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호

김태식의 考古野談 | 마지막 회 |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일제에 납치돼 청와대에 갇힌 ‘미남 석불’

  •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입력2017-08-21 13: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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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 일간 매일신보는 1934년 3월 29일자에 ‘석가여래상(釋迦如來像)의 미남석불(美男石佛), 즐풍욕우(櫛風浴雨) 참아가며 총독관저(總督官邸) 대수하(大樹下)에’라는 제목을 내건 기사 하나를 싣는다. 이런 큰 제목만으로는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음인지, 이에는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던 경주의 보물, 박물관(博物館)에서 수연만장(垂涎萬丈)’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았다.

    80년 전 문체여서인지 우선 큰 제목과 작은 제목에 들어간 몇 단어가 생경하다. 즐풍욕우(櫛風浴雨)란 글자 그대로는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몸을 씻는다는 뜻이니, 간단히 말해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상태라는 의미다. 대수하(大樹下)란 큰 나무 아래라는 뜻이요, 수연만장(垂涎萬丈)이란 침을 만 길이나 흘린다는 뜻이니, 어떤 것을 제 소유로 만들고 싶어서 몹시 탐낸다는 비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저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대의(大義)를 풀어보자. 석가여래를 표현한, 잘생긴 돌로 만든 부처가 어쩌다가 경주를 떠나 조선총독 관저로 옮겨졌지만, 그곳 정원 큰 나무 아래서 별다른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비바람에 노출돼 있어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애를 태운다는 뜻이다. 이제 이 불상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이 기사를 통해 찬찬히 살펴본다. 현대에 익숙지 않은 표기법만 약간 손질하는 선에서 당시 표현을 최대한살린다.  

    “석가여래상으로 경주 남산에 있던 미남석불(美男石佛)이 지금으로부터 여러 해 전에 자최(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었다. 그 얼마 후에야 미남석불이 어디로 도피한 줄을 안 총독부박물관에서는 그동안 그의 간 곳을 찾아오다가, 작(昨·지난) 27일에야 왜성대(倭城臺)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비목(榧木) 촉탁이 급히 달려가 보니, 경관힐소(警官詰所) 뒤 언덕 큰 나무 아래에 천연스럽게 좌정(坐定)은 하고 있으나,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경관힐소란 경비 초소다. 이 무렵 총독 관사 위치를 왜성대(倭城臺)라 하거니와, 이곳은 지금의 서울시 중구 예장동 2-1번지 일대 남산 기슭이다. 이곳 총독 관저로 가서 문제의 불상을 조사했다는 ‘비목(榧木) 촉탁’이란 총독부박물관 촉탁(일종의 전문위원)이던 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를 말한다. 이 대목으로 보면 문제의 경주 남산 불상은 이전에 존재는 알려졌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다가 이때 와서 재발견됐음을 알 수 있다. 한데 이 돌부처를 ‘미남석불’이라 한다. 부처가 잘생겨서 얻은 이름일 터이다. 그래서일까? 기사의 불상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극찬이다.

    “이 미남석불은 시가(時價)로 따진다면 적어도 오만 원 이상은 할 것이나 지금 세상에 있어 돈 아니라 금을 가지고라도 도저히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 좌신(座身·앉은 자세의 몸)의 높이가 3척 6촌, 슬폭(膝幅·양쪽 무릎 끝까지의 폭)이 2척 9촌이오, 또 연좌대(蓮座臺·연꽃 모양 받침대)에는 천녀(天女)를 아로새긴 엄청난 것으로 신라의 유물로서 석불과 함께 다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참고자료이다.”



    이 불상을 좌신(座身)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는 부처 중에서도 앉은 모습을 형상화한 이른바 좌불(坐佛)임을 미루어 짐작한다. 1척이 대략 30.3㎝요, 1촌은 약 3.33㎝니, 이 좌상(坐像)은 받침대를 제외한 불상만으로 볼 때, 기사에서 말한 높이는 110.88㎝다. 양쪽 무릎 간 폭은 90.63㎝다. 대략 앉은키와 무릎 높이가 1대 1 가까운 비율을 이룬다. 나아가 이 불상을 신라 작품으로 본다는 점도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불상이 어찌하여 총독 관저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그에 대한 신문의 답변이다. 

    “이에 대하여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그 미남석불이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제1회(의미 불명) 재등(齋藤) 총독시대에 어떤 우연한 일로 관저로 올라온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물관 홀에 진열되어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와 경주의 같은 골짜기에 안치되어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한다.”



    조선총독의 포로 된 ‘미남 석불’

    기자도 이 불상이 옮겨진 구체적인 사연을 더는 캐지 못하고 있다. 다만 2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재임하던 시절(1919~1927)에 올라왔을 것이라는 총독부박물관 측의 발언을 전달만 한다. 아마도 이 발언은 이를 조사한 가야모토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나아가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이 불상이 당시 그곳에 전시 중인 약사여래상과 같이 경주의 골짜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약사여래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3층 불교조각실에 상설 전시 중인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 약사여래 좌상’을 말할 것이다. 이 약사여래상은 1915년 무렵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지시로 남산을 떠나 경성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총독부박물관이 인수하게 된다. 이 불상은 남산 서쪽에 위치하는 계곡 중 하나인 삼릉곡 작은 절터에 있었다. 이로써 본다면, 총독부박물관에서는 비록 단순 추정이라는 범위를 넘지는 못하지만, 문제의 ‘미남 석불’ 역시 이곳에서 봉안하던 것으로 본 셈이다.

    이런 보도를 하면서 기사는 “그리하여 박물관에서는 수연만장(垂涎萬丈) 어떻게 박물관으로 가져왔으면 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미 총독 관저의 물건이 되어 있는 이상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형편이므로 총독의 허가를 얻어 박물관에 진열하여 보려고 희망하고 있는 중이라더라”고 끝을 맺는다. 하기야 박물관으로서는 그것을 옮겨오고 싶었겠지만, 다름 아닌 총독 관저에 있는 것이라 섣불리 말도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찌됐건, 우리는 저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적어도 1934년 3월 현재에는 ‘미남 불상’이 조선총독에게 사로잡힌 포로 신세 비슷함을 확인한다. 한데 더 놀라운 사실은 조선총독 관저의 장식물 중 하나로 전락한 바로 그 불상이 83년이 흐른 지금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이자 사저가 있는 청와대 구중심처에서 여전히 일반과는 유리된 채 포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있다니?

    필자가 문화재 담당 기자 시절, 아마 박근혜 정부 초창기였다고 기억하거니와, 청와대 출입 사진기자를 통해 ‘미남 불상’ 촬영을 의뢰한 적이 있다. 그 기자가 청와대 대변인실에 이를 문의했더니, 예상한 대로 그곳은 접근 불가라 보여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변인실의 정확한 답변은 기억나지 않지만, 청와대 관내 사람도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곳에 있으며, 대통령 경호상 더더구나 불가능하다는 요지였다.

    ‘미남 불상’이 광복 이후 청와대로 넘어가게 된 과정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조선총독을 대체한 대한민국 권력이 대통령이고, 그가 집무하고 생활하는 공간이 청와대이니, 인수인계 차원에서 그리되었다고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경주가 출처임이 확실한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청와대 경내에 있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려져, 서울시에서는 이미 1974년 1월 15일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했다. 이를 지정하기 위해서는 기초 조사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다.



    소유자도, 관리자도 없는 석불

    문화재청이 2017년 7월 현재 제공하는 이 불상에 대한 정보를 보면 간략하기 짝이 없다. 우선 그 명칭부터가 아주 어정쩡해서 그냥 ‘석불좌상(石佛坐像)’이다. 석불좌상이 한두 점이 아니고, 더구나 그것 중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꽤 많은데 이런 명패만 덜렁 달아, 다른 석불좌상과 구별되지 않는다. 한데 지정 당시 명칭은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었다. 서울시는 문화재청의 문화재 지정 명칭 변경 방침을 수용해 2009년 6월 4일, 서울시 고시 제2009-221호를 통해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

    문화재청 제공 정보에 의하면, 이 불상 소재지는 당연히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1 (세종로) 청와대’이며,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표시했다. 한데 놀랍게도 ‘소유자(소유단체)’와 ‘관리자(관리단체)’ 칸이 비어있다. 당연히 청와대여야 하겠지만, 이 불상은 주인도 없고, 관리자도 없다. 이 불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이 전부다. 나아가 이런 정보에는 불상 크기가 빠질 수 없지만, 이 ‘미남 불상’은 그 내력이 빠져 있다. 청와대 구중심처에 있는 까닭에 실측조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이 불상은 원래 경주 남산의 옛 절터에 있었는데, 1927년 총독부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놓았으며, 풍만한 얼굴은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갔고 두툼한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왼쪽 어깨만을 감싸고 입은 옷에는 주름이 소매 끝과 발목까지 표현되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면, 이 불상은 유덕사(有德寺) 석가여래좌상으로 불리어왔는데, 유덕사는 신라시대 최유덕(崔有德)이 자기의 집을 기부하여 지었다는 절이다. 그의 후손인 삼한공신 최언위(崔彦撝)가 최유덕의 진영(眞影·초상화)을 모시고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며 절터는 경상북도 월성군에 있다.”

    1989년 1월 1일자로 경주와 통폐합된 도시임에도, 문화재청은 여전히 소재지를 ‘월성군’이라고 적고 있다. 이 설명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1927년 총독부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이 불상을 경주에서 총독 관저로 옮겨왔다는 문구다. 무엇을 근거로 이리 확정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최근의 연구 성과를 보면,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는 현재 위치를 종잡을 수 없는 유덕사가 아니라, 이거사(移車寺)라는 경주 지역 한 절터였음이 거의 정설이 되어 있다. 이거사의 위치는 약사여래 좌상이 있던 경주 남산 서쪽이 아니라 남산 동쪽으로 추정된다.

    한데 이 불상을 이제는 제자리로 옮기거나, 청와대가 아닌 다른 곳, 예컨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경주박물관 같은 데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역대 정권마다, 특히 대통령의 종교성향에 따라 이 불상은 자주 괴담의 주인공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지금 이 불상은 대통령 관저를 내려다보는 녹지원 경내 보호각 시설 안에 있다. 1989년 노태우 정부 시절,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100m가량 후퇴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 불상을 특별히 생각했는지는 흔적이 없다. 하지만 청와대 경내에서의 불상 이전은 기독교계가 반발하는 빌미가 됐다. 불교신자 대통령 등장으로 심기가 불편했던 기독교계는 “청와대에 불상이 들어섰다”며 대통령의 종교 편향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신교 장로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미남 불상’은 전연 반대의 위치로 내몰린다. 집권 초창기, 하나회 숙청과 공직자 재산공개, 그리고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와 같은 전격적인 개혁 정치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벌이던 김영삼 정부는 구포역 열차 탈선이며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대규모 참사에 휘말리게 되고 그러자, 불교계가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난 것이 “청와대 불상을 치워버렸기 때문”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무리 봐도, 대통령의 친기독교 성향을 견제하기 위한 심리전 성격이 강했지만, 참위설(讖緯說)의 힘은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세지기 마련이다. 할 수 없이 청와대는 ‘미남 불상’이 온전하게 남아 있음을 증명하고자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조계종단 승려들을 초청해 현장을 보여주어야 했다.



    대통령 종교 따라 구설 휘말려

    같은 기독교 장로 출신인 이명박 정부에서도 불상이 다시 문제가 됐다.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 터진 숭례문 화재와 집권 뒤 발생한 용산 화재 참사와 같은 악재가 겹치자, 이번에도 불교계는 청와대가 문제의 불상을 홀대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말을 했다 해서 구설에 오른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반작용 측면도 컸다. 이명박 정부의 친기독교 성향 혹은 정책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전략들이 얼마나 주효했는지 모르지만, 불교계가 그 반대급부의 일정 부분을 챙긴 흔적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 이명박 정부는 불교계를 달래기 위한 각종 정책을 폈으며, 취임 첫해인 2008년 5월 9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는 문제의 불상을 출입기자단과 조계종에 공개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종교 성향이 다소 모호한 측면이 있는 박근혜 대통령 시절 역시 불교계 달래기 차원에서였는지 모르지만, ‘미남 불상’을 활용한 흔적이 보인다. 2013년 부처님오신날을 하루 앞둔 5월 16일, 최상화 춘추관장을 비롯한 청와대 불자 모임인 청불회(靑佛會) 소속 일부 신자가 미남 불상을 참배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이 일이 비공식이라 했지만, 그 일정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음을 볼 때, 대외용 행사로 기획했음을 엿볼 수 있다.

    불상을 둘러싼 이런 정치 역학의 움직임은 당연히 원래 자리인 경주로 돌아가야 할 불상의 이전을 복잡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앞서 보았듯 이 불상은 그 과정이 석연치는 않지만, 일제강점기에 불법적 방법을 통해 경주를 벗어나 서울로 이송되고, 더구나 조선총독 관저에 장식물로 비치됐다. 더구나 그것을 이어받은 청와대는 소유권도 없고, 관리권자도 아니다. 당연히 불상은 청와대를 벗어나야 한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경주 사람들은 더는 불상을 볼모로 삼지 말고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불교계와 자주 대척점을 형성하는 기독교계에서도 탐탁지 않게 바라본다. 당연히 내 보내라고 요구한다. 언뜻 보면 당장 경주로 내려보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모든 여건이 경주 귀환을 충족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불상을 둘러싼 그간의 일들은 불교계를 곤혹스러운처지로 내몰리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불교계에서도 당연히 경주 귀환을 바라겠지만, 그런 일이 자칫 외부의 압력에 굴복해 불상이 청와대에서 ‘축출’되는 것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우려해서다.
    불상은 이제 제자리로 가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한테 ‘진상’된 성보문화재를 언제까지 청와대가 볼모로 잡아둘 수는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이제는 당당히, 그리고 자랑스럽게 불상을 제자리로 돌려야 할 때다.




    김태식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연세대 영어영문학 학사, 선문대 고대사·고고학 석사
    ● 저서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직설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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