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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비사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국가대표 가수’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 임진모 < 음악평론가 >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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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모르실꺼야’ ‘감수광’의 혜은이(본명 김승주)도 어릴 적부터 무대에 섰던 소녀가수였다. 그녀의 아버지 고 김성택씨는 변사 출신으로 195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낙랑쇼’의 단장이었고 가수 고봉산 안다성 윤복희, 코미디언 이기동 남성남 등 쟁쟁했던 연예인들이 바로 이 단체에서 배출되었다. 역시 ‘소녀가수’였던 윤복희가 아버지 윤부길씨와 한창 낙랑쇼단에서 노래했을 때만 해도 혜은이는 갓난아이였다. 젖먹이 시절 혜은이는 전형적인 ‘울보’로 아무리 젖을 물리고 달래도 마냥 앵앵거리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김성택씨는 가끔 열 받은 나머지 “저걸 그냥 갖다 버려!” 하며 호통을 친 적도 있었다. 공연 관계자들은 혜은이가 나중에 톱 가수로 성장한 비결로 “어려서 많이 울면 커서 가수 된다”는 속설에서 찾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탓에 비스킷을 주면 좋아할 것 같은 어리고 착한 혜은이였지만, 실제로는 남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고 세상물정에 훤한 ‘애어른’이었다고 전해진다. 최성일씨가 즐겁게 기억하는 혜은이 회고담. ‘혜은이=관객동원’이던 1979년 제주 시공관 혜은이 리사이틀에서 공연이 끝난 후 그는 단원을 위해 성큼 수고비를 내놓았다. 그런데 사회자 최성일씨한테는 밴드 전체에 준 돈과 맞먹는 거액을 슬그머니 손에 쥐어주었다는 것이다.

최성일씨가 “왜 나만 이렇게 많이?”라고 묻자 그 답변이 걸작. “에이 아저씨두. 모처럼 제주도에 오셨잖아요. 그러니까 술 한잔에 식사도 푸짐하게 하시구요. 또 으음…. 여자구경도 하세요.” 아마 산전수전 거친 오랜 경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인간적인 처세 아닐까.

하춘화의 경우도 흡사하다. 17세이던 72년 하춘화는 파월장병 위문차 월남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 공연에서 그가 겪은 어려움은 노래가 아니라 노래가 끝난 뒤 반드시 술이 있는 ‘파티’였다. 으레 고위장성급이 많은 이 자리에서 그는 귀찮을 정도로 ‘춤 한번 추자’ ‘술 한잔하라’는 요구에 시달렸다.

춤도 못 추고(그는 댄스가수가 아니었다) 술도 전혀 못 하고 또 그러기에는 어리기도 했지만 하춘화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자신을 지켜가면서도 이런 부탁을 다 들어주는 ‘탄력적 프로’였다고 한다. 춤추러 플로어에 나가서는 파트너의 발을 슬쩍 밟고 재빨리 내려왔고 술은 마시는 척하면서 남몰래 엎지르는 교묘한 전술을 동원했다. 최성일씨는 그것을 “흥겨운 판을 깨지 않고 분위기를 타면서 자신도 무리하지 않는, 아무리 어렸어도 캐리어가 쌓이지 않으면 해내지 못할 능숙한 솜씨”라고 표현했다.



하춘화와 혜은이는 70년대 연예계의 중심이 ‘자기 아닌 남’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관록이란 바로 남(대중)을 헤아리는 데서 나온다. 조금이라도 떴다 싶으면 자기 챙기기에 바쁜 지금의 연예계와는 근본적으로 그림이 다르다. 요즘의 자기중심 세태에 관록이 푸대접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무대를 지키는 하춘화(얼마 전 데뷔 40년 기념공연을 가졌다)와 혜은이를 본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 가수들의 무대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바로 푸근한 관록의 향기”라고 입을 모은다.

윤복희의 오빠 윤항기는 가요사에 획을 그은 인물이다. 역사적으로는 신중현이 이끈 ‘애드포’가 한국 최초의 록그룹으로 기록되지만 일반인들도 아는 최초의 대중적 록그룹은 엄연히 ‘키보이스’였고 이 그룹의 일원이 바로 윤항기였다. 그는 나중에 솔로로 독립하면서 ‘나는 어떡하라고’를 크게 히트시키며 74년에는 가수라면 누구나 탐냈던 KBS ‘가수왕’에 등극했다. 그러니까 윤항기는 한국 록이 배출한 최초의 대중스타였던 셈이다(물론 노래는 포크에 가까웠지만).

이러한 점에 비추어 정작 놀라운 사실은 어릴 적에 그는 코흘리개 철부지에, 자기의사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던 ‘말더듬이’였다는 점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나이가 들면서도 더듬는 버릇은 여전해서 남들 세 마디 할 때 겨우 한 마디밖에 못했다고 한다. 그와 대화를 나눌 때 그가 하고픈 말을 미리 해주면 손뼉을 치면서 ‘맞아! 맞아!’ 하며 기쁨을 나타내는 것은 그를 아는 사람들은 흔히 목격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뒷날 한 시대를 풍미하는 가수가 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윤항기는 1964년 군에서 제대한 직후 차도균, 김홍탁, 옥성빈 그리고 작고한 차중락과 함께 록그룹 키보이스를 결성했다. 하지만 그 시절 록그룹이란 말부터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고 괴상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록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생생하게 말해주는 일화.

만능 엔터테이너 윤항기

키보이스 멤버들이 서울 녹번동의 윤항기 사촌누나 집에서 한창 연주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동네 주민들로부터 신고를 받았는데 신고한 이유는 “하루종일 ‘상여 나가는 소리’가 찢어지게 들리는데 귀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조용한 동네에 한 사람만 목청을 높여도 많은 가구가 괴로웠던 시절에 무려 다섯 명이나, 그것도 악머구리 끓듯 악기를 두드려댔으니 그게 얼마나 주민들 듣기에 소란스러웠겠는가. 그래서인지 “한국에 록이 늦게 정착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우리의 ‘가옥구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런저런 난관을 딛고 윤항기는 가련한 말더듬이에서 일약 ‘한국 록그룹의 창시자’로 각광을 받았다. 또한 윤복희의 ‘여러분’이란 노래가 말해주듯 탁월한 싱어송라이터에, 전성기에는 부전자전이라고 아버지 윤부길씨의 재능을 이어받아 무대 연출에도 능했고 공연 기획과 작품각색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고 한다. 일례로 1975년 윤항기가 윤복희와 그때 매제였던 남진이 함께 했던 ‘3인 리사이틀’이 크게 히트한 것은 그의 훌륭한 작품구성에 힘입었다는 것이다. 이런 게 인간승리 아닐까.

송창식은 윤항기 이상으로 가요사에 남긴 업적이 지대한 인물이다. 윤항기가 록 출신이었다면 그는 통기타 포크음악이 배출한 MBC 가수왕이었다. 포크의 거성이었던 것은 물론 ‘토함산’이나 ‘가나다라’가 입증하듯 포크와 국악의 접목을 시도한 개척자였다.

가수로서 송창식은 이처럼 분명한 존재였지만 당시 ‘인간 송창식’은 정녕 알다가도 모를 불분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를 본 공연 관계자들의 이구동성이다. 막말로 하자면 ‘괴물’이고 좋게 말하면 기인(奇人)이었다고 할까? 자기 좋을 대로, 멋대로 살아갔고 원체 ‘어벙’했던 까닭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스타일이었다.

최성일씨는 “우선 어떻게 해서 가요계에 나오게 됐는지 모르겠다. 명동에서 윤형주와 만나 트윈폴리오를 조직해 데뷔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어떤 꿈을 가지고 연예계에 진출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먼저 그의 괴벽 가운데 하나는 철저한 ‘올빼미’였다는 사실.

1976년 서해 5도의 군부대 순회공연 때였다. 그중 백령도 공연에서 행사가 끝난 뒤 군인들 숙소에 가수의 잠자리가 마련됐고 모두 곯아 떨어진 한밤중에 그는 취침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연신 기타 줄을 퉁겨댔다. 보초가 득달같이 달려와 취침시간임을 경고했지만 그는 “알았습니다” 해놓고는 잠시 후 또 기타를 쳐댔다. 옆방 여자숙소에서 자던 가수 옥희는 혼자 신경질을 부리다 못해 “이제 그만 치고 제발 잠 좀 잡시다!” 하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나 송창식의 기타소리는 하염없이 밤하늘에 메아리쳤고 이 때문에 옥희는 아예 뜬눈으로 날을 새웠으며 상당수 군인들도 귀중한 잠시간을 빼앗기는 피해를 당했다.

그는 또 세수, 손톱과 발톱 깎기, 빗질 그리고 양치질 등 기본적인 공중생활 에티켓과도 인연이 멀었다. 옷차림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티셔츠 등 허름한 캐주얼 차림이었고 정장 입은 모습을 본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75년 가수왕으로 선정되던 순간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맸으니 상이 대단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공연 관계자들은 “그가 옷을 다려 입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구두도 한번 광을 낸 것을 못 봤다”고 증언한다(가수왕 맞아?).

게다가 엄청나게 무감각 무관심 무혈(無血)한 사람이 송창식이었다. 언젠가 공연 관계자들 앞에 굴곡이 어지러운 멋진 몸매의 다방 아가씨가 휙 지나갔다. 당연히 대다수 남자들은 “와, 끝내준다!” “아가씨, 더 쉬었다 가, 응?” 하며 짓궂게 시비를 걸었다. 이때 송창식의 반응. “왜들 그래요? 여자가 지나갔어요? 남자가 지나갔어요?”

좋게 말해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할 만큼 대인관계에서 사리사욕을 차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무대 욕심만은 알아주었다고 한다. 객석에서 단 한 사람이 앙코르를 해도 신명나게 노래를 부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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