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명성황후 시해 주범 밝혀낸 원로 사가(史家) 최문형

“좌편향 사학자는 민중주의에, 뉴라이트는 통계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6-10-09 09:5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민왕후는 영리한 정치가, 그러나 구중궁궐에 머문 ‘아마추어’
    • 술에 취한 일본 낭인배, 민왕후 시신 능욕 시늉까지…
    • 민왕후 사진은 없지만, 살해범이 들고 온 스케치는 남아 있을 것
    • 가해자 일본인의 머릿속에 ‘민비’ ‘한국’ 따윈 없다
    • 학자들이여, 자기 이론과 사상에 역사를 두드려 맞추지 말라!
    • 동북아 균형자? 약자가 강자 이용한다는 건 거짓말
    • 전작권 단독행사 주장… 주제 파악 못하고 떠드는 ‘바보 외교’
    명성황후 시해 주범 밝혀낸 원로 사가(史家) 최문형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악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야만적 국가범죄였다. 식민지 쟁탈전에 뒤늦게 뛰어든 일본은 칼잡이들을 궁중에 난입시켜 조선 식민화의 장애물인 명성황후를 끔찍하게 난자했다. 한 사학자의 집요한 추적으로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 내각이 결정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에서 초대 외무대신을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주범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한국에서 명성황후는 드라마와 뮤지컬로 부활해 민족사의 아픔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가해국인 일본은 명성황후의 존재를 잊은 지 오래다. 관심 있는 소수의 사람 또한 이 사건이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떠돌이 낭인(浪人)들을 동원해 저지른 개인적 범죄라고 생각하는 게 고작이다.

    최문형(崔文衡·71) 한양대 명예교수는 일본 제국주의가 명성황후 살해에 관여했음을 밝히는 자료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지식산업사에서 최근 개정판이 나온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는 일본 정계 실세들의 움직임을 날짜별로 추적해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와 황후 시해 사건을 재구성했다.

    일찍이 일본의 야욕을 간파한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으려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명성황후 시해는 러일전쟁의 전주곡이었다. 일본판 ‘민비는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나’(閔妃は誰に殺さわたのか·彩流社 간행)에는 ‘보이지 않는 일러전쟁의 서곡’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국제관계 속에서 개항기 한국사를 탐구하는 최 교수는 일부 근현대사 교과서가 “민중민족주의의 우물 안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세계열강의 각축에 휘말려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조선의 운명이 결정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역사에서 역(逆)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이나 느슨해지는 한미동맹 관계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례를 들어 고언(苦言)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가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를 벼락치기로 읽었는데 소설처럼 흥미진진했다”고 말하자 그는 “지식산업사 김경희 사장이 제발 주(註) 달지 말고 소설처럼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나”라고 했다. 첨언하자면 ‘명성황후 시해의…’는 소설처럼 흘러가면서도 학술적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았다.

    죽음 재촉한 인아거일(引俄拒日)

    ▼ 책을 읽고 나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더군요.

    “황 선생 같은 독자니까 재미있겠죠. 요즘 한문도 모르는 젊은 친구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어요.”

    명성황후는 시해된 지 2년 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추존(追尊)된 호칭이다. 일본인들은 ‘민비(閔妃)’라고 낮춰 부른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는 고종이 왕이었으므로 민왕후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 민왕후 시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명성황후 추모사업회 이영숙 회장이 시해 사건에 관한 연구를 부탁했어요. 나는 서양사 전공자라서 못하겠다고 했지요. 1988년 KBS TV에 나가 국제관계를 강의한 적이 있어요. 60분짜리 특집을 네다섯 번 했을 거예요. 이 회장이 그걸 보고 강권하다시피 했어요. 그 무렵 학장을 그만두고 시간적 여유가 있었어요. 제자들한테 한 파트씩 맡겼어요. 그리고 민왕후 시해에 관심을 갖고 있던 동료 교수들과 함께 논문을 모아 1992년 민음사에서 ‘명성황후 시해의…’를 펴냈습니다. 이 책이 ‘동아일보’ 1992년 8월13일자 1면과 5면 전면에 소개됐어요.”

    ▼ 책에서 ‘민씨 정권’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대원군이 물러난 후에는 고종이 통치하던 시대인데요.

    “다른 연구논문에서도 ‘민씨 정권’이라는 용어를 많이 써요. 고종에겐 자기 세력이 없었어요.”

    ▼ 민씨 정권이라는 용어가 역사학계에서 자리잡을 정도라면 고종은 무능했다고 봐야 하나요.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려졌죠.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는 고종이 훌륭했다고 얘기하는데, 훌륭했으면 나라를 그 꼴로 만들었을까요. 하여간 저는 훌륭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의 군주에게 모든 책임을 미룰 수도 없을 것이다. 고종과 민왕후가 망국지주(亡國之主)라는 인식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관점도 있다. 이태진 교수는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을 1999년에 펴냈다. 이 교수는 그 책에서 고종이 대원군과 민왕후의 권력다툼 사이에서 우왕좌왕한 유약한 군주였다는 기존의 인식을 부인하고,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시각으로 개화를 추구한 개명(開明) 군주라고 평가했다.

    ▼ 민왕후 하면 보통 사람의 뇌리에는 대원군과의 마찰이 먼저 떠오를 겁니다. 소설이나 드라마도 전부 그걸 중심으로 그리잖아요.

    “물론 갈등이 없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사람들이 민왕후가 대원군과의 갈등 때문에 시해됐다고 조작하려 했어요. 대원군은 실각 후 민씨 세력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어요. 민왕후의 시해는 러시아와 일본의 싸움에서 비롯된 거예요. 민왕후가 러시아에 접근하니까 일본이 죽인 것이죠.

    민왕후를 정치인으로 평가해야지, 하우스와이프(가정주부)로 봐서는 안 됩니다. 하우스와이프로서 민왕후를 보면 시아버지한테 대든 패악(悖惡)한 며느리가 되지요. 민왕후는 대단히 똑똑한 여성이었어요.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항상 남편의 체면을 세워줬죠. 아이디어와 기지(機智)가 있는 명민한 정치인이었지만 객관적으로 세계 외교무대에 내놓고 볼 때는 구중궁궐에 박힌 여인에 불과했어요.

    민왕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격하는 인아거일(引俄拒日)을 했습니다. 그런 정책을 쓰려면 러시아가 조선을 완전히 도와준다는 전제가 있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한국을 위해 움직일 생각이 없었어요.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될 때까지 일본과는 절대 대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러시아는 한국 문제를 놓고 일본과 거래했어요. 이건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민왕후는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친절을 러시아 정부의 호의로 이해했습니다. 하우스와이프가 아니라 정치인이었지만 객관화해놓고 보면 뛰어난 정치인은 못 되죠. 국제정세를 몰랐으니까.”

    박영효 숙청에 분개한 일본

    ▼ 민왕후 시해의 주범은 누구입니까.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퉜죠. 일본의 국익이 걸린 싸움이었습니다. 일본 낭인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를 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일본의 국가적 결정에 의해서 움직인 거죠. 일본 정부는 처음부터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죠.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토 히로부미와 고향도 같고 영국 유학을 같이했습니다. 나이는 이토보다 다섯 살 위입니다. 이토 초대 내각에서 외무대신, 2차 내각에서는 내무대신을 지냈어요. 그리고 일본의 ‘겐로(元老)’로 천황에게 수상을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이런 실세가 국장급에 불과한 주한공사를 자청합니다. 한국 문제에 관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결권, 백지위임장을 받아왔습니다. 한국에 와서 완전히 총독처럼 군림했죠. 이 사람이 한국에 관한 모든 문제를 직접 결정했죠.”

    최 교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明) 육군대장이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상에게 “이노우에 백작을 즉각 도한(渡韓)시켜야 한다. 내각회의에서 결정되는 대로 단행하기를 희망한다”고 민왕후 시해의 결단을 촉구한 편지를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내 개정판에 보완했다.

    “일본의 정책이 민왕후를 회유하는 것에서 시해하는 강경책으로 바뀐 시점이 1895년 7월11일경입니다.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에서 그즈음의 자료를 다 찾아봤죠. 문제의 편지는 7월8일에 씌어진 것입니다. 민왕후가 7월6일 박영효를 내각에서 내쫓은 다음이죠. 박영효는 이노우에가 심어놓은 친일파 내무대신입니다. 박영효의 축출은 한국 내 일본세력에 심대한 타격이었죠. 편지에서 ‘이제는 한국사태에 대해서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말이 나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주범 밝혀낸 원로 사가(史家) 최문형

    2005년 12월1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교과서포럼 4차 심포지엄에 발표자로 나선 최문형 교수(오른쪽).

    일본은 한국을 집어먹기 위해 청일전쟁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런데도 민왕후가 엉뚱하게 아라사(俄羅斯·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인아거일을 하자 일본으로서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죠. 그렇다고 당장 아라사와 전쟁을 벌일 수도 없었습니다. 청일전쟁을 치른 지 얼마 안 돼 국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민왕후를 어떻게든지 회유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안 되니까 죽이기로 한 거죠. 시해 결정은 7월11일경 내려집니다.”

    최 교수는 서양사 전공자로서 일본과 서양의 자료를 수집함으로써 민왕후 시해를 국제관계의 흐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 교수는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근처 오피스텔을 연구실로 쓰고 있다. 연구실에서 대모산 자락이 보였다. 올 초 폐암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연구실에서 하루 10시간을 보냈으나 지금은 오전 8시경 집에서 자동차를 몰고 연구실로 나와 4시간 가량 일하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집에 들어가 쉰다.

    ▼ 태국은 이웃 국가들이 전부 열강의 식민지가 됐는데도 국왕이 외교를 잘해 독립을 유지했다고 자랑하는데요.

    “식민지 확보 경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그대로 계속 나아가면 태국에서 부닥치게 돼 있었죠. 그래서 태국을 완충국으로 만들어놓자고 합의했지요. 그런 합의 때문에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은 것이지, 국왕이 외교를 잘해 독립을 유지한 건 아닙니다.”

    민왕후는 판단력 뛰어난 정치인

    ▼ 역사에서 가정법은 의미가 없지만 고종, 민왕후, 대원군 등 당시 정치의 주역들이 좀더 현명하고 국제정치에 밝았더라면 식민지로 떨어지지 않고 독립을 유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건 물론이죠.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쉽게 생각하는 대목이죠. 당시 지구상에 남아 있는 최후의 식민지감이 한국과 만주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었죠.”

    ▼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쓴 데 비해 민왕후는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도 있고, 나름대로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친 흔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민왕후를 아주 현명한 사람으로 봐요. 러시아 기어즈 외상조차 청일전쟁 직전에 청나라가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런데 민왕후는 일본의 위협을 걱정했어요. 판단력이 우수한 여성 정치인이죠. 기지가 있고 눈치도 빨랐지만 구중궁궐 속에 박혀 세계정세를 잘 몰랐어요. 여기에 그녀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민왕후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였죠. 러시아의 아이디어가 들어간 정보를 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민왕후는 친러파입니다. 1884년 7월7일 체결된 한러수호통상조약은 민왕후의 첫 작품이에요.”

    ▼ 일본이 한창 서구로 유학생을 보내고 해외문물을 도입해 부국강병을 추진할 때 우리나라는 천주교 신부를 잡아 죽이고 쇄국정책을 폈죠. 민왕후는 문호개방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나요.

    “민왕후도 처음에는 문호개방을 불안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르니까 불안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일본이 1875년 운요호(雲揚號)를 보내 무력으로 조선을 압박해 강화도수호조약을 체결합니다. 우리 스스로 문을 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많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이 야만국이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본은 미국 페리 제독의 포함(砲艦) 외교로 문을 열었지만 그전에도 서양문물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준비가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요.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은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초기 산업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마찬가지로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저력과 기초가 있었다는 거예요.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총을 들고 쳐들어왔는데 우리는 활로 맞서 싸웠지 않습니까. 역사는 ‘What really happened’, 즉 실제로 일어난 것을 중심으로 써야 합니다.”

    ▼ 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가 쓴 글에 ‘일본에 민비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더군요. 그런가 하면 일본 우익들은 중국 난징(南京)학살도 조작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일본인의 이런 인식은 어디서 비롯된다고 보는지요.

    “우월감이죠. 고야스는 일본 사람의 머릿속에 한국이라는 존재는 100년 전 러일전쟁 때도 없었고, 오늘날에도 없다고 말했지요. 대륙으로 가는 통로로 조선반도가 있을 뿐이라는 거죠. 고야스는 NHK에 나가서 야스쿠니 신사를 비판한 사람인데 그렇게 말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좌파와 우파 학자가 서로 대립합니다. 좌파학자들은 일본의 침략을 당한 나라들의 딱한 사정을 동정하는 척합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네 나라 중심이에요. 우파는 더하죠. 와세다대의 어느 교수는 한국이 일본과 강화도수호조약을 체결할 당시의 형편은 오늘날 북한과 미국 관계와 같다고 말했어요. 조선이 그 정도로 처참했다는 거죠. 듣는 순간 열이 나더군요.”

    사람은 물을 먹어야 큰다?

    ▼ 세계사에서 이웃나라의 궁정에 들어가 황후를 난자해 죽인 유례가 있습니까.

    “없어요. 쿤타킨테 식으로 죽인 거예요.”

    쿤타킨테는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에 나오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

    “아프리카 사람들 사냥해서 죽이던 거 있잖아요. 잔혹하게 살해했죠. 술에 취한 일본의 낭인배는 민왕후의 시신을 능욕하는 시늉까지 했죠.”

    ▼ 가끔 민왕후 가짜 사진 소동이 벌어지잖아요. 민왕후는 생전에 사진을 찍지 않았나요?

    “일본 낭인배가 왕후를 시해할 때 얼굴 스케치를 가지고 궁정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민왕후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 어딘가에 스케치가 남아 있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일본 사람들이 감추고 내놓지 않지만.

    사진은 전부 가짜예요. 민왕후는 자신의 사진을 찍게 하지 않았어요. 스케치도 서양인들이 인상을 머릿속에 담고 가서 그린 거예요. 그렇지만 서양 사람들의 스케치는 아주 섬세하죠. 비슷하게 그렸을 거예요.”

    최 교수는 서울대 사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하고 박사 학위는 서강대에서 받았다. 그는 서강대 신제(新制) 박사 1호. 당시는 구제(舊制) 박사 학위와 신제 박사가 병존했는데 서울대 국사학과에서는 박사 전임교원이 없어 신제 박사를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서울대에 있던 이기백, 전해종, 길현모, 이보형 교수가 전부 서강대로 옮겨가 있었다.

    그는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며 조교를 할 때 민석홍 교수에게 ‘찍혀’ 서울대 교수를 못한 한(恨)이 있다. 필자가 이 이야기를 꺼내자 “질릴 수밖에 없군요.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물었다. 그러면서도 “돌아가신 분한테 결례되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라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찍혔다’는 속어 표현이 재밌는지 몇 차례 되뇌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건방졌어요. 당시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다’ 하는 태도가 제게 있었죠. 아마 제 학생이 저한테 그런 짓을 한다면 저도 절대 용서 안 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솔직히 억울했어요. 서울대 대학원에서 제가 성적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리고 조교를 했죠. 모든 것으로 볼 때 제가 적임자였죠. 그런데 서울대 교수로 못 가니까 아는 사람들이 제가 찍혔다고 본 거죠. 한양대 조교수로 있을 때인데 억울해서 며칠동안 술을 마셨습니다. 지식산업사 김경희 사장이 ‘만일 선배님이 서울대에 남았으면 이런 책 못 썼습니다. 서울대에서 에헴 하다가 끝났죠’라고 위로합니다. 차하순 서강대 명예교수도 저처럼 찍혀서 서울대에 못 갔죠.

    한양대에서 생각한 만큼 제자를 못 키웠어요. 죽으면 그대로 끝나는 거죠. 오기를 품고 책을 썼습니다. 공부한 흔적을 책으로 남기려고.”

    정약용은 그를 총애하던 정조가 죽고 나서 17년 동안 전남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학문을 갈고 닦아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같은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그가 유배를 가지 않고 순조 때도 승승장구했더라면 조정 출입을 하며 ‘에헴’ 하다가 한세상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필자가 다산(茶山) 이야기를 꺼내며 “사람은 물을 먹어야 큰다고 하더라”고 말하자 그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물 좀 마십시다” 하며 물을 한잔 따라 마셨다.

    명성황후 시해 주범 밝혀낸 원로 사가(史家) 최문형

    최문형 교수는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작은사진) 외에 ‘러일전쟁의 세계사’를 일어판으로 출간했다.

    써야 할 것은 반드시 써야

    진보 계열인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역사비평’ 가을호에 뉴라이트 쪽 ‘교과서 포럼’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두 편의 글이 게재됐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신주백 연구원은 최 교수가 금성출판사간(刊)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개항기 서술에 대해 지적한 내용을 인용하며 ‘지나친 측면이 있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기의 국제관계를 기술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최문형의 비판은 옳다’라고 썼다.

    “그 친구들이 나를 옳다 그르다 할 처지가 아닙니다. 건방진 거죠. 솔직히 그 애들의 나이보다 제가 역사 공부한 시간이 더 많아요. 제가 1953년에 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로부터 50년이 넘었어요. 그 애들, 50도 안 된 아이들이에요. 제가 역사학회에서 ‘너희들이 쓴 글 중에 몰라서 잘못 쓴 것을 알겠다’고 말했어요. 언제든지 그에 대해 토론할 준비가 돼 있죠.”

    뉴라이트의 사상이론지를 자처하는 계간 ‘시대정신’의 재창간사에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고등학교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자주 노선에 입각한 독립운동사, 민주화운동사, 통일운동사를 그 체계로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 현대사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와 같은 중요한 역사는 경시되거나 부정적으로 기술되고, 민주화 운동과 북한 정권은 높이 평가되어 있다.’

    신주백 연구원은 그러나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능력을 떨어뜨릴 개연성이 아주 높은 위험한 역사인식이다. 그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교과서 포럼의 주장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친일파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고 있다’고 반론을 폈다.

    최 교수는 좌편향 교과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뉴라이트 쪽에도 오류가 있다고 중립적 견해를 보였다.

    “저는 좌편향 학자들의 얘기는 전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뉴라이트가 전적으로 옳다는 거 아닙니다. 뉴라이트에도 문제가 있어요.”

    있는 그대로 역사를 말하라

    ▼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동학농민혁명 같은 민중혁명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길게 기술했어요. 편중된 기술로 말미암아 으레 써야 할 사실을 쓰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청일전쟁, 러일전쟁, 민왕후 시해, 헤이그 밀사사건, 안중근 의사, 독도 문제까지 다 간단하게 기술했어요. 심지어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그냥 지나가요. ‘대한제국의 개혁은 일제가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중단됐다’는 기술이 전부예요. 어디 다른 기술이 있나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우리 역사하고 깊은 관계가 있어요. 전쟁터가 바로 우리 땅이에요. 우리 땅을 집어먹으려고 청국과 일본이 싸우고, 러시아와 일본이 싸운 거예요. 이걸 무시하고 있어요. 헤이그 밀사사건도 단어 하나 집어넣고 말았죠. 민왕후 시해사건은 ‘일제가 우리의 왕비를 잔혹하게 시해했다’ 정도로 기술했죠. 의당 써야 할 것은 안 쓰고, 민중운동에 치중하고 있어요. 거기에 큰 비중을 두는 것도 좋은데, 써야 할 것은 반드시 써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1876년 일본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어요. 1882년에는 미국 독일 영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했죠. 1884년에는 러시아가 들어왔어요.”

    그는 이 대목에서 국제관계사에서 ‘영러 대결의 역사’가 중요하다며 꽤 긴 강의를 했다. 조금 줄여서 정리해본다.

    “영러 대결은 1815년 이후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90년간 계속됐어요. 나폴레옹 타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영국과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부상해 패권을 다퉜습니다. 러시아가 발칸, 중앙아시아, 동아시아에서 남진(南進)을 기도하면 그때마다 영국이 전력을 다해 저지했습니다. 히틀러 타도에 성공한 미국과 소련이 세계의 패권을 다툰 기간(1945∼91년) 보다 2배나 길었습니다.

    영러 대결의 무대가 크림전쟁을 계기로 발칸에서 동아시아로 옮겨졌습니다. 그 여파가 1860년 러청 베이징조약으로 이어져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고 한국 만주와 국경을 접하게 됩니다.

    영러 대결체제에서 청일, 러일이 대결하는 겁니다. 역사기술이 고작 우리와 청국과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가 전부예요. 열강과의 관계는 전혀 언급이 없어요. 열강이 우리나라에 관광하러 왔습니까? 역사를 넓게 보지 못하고, 전부 아시아적이거나 한국적인 규모로만 축소해서 보려고 해요.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인식에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경제사를 공부한 사람이에요. 나도 젊어서 서양경제사를 공부했습니다. 경제사를 공부한 사람들이 통계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모든 게 통계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북한의 전체 국가예산이 우리나라 국방예산보다 적습니다. 그렇다고 저들의 위협이 없습니까? 저들은 핵과 미사일, 화학무기를 가지고 있어요. 통계만 가지고 얘기할 수는 없죠.”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에 관여하는 학자들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안병직 교수와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가 경제사를 전공했다. 최 교수는 그러나 특정인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았다.

    “뉴라이트 계열 어떤 학자는 일본이 1905년에 이미 우리나라를 통합한 것이라고 봐요. 1905년에 일본의 정치체제가 마련됐으므로 일본 통치가 1905년부터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일제 36년이 아니라 41년이 됩니다. 역사적 사실과 달라요. 저도 엄격하게 따져서 우파입니다. 그러나 좌파든 우파든 사실에 입각해 얘기해야 합니다. 자기 이론과 사상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역사를 거기다 두드려 맞춰서는 안 됩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겁니다.

    좌파 역사학자들은 1905∼10년의 5년 동안 일본이 외교권을 빼앗고도 한국을 병합하지 못한 원인을 오로지 의병의 저항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대청제국을 때려 부수고 러시아 해군을 무찌른 일본이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의병 때문에 5년을 끌었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조선을 바로 먹지 못한 이유는 러시아의 복수와 미국의 견제 때문이에요. 일본은 만주를 미국시장에 열겠다고 미국과 약속했어요. 러시아가 만주의 문호를 폐쇄하고 있으니까 미국은 일본을 동원해 러시아를 쳐서 문을 열게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전쟁에서 이기자 일본은 만주의 문을 닫아걸었죠.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못 먹게 했죠. 일본 외교가 무섭습니다. 미국이 견제하니까 일본은 어제의 적인 러시아하고 손을 잡아요.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에 붙어 독일 포위망에 동참합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힘을 빌려 만주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했습니다. 한국을 병합하는 데 외교적으로 성공한 거죠. 일본은 군사력에 못지않은 외교력을 가졌습니다. 일본은 그때부터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비해 세계를 모릅니다.”

    거시적 한국사 연구의 필요성

    한국 근현대사의 주류가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침략과 저항을 그 기본체계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내재적 발전론과 ‘자본주의 맹아론’은 일본 식민지배만 없었다면 조선후기에 이미 내재적 자체적 자발적으로 맹아를 잉태한 자본주의적 근대화 움직임을 토대로 한국은 근대적 국민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 자본주의 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서구에서 농업에 자본주의 경영이 시작되면서 노동력이 필요없게 됩니다. 농민들은 농촌에서 쫓겨나 도시 빈민이 돼요. 그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입니다. 적수공권(赤手空拳), 가진 거라곤 빨간 손바닥밖에 없는 사람들이죠.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이 자본을 축적하게 됩니다. 이게 서양 자본주의의 맹아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 맹아는 서양 것과 다릅니다. 유럽에서도 엘베 강 동쪽과 서쪽이 전혀 달라요. 내재적 발전론이나 자본주의 맹아론은 서양 것을 빌려다가 우리 것을 거기에 두드려 맞춘 거예요.”

    ▼ ‘근현대사를 전공한 사람들의 8, 9할은 민중민족 계열로 보면 대충 맞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만길 교수를 필두로 한 계열이 사실상 근현대사 연구 쪽을 점령했다는 시각이 있더군요. 사실에 가까운 견해인가요? 사실이라면 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는지요.

    “책임이 역대 정부에 있어요. 저는 대학 선생 40년 하면서 그렇게 되는 걸 보고 세상을 산 사람이에요. 우리 또래에서 근현대사를 전공하면 대개 독립운동사를 공부했어요. 나라가 망하기 전의 의병활동사, 나라가 망한 후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거예요.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공부하면 역대 정부가 장학금을 줬어요. 민족을 간판으로 걸고 그걸 장려했어요.

    명성황후 시해 주범 밝혀낸 원로 사가(史家) 최문형

    인터뷰하는 최문형 교수.

    의병활동 연구가 나중에는 운동권 학생들의 교과서가 됐어요. 의병 연구는 대단히 접근하기 쉽죠. 특별한 어학 실력이나 한문 지식 없이도 할 수 있죠. 다가가기 용이하고 혜택이 많으니까 자꾸 그쪽으로 모였어요. 그게 축적된 거죠. 어느 원로학자가 얘기하듯이 이제는 그 분야를 누가 해도 똑같은 게 나올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이게 오늘의 현실이에요.

    이제는 그렇게 공부해서는 안 됩니다. 좀더 넓은 안목으로 봐야 합니다. 1882년 이후 우리나라에 외세가 들어와요. 그때부터는 우리의 역사라도 우리 민족의 의지대로 결정된 게 거의 없어요. 우리 문서만 가지고 국사를 공부하는 시대는 지났단 말입니다.”

    ▼ 교과서포럼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근현대사 교과서가 민중민족 이념의 우물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을 했던데요.

    “‘우물 안에 갇혀 있다’는 권재현 기자(동아일보 문화부)가 붙인 말이죠. 하여튼 우리만 고립돼서 살 수는 없어요. 모든 걸 오픈하고 세계화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어요. 민왕후 시해만 놓고 보더라도 연구를 하려면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알아야 해요. 일본 문서가 부족해 일본에 와 있던 서양 기자나, 외교관이 자기 나라에 보고한 문서를 토대로 제가 연구를 시작했어요. 우리 국사만 공부해서는 민왕후 시해 문제를 해결 못 하죠. 지금 대학에서 한문 가르칩니까? 심지어 사학과에도 한문강독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사학과, 서양사학과, 동양사학과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합쳐서 함께 공부해야 합니다.”

    ‘무지의 외교’에서 배우는 역(逆)교훈

    ▼ 국사학과와 동서양 사학과의 통합은 평소 지론이더군요.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 일본사학과가 독립돼 있는 곳은 일본 도쿄대밖에 없어요. 우리는 그걸 탈피해야 합니다. 다 합쳐서 역사를 크게 봐야 합니다. 일본에서도 작은 문제를 갖고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인텐시브(intensive·집중적인) 연구는 많아요. 그런데 익스텐시브(extensive·광범위한) 연구는 거의 없습니다.”

    ▼ 일부 역사교과서가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바지한 사람들은 정통성이 약한 친일파이고, 좌파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기술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그건 부당하죠. 나라 밖에서 일제에 저항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여기서 일본 통치를 받고 살았어요. 그 통치에 저항하면 결국 희생당했어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일본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다 친일파가 된 건 아닙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어요. 영국 교육을 받은 사람은 친영파가 되지만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은 나중에 반일파가 된다는 겁니다.”

    ▼ 재밌는 이야긴데요. 왜 그렇죠.

    “미국, 영국 사람은 사람을 붙잡을 때도 감싸서 붙잡는데, 일본은 멱살을 잡아요. 그러니까 반감이 생긴다는 거죠.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반일정신이 있었어요. 다만 반일정신을 표현했다가는 희생당하니까 못한 것뿐이에요. 일률적으로 선을 그으면 안 되죠.”

    권태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라는 저서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유별난 동화(同化) 정책이 민족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남달리 더 널리 깊게 일으켰다’고 썼다. 최 교수와 비슷한 시각이다.

    ▼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가 발족해 활동 중인데요. 60∼100년이 지난 일을 대통령직속위원회에서 규명하고 재단하는 방식이 타당하다고 봅니까.

    “정치 문제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어떤 목적이나 편향된 생각을 갖고 정치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절대 안 돼요.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영국경제사를 전공하다가 한국 근세사 연구로 방향을 틀었다. 대학 1학년 때 일본의 경제사학자 오쓰카 히사오(大塚久雄) 도쿄대 교수가 쓴 ‘서양경제사 서설’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오쓰카 교수는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이 어느 날 ‘전쟁터로 떠납니다’라고 엽서를 써놓고 소식이 끊기자 마음이 너무 아파 가슴에 ‘평화’라는 두 글자를 깊숙이 새기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책의 서문에 이런 사연을 옮겨놓았다. 최 교수는 그 글을 읽고 우리가 사는 길은 경제발전이라고 생각했다. 6·25전쟁 직후에 나라가 형편없이 된 마당에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부터 윌리엄 애슐리, E 립슨, 윌리엄 커닝엄의 서양경제사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경제발전을 하려면 기반을 쌓아야 해요. 영국은 산업혁명을 해놓고 식민지를 늘려갔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식민지가 됐느냐’로 관심이 옮아갔죠. 경제사 연구하다 관심을 그리로 돌린 거예요.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경쟁을 하면서 세계를 다 차지하고 아시아에 남은 먹잇감 중의 하나가 한국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국한테 안 당하고, 일본한테 당하게 됐느냐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 제국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국권을 상실했습니다. 그 시대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아야겠다는 역(逆)교훈을 배워야지요. 교훈은 모방하는 거고 역교훈은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19세기 말에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똑바로 알아야 되풀이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역교훈은 반면교사(反面敎師) 정도의 뜻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바보짓을 골라가며 했단 말이에요. 김옥균, 박영효 두 사람이 일본에 가서 주일 영국공사 파크스를 만났어요. 그들은 ‘영국이 조선을 청나라하고 똑같이만 대우해준다면 관세율을 인하하겠다’고 했어요. 청나라가 싫다고 그런 바보 같은 제의를 하면 되겠어요. 그때 김옥균이 32세, 박영효가 22세예요. 뭘 알겠어요. 파크스는 일본공사만 18년을 해 세계 정보를 다 수집하고 있는 외교관이에요. 상대가 안 돼요. 파크스가 ‘조선인은 외형적인 절차만 충족해주면 내면적인 이해관계는 따지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어요. 얼마나 아픈 얘기예요. 이래서 한영수호조약을 맺고도 한영신조약을 다시 맺어 관세를 반감해줬고 이 관세율이 모든 수교국에 적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책임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무지(無知)에 있는 거예요. 이런 무지가 얼마만큼 큰 문제를 낳았습니까.”

    주제 파악 못하는 바보 외교

    ▼ 한국이 동북아 균형자가 된다는 말은 타당합니까.

    “약자가 강자를 이용한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오랑캐로 오랑캐를 견제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죠. 19세기 말에 영국과 미국의 힘을 끌어들여 러시아, 일본, 청을 견제하는 전략이 이이제이지요. 그러나 힘있는 놈이 바보처럼 당합니까? 거꾸로 치는 거예요. 균형자론을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이쪽에 붙으면 이쪽이 유리하고, 저쪽에 붙으면 저쪽이 유리하게 된다는 거예요.

    지난 해를 기준으로 할 때 세계 각국의 국내총생산(GDP)은 미국(12조4872억달러)과 일본(4조5588억달러)이 부동의 1, 2위이고 독일, 영국, 프랑스가 2조달러대로 뒤를 잇습니다. 한국은 7875억달러로 세계 12위입니다. 1조달러도 안 되는데 어떻게 균형자 노릇을 합니까. 우리가 국제관계에서 똑바로 배워야 될 교훈은 약자가 강자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국에 붙어도 둘을 합해 2조달러가 안 돼요.”

    ▼ 반미 풍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본의 어떤 국회의원이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총리한테 ‘당신은 왜 그렇게 미국 부시 대통령의 푸들 노릇을 하느냐’고 공격했어요. 그러니까 고이즈미가 웃으면서 ‘당신 그것도 모르냐’고 했어요. 그게 답이에요. 누가 힘이 가장 센 나라입니까. 국제관계는 개인적 의리와는 달라요. 어떻게 국민을 보호하고 잘살게 만드느냐가 제일 중요해요.”

    전시작전권 단독행사와 한미연합사의 해체를 계기로 미국이 한미동맹을 태국과 필리핀 수준으로 격하해 방위 부담을 줄이려 한다는 견해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미국과 태국은 매년 정기적인 공동훈련만 몇 차례 실시한다. 최 교수는 19세기 말기에 미국이 한국공사의 지위를 태국 수준으로 낮춘 사례를 소개했다.

    “1884년 7월 미국 의회에서 외교 및 영사법이 통과됐어요. 그 법에 미국과 조선의 교역량이 미국과 태국의 교역량과 비슷하므로 주한공사의 지위를 격하했죠. 초대 공사인 후트는 전권공사인데 그 지위를 변리(辨理)공사로 낮췄어요. 오늘의 상황과 비슷해요.

    주일미군사령관을 대장으로 올리고 주한미군사령관은 중장으로 낮추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파크스가 한영신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공사에게 공사라는 직함을 붙여줬지만 실제로는 영사급 공사였어요. 주한 영국공사는 본국에 직접 보고하지 못하고, 주청공사를 통해 보고했지요. 그러니까 주한 영국공사의 지위를 떨어뜨린 거죠. 주한미군사령관은 주일미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체제가 될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100년의 차이를 두고 어쩌면 그렇게 비슷하게 연결되는지 모르겠어요.

    국방대학원 장군 진급반에서 10여 년 강의를 했어요. 강의할 때마다 ‘국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죠. 외교는 힘 없으면 안 되거든요. 우리는 힘을 똑바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죠. 우리가 결정하면 다 되는 줄 안단 말이에요. 이게 큰 문제예요. 세계를 좀 알아야 해요.

    인천공항을 떠나 미국에 들어가보면 우리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요. 우리는 미국을 그렇게 크게 생각하는데, 미국은 우리의 비중을 어느 정도나 보겠어요. 우리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개관적인 위치를 알고 나서 얘기해야 돼요. 자기의 올바른 실력도 모르고 떠들면 바보밖에 안 되는 겁니다.”

    동맹의 역사로 본 한반도 병합

    ▼ 역사에서 국가간 동맹이 국운(國運)을 좌우한 경우가 많았지요.

    “영일동맹 이야기를 해봅시다. 러시아 발틱 함대가 일본 해군과 싸우기 위해 아시아로, 동북아시아로 올 때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은 발틱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게 하죠. 결국 발틱 함대는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서 왔죠.

    영국이 발틱 함대가 움직이는 정보를 일본에 줬어요. 일본은 앉아서 모든 정보를 받았죠. 동맹관계 때문에 큰 덕을 본 겁니다. 그렇다고 영국이 일본을 위해 희생한 것도 없어요. 영국은 발틱 함대에 기름, 석탄, 물을 팔아먹었어요. 국가이익을 추구한 것이죠. 어느 하나에 붙어서 죽어라고 매달리지 않아요.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었습니다. 프랑스가 러시아에 철도 건설 차관을 주면서 서쪽으로 철도를 놓으라고 했습니다. 유럽쪽으로 철도를 놓아 독일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비테 재무장관은 거꾸로 동쪽에 철도를 놨어요. 동쪽으로 놓아야만 철도를 타고 병력이 아시아로 빨리 이동할 수 있죠. 면직물을 아시아에 팔 수도 있고요.

    경제, 군사 면에서 자기네 이익을 지키려고 맺는 것이 동맹이에요.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한테 매달릴 필요도 없죠. 동맹을 맺고도 자국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국가의 본질이에요. 우리는 지금 허공에 뜬 소리만 하고 있어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예요.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두드려 맞춰 넣으려고 해서는 안 되지요.”

    최 교수는 일본이 러일전쟁 과정에서 독도를 병합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의 동북쪽에 노시베 항구가 있다. 러불동맹 덕에 아프리카를 돌아온 발틱 함대가 거기서 쉴 수 있었다. 다른 항구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발틱 함대는 그곳에서 기다리다가 본국으로부터 제3 태평양 함대와 합류해서 가라는 연락을 받는다. 제3 태평양 함대를 기다리는 동안 일본이 뤼순(旅順)을 점령했다. 노시베는 적도상에 있는 항구다. 태양이 내리쬐는 갑판 위에서 고통스러운 나머지 병사들이 자살을 했다. 결국 발틱 함대는 제3 태평양 함대와 도킹해 프랑스령인 캄란 만을 거쳐 위로 올라갔다.

    “뤼순 쪽이 함락됐으니 발틱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거 아니겠어요? 일본 해군은 1905년 5월27일 발틱 함대를 대마도에서 때려부쉈죠. 발틱 함대의 항로와 일정을 일본에서 다 계산하고 있었어요. 거기에 맞춰서 독도를 시마네현에 속한다고 고시해 차지했죠. 전쟁을 목적으로 독도를 점령했습니다. 카이로선언에 탐욕과 폭력에 의해서 점령한 땅은 다 내주라고 돼 있죠. 그러니까 일본은 독도에 대한 권리가 없어요.”

    힘이 있어야 진실도 밝혀진다

    최 교수가 쓴 ‘국제관계로 본 러일전쟁과 한국의 병합’은 한국에서 1000부도 채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어판 ‘일로전쟁(日露戰爭)의 세계사’는 2005년 5월 초판이 나온 지 두 달 만에 재판을 찍어 4700부가 팔렸다.

    ▼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에 대한 관심이 높다지요? 그 분야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고.

    “자기네가 승리한 전쟁이니까요. 조그만 섬나라가 백인의 대국을 때려부쉈지요. 일본 사람으로서는 보통 영광이 아니지요. 그 전쟁을 계기로 세계적인 대강국이 됐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일본 학계의 축적된 연구 성과에 견주어 우리 학계엔 열강과의 관련 속에서 종합적으로 다룬 연구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일본 일러전쟁연구회가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기존 연구에서 한반도와 중국의 시각이 빠져 있는 것을 보완하고, 국제관계라는 거시적 시각의 연구가 절실하다’고 자인했죠. 일본 학자들이 제 책을 주목한 건 이 때문이죠.

    러일전쟁의 결과 우리나라가 일본에 예속됐죠. 그런데 일본 학계는 러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병합하게 됐다는 얘기는 싹 뺐어요.”

    ▼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힘 없이는 해결 못해요. 여기엔 국방력, 외교력, 경제력은 물론 학문적인 힘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국제관계에서 힘있는 쪽에 붙어야죠. 지금 일본만 나쁘다고 할 게 아니에요. 중국도 똑바로 봐야 할 때가 됐어요. 물론 일본이 좋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문제가 굉장히 많은 나라예요. 이 책을 내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을 잘 몰랐어요. 그런데 책을 내고 일본을 다니면서 보니까 일본의 힘이 자꾸 느껴져요. 일본이 정당하다는 게 아닙니다. 정당성의 문제와 일본의 경제력, 외교력은 별개예요. 어떤 이들은 일본이 별거 아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별거 아닙니까.”

    ▼ 젊은이들한테 권하고 싶은 역사서가 있으면 몇 권 추천해주시죠.

    “세계사 책을 읽었으면 좋겠어요. 어느 책이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는 싫어요. 지금 너무 국내 문제에 집중하고 있어요. 세계화를 얘기하면서도 전부 나라 안만 보고 있어요.”

    그는 올 초 폐암 수술을 받았다. 의사 사위 덕에 폐암을 초기에 발견해 오른쪽 폐를 4분의 1가량 떼어냈다. 항암제가 사람을 녹초로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 침략’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다. 컴퓨터를 열어 A4 용지로 178쪽이 완성된 원고를 보여줬다. 20쪽만 더 쓰면 되는데 하루에 한 장밖에 못 쓴다고 아쉬워했다. 무척 두꺼운 책이 될 것 같다.

    반공은 집안 내력, 그러나…

    그는 평생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데도 폐암에 걸렸다. ‘카펫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가 폐로 들어가 폐암을 유발한다’는 말을 전문가로부터 들은 기억이 났다. 혹시 집에서 카펫 생활을 하느냐고 물었다.

    “맞아요. 여태껏 집에 카펫을 깔아놓았어요. 수술받고 나서 치웠어요.”

    ▼ 폐암의 주범은 담배지요. 간접 흡연도 무서워요.

    “병원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은 야만인 취급하더군요. 한양대 의대 교수 중에 폐암으로 죽은 사람이 있어요. 수술하러 들어가서도 담배를 피웠대요.”

    수술 이전에는 750ml 양주 반 병은 거뜬히 마셨다. 지금은 맥주 한 컵이 고작. 인생이 처량해졌다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1남 1녀를 두었다. 이화여대 사학과를 나온 딸은 개업의의 부인이고, 아들은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에서 중국문화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그는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이다. 지주 집안이어서 공산정권 치하에서 재산을 빼앗기고 월남했다. 북한에서 사리원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 중앙고를 졸업했다.

    ▼ 반공 정서는 집안 내력이겠군요.

    “그렇게 얘기할 수가 있죠. 하여간 내가 그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보수우익도 나쁜 짓 많이 했어요.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얼마나 인권을 탄압했어요.”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휴대전화가 걸려왔다. “알았어. 곧 들어갈게”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부인의 호출전화인 듯했다.

    “요즘은 조금만 늦어도 전화를 걸어요. 무리하면 안 좋다는 거죠. 제가 이렇게 이중 삼중 체크를 받으며 살아요.”

    주변에 건강을 염려하고 살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한 인생이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함께 걸었는데 최 교수는 폐암 수술을 받고 항암제를 먹는 노인답지 않게 걸음걸이가 활달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