약을 개정하려고 하고 러시아는 유지하려고 한다는 2분법적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미국이 말하는 strengthen과 러시아가 말하는 strengthen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차에 ABM 제한조약을 유지 강화한다는 내용의 한·러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뉴욕타임스’의 보도까지 이어지자, 한국이 러시아를 지지했다고 보도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김대중 정부와 언론의 관계다. 김대중 정부는 때마침 주요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단행해 언론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이런 차제에 외견상으로 러시아를 지지하는 문구를 담은 한·러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뉴욕타임스’ 보도까지 이어지니, 한국언론은 한국 정부의 해명을 듣거나 더 이상 알아보지 않고 한국이 러시아를 지지했다고 보도한 것 같다. 그렇다면 주요 신문에 대한 공격에 앞장선 방송이나 한겨레·대한매일 등이라도 한국은 러시아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는 보도를 내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겠지만 때마침 언론에 대한 세무조사를 단행한 것이 정부에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었다.”
‘러시아 지지’ 소동이 김대통령의 방미가 코앞에 닥칠 때까지 가라앉지 않자, 3월2일 이정빈(李廷彬) 외교통상부장관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두루뭉실하게 “우리는 부시 대통령의 지도력을 신뢰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국내 언론은 한국이 러시아 지지를 철회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러시아 지지 소동이 일단락된만큼 왜 이런 소동이 일어났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의 분석이다.
“한국은 NMD망 구축에 대해 지지 의사를 밝히지 않았지만, 일본은 NMD 참여를 선언했다. 때문에 일본이 러시아와 ABM 제한조약 유지 강화에 합의한 것과 한국이 그렇게 한 것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캐나다는 미국의 최우방국이니, 그러한 합의를 했다고 해도 미국이 캐나다의 본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은 숙적인 북한이 러시아와 ABM 제한조약을 유지·강화키로 합의했는데도, 러시아와 같은 문구를 넣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의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는 동북아 4강 중에서 한반도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영향력이 적은 나라다. 러시아가 한반도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부문은 군사력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미국과 일본·중국 등은 군사력은 물론이고 경제·정치·문화 등 각 방면에서 깊이 개입해 있다. 그런데 러시아에게서는 군사력만 보이니, 군사력을 과대 평가하게 되었다. 러시아에 양보할 수 있는 선을 너무 넓게 잡은 것이다.
반대로 러시아의 눈에 비친 한국을 상상해보자. 우리가 북한은 러시아와 가까운 나라로 생각하듯, 러시아는 우리를 미국에 훨씬 가까운 나라로 볼 것이다. 이러한 한국이 경의선을 복구하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을 거론하자, ‘차제에 미국 품 안에 있는 한국을 끌어내 보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국 흔들기 작전인 것이다. 경의선과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연결되면 러시아로서는 전혀 손해볼 것이 없으니 정상회담을 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온 것이다.
경의선과 시베리아 철도를 연결하는 것을 미끼 삼아, 한국으로부터 ABM 제한조약 개정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받아내보자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푸틴 대통령은 1박2일로 잡아 놓은 방한 일정을 하루 늘리는 ‘쇼’까지 연출하고, 한나라당의 이회창(李會昌) 총재까지 만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러시아의 의도를 몰랐고, KGB 출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의 국익을 위해 영악하게 행동했다. 한국이 현명했다면 ‘ABM 문제는 한국과 러시아 간에는 전혀 논의될 사항이 아니니 아예 거론하지 말자’고 했어야 한다.”
서울올림픽은 한국과 소련이 만난 첫 무대였다. 이때 한 경기장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맞붙자, 한국 관중이 동맹국인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를 열렬히 응원해 화제가 됐었다. 이때만 해도 한국은 러시아를, 남북 통일의 기회와 함께 경제적인 특수(特需)까지도 가져다 줄 나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경제 교류는 치안 부재 등 러시아의 내부 사정 때문에 잦아들었다.
그런 가운데 98년 러시아 공안기관은, 참사관 직함을 갖고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에 나가 있던 안기부 직원 조성우(趙成禹)씨에게 매수돼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발렌틴 모이세예프 외무성 아주국 부국장을 구속했다. 이어 조참사관마저 추방했다. 이에 맞서 한국은 서울 주재 러시아대사관에 역시 참사관 타이틀로 근무하는 해외정보국(SVR) 요원 올레그 아브람킨씨를 맞추방했다.
한국과 러시아 간의 정보요원 맞추방은 96년 미국에서 일어난 로버트 김(한국명 金采坤) 사건과 비교된다. 미 해군 정보국에 근무하던 미국 국적자 로버트 김은 주미한국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미 해군 정보를 제공하다 FBI에 검거되었다. 로버트김이 구속되자 한국은 백동일 무관을 소환했다.
안기부 요원은 ‘비공개 스파이’(그러나 상대국 정보 기관에는 안기부 직원임을 알려주므로 사실상은 공개된 스파이와 같다)고, 무관은 ‘공개된 스파이’란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둘은 공통적으로 주재국의 첩보를 수집한다. 안기부 직원 조씨는 금품을 주고 첩보를 수집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백대령은 금품을 제공했다는 혐의까지는 받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한국은 로버트김 구속과 백대령 소환에 대응하는 ‘펀치’를 미국에 날리지 못했다. 미국에 대해서는 감히 ‘맞대응’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에 대해서는 전혀 ‘굴하지 않고’ 외교관 맞추방으로 나섰으니, 초강대국을 자처하는 러시아로서는 심히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러 관계는 급랭했다. 러시아는 한국에서 무시당하는 나라가 되었다. 푸틴 대통령의 방한에는 무너진 러시아의 권위를 다시 올려놓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한·러 정상회담을 통해 러시아가 얻어낼 것은 매우 많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 회담을 통해 한국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공동성명을 분석해보면 한국은 러시아로부터 ▲지난해 6월 남북정상회담과 후속조치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는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김대중 정부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러시아는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에 기여할 용의가 있다 ▲1992년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1994년의 제네바 합의 이행에 대해 동의한다는 등의 ‘과실’을 얻어냈다.
이러한 결과물은 러시아가 군사력을 동원해 한반도의 안정을 훼방하지 않겠다는 뜻이므로, 한국으로서는 그런대로 괜찮은 성과물이다. ABM 제한 조약을 아예 거론하지 않았더라면, 거론했더라도 ‘뉴욕타임스’의 오보에 대해 정부와 언론이 한마음으로 대처했더라면, 한국으로서는 손해보지 않은 게임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제네바 합의 준수’ 강조
다음으로는 한·미 문제를 살펴보자. 한·러 정상회담이 있은 후인 3월2일 기자는 주한미국 대사관 측의 초청을 받아, 주한미국공보원장 사저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부시 대통령 때 미 국방부 부차관보를 지내고, 지금은 싱크탱크인 ‘비확산정책 교육센터’의 소장으로 있는 헨리 소콜스키(Henry D. Sokolski)씨와 에너지문제 전문가인 빅토르 길린스키(Victor Gilinsky) 박사를 만났다.
이 만남에서는 KEDO가 건설하기로 한 북한 경수로가 화제가 됐다. 먼저 전력(電力) 문제 전문가인 길린스키 박사가 북한 전력 문제에 대해 매우 심도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전력은 발전량이 소비량보다 많아야지, 생산량과 소비량이 똑같아지면 엄청난 문제가 발생한다(전기는 발전된 양만큼만 소비하므로, 소비량이 발전량을 초과하는 경우는 없다. 발전량과 소비량이 똑 같다는 것 자체가 소비량이 발전량을 초과했다는 뜻이 된다).
가정에서도 전기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두꺼비 집에 있는 퓨즈가 나가며 일시에 정전이 된다. 그와 똑같이 한 나라의 발전량과 소비량이 똑 같아지면, 그 나라의 모든 전기가 일시에 나가 버린다. 이를 ‘블랙 아웃(Black Out)’이라고 하는데, 블랙 아웃이 되면 전기만 나가는 게 아니라 발전소도 서 버린다.
블랙아웃 위험성 있는 北韓
발전소의 발전기도 기계이기 때문에, 약간의 전기가 있어야 다시 돌릴 수 있다. 블랙 아웃 상태에서 다시 전기를 생산하려면, 전지(電池)를 이용해 발전기 하나를 돌리고, 이 발전기에서 나온 전기로 다른 발전소를 돌리는 식으로 발전소를 재가동한다. 동시에 송전소와 변전소 그리고 각 가정의 두꺼비집 등을 수리해야만 전기공급을 복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피해 복구가 끝나지 않는다. 제철소의 용광로 안에 있던 쇳물은 전기가 끊어지는 순간 식어서, 용광로와 한덩어리의 쇠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이 용광로는 버리고 새로 만들어야 한다(물론 제철소에서는 비상발전기를 이용해 정전에 대비할 수 있지만, 각 산업현장에서는 정전으로 인해 큰 피해가 발생한다). 이러한 피해를 복구하는 데는 엄청난 돈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나라는 소비량보다 많은 전기를 생산하는데, 이 여유분을 ‘전력 예비율’이라고 한다.
산업국가에서는 대개 10∼15%의 전력예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총 시설용량은 4800만㎾이므로 10∼15%에 해당하는 480만∼720만㎾의 여유 전기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100만㎾짜리 발전소 두 기가 동시에 멈춰도 블랙아웃 되지 않는다. 반면 북한의 실제 발전량은 250만㎾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KEDO가 100만㎾급 경수로 두 기를 지어줄 예정으로 있다. 이렇게 되면 북한의 총 발전량은 450만㎾가 되고, 이에 따라 북한은 멈춰선 공장을 재가동해 400만㎾대의 전력을 소비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고장으로 100만㎾ 경수로가 멈추면 북한은 일시에 블랙 아웃에 직면하게 된다. 길린스키 박사는 이 문제를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
“10명이 자일로 서로를 연결해 바위를 오르다 한 명이 미끄러져 떨어지면, 나머지 9명이 그 충격을 흡수해 미끄러진 한 명을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러나 세 명이 줄로 묶고 올라가다 한 명이 미끄러지면 나머지 두 명도 떨어져버린다. 미국과 한국 일본 등은 발전소가 워낙 많기 때문에 한두 개의 발전소가 고장나도 문제가 없지만, 북한은 경수로 한 기가 가동을 멈춰도 블랙 아웃이 된다. 따라서 북한에 경수로를 짓는 것은 재검토해야 한다”
소콜스키 소장은 한 술 더 떠서 제네바 합의 사항 준수를 들고 나왔다. 제네바 합의 제4조에는 ‘경수로의 핵심부품을 북한에 인도하기 이전에, 북한은 핵물질이 전혀 없다는 것을 검증받아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약속한 안전조치 협정을 완전히 이행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소콜스키 소장은 이 조항을 근거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94년 제네바 합의의 이행을,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지어주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제네바 합의는 경수로 핵심 부품을 북한에 제공하기 이전에 북한에 핵물질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경수로 핵심 부품은 미국이 공급한다. 따라서 북한에 핵물질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미국은 경수로 핵심부품을 인도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서울에서 외교통상부 구주국장 등 한국 관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한국이 경수로를 지으면, 미국은 당연히 핵심 부품을 제공할 것으로 믿고 있더라. 그러나 미국 법은 의심스러운 국가에 대해서는 원자로 핵심 부품의 공급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을 샅샅이 조사하는 데는 3∼4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북한에 완성된 경수로를 공급할 수 없다. 이것이 제네바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기자가 “부시 정부는 북한에 대한 경수로 지원을 원치 않는 것인가. 경수로 대신 화력발전소를 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라고 물었다. 소콜스키 소장은 “우리는 화력발전소가 낫다고 생각한다. 화전은 건설 기간이 짧다는 장점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소콜스키 소장은 “여기서 우리가 펼친 주장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장이지, 미 정부의 공식 의견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주한 미 공보원장 사저에서 미 대사관이 주선해서 만난 자리에서, 소콜스키 소장은 개인 의견을 전제로 제네바 합의의 철저한 이행을 강조한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미국은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철저히 이행하지 않는다면 완성된 경수로를 제공할 수 없다”는 주장을 동시다발적으로 펼쳤다. 제임스 릴리(James Lilley) 전 주한미국 대사는 미국 시간으로 3월1일 헤리티지 재단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제네바 합의 자체를 깨뜨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전력 공급은 시급하므로, 건설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수로는 적절치 않다. 경수로를 짓는 동안 북한에 공급해주기로 한 중유 비용으로 화력발전소를 지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월2일에는 미 하원의 헨리 하이드 국제관계위원장(공화)과 크리스토퍼 콕스 정책위원장(공화)·에드워드 마키 의원(민주)은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명확히 이행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이행할지 불확실하다면 부시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에게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성실히 이행할 것이라는 확답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부시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미국 조야의 이러한 주장과 ‘뉴욕타임스’의 오보는 대북 유화정책을 추진해온 김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 무렵 청와대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는데, 대부분의 비서관들은 김대통령이 이 난관을 돌파해줄 것으로 ‘막연히’ 믿고 있었다. 이들은 “김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낼 것이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김대통령은 최고 전문가이자, 일관성 있게 행동해온 사람이다. 때문에 미국의 보수 세력을 설득해낼 수 있을 것이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眼 질환 걸린 대통령
이러한 기대는 김대통령의 어깨를 무겁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김대통령은 새벽 3∼4시까지 각종 자료를 읽느라 과로해, 오른쪽 눈의 실핏줄이 터져 안구가 벌겋게 되는 ‘결막하출혈’에 걸렸다. 3월1일 김대통령은 그런 상태에서 KBS TV에 나와 ‘국민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이때 사회를 본 소설가 김주영(金周榮)씨가 “밤을 새워가면서 공부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지적하자, 김대통령은 “밤을 새우지는 않는다. 다만 잠을 자다가 눈을 잘못 비볐는지 핏줄이 잘못됐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오른쪽 눈을 가리키며 “분장을 두껍게 해서 그렇지 지금 푸르뎅뎅한 상태다”라고 말해 방청객을 웃겼다. 이런 유머마저 구사하지 못했다면, 김대통령은 더 힘들어 보였을 것이다.
3월6일 눈이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김대통령은 출국했다. 미국 조야의 ‘김대통령 때리기’는 this man 헤프닝이 있은 부시 대통령과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정상회담을 하는 도중 23세나 젊은 부시 대통령은 김대통령이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와 자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외교 격식을 무시한 것이다.
3월7일 김대통령은 제임스 릴리 전 주한대사가 특별연구원으로 있는 미국 기업연구소(AEI)와 윌리엄 글라이스틴(W. Gleysteen) 전 주한대사가 연구실장으로 있는 외교협회(CFR)가 공동 주최한 오찬에 참석해 연설을 하고 질의에 대답했다. 한국의 관훈토론회 형식으로 진행된 이 오찬에서 미국의 언론인과 외교 전문가들은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었다. 첫 번째 질의자로 나선 조 시스코는 “왜 한국은 (ABM 제한조약 등과 관련해) 러시아 쪽으로 기울어졌는가?”라고 따졌다.
김대통령은 “먼저 논란을 일으키게 한 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 논란은 한·러 공동성명에 대한 잘못된 이해,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ABM 제한조약에 대한 언급은 러시아 지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NMD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견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라고 답변했다.
김대통령이 “러시아를 지지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답변은, 미국인들은 만족시킬 수 있어도, 조금 전에 정상회담을 했던 러시아 측은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한국이 NMD 문제에 대해 중립을 지키기로 했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히 답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뉴욕타임스’의 오보와 미국 조야의 김대통령 때리기에 몰려 이 문제에 대해 불명확한 답변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버린 것이다.
이어 ‘뉴욕 타임스’의 데이비드 생거는 “김정일이 서울을 답방하면 김대통령은 그와 함께 평화선언을 하기를 바라는가? 그리고 평화선언을 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김대통령은 “서울평화선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남북한 간 평화조약 체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데, 평화조약은 남북한과 4강 구조 속에서 나와야 한다. 또 미국과 중국이 전폭적으로 지지해야 가능한 것이다. 평화조약은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답변했다.
세 번째 질의자인 빌 거츠(Gertz)는 “미사일을 포함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판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김대통령은 “부시 대통령 및 그 측근들과 토론할 때 나는 포괄적 상호주의를 제안했다. 포괄적 상호주의를 적용하는 대상은 세 가지다. 첫째는 제네바 합의의 철저한 준수다. 둘째는 북한이 미사일의 개발과 수출을 중단하는 것이다. 셋째는 북한이 미사일의 개발과 수출을 중단하는 대신,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 대해 어떠한 무력 공격도 가하지 않는다고 확약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실행에 옮겨진다면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 대해 경제 지원을 펼친다. 그리고 북한을 국제 무대로 나오게 해, 국제 금융기구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이런 식으로 토론회 내내 질의자들은 창을 던졌고, 김대통령은 방패로 막았다. 질의자들의 ‘가혹한’ 질문과 김대통령의 ‘간곡한’ 답변은 토론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날 김대통령은 미 상원 외교위원장 제시 헬름스 의원이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했다. 제시 헬름스 의원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방미를 거론한 사람인데, 그는 의원들에게 “자유롭게 질문하라”는 말로 공격적인 질문을 유도했다.
AEI/CFR 토론회에서는 장내 질서가 유지됐으나, 미 의회 간담회에서는 참석한 의원들이 토론회 중간에 “표결을 하러 간다”며 빠져나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을 향해 쏟아진 질문은 청문회 수준을 방불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3월8일 워싱턴을 떠나기 직전 힐튼 호텔에서 수행원들과 조찬을 가진 김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여러 번 해봤지만, 이렇게까지 긴장한 것은 처음이다. 청문회도 이러한 청문회가 없을 것이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김대통령의 간곡한 설득은 어느 정도 미국 조야를 움직였다. 김대통령 일행이 미국을 떠나던 날 한국을 골탕먹였던 ‘뉴욕타임스’는 ‘김대통령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지적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미국을 설득하자 이번엔 북한이 삐치고 나갔다. 3월13일 북한은 이날부터 서울에서 열기로 한 남북 장관급 회담에 불참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때부터 북한은 전 매체를 동원해 “미국은 식인종” 등의 용어를 쓰며 미국 비난에 열을 올렸다.
김대중 정부는 너무 유화적인 대북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러시아에 말려들고, 한국내 보수파와 부시 정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비판적 평가가 요즘 많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김대통령과 측근들은 “제네바 합의 때도 미국이 양보하지 않았는가. 북한은 원래 그런 상대다. 대화 창구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설명했다. 김대통령은 “우리가 제공하는 구호품이 북한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파와, 감시를 거절하는 북한 사이에 낀 상태에서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3월1일 독일이 북한과 수교 협상을 벌이면서 “독일은 북한에 20만 마리 분의 쇠고기를 원조하는데 이 쇠고기가 북한 주민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감시하기 위해, 독일 외교관과 원조기관원이 북한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게 한다”는 합의를 받아냈다. 광우병을 피하기 위해 도살하는 쇠고기를 갖고 독일이 ‘주체외교’의 북한을 굴복시킨 것이다.
이러한 독일 외교의 승리는, 남북관계에도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독일 외교의 승리가 김대통령이 언급한 포괄적 상호주의와 맞물리며 북한에 지원하는 원조품이 북한주민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한 것이다.
대북정책과 ABM 제한조약 문제를 제외하면 현재 한·미 간에는 화급히 다뤄야 할 문제가 없다. 때문에 한·미 공동발표문 작성을 위한 사전 접촉도 ABM제한 조약과 대북문제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러 공동성명 때 ‘홍역’을 치러서인지 여기에서는 ABM 제한조약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완곡히 한국은 NMD를 지지한다는 표현이 들어 있는데, 옮기면 이렇다.
양 정상은 세계 평화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하여 미사일 방어(missile defense)를 포함한 이러한 조치들에 관하여 동맹국과 기타 이해 당사자들 간에 협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하였다.
한국은 미사일 방어와 관련해 미국에 동맹국인 한국과 협의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이다. ‘미사일 방어(Missile De- fense)’ 앞에 ‘국가(National)’을 붙이면 NMD가 되고, ‘전구(Theater)’를 붙이면 TMD가 된다. 이러한 합의는 장차 한국이 NMD개발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반면 한국은 공동발표문에 ‘부시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에 대한 지지와 함께 남북문제 해결에 있어서 김대통령의 주도적인 역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는 문구를 넣음으로써 남북문제에 대한 한국의 주도권을 인정받았다. 포괄적 상호주의에 입각해 남북문제를 추진하겠다고 하면 미국도 이의(異意)가 없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황장엽의 충고
한반도를 무대로 남·북, 조·로, 한·러, 한·미 정상이 한 차례씩 만난 지금, 한국이 나가야 할 통일 및 외교 방향이 가시화되는 듯한 분위기다. 외교 전문가들은 이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남북 관계는 한국이 미국과 함께 북한 안보를 위협하지 않는다고 보장하는 대신 북한은 모든 핵물질을 폐기하고 미사일의 개발과 수출을 중단해야 한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한국이 계속 지원자 노릇을 하되, 지원품이 북한 주민에게 전달되는지 감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체제가 구축되면 미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한반도 문제로 인해 한국과 미국이 마찰을 빚는 일은 줄어든다. ▲NMD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은 명확한 의견을 밝히지 않은 채 ABM인 SAM-X 도입사업을 벌이다가, 적절한 시기가 오면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참여하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한다. ▲러시아는 물론이고 중국에 대해서는 그들이 한반도 재통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경제적 유대를 강화해나간다.
한국은 과연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제시 헬름스 의원이 주도하는 미 상원 외교위원회로부터 초청받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도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간접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왔다.
“북한은 강력히 조직화된 사회다. 때문에 남쪽에서 지원한다고 해서 마음을 여는 ‘간단한’ 나라가 아니다. 북한은 경제 논리로만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북한이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붕괴하고도 버티는 것은 이러한 조직력 때문이다.
때문에 통일은 남한이 정치·군사·경제·문화적으로 북한에 비할 수 없이 우세해진 이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북한의 조직력은 아직도 유지되고 남한은 아직 북한에 비해 월등히 우세하지 못하다. 남북한이 모두 통일될 준비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남한은 통일을 염두에 두고 북한과 교섭에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내실부터 다져야 한다. 지금은 남한이 통일외교에 나설 때가 아니라, 자기 힘을 기르는 무실역행(務實力行)에 힘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