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신군부 동명목재 몰수 27년, 강정남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의 격정 토로

“우리가 ‘악덕기업인’이라니…‘동명인’은 진실을 알고 싶다”

  • 윤희각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toto@donga.com

    입력2008-02-12 15: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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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당시 세계 최대 목재 회사인 부산 동명목재상사를 강제 환수하고 사주 강석진 회장과 아들 강정남 사장 일가의 재산을 몰수했다. ‘악덕기업인’이라는 이유였다. 27년이 흐른 지금 과거사위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 당시 엄청난 시련을 겪은 강정남 동명목재 사장은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학교법인 이사장으로 변신해 있다. 과연 동명목재 재산몰수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또한 ‘동명인’의 정신을 계승한 동명대는 어떤 미래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신군부 동명목재 몰수 27년, 강정남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의 격정 토로
    1980년 6월19일 새벽 2시. 해외에서 부친인 동명목재상사 강석진 회장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 강정남(姜政男·당시 41세) 동명산업 사장은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로비에서 집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건장한 청년 3명이 그를 에워싸더니 차에 태우고는 한강을 건너 서대문 방면으로 끌고 갔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청년들은 보안사 소속 수사관들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로 끌려간 강 사장은 다음날 오전 부산으로 압송돼 보안사 부산지부 지하실에 감금됐다. 옆방에서 먼저 연행된 동명목재 임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문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임원들의 비명도 들렸다. 부친이 이곳에 감금돼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됐다. 부친은 얼마 뒤 쇼크로 쓰러져 인근 병원으로 실려간 뒤 그곳에 감금됐다.

    이때부터 두 달 동안의 지하 독방생활이 시작됐다. 외부와의 연결은 철저히 차단됐다. 수사관들로부터 이틀간 회사와 관련된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3주 뒤 수사관이 각서 한 장을 그에게 내던졌다. ‘동명목재와 사주의 재산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의 재산포기 위임 각서였다. 서슬 퍼런 그때 분위기에선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설사 재산을 뺏기더라도 지하 독방에서만 풀려나면 회사를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두 달 뒤 바깥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의 판단은 오류로 드러났다.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동명목재는 이미 공중분해된 뒤였다. 동명목재와 가족의 전 재산은 국가로 넘어갔다. 동명산업, 동명식품, 동명해운, 동명중공업 등 나머지 계열사도 마찬가지. 보안사에서 풀려났지만 그는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부친과 그는 ‘악덕기업주’로 낙인찍혀 이후에도 가택연금을 당했다. 가택연금은 이듬해 1월20일 비상계엄 해제 때까지 계속됐다. 출국금지조치는 4년 가까이 이어졌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입니다. 수천억원의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악덕기업인으로 몰렸으니까요. 돌아가신 부친이나 저나 악덕기업주라는 누명을 반드시 벗고 싶어요. 동명목재도 절대 악덕기업이 아니었음을 국민께 알리고 싶습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 이 같이 유언하셨어요.”

    지난해 12월31일 부산시 남구 용당동 동명대학교 내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 사무실에서 강정남 이사장을 만났다. 동명목재상사 창업주이자 ‘목재왕’으로 불리던 고(故) 강석진 회장의 장남인 그는 강 회장이 198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10년 넘게 생활했다. 10여 년 전 귀국한 그는 부친이 설립한 동명문화학원의 업무를 돕다 2004년부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1980년 신군부는 동명목재상사를 강제 해산하고 회사와 사주 강석진 회장 일가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 사건은 부산지역에선 ‘동명목재상사 해체 몰수 사건’이라 불리며 널리 알려졌지만,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갔다.

    동명목재상사 재산몰수 일지

    1945 : 강석진 회장, 동명목재 설립

    1968~1970 : 동명목재, 3년 연속 전국 수출 1위 달성

    1979. 12.12 : 신군부 쿠데타

    1980. 3.7~5.1 : 원자재 값 상승 등으로 위기 맞은 동명목재, 은행권에 자구 노력

    1980. 5.16 : 강 회장, 200억원가량의 자산 매각 추진

    1980. 5.31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1980. 6.18~19 : 강 회장과 강정남 사장 등 임원진 28명 보안대에 불법 구인, 강정남 사장은 이후 보안대서 2개월 독방 생활

    1980. 6.26 : 동명목재 최종 부도

    1980. 6.27 : 동명목재 재산 국가 환수조치 발표

    1980. 7.9~10 : 강 회장 부자, 동명 재산처리 위임 각서 날인

    1980. 11.13 : 전두환 대통령, 동명목재 처리 최종 결재

    1984. 10.29 : 강 회장 사망

    1988. 3.16 : 강 사장, 재산권 강탈 무효 청원서 제출(한 달 뒤 반려)

    1997. 4.23 : 서울지법에 국가 상대 재산권 반환 청구 소송

    1998. 11.18 : 1심 승소

    2000. 5.18 : 서울고법 패소

    2002. 8.27 : 대법원 패소

    2007. 4 : 과거사위, 동명목재 재산몰수사건 진상조사 착수


    부산 남구 용당동에 있던 동명목재상사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210만㎡)의 합판 제조업체로 1960년대 우리나라 10대 기업에 포함되는 등 한국 수출을 대표하던 기업이었다. 그러나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강 회장을 부산지역 악덕기업주로 지목하면서 곧 국보위 소속 동명목재상사처리위원회에 의해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강 회장과 강정남 동명산업 사장은 보안사 부산지부 지하실에 감금돼 ‘동명목재와 관련한 재산처리를 동명목재상사처리위원회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강제로 써야 했다.

    당시 동명목재상사와 계열사는 부산 일대 부동산 414만㎡, 공장 건물 24만5000㎡, 은행권 주식 등을 모두 빼앗겼다. 몰수된 부동산의 가치를 1999년 공시지가로 환산하면 6000억원이 넘는다. 나머지 건물, 주식 등을 포함할 경우 빼앗긴 전체 재산은 현재 가치로 1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강 사장은 1997년 정부를 상대로 동명목재를 몰수한 신군부의 행위는 무효라며 소송을 냈고, 1심 재판부는 강 사장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2심과 대법원에서 잇따라 패소했다. 이후 2006년 10월 강 사장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에 ‘전두환 정권에 의한 동명목재 강제해산과 사주 재산 강탈을 둘러싼 진상규명’을 요청했으며,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다.

    “진실만 밝혀달라”

    강정남 이사장은 요즘 부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동명목재’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법원에 동명의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지만 대법원에서 패소하는 바람에 잠시 주춤했습니다. 하지만 2006년 10월 과거사위에 동명목재 몰수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을 요청한 뒤 지난해 4월부터 조사가 진행되고 있어요. 여기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50대 이상 성인이라면 동명목재를 기억하실 텐테….”

    그의 말대로 동명목재의 위상은 대단했다. 부산에서는 동명목재상사를 ‘동명왕국’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부산 남구 용당동, 남천동, 학장동, 대저동, 범천동, 경남 창원시 내동 등 곳곳에 동명의 계열사가 있었다. 동명목재에 근무하던 임직원만 6000여 명.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수용해야죠. 다만 동명목재를 둘러싼 진실이 무엇인지만 확실하게 밝혀줬으면 좋겠어요.”

    과거사위는 최근 강 이사장 등 동명목재 재산 몰수 사건의 피해자에 대한 조사를 모두 마쳤다. 남은 것은 가해자 측인 보안사 관계자와 금융권, 당시의 자료 조사다. 9월까지 가해자 조사를 마쳐 이 사건을 올해 안으로 마무리짓는다는 게 과거사위의 계획이다. 만약 강 이사장의 주장대로 동명목재 재산몰수 사건이 신군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면 과거사위는 국가에 ‘어떤 형태로든 사과를 하고 화해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사위의 권고가 강제력은 없으나 국가는 권고에 걸맞은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강 이사장과 당시 동명목재 임직원들은 과거사위의 결정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신군부 동명목재 몰수 27년, 강정남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의 격정 토로

    동명목재의 창업주 故 강석진 회장(왼쪽)과 강정남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이 1980년 보안사 부산지부에서 서명한 위임각서.

    ▼ 신군부가 왜 동명목재를 공중분해했을까요.

    “제가 정말로 알고 싶은 부분입니다. 신군부에 찍혔다거나 반발한 적도 없습니다. 군부에서 협조를 요청한 적도 없었고요. 동명목재를 조사하겠다는 연락도 없었어요.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1970년대 후반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회사가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부친과 제가 소유한 부산은행과 부산투자금융 주식 200억원을 매각할 계획이어서 회사 경영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억울한 거죠. 아버님이 그때까지 받은 훈장이 15개나 됐고 ‘소득세 납부왕’이라 불릴 만큼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납세의무를 지켰습니다. 동명이 망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유가 박탈될 정도 아니다’?

    ▼ 그래도 뭔가 짐작 가는 데가 있을 텐데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저희 나름대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동명목재는 부채보다 부동산 등 재산이 더 많았습니다. 재무구조가 튼튼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식회사나 법인이 아니라 개인 소유 기업이었습니다. 이런 점을 눈여겨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쉽게 말해서 기업 해체 과정에서 주주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재산가치가 상당한 기업이기에 신군부가 분해하는 데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당시 임원들과 저의 추측입니다.”

    ▼ 보안사에 감금되고 일주일 뒤 동명목재가 최종 부도처리 되고 다음날 환수조치가 발표 됐습니다. 그 자세한 과정을 기억하십니까.

    “신군부가 동명을 악덕기업으로 지목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준비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조사해보니 동명이 악덕기업도 아니고 건실한 기업으로 판명됐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기업가가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풀어줘야 할 텐데, 반대로 그때부터 억지로 동명 죽이기에 나선 거죠. 국보위 산하에 동명목재처리위원회를 만들어서 한순간에 기업을 날리고 각종 부동산을 부산시와 항만청(현재 해양수산부)에다 헐값에 넘겼습니다. ‘해외에 시장이 많이 있어 운영자금이 충분하다’고 누차 설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동명을 포기하라는 말만 되돌아왔죠.”

    ▼ 당시 동명목재는 얼마나 건실한 기업이었 습니까.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고 원목 생산국의 공급량 제한에 따라 원목 확보가 어려웠습니다. 또 국제건설 경기의 둔화로 합판 수요가 급감하는 등 채산성이 악화돼 동명이 한때 위기를 맞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친과 제가 200억원가량의 주식을 매각하기로 결정해 유동성 위기는 1차적으로 극복됐습니다. 여기에다 1980년 6월15일 정부 고위관계자와 200억원대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기로 약속된 상황이었어요. 그뿐 아닙니다. 목재 가공과 관련해 인도네시아와 합작 투자까지 이뤄낼 정도로 기업의 미래는 밝았습니다.”

    ▼ 재산포기 각서에 도장을 안 찍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나요.

    “각서에 도장을 찍으라면서 보안사 관계자들이 ‘회사는 살려준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기억합니다. 재산은 몰수되더라도 회사만 남아 있다면 나가서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는 생각에 그런 결정을 했죠. 그리고 제가 도장을 찍었지만 각서의 글씨는 저와 부친의 필체가 아닙니다. 보안사에서 불러주는 대로 동명목재 임원이 강제로 받아쓴 것입니다. 그런 다음 부친과 저에게 들고 온 것이죠. 물론 도장 찍을 때 분위기는 강압적이었죠.”

    신군부 동명목재 몰수 27년, 강정남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의 격정 토로

    국보위의 동명목재 강탈사건 당시 언론보도.

    ▼ 법원의 패소 원인을 보면 당시 ‘의사결정의 자유가 박탈될 만큼 강압이 심하지 않았다’고 밝혔더군요.

    “지하 독방에 오랫동안 갇혀 있으니 자포자기의 심정이 됩디다. 두 달 동안 5㎡ 남짓한 곳에서 벽만 보고 지내니까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이렇게 살아야 되나,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닌지 등 별생각이 다 들었어요. 이런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는데…. 컴컴한 지하실에 혼자 갇혀 있어 보세요. 그것 자체가 엄청난 강압입니다. 그런데 자유가 박탈될 정도가 아니라니요. 재판부의 판결은 존중하지만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 또 다른 패소 이유는 계엄이 해제된 뒤 3년 안에 각서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못 하죠. 계엄이 해제됐어도 그때 대통령이 누굽니까. 전두환씨 아닙니까. 그리고 국보위의 동명목재처리 최종보고서에는 ‘어떠한 이유로든 일절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어떤 사유로든 법적 제소를 할 수 없다’고 돼 있습니다. 이후 1988년 노태우 대통령 때 동명목재 재산을 돌려달라는 청원서를 냈는데, 청와대에서는 정당하게 처리된 부분이라며 청원을 반려했습니다.”

    ▼ 과거사위에서 최근 피해자 조사를 끝낸 것으로 압니다.

    “세 차례 조사를 받았습니다. 동명목재 사건의 경위와 배경,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다 했죠. 과거사위의 판단을 수용하겠지만 우리의 희망대로 결론이 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동명목재의 재산을 가능한 범위에서 돌려줬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재산을 돌려받아서 사리사욕을 채우자는 게 아니라 장학사업과 대학육성 등에 전액을 투자할 계획입니다. 동명목재가 사라지면서 6000여 명의 임직원이 일자리를 잃었어요. 옛 동명 가족들을 위한 장학회를 만들고 싶은 소망도 있고요. 국가가 동명을 합법적으로 가져갔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강탈한 데 대해서는 공정한 판단을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린 악덕기업인 아니다”

    ▼ 동명목재에 근무했던 분들과는 연락이 닿습니까.

    “‘동명왕국’은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동명목재 출신의 모임인 ‘동목회’, 동명산업 출신인 ‘동산회’ 등 한 달에 한 번 옛 임직원들의 모임이 열리고 있어요. 아픈 현대사 때문에 동명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동명역사관’을 만들어서 동명목재 계열사의 모든 자료를 보관하기로 옛 임직원분들과 의견 일치를 봤습니다. 당시 동명가족은 일요일도 없이 일했습니다. 동명의 일주일은 ‘월화수목금금금’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기업은 사라졌지만 그분들께 보답을 해야죠.”

    ▼ 부친 강석진 회장 얘기를 좀 해주시죠.

    “재산을 몰수당하고 4년 뒤인 198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후두암이 원인이지만 진짜 사인은 한(恨)일 겁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 ‘나처럼 부산을 사랑하고 부산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왜 악덕기업인이냐’고 반문하셨어요. 그러면서 제일 첫 번째 유언이 ‘악덕기업인’이라는 누명을 벗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보안사에서 나오신 뒤로 아버님은 집 근처 산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잠 안 자고 배곯아가면서 이룩한 업적과 재산을 하루아침에 빼앗겨버렸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 강 이사장께선 지난 27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동명의 수천억원대 재산을 뺏기고 제게 돌아온 것은 ‘생활정착금’ 명목의 3억5000만원이 전부였죠. 그때 제 나이 41세. 재계 2세로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갑자기 기업이 공중분해되니 삶의 목표가 없어지더군요. 나름대로 홍콩과 인도네시아에 회사법인을 만들 계획도 세우며 사업가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는데….

    1985년경 출국금지가 풀려서 곧장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해외로 나가면 다시 일어설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해외에 많은 친구와 지인이 있었으니까요. 많았는데…. 하지만 그때 이미 저는 국내에선 물론 외국에서도 까마득히 잊힌 기업인이었습니다. 뉴욕에서 슈퍼마켓과 옷 장사도 했습니다. 인건비라도 건지기 위해 집사람과 아이들 모두 생업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다 부친이 설립한 동명문화학원을 맡아달라는 당시 동명전문대 학장의 부탁이 있어 10년 전 귀국했죠.”

    실용정신 기반 동명대의 저력

    신군부 동명목재 몰수 27년, 강정남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의 격정 토로

    부산시 남구 용당동에 있는 동명대학교 전경.

    ▼ 동명대학교는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아버님 유언 중 하나가 4년제 대학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06년에 동명전문대와 동명정보대를 통합해 지금의 동명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요즘은 동명대학교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학교법인이 개인재산은 아니지만 부친께서 직접 설립한 곳이라 애착이 많습니다.”

    동명대학교는 1979년 만들어진 동명전문대학(1985년 동명전문대로 교명 변경)과 1996년 문을 연 동명정보대의 통합으로 탄생한 부산의 대표적 사학 가운데 하나. 6개 단과대학, 1개 학부, 35개 학과에 1만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2006년에는 졸업생 취업률이 71%에 달했으며, 교내 장학금 15종, 교외 장학금 25종이 있을 만큼 장학제도가 탄탄한 학교로 알려져 있다.

    “부친의 땀과 그 결실은 사라졌지만 유일하게 학교만 남아 있습니다. 동명의 정신이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 대학의 역사가 짧은 데다 다른 지방대와의 경쟁 때문에 힘든 점이 많아요.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실용주의 대학’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전공교육도 중요하지만 졸업생이 100% 취업할 수 있도록 외국어, 정보통신(IT), 교양, 예절교육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직업능력개발원장과 경일대 총장을 역임한 이무근 박사님을 총장으로 모셨는데 그분의 대학 경영 방침도 저의 그것과 같습니다.”

    동명대는 최근 일본 벳푸대, 몽골 국립대, 뉴질랜드 오타고대, KT, KTF, 한국IBM 등 국내외 유명 대학 및 기업들과 학술교류협정을 맺었다. ‘글로벌 IT 브레인 양성’이 대학의 슬로건이 될 만큼 모든 학과 교육이 IT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결과 정보통신부의 ‘대학전공 역량강화사업’에 멀티미디어공학과, 정보통신공학과, 컴퓨터공학과 3개 학과가 선정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지방대학 혁신 역량 강화사업(누리사업) 대학으로 선정돼 5년 간 75억원, 산학협력 중심대학 선정으로 올해까지 105억원을 지원받는 등 국내 IT 분야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혔다.

    2006년에는 교수 한 명(멘토)이 입학, 학업, 프로젝트 수행, 취업 등 학생(멘티) 10여 명의 학사일정을 책임지도록 하는 ‘TU 멘토링’ 제도를 신설하고 그 실적을 교수업적 평가에 반영하도록 했다. 또 저학년이 고학년 전공과목을 수강할 수 있도록 하는 ‘학년 파괴 제도’를 잇따라 도입했다. 그뿐만 아니라 항만과 국제영화제 개최라는 부산의 도시 특성에 맞게 항만물류와 영화영상, IT산업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 지난해에는 전국 대학 중 최고 성능의 실용형 슈퍼컴퓨터를 도입해 부산의 전략산업인 영화영상 분야에서 활용하고 있다.

    ▼ 동명대 발전을 위한 중장기 계획이 있다면.

    “우리나라 대학은 외국에 비해 상과대학의 수준이 낮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그래서 이쪽 분야의 유능한 인재를 수용하기 위해 교육과정이나 강의계획서, 교수 학습서 등을 계속 업그레이드하고 있습니다. 대학이 발전하려면 이사장 독단이 아니라 보직교수와 한마음 한뜻을 이뤄야 합니다. 당장 성과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긴 시간을 갖고 우리 대학만의 스타일을 찾을 겁니다.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는데 우선 필리핀과 중국, 말레이시아, 일본에 해외 분교를 설립할 방침이에요. 동명대 학생들이 길게는 한 학기 동안 외국어 연수를 하면서 국제화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또한 숲과 꽃이 울창한 부산에서 제일 아름다운 캠퍼스를 만들 계획입니다.

    이제 사업이나 장사는 하라고 해도 안 합니다. 제 나이가 68세입니다. 아버님께 대한 마지막 효도는 교육사업이라고 생각해요. 동명대의 발전을 이뤄내서 아버님으로부터 꼭 효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네요.”

    ‘忍’의 참뜻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실은 의외로 작았다. 15㎡가 채 되지 않았다. 사무집기는 책꽂이와 책상, 컴퓨터, 회의용 책상과 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곳곳에 강석진 회장의 유품이 눈에 띄었다. 10폭 병풍도 있고 강 회장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원숭이 조각도 눈에 띄었다. 이사장실 벽에는 참을 인(忍)자가 씌어진 액자가 걸려 있다.

    “아버님이 직접 쓰신 글자죠.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참는 것이 살아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요즘은 달리 해석하고 있습니다. ‘忍’의 의미는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다는 것으로요. 그 뜻은 때때로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도 사무실에 앉아 저 글자를 보면서 그에 담긴 참뜻을 되새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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