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호

“지난 세월 窓이자 벗이었던 그대여”

애독자가 말하는 ‘나와 신동아’

  • 입력2012-10-23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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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년 11월 창간호를 펴낸 신동아가 11월로 창간 81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다섯 분의 명사에게 ‘나와 신동아’를 주제로 글을 요청했다.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김도연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김성호 행복재단 이사장(전 법무부 장관·국가정보원 원장), 최영미 시인, 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과 교수는 수십 년 열혈 독자이자 주요 취재원으로, 그리고 핵심 필자로 신동아와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이분들의 찬사, 추억, 그리고 따끔한 질책을 가슴에 새기며 신동아는 더 사랑받는 잡지가 되기 위해 열심히 달릴 것임을 독자 여러분께 약속드린다. <편집자 주>
    ■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

    가슴 뜨거웠던 내 40대 초상

    “지난 세월 窓이자 벗이었던 그대여”


    나와 신동아의 인연은 각별하다. 우선 나는 아마도 신동아에 글을 가장 많이 쓴 필자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해서 신동아에 내가 그동안 쓴 글의 목록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살펴보니 1976년 이래 최근까지 신동아에 40편의 글을 썼다. 그런데 그 중 23편이 한국 정치가 오랜 권위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향해 숨 가쁘게 질주하던 1980년대에 집중되어 있었고, 특히 민주화의 불꽃이 가장 높게 치솟았던 1985년 초부터 1987년 6월 항쟁 직전까지 9편의 글을 썼다. 글은 대부분 신군부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민주화의 당위와 그 나아갈 길을 설파하는 정치평론이었는데, 글 목록 속에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내가 느꼈던 분노와 절박감, 열망과 감동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1980년대는 내 40대와 그대로 겹치는 시기다. 이 때문에 나는 그 목록을 보며 1980년대의 신동아 속에서 가슴 뜨거웠던 내 40대의 초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신동아의 편집위원으로 장기간 일했다. 편집회의에서는 그 시대에 걸 맞은 공공의제를 찾아내고,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열띠게 논의했다. 가끔 주요한 편집기획에도 참여했다. 편집위원 중에 나보다 스무 살 많은 소설가 이병주 선생이 계셨는데, 가끔 달관한 경지의 말씀을 툭툭 던지시던 것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1991년, 신동아가 환갑이 되는 60년을 기념해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4차례의 연속기획 토론의 장을 열었는데 공전의 성황을 이뤘다. 첫 번째 주제인 ‘제3의 길은 있는가’에서 내가 사회를 보았고, 세 번째 주제 ‘복지국가의 길’에서 내가 발제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부터 21년 전에 신동아가 복지국가 담론을 펼쳤으니, 당시 신동아는 분명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1931년 창간된 신동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지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는 큰 고난을 겪었고, 암울했던 권위주의 시절 민주화에 앞장 서는 등 우리 민족과 영욕을 같이했다. 신동아는 연륜에서 비롯되는 서지(書誌)적 가치를 넘어 권위 있는 시대의 기록으로 한국 언론사의 기념비적 가치를 지닌다. 신동아는 한창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1980년대 중반에는 40만 부를 넘는 폭발적인 발매부수를 올리기도 했다.

    사회적 고뇌와 희망 함께하는 열린 광장 되길

    내 뇌리에 가장 인상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1980년대의 신동아는 지식인 계층이 읽는 지성지와 대중이 읽는 종합지의 중간 성격을 띠었다. 어느 정도 상업성을 추구하고 있었으나, 사회와 시대에 대한 ‘의제 설정(agenda setting)’기능을 성실히 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시대적 고뇌를 같이하며 우리 사회가 무엇을 아파하는지, 우리 사회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성찰적 자세를 잃지 않았다. 당시 편집위원들도 당대를 향해 비판적, 창조적 지성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타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진입한 후 신동아는 지성지의 성격이 약화되고, 교양 있는 일반 대중이 읽는 종합지로 변모했다. 그러면서 지성지의 핵심인 의제 설정 기능을 잃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나 프랑스의 ‘렉스프레스’도 시대와 더불어 지성지에서 종합지로 바뀌었으나, 아직도 의제 설정 기능이 엄연히 살아 있는 것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아프다.

    시대와 매체 상황이 크게 달라진 오늘 ‘아! 옛날이여’를 외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 고언(苦言)이 허락된다면, 신동아가 현재의 백화점식 편집에서 얼마간 탈피해 우리 시대의 관심 주제를 한발 앞서 제시하고, 시대의 아픔과 희망에 대해 토론하는 열린 광장의 구실을 해줄 것을 감히 청하고 싶다. 신동아가 너무 무겁지 않게, 흥미를 돋우면서,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방식으로 의제 설정 기능을 왕년의 반쯤이라도 되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얘기다. 오늘 이 땅의 주요 언론매체들이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있어 실제로 이런 공간이 비어 있다. 이 때문에 신동아가 이 빈틈을 슬기롭게 파고든다면 그러한 시도가 무모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오랜 연륜과 더불어 사회적 책임과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는 신동아가 창간 81주년인 올해를 의미 있는 변화와 발전의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ahnby@yonsei.ac.kr

    ■ 김도연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반세기 이어온 ‘습관성’ 독자 인생

    “지난 세월 窓이자 벗이었던 그대여”
    이광수(李光洙)의 시와 현진건(玄鎭健)의 소설 등이 실렸다는 신동아 창간호가 발행된 것은 1931년이다. 올해로 여든하나의 연륜을 갖게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겠지만, 내게 신동아의 존재는 당연히 복간(復刊)이 이루어진 1964년 9월부터다. 나는 이때부터 매월 발간되는 신동아를 빠뜨리지 않고 열독해온 습관성 독자이니 신동아와는 각별한 인연인 셈이다.

    1964년 당시 고작 중학교 1학년이던 내가 신동아 같은 고급 시사잡지를 손에 쥐게 된 것은 아마 대학생이던 큰형님이나 선친이 신동아를 즐겨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꽂이에 신동아가 복간호부터 순서대로 가지런히 꽂혀 있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책장에는 민중서관에서 발행한 ‘한국문학전집’과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이 꽂혀 있었는데, 신동아와 함께 이 책들은 어린 시절의 내가 세계를 내다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이 책들 속에서 한 인생이 꿈을 꾸고 미래를 설계했고 인생관까지 확립했다.

    유년 시절의 독서가 특히 중요한 것은 아마도 머릿속에 그 내용이 깊이 각인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삶에 독서가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스스로 알 순 없지만, 여하튼 그 시절 신동아에서 읽은 소설들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유주현(柳周鉉) 작가의 ‘조선총독부’(1964년 9월~1967년 6월 연재)는 내 인생 최초의 대하소설(大河小說)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읽는데도 매회 너무도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지금은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진다. 무단통치(武斷統治)의 데라우치 총독, 조금은 부드러웠다는 사이토 총독 등 소설 속 수많은 인물이 여전히 기억이 난다. 심지어 그들의 얼굴 생김새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중학 시절 방학숙제로 ‘조선총독부’에 대한 독후감을 작성해 냈다가 선생님에게 칭찬받은 기억도 난다. 학창생활 중 아주 드물게 받은 칭찬 중 하나가 신동아 덕분이니 이도 감사할 일이다.

    유학 중에도 매달 신동아 읽어

    세월이 조금 흐른 후에 신동아가 연재한 이병주(李炳注)의 소설은 또 얼마나 흥미로웠던가. 젊은 시절의 나는 “태양(太陽)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로 시작하는 ‘산하(山河)’(1974년 1월~1979년 8월 연재)를 비롯한 그의 모든 소설을 빼놓지 않고 찾아 읽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기나긴 줄거리의 장편 대하소설을 밤을 밝혀가며 읽곤 했는데, 요즘은 모든 측면에서 그런 긴 호흡이 사라졌다.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지만 생활의 느긋함 혹은 여유로움이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깝다. 요즘의 신동아가 소설을 싣지 않는 것도 안타깝고, 또 예전처럼 열심히 읽지 않는 내가 안타깝다.

    여하튼 신동아는 내게 매월 한 획을 긋는 삶의 방식이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당시 막 개교한 한국과학원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과학기술을 위해 병역의무까지 면제받는 특별한 학생들이었으니 학업 분위기는 매우 열성적이었다. 시험도 많았고 실험도 바빴지만 한 달에 한 번 신동아를 받는 날엔 어떤 일보다도 신동아를 독파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그때 내 버릇을 잘 알고 있던 기숙사 룸메이트는 내가 유학을 떠나 있었을 때 고맙게도 외국에까지 신동아를 보내주어 매달 한 번씩 ‘신동아 몰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신동아가 복간되던 1964년, 대한민국은 바로 그해에 처음으로 연간 수출액 1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 무렵 국민소득 100여 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던 대한민국은 불과 반세기 만에 선진국 문턱에 도달했다. 지난해 수출액은 5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국민소득도 2만2000달러에 달했으니 우리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발전을 이룩한 자랑스러운 국민이다. 같은 기간에 쌓인 신동아의 역사도 당연히 자랑스러운 것이다. 이제부터 할 일은 새로 맞을 반세기를 지난 반세기보다 훨씬 더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어려운 과제지만 대한민국과 신동아는 역시 잘해낼 것으로 확신한다.

    dykim@nstc.go.kr

    ■ 김성호 행복재단 이사장

    내 인생 가장 허심탄회한 인터뷰

    “지난 세월 窓이자 벗이었던 그대여”
    신동아 창간 81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신동아의 창간을 계기로 비로소 ‘신문잡지 시대’가 열렸으니, 대한민국 종합지의 시조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일제의 압제 탓에 28년이라는 긴 시간 공백기를 가졌지만 신동아는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났고, 온전히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함께했다. 시대와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더 말해 무엇하랴.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만큼 오랜 시간 전부터 신동아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왔으니, 이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젊은 시절, 내게 신동아는 한 달을 꼬박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고마운 선물이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국제 문제를 비롯해 흥미진진한 인터뷰와 칼럼들. 건강, 문화에 대한 알찬 정보로 꽉 찬 신동아 한 권만 있으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350쪽에 달하는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닌데도 어찌나 빨리 읽히던지…. 또 다음 호를 기다리는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이미 다 읽은 신동아를 두세 번 다시 읽어도 그때마다 의미와 재미를 새롭게 찾을 수 있어 내게 신동아는 마치 보물상자와도 같았다.

    당시 그렇게 열심히 신동아를 읽으면서, 언젠가 이 잡지를 통해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기분 좋은 상상도 했다. 그때는 정말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서 시간이 흐르니 정말 그런 기회가 생겼다.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신동아를 통해 전할 기회가 지금까지 무려 세 차례나 주어져 내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법무부 장관 취임 후 가진 인터뷰에서 법무부 수장으로서의 포부와 계획, 그리고 지나온 삶을 정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뷰가 얼마나 알차게 진행되고 전달됐는지, 이후 한동안 다른 매체들과의 인터뷰는 재방송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후 아쉽게 법무부 장관직을 그만둔 뒤의 심경과 지금 하고 있는 재단에 대한 이야기를 그나마 가장 솔직하게 털어놓은 곳도 바로 신동아다. 생각해보니 신동아는 곁에 오래 두고 사귄 벗과 같아 더욱 편하게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버킷 리스트’ 글 게재는 행복한 추억

    지난해 봄에는 신동아로부터 ‘명사의 버킷 리스트’라는 주제로 글을 부탁받은 적도 있다. 신동아는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세상 만들기’라는 내 졸문(拙文)을 그대로 실어주었다. 나름 열심히 잘 썼다 싶었는데, 출판되어 나온 글을 다시 읽어보니 참 부끄러웠다. 역시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실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신동아가 그 졸문을 잘 봐준 덕인지 이렇게 창간 81주년을 맞아 또 글 한 자락 보탤 기회를 얻었다. 이 또한 부담이자 큰 행복이다.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인쇄매체의 설자리가 점차 줄어드는 일이 한편으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신동아의 묵직한 무게가 결코 종이 무게가 아닌, 그곳에 실린 알찬 글들의 무게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제 그런 무게를 느끼는 일이 자꾸 어려워지고 있는 건 아닐까.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들을 소비하며, 사람들이 그 무게마저 가볍게 넘겨버리는 것 아닌가 싶어 아쉽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며 인쇄된 활자를 읽는 일은 그 어디에도 비할 바가 없는 큰 기쁨이다. 최근 나오는 전자책들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진짜 종이를 넘기는 것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아무리 디지털이 대세라도 아날로그 감성을 포기할 순 없는 모양이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세상은 어제 다르고 오늘이 다른 곳이 되었다. 신동아 또한 이런 시대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 세상을 앞서나가고 또 선도하는 잡지가 될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오랜 역사가 가진 힘, 전통과 원조가 가진 저력 아니겠나. 하여 신동아가 100년, 200년 이상 가는 잡지가 되기를, 과거를 기록하고 현재의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며, 미래에 대한 혜안을 제시하는 위대한 잡지로 계속해서 남아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skkang29@ihappyworld.net

    ■ 최영미 시인

    날 보고 촌스럽다 한 ‘그때 그 기자’

    “지난 세월 窓이자 벗이었던 그대여”
    딱 걸렸네. 하하하.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거침없는 아줌마 스타일로, 통쾌하게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나와 신동아’라니. 창간기념 지면에 편집자의 작가 선택이 기막히다. 상식의 눈으로 보면 나야말로 ‘신동아’에서 가장 꺼려야 할 글쟁이 아닌가? 그동안 나 땜에 고생했으면서 내가 밉지도 않나봐? 오래 고민하지 않고 나는 대답했다.

    “쓸게요. 신동아에 내가 잘못한 게 많으니까. 몇 매이죠? 마감은 언제지요?”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가 들었다. 특정 언론사와 나의 관계에 대한 글은…. 어렵다. 한국의 전업작가로서 가장 쓰기 힘든 글이 언론에 관한 글 아닐까? 내 식대로 마냥 그냥 내 생각을 펼쳤다가 자칫 균형을 잃으면 추락할 수도 있다. 특정 언론과 너무 사이가 가까워 보여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둘의 관계를 너무 멀게 설정해도 안 된다. 그러나 내 나이 오십, 죽음도 두렵지 않은 나인데 남의 시선 따위가 두려우랴.

    내가 만난, 나와 더불어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술을 마신 신동아의 세 남자 이야기를 하련다. 시인이 된 뒤에 잡지사와의 첫 인터뷰. 내 총천연색 사진이 (신문광고에 실리는 반신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처음 ‘여성동아’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당시 여성동아 기자였던 J 신동아 차장을 만날 때 나는 서른두 살이었고, 회색 옷을 즐겨 입었고, 정장이라곤 한 벌밖에 없었고, 나를 향한 카메라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촌뜨기였다. 인터뷰하러 나온 내 모습이 얼마나 엉망이었던지, 몇 년 뒤에 충정로를 걷다 마주친 J 차장으로부터 “그때는 아주 촌스러웠는데 최영미 씨 많이 세련돼졌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내게 감히 촌스럽다고 대놓고 말한 남자는 그가 유일무이하다. 흥! 자기가 아름다움에 대해 뭘 안다고 나보고 촌스럽대! 열이 올라 대꾸했던가 속으로 분을 삭였던가.

    인터뷰 날 나는 미장원에 가지 않았고, (나는 파마약 냄새가 싫어서 TV 출연을 앞두고도 웬만해선 미용실에 가지 않는다) 머리도 옷도 흐트러진 편한 차림이어서, 정장에 익숙한 그에게 촌스러운 인상을 주었으리라. 서운함을 토로해도 허허 웃어넘기던, 그는 아주 착한 남자였다. 몇 년 뒤에 동아일보 출판팀으로 자리를 옮긴 그로부터 축구에세이를 내자는 제안을 받았다.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밥을 얻어먹고 계약서에 사인한 뒤에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나는 계약을 해지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아주 나쁜 방식으로 그를 곤란하게 했으니 열 번 백 번 그에게 미안했다. 거절할 때 나는 아주 서툴다. 인생을 사는 태도로 평가하자면, 그보다 내가 더 촌스러운 사람이다.

    축구 전문가 행세하게 해줘

    속초에 살던 2000년 겨울에 처음 신동아에 긴 글을 기고했다.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의 베란다에 앉아 속초중학교와 설악중학교의 축구경기를 멀리서 구경하며 새 천년을 맞는 감회를 꽤 힘을 주어 서술한 글이었고, 퇴고를 되풀이하느라 손목이 아팠다. 축구팬임을 신동아 지면을 통해 처음 자랑한 뒤 여러 매체에 축구 관련 에세이를 기고했다. 황선홍 선수와의 인터뷰를 주선한 신동아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축구전문가로 행세하지 못했을 텐데.

    Y 전 신동아 편집장과는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 나처럼 일산에 살았고 나이도 나와 비슷했다.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그는 내게 황선홍과의 대담을 제의했다. 나 황선홍 만난다,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얼마나 자랑했는지. 너, 황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열 가지만 내게 말해줘. 열심히 준비한 나를 그도 알아봤는지. 그날 분당의 황 선수 집에서 우리는 아주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동석한 신동아 기자들이 녹음하고 정리한 대담을 나중에 보고 몇 군데 수정을 요청했는데, 내 의견을 반영해주어서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S 기자는 내가 만난 언론인 중에 가장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친해져 같이 야구장에도 갔다. 나처럼 서울내기이며 쿨한 그와의 대화를 나는 즐겼다. 그를 닮은 남동생이 있으면 참 좋겠다, 아니 더 솔직해지자. 그가 싱글이고 내가 10년쯤 젊었다면…. 만약의 경우를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었으니. 2010년 잠시 서울의 정릉에 방을 얻어 살 때다. 서울에 입성한 기념으로 신동아에 ‘최영미의 서울이야기’를 연재하마고 약속하고 나서 석 달 만에 나는 또 딴소리를 했다. 원래 6개월 연재할 계획이었는데, 나의 숙원인 장편소설을 써야겠다는 핑계로 약속을 어겼으니. 정말 나도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용서해주시게.

    ymchoi30@hotmail.com

    ■ 전봉관 KAIST 교수

    이수탁의 추억

    “지난 세월 窓이자 벗이었던 그대여”
    신동아 황일도 기자로부터 원고 연재를 의뢰받은 것은 2005년 3월, 대학에 자리를 잡은 지 이제 겨우 한 학기를 보낸 초임 교수 시절이었다. 그전에도 월간지에 몇 차례 원고를 기고한 적은 있었지만, 신동아처럼 유서 깊은 잡지에 매달 원고지 60장 남짓한 글을 연재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영광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이었다. 과분한 원고 청탁을 흔쾌히 수락한 것은 그때 내가 겨우 서른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겁 모르는 ‘청년’이었기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나와 신동아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그해 1월 간행한 나의 첫 저술 ‘황금광시대’에 1930년대 신동아에서 기사 몇 편을 인용한 덕분이었다. 황 기자는 1930년대 신동아에 그처럼 재미있는 기사가 수록돼 있었는지 몰랐다며,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라는 제하의 연재를 의뢰했다.

    지금에야 터놓는 사실이지만, 당시 나는 황 기자의 제안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당시 옛날 잡지를 뒤져 흥미 있는 기사를 찾아내 소개하는 글이 유행이어서 참신한 기획으로 느껴지지 않은 데다가 일제강점기 금광 열풍을 조망한 ‘황금광시대’를 탈고한 이후 나는 그 시대 인물을 발굴해 내 식으로 재해석하는 또 다른 저술을 구상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꼭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여야 하나요?”

    황 기자는 자신의 제안은 어디까지나 화두일 뿐이라며, 더 좋은 기획이 있다면 그것을 연재해도 좋다고 나의 수정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한 세기 가까이 한국 사회의 여론을 주도해온 신동아에 내 이름을 단 연재가 시작된다니 흥분하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 원고를 써서 마감 시간 직전에 원고를 보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의 일화를 다룬 ‘무난한’ 원고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한 달이 지나도록 가타부타 소식이 없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황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황 기자는 몹시 미안해하며, 데스크에서 원고 게재를 보류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황금광시대’에서 보여준 기발하고 도발적인 상상력을 바랐는데, 너무 점잖은 원고를 보냈다는 것이 이유였다. 솔직히 학자로서 또 작가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 찾아보라고 큰소리 치고 전화를 끊을까도 잠깐이나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한 번의 게재 보류로 포기하기에는 신동아에 원고를 연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기회였고, ‘그래 당신들이 좋아하는 기발하고 도발적인 상상력이 무엇인지 한번 보여주겠다’는 오기도 생겼다.

    꼬박 40개월간 ‘옛날 잡지…’ 연재

    “아무래도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로 가야 할 것 같은데요.”

    황 기자는 머뭇거리면서 새로운 원고를 부탁했고, 나 역시 원고를 다시 써서 보내겠다고 떨떠름하게 수락했다. 그 후 최근 수십 년 동안 일제강점기를 다룬 책과 글에서 한 번도 다루지 않은 놀랍고 엽기적인 이야기를 찾기 위해 일제강점기 신문·잡지를 샅샅이 뒤졌다. 몇 주를 궁싯거린 끝에 드디어 실마리가 풀렸다.

    ‘이수탁 살부(殺父) 공판: 백만장자 외아들의 패륜 드라마’

    아버지를 아편으로 독살했다는 혐의를 쓰고, 10년 동안 법정에서 전대미문의 패륜 재판을 벌인 익산 백만장자 이건호의 외아들 이수탁의 패륜과 그의 재산을 둘러싼 암투를 최대한 ‘막장스럽게’ 그렸다. 너무 점잖은 원고라서 게재할 수 없다면, 이런 ‘막장 가족사’는 게재할 수 있느냐는 반발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원고를 받아 들고 황 기자와 데스크가 당황하며 또다시 고민에 빠질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뜻밖에도 바로 다음 날 연락이 왔다.

    “저희가 바로 이런 원고를 찾고 있었어요. 데스크도 대만족입니다.”

    황 기자의 상기된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선하다.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는 그러한 우여곡절 끝에 2005년 7월부터 연재가 시작되어 2008년 10월호까지 무려 3년 4개월 동안 단 한 차례의 결호(缺號)도 없이 총 40회에 걸쳐 무사히 연재를 마무리했다. 애초 60장을 청탁 받았지만, 쓰다보면 100장을 넘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매달 새로운 사건을 찾아내 마감 전에 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황 기자와 신동아의 의지와 배려 덕분에 결호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연재 원고를 정리해 나는 ‘경성기담’(2006), ‘럭키경성’(2007), ‘경성자살클럽’(2008) 등 세 편의 저술을 간행했고, 그중 일부는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쁨도 맛보았다.

    내 이름 옆에는 지금도 ‘경성의 뒷골목 풍경에 정통한 학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대로(大路)가 아니라 뒷골목일지언정 최고로 평가되는 분야가 있다는 것은 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복한 경험이다. 황 기자 그리고 신동아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나는 그처럼 경성의 뒷골목 풍경을 철저히 헤집고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경성의 뒷골목과 신동아와 함께했기에 지나간 나의 30대 후반은 진정 행복했다.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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