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호

블랙리스트 흑역사

‘차별과 배제 넘어 헌법 가치 파괴’

쁠랙크리스트에서 화이트리스트까지

  • 김당 | ‘시크릿파일 국정원’ 저자 dangkim@empas.com

    입력2017-03-21 15: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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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검,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중대 범죄’
    • 일제강점기 토양에서 자란 범죄의 씨앗
    • 박정희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격세유전’
    • 고위 장교 800명의 옐로리스트
    • 정보기관의 정치사찰과 사생활 침해
    • 이명박·노무현 정부 때도 편파 지원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이하 박영수 특검)가 3월 6일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박영수 특검은 검찰 특별수사본부의 수사결과를 이어받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뇌물공여 사건 △국민연금공단의 삼성물산 합병 관련 직권남용 및 배임 사건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입시 및 학사비리 사건 △최순실 민관 인사 및 이권사업 개입 사건 등에 대해 90일 동안 수사했다.

    수사의 한계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박영수 특검이 거둔 큰 성과 가운데 하나가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이에 대한 박영수 특검의 인식은 최종 수사결과 발표에 잘 드러나 있다.

    “‘정부가 청와대의 입장에 이견을 표명하는 세력은 ‘반민주’ 세력으로 규정한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정권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들려는 행위로 바라보려는 시각에 기인한 것으로서 헌법의 본질적 가치에 위배되는 중대 범죄로 판단됨.”



    ‘롯데와 CJ 협조 안 해’

    박영수 특검은 이미 2월 7일 김기춘(77)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50)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블랙리스트)과 관련해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및 강요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박영수 특검은 두 사람 외에도 김종덕(59) 전 문체부장관, 정관주(52) 전 문체부 1차관, 김상률(56)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신동철(55) 전 정무비서관, 김소영(50) 전 문화체육비서관 등을 줄줄이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했다.



    박영수 특검은 당시 김기춘 전 실장 등을 기소하면서 공소장에 “김종덕, 신동철, 정관주, 대통령, 최서원(최순실의 개명 후 이름) 및 문체부 담당 공무원 등과 순차 공모하여”라고 박 대통령을 공모자로 명시했다. 대통령이 문화예술계를 대상으로 작성한 이른바 ‘좌파 척결 블랙리스트’와 ‘우파 지원 화이트리스트’를 운용하는 데 공모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국가정보원의 역할이다. 박영수 특검 수사결과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은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의 근거를 정책보고서 형태로 청와대에 제공했다. 또한 국정원은 청와대가 문체부에 명단을 통보하면, 그 명단이 배제 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확인해주는 방식으로 블랙리스트 운용을 지원했다.

    박근혜 정부의 ‘좌파 척결 블랙리스트’가 작성·시행된 배경에는 군사정권 시절에나 존재했을 법한 김기춘 비서실장의 천박한 문화·예술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김 수석의 업무일지에는 김기춘 실장이 수석비서관들에게 “70년대와 같은 열의로 대처해야”라고 지시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김기춘은 또한 ‘문화는 보수이념을 전 사회에 전파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문화계의 종북세력 확산 차단을 이 정부의 국정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이런 공안적 사고방식과 국정 기조가 실제 정부의 예산지원 배제로 실행된 계기는 국정원이 제출한 보고서였다.

    특검이 확인한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대통령의 첫 발언은 2013년 9월 30일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국정지표가 문화융성인데 좌편향 문화·예술계에 문제가 많다. 특히 롯데와 CJ 등 투자자가 협조를 안 해 문제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다.



    국정원 블랙리스트 개입

    모든 안테나를 대통령에게 맞추고 ‘대통령의 눈과 귀’를 자처하는 국정원이 “좌편향 문화·예술계에 문제가 많다”는 대통령 발언의 맥락을 놓칠 리 없었다. 2013년 하반기 국정원은 △예술위의 정부 비판 인사에 대한 자금지원 문제점 지적 △시·도 문화재단의 좌편향·일탈 행태 시정 필요 등 대외비 보고서를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실장에게 보고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윗분의 뜻을 받든’ 김기춘 비서실장의 심기가 불편한 순간에 국정원은 대통령의 심기에 맞춘 ‘정치화된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실제로 보고서는 “전국 12개 지자체의 일부 문화재단이 이념편향적인 이사진을 구성하는 등 좌편향·독단적 운영으로 지역사회 이념이 오염되고 ‘문화융성’ 국정과제의 성공적 추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면서 특히 광주문화재단이 대통령을 비판, 풍자한 작가를 지원하거나, 월북예술인 추모사업을 지원한 것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또한 구체적 관리방안으로 감사원이나 문체부가 국비 지원사업 감사 등을 통해 운영 실태를 점검하면서 보조금 삭감·형사처벌 조치 등 ‘정상화’를 견인하고, 건전 언론·단체와 협조해 이념편향과 예산낭비 행태를 알려 국민 공분을 조성하고 경각심을 고취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결국 국정원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화예술계 종북세력을 무장해제할 무기는 ‘돈’이었다.

    박영수 특검의 수사결과에 따르면, 청와대는 정무수석 주관으로 ‘민간단체 보조금 TF’를 운영하면서 문체부 산하의 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출판진흥원의 지원심사 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문화예술위 심의위원 후보 19명 선정 배제 △예술위의 해당 예술가 공모사업 325건 지원 배제 △영진위의 예술영화전용관 관련 8건 지원 배제 △출판진흥원 세종도서 관련 22개 선정 배제 등을 강요함으로써 직권을 남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른바 블랙리스트(blacklist)의 사전적 정의는 감시가 필요한 위험인물들의 명단이다. 흔히 정보·수사기관에서 위험인물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마련하는데 ‘감시대상 명단’ ‘요주의자 명단’으로 순화해 부르기도 한다. 블랙리스트의 뿌리는 일제강점기 경찰의 사상범, 정치범, 무정부주의자 등에 대한 요시찰인(要視察人) 제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요시찰인’으로 검색을 하면, 일제강점기의 관련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컨대 동아일보(‘3000여의 요시찰인’, 1922년 10월 24일자)를 검색하면, 요시찰-주의(注意) 인물 통계가 나오는데, 조선 사람으로 해외에 있는 요시찰·주의 인물은 총 2161명(일본 거주자 제외)인데 △상해 221명 △중국 각지 1561명 △시베리아 152명 △하와이 54명 △미국 130명 △구주 및 기타 35명 △거소 불명 2명 등이었다. 또 ‘요시찰인 300명 검거’ 기사(동아일보, 1928년 10월 28일자)에 따르면, 경시청은 관할 경찰서를 동원해 일본 천왕 부인의 조선 방문을 앞두고 ‘사회주의 과격사상의 요시찰인’을 예비 검속했다.


    블랙리스트 원조(元祖)는 일제 사상경찰

    일제 경찰(총독부 경무국)은 사상이 불온하거나 총독 정치에 찬성하지 않는 행동을 취하는 인물을 요시찰인으로 규정해 위험성의 경중에 따라 ‘갑종’과 ‘을종’으로 분류해 오다가 1928년 7월 갑-을종을 폐지하고 요시찰 명부를 새로 작성했다. 당시 동아일보(1928년 7월 28일자)는 ‘黑標帳中의 人物 全朝鮮에 3천명’이란 기사에서 “개명되는 소위 ‘쁠랙크리스트’에 드는 사람은 3천명 내외에 달하여 3·1운동이 일어나던 기미년까지 약 1천명에 불과하던 것이 그후 차차 증가해 현재의 3천명에 달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새로 만든 ‘쁠랙크리스트’는 각 도(道)의 명부를 통일해 사진까지 첨부해 배치하게 되며, 종래는 정치 요시찰인과 사상 요시찰인으로 구분했으나 조선인의 행동은 정치운동과 사상운동의 차이를 분간할 수 없어 민족운동자들도 사상 요시찰인 명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런데 당시에도 이미 ‘쁠랙크리스트’(블랙리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를 한자로는 ‘흑표장(黑標帳)’이라고 표현한 것이 눈에 띈다. 일제 경찰이 만든 ‘요시찰인 명부’, 소위 ‘블랙리스트’는 8·15광복 이후 친일파가 득세한 한국 경찰에 그대로 승계돼 사상범, 즉 ‘빨갱이’를 감시하고 잡는 근거로 활용됐다. 그로 인해 블랙리스트 때문에 고초를 겪거나 공무원 취업에 지장을 받은 사람들은 경찰서에 비치된 ‘요시찰인 원본대장’에 기재된 자신의 명단을 지우기 위해 경찰에 뇌물을 주고 말소한 사례도 있다.



    요시찰인 명부

    그러다가 6·25전쟁으로 ‘요시찰인 명부’가 일부 소실된 가운데 북한의 간첩 남파가 빈번해지자 대검찰청은 1958년 3월 ‘사상검사’로 유명한 오제도 검사의 주도로 ‘반국가적 행동 단속요강’을 작성해 전국 각급 검찰에 시달했다. 검찰이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에 대한 단속을 강화한 데는 그 직전에 발생한 김정제(金正濟) 간첩 사건과 KNA 여객기 납북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

    ‘반국가적 행동 단속요강’에서 특히 이목을 끈 것은 ‘요시찰인 명부’ 작성에 관한 지침이다. 당시 검찰이 내세운 ‘요시찰인 명부’ 작성의 의의는 3가지였다. 첫째, 6·25전쟁으로 인해 수사기관에 비치돼 있던 명부가 소실됐기 때문에 재작성하는 것이다. 둘째, ‘명부’가 없으면 자칫 무고한 사람까지 괴롭히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명부’가 있어야 사찰경찰의 인사이동이 있어도 ‘불온분자’ 파악 등 사찰업무의 연속성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요시찰인 명부’ 대상자는 6·25전쟁 당시 부역자로 재판소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그 형이 종료된 자나 또는 실형은 아니지만 자유형(집행유예, 선고유예 등)을 받은 자로 제한했다(동아일보, 1958년 3월 31일자).

    그러나 ‘요시찰인 명부’에 이름이 오르면 개인의 행동 반경과 사생활이 크게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검찰은 당시 이런 우려와 반발을 고려해 당초에는 ‘단속요강’의 명칭을 ‘대공사찰 강화요강’이나 ‘간첩 단속요강’으로 했다가 ‘반국가적 행동 단속요강’으로 순화했다. 또한 검찰 당국이 “‘요시찰인 명부’에 이름이 오른다고 해서 연행이나 예비검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위치에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일시적-구체적으로 염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한 것이 눈에 띈다.



    옐로리스트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공안기관의 블랙리스트와 별도로 존안 자료를 만들어 활용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육군 방첩부대가 A4 크기의 종이에 ‘안보’를 명분으로 주요 인사의 인적사항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그 시초였다. ‘반혁명세력’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중앙정보부는 이를 그대로 차용했다. 생년월일, 출생지 등 기초 정보인 ‘1호 정보’부터 가족사, 정치·사상 성향의 ‘2호 정보’와 최근 동향, 접촉 인물 등에 관한 ‘3호 정보’로 분류해 속속들이 기록했다.

    박정희는 이후 1970년대 중반에 군 정보기관에 지시해 연대장급 실병 지휘관 이상 장교 800명의 신상카드(일명 옐로카드)를 작성토록 했다. 군(軍)내 사조직 ‘하나회’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린 김충립 전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은 1974~197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보안사 대전복계(係)에서 연대장급 실병 지휘관인 대령급 이상 장교 800명의 신상카드를 작성했다고 증언했다.

    “1974~1975년 청와대의 지시로 보안사 대전복계에서 대령급 이상 장교 800여 명의 신상카드인 일명 ‘옐로카드’를 작성했다. 장군 1명의 존안 자료를 차곡차곡 쌓으면 높이 50cm가 넘었다. 그 기록을 대통령이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한 장에 담는 작업이었다.”(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1963년 전두환·노태우 쿠데타 음모 옐로카드 신상카드 기록하려다 무산’, 신동아, 2016년 1월호)

    고위 장교 800명의 ‘옐로카드’가 작성된 1974~1975년경에는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육영수 사망, 1974년 8월 15일), 베트남 공산화 통일(1975년 4월 30일) 같은 대형 안보 사건이 발생했다. 그전인 1973년에는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물러나게 하고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말한 게 쿠데타 음모설로 번져 윤 사령관과 손영길 준장 등 장교 30여 명이 횡령과 수뢰 혐의 등을 덮어쓰고 숙청된 ‘윤필용 사건’이 터졌다. 이런 정치·사회적 배경 속에서 존안 자료가 작성된 것이다.

    블랙리스트를 창건한 원조(元祖)가 일제 사상경찰이라면,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는 블랙리스트를 재건한 중시조(中始祖)인 셈이다. 군부를 감시하는 보안사령관을 지낸 박정희의 후계자 전두환-노태우도 블랙리스트를 이어받았다.



    보안사의 ‘청명계획’

    보안사(현 기무사)는 노태우 정부 당시 공안정국이 조성되자 비상계엄에 대비해 반정부인사 목록을 만들고, 이들을 D-데이 전후해 전원 검거한다는 예비검속 계획(작전명 청명계획)을 세우는 등 사실상 ‘친위 쿠데타’를 준비한 것으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위원장 이해동 목사) 조사에서 드러났다.

    1989년 3월 당시 보안사 3처(우종일 처장)는 계엄에 대비해 각계 주요인사 923명의 인적사항·예상 도주로·예상 은신처·체포조 등이 기재된 ‘청명카드’를 작성하고, 계엄 시 이들을 검거·처벌하기 위한 청명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청명계획은 1989년 계엄령을 실시하지 않아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이후 민간인 사찰로 변질되면서 그 대상자는 1311명으로 늘어났다. 개인별 신상자료철(1만2100쪽)은 기무사에 보관돼 있다.

    ‘청명’ 대상자 선정과 등급은 공안합수부 정책협의회에서 검찰·경찰의 좌익인사 자료와 보안사의 좌익인사 명단과 등급 등을 참조해 분류했다. 보안사는 청명카드 작성 작업을 완료한 뒤, 1989년 8월 을지훈련 기간에 8개 부대를 선정해 도상훈련까지 실시했다. 보안사는 19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의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청수’(동향파악) 대상자라는 명칭으로 민간인 1300여 명에 대해 공개 자료와 예하 보안부대의 ‘동향관찰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개인별 신상자료철을 작성·관리했다. 과거사위 조사 결과, 보관 자료에는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빠져 있었다. 윤석양 이병이 폭로할 때 명단에 포함됐던 노무현, 이강철, 문동환, 박현채 등 4명의 신상 자료도 누락됐다.

    ‘청명(예비검속) 카드’ 또는 ‘청수(동향파악) 카드’의 어두운 그림자는 이미 1990년 10월, 보안사에서 복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정치계·노동계·종교계·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 1303명을 상대로 정치사찰을 벌였다고 폭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보안사에 연행돼 과거 학생운동권에 함께 몸담았던 동지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프락치 노릇을 강요받은 윤 이병은 민간인 사찰자료 디스켓 30장과 명부철을 들고 나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의 도움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활동을 폭로했다.


    윤석양의 폭로

    윤석양이 갖고 나온 동향 파악 대상자 색인표 1303장, 4명(노무현, 문동환, 이강철, 박현채)의 개인신상카드, 개인별 동향 파악 내용이 들어 있는 컴퓨터 디스켓 30장(447명분) 자료에 따르면, 보안사는 대상자를 A, B, C, D 네 등급으로 나누어 동향을 파악했으며, 사찰 활동을 통해 얻은 동향 첩보를 컴퓨터에 기록했다. 개인신상카드에는 인적사항, 가족사항, 해외여행 관계, 교우 및 배후 인물 등 9개 항목으로 나뉘어 기록돼 있었으며, 자택의 담장 높이, 비상 탈출구, 예상 도주로 및 은신처도 들어 있었다. 사찰 대상에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의 정치인을 비롯해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등 종교계 인사까지 포함돼 있었다.

    윤석양은 당시 보안사가 ‘현실문화사’라는 잡지사를 운영하면서 ‘현실초점’이라는 계간지를 냈으며, 이는 기자 신분을 가장하면 취재원인 동향 파악 대상자에게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실제 ‘현실문화사’라는 잡지사 편집장은 보안사 군무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윤 이병은 이 밖에도 “보안사가 정보 수집을 위해 경영하고 있는 위장 술집이 신림동 어디에 있다”고 밝혔는데, 한 언론이 이를 추적한 끝에 보안사 요원(장교는 지배인, 사병은 웨이터로 근무)이 운영하는 위장 카페 ‘모비딕’을 찾아내기도 했다.

    군과 관련된 첩보 수집 및 수사로 직무가 제한돼 있는 보안사가 민간인 사찰을 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은어로 ‘대(對)전복’, 즉 쿠데타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한 군에 대한 ‘동향 관찰’이 ‘체제 전복’ 혐의가 있는 민간으로까지 스멀스멀 확대된 것이다. 국가기관의 불법행위가 장기간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은 군 정보기관이라는 조직의 특성과 끼리끼리라는 패거리 의식 때문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는 컸다. 이로 인해 보안사령관은 물론, 국방장관까지 옷을 벗었다. 보안사령관 출신인 노태우 대통령은 보안사를 기무사로 바꾸고 조직을 개편해야 했다. 사법부도 민간인 사찰을 불법행위로 판결했다. 사건 발생 8년이 지난 1998년 7월 대법원은 보안사의 사찰대상자였던 한승헌 감사원장과 노무현 의원, 그리고 박원순 변호사 등 14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보안사가 군과 무관한 정치인·교수·종교인·언론인을 부당한 방법으로 사찰한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 행위’라며 헌법상의 사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점을 인정해, “국가는 한 감사원장 등에게 각 200만 원씩, 모두 2억90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박정희·전두환, 노동계 블랙리스트

    이로써 과거 정보기관의 정치사찰 행위가 특정 인물의 사생활을 침해했음이 처음으로 공식 확인됐다. 보안사의 사찰은 명백한 사생활 침해라는 점에서, 사법부 판결은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한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단죄였다. 정치적으로는 군의 정권 사병화(私兵化)에 대한 경종이었다. 특히 ‘체제 전복’ 혐의로 사찰을 받은 재야 변호사 3인이 나중에 감사원장과, 서울시장 그리고 국군을 통수(統帥)하는 대통령에 오른 사실은 보안사가 어두운 골방에서 얼마나 허접한 짓을 했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박정희의 후계자들이 승계한 또 다른 공안통치의 자산은 ‘노동계 블랙리스트’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 과거사위)에 따르더라도, 과거 독재-권위주의 정권에서 블랙리스트가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한 분야는 노동계였다. 중정과 안기부는 ‘불순 노동운동에 대한 외부세력 차단’이라는 명분 아래 기업, 노동부, 경찰 등과 상호 정보교류 속에서 ‘블랙리스트’를 활용해 해당 근로자의 동향을 감시하고 노조 조직의 와해공작을 전개했다. 국정원이 보존한 블랙리스트 관련 자료로 실체가 드러난 대표적 노동 탄압이 동일방직 사건과 도시산업선교회 사건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활동한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어용노조를 탈바꿈시키는 소위 ‘민주노조 운동’이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원풍모방, 반도상사, 동일방직, 청계피복, 콘트롤데이타 등의 노조가 대표적이다. 노동자 1400명의 동일방직 노조는 1972년 한국 최초의 여성 지부장(주길자)이 당선될 때부터 중정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는 한국노총과 산별노조 위원장들뿐 아니라 대기업 지부장까지도 중정의 낙점이 없으면 직책을 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정은 1975년 두 번째 여성 지부장(이영숙) 체제가 들어서자 적극 개입했다. 농성 중인 여성 노동자들이 ‘알몸 시위’까지 벌이며 경찰에 저항했으나 중정의 공작으로 매수된 반대파 남성들이 ‘똥물 투척’을 하며 공격했다.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끝내 중정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24명의 해고자를 낳고 와해됐다.



    도시산업선교회와 불순세력

    1978년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 이후 해고자 124명의 재취업을 막기 위해 당시 김영태 섬유노조 위원장 명의로 각 사업장에 배포한 것이 바로 노동계 블랙리스트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노조 활동으로 해고되는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업데이트된 다양한 블랙리스트가 등장했다. 1986년 8월 인천 경동산업 파업농성 중에 발견된 블랙리스트에는 동일방직 해고자 124명을 포함해 1662명의 명단과 업체, 성명, 본적, 주소, 주민번호, 최종학력, 활동사항, 근속기간 등이 기재돼 있다. 위장취업자는 A-B-C급으로 분류돼 있다. A급은 사업장 접근 철저 차단과 즉각 해고, B급은 사전에 취업을 제한(자영업 유도)하되 위장취업 시 보직 변경 및 순화하도록 했다.

    중정과 안기부는 민주노조 활동을 하다가 해고된 노동자를 ‘도산(도시산업선교회)과 연계해 산업평화를 저해하는 불순세력’으로 규정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이들을 노동현장에서 격리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감시했다. 특히 안기부는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 유관기관에 블랙리스트 관리지침을 제시하고 블랙리스트 적용 범위와 대상을 수시로 조정했다. 블랙리스트 작성은 대체로 개별 기업의 제보에 의해 기업-노동부-정보기관의 긴밀한 협조 아래 작성되어 각 사업장 및 노동부의 근로감독관실-정보기관 등에 비치되어 활용되었다.

    안기부는 블랙리스트 작성 및 취업 배제가 헌법과 노동법을 침해하는 위법 행위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안기부의 ‘해고도산노동자 최근 실태 및 관리방안 검토’(1984. 1. 10)에 보면, 당시 종교계의 블랙리스트 철폐 요구에 대해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홍보할 것을 중앙노동대책실무회의(노동부, 문교부, 치안본부, 보안사 및 당부)에서 ‘조정’한 내용이 이렇게 담겨 있다.

    ‘노동부가 종교지도자, 교계신문, TV 등을 활용해 자연스럽게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것을 홍보하고 해명할 것, 125명의 중점 관리대상자에 대해 재분류, 대상자 축소, 원직 복직은 불허하나 일정한 재취업 허용 등의 관리방안을 완화할 것, 사업장 내 도산 활동을 허용하지 않고 강력 규제할 것, 취업알선을 통해 재취업한 자들이 문제 활동 시 지역노동대책회의를 통해 처리방안을 강구할 것.’



    박철언이 이끈 종교대책반

    안기부의 ‘도산 관련 해고자’ 681명에 대한 관리와 재심사 등은 1982~1984년 사이에 집중돼 있다. 이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1982년 3월 18일) 사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개인적 관심사와도 연관돼 있다. 검찰이 방화범 문부식의 배후인 김현장을 검거하면서 김씨를 보호해준 최기식 신부를 구속하자 종교계가 강력 반발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직접 대책회의를 주재하며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성명을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장으로 규정하고 종교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그 후 1982년 5월 10일 전 대통령은 반체제 종교문제를 정무1수석실에서 관장하되 별도의 ‘종교대책반’을 구성해 종합적-체계적으로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그때까지 통상적인 학원 및 종교대책은 교육문화수석실 소관이었다.

    이에 따라 공안검사 출신 박철언 비서관이 교육문화수석실, 문공부, 안기부의 실무 지원을 받아 종교대책반을 맡았다. 당시 전두환은 박철언에게 자신이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79년 8월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도산(도시산업선교회)의 실태를 파악·보고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당시 자신의 보고를 토대로 박 대통령이 지시해 검찰이 도산을 조사했으나 이론 무장이 제대로 안 돼 실체 파악을 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도 대통령으로부터 크게 질책을 받았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이어 “이제야 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박철언을 격려했다.

    1982년 당시에는 KBS, MBC, 경향신문 등에서 도시산업선교회의 실체를 알리기 위한 특집 보도가 줄을 지었다. 당시 특집방송과 기획기사에 의하면, 사회 전복을 목표로 하는 도산의 극한투쟁은 남미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도산이 침투한 기업은 무리한 임금인상 요구와 파업으로 어김없이 부도가 나거나 폐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박철언은 회고록에 노동계 블랙리스트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지만 당시 안기부가 관리한 ‘도산 관련 해고자’ 블랙리스트와 안기부 보도지침에 따라 기획된 관제 언론의 도산 특집보도는 청와대 종교대책반 활동의 산물로 추정된다. 물론 이는 전두환 대통령이 보안사령관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파악해 보고했던 ‘도산의 실체’에 대한 개인적 인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청와대 존안 자료

    그러나 블랙리스트는 민주노조 활동에 참가한 노동자의 재취업을 막고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노동운동에 대한 지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활용됐다. 이는 헌법상 보장된 노동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근로기준법 제39조(취업방해의 금지)도 이를 금지하고 있다. 박정희와 그 후계자인 전두환 정권에서 노동계 블랙리스트 관리 및 적용 실태는 놀랍게도 그 대상만 노동계에서 문화계로 바뀌었을 뿐, 박근혜 정부에서 격세유전된 블랙리스트의 그것과 판박이다.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새로운 정치판 짜기에 시간이 촉박했으나, 현실정치에 어두운 그들로선 사람 보는 눈이 부족했다. 그때 위력을 발휘한 게 존안 자료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보안사(현 기무사), 경찰 등이 작성해 보관하고 있던 개인 신상정보를 십분 활용한 것이다. 존안 자료는 신군부에 협조할 인물을 선정하는 데에도 유용했지만, 반대 세력을 회유·억압하는 데도 편리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뒤에는 사정기관의 존안 자료 수집을 대통령훈령으로 제정해 국가보안법 위반, 불법 시위, 반국가단체 결성 등의 공안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관련 자료를 수집, 관리하는 일종의 공안사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데이터베이스 작업으로 전두환·노태우 정부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일부 인사들에 대해 가족, 친인척, 주변 인물까지 존안 자료에 올려 연좌제식으로 관리해온 것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인 시절, 김중권 비서실장은 2600여 명을 관리하는 청와대 존안 자료의 존재를 언론에 확인해주면서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내각 인선에서도 이들 자료를 활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영삼 정부 때까지 차관급 인사는 청와대 민정수석이 사정기관의 존안 자료를 토대로 대통령에게 후보 추천안을 보고한 뒤 필요할 경우 장관의 의견을 물어 최종 결정하는 형식이었다. 이에 따라 민정수석을 제외한 다른 수석비서관들은 차관급 인사에 관여할 수 없었으나, 김대중 대통령은 관련 부처 차관급 인사의 1차 인선안을 관련 수석들에게 맡겨 존안 자료 의존도를 낮췄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국정원과 사정기관(검찰-경찰)의 존안 자료를 인사에 거의 참조하지 않았다. 정찬용 인사수석은 처음 인사보좌관으로 발탁될 때부터 “정부 존안 자료에만 의존하던 인사 관행에서 탈피해 널리 인재를 구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정찬용 인사수석은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이던 필자에게 “존안 자료는 참고자료일 뿐 거의 의존하지 않고 있다”고 사석에서 여러 번 밝힌 바 있다.

    또한 노무현 정부가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대통령기록물법)을 제정한 뒤로는 존안 자료도 대통령기록물로 분류돼 정권이 바뀌면 기밀문서로 지정돼 대통령기록물보관소로 옮겨져 봉인 절차를 밟았다. 이로 인해 이명박 대통령은 전 정권으로부터 존안 자료를 인계받지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했고,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바뀌었을 때도 박근혜 대통령이 존안 자료의 부재로 인사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투로 얘기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검찰 1400여 명 관리

    한편, 대검찰청이 관리한 공안사범 자료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거쳐 김영삼 정부 시절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검찰의 존안 자료(공안사범) 관리 대상이던 인사들이 김대중-노무현 정권 들어 국정을 책임지게 된 상황이 되자 이들을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가 됐다. 그런 연유로 검찰의 존안 자료는 유명무실하다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9월경에 완전 폐기됐다. 검찰이 존안 자료를 폐기한 것은 이명박 정권 초기 ‘광우병 파동’ 당시 촛불집회 연행자 중 일부에 대해 존안 자료를 활용해 가족 관련 기록을 조회한 것이 ‘연좌제식 수사’라는 비난을 사 국정감사에서 논란이 된 것과 관련이 있다.

    검찰 공안부서의 존안 자료 관리대상은 폐기되기 전까지 전국적으로 모두 1400여 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보안법, 불법시위, 정치파업, 반국가단체 및 친북활동 등을 한 공안사범이 주요 대상이었다. 검찰은 또 노동, 종교, 학원, 재야단체 등으로 세분화해서 자료를 보완해왔다. 검찰도 존안 자료 관리 대상을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A~D등급으로 분류했다. 존안 자료에 오른 공안사범은 추가로 범죄혐의가 드러나거나 다른 사건·사고에 연루돼 조사를 받을 경우, 관련 내용을 모두 기존 존안 자료 파일로 이첩해 관리했다.



    박영준과 공직윤리지원관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른바 ‘신공안’ 개념을 내세우자 ‘구공안’은 설 자리를 잃었다. 노무현 정부는 거기서 한발 나아가 ‘과거사 청산’과 사법개혁을 추진했다. 실제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존안 자료가 유명무실해지고 ‘블랙리스트’도 문제 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촛불 집회 참석자 연행 논란을 계기로 검찰의 공안사범 존안 자료는 폐기됐지만, 민간인 사찰 망령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이 폭로된 지 20년 만에 되살아났다.

    당시 이 사건을 폭로한 신건 의원에 따르면, 국무총리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은 2008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동영상을 개인 블로그에 링크한 김종익 씨를 사찰했다. 그뿐만 아니라 김씨 회사에 용역을 준 은행을 찾아가 김씨 회사와 거래를 끊으라고 압력을 행사해, 결국 김씨는 대표이사직을 내놓아야 했다. 과거 독재-권위주의 정부에서 암약했던 민간인 사찰의 DNA(유전자)가 보수정권이 들어서자 20년 만의 ‘격세유전’으로 되살아난 셈이다.

    예부터 권력형 비리 사정 및 예방 업무와 공직기강 확립 및 인사검증 업무는 민정수석실 소관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권력형 비리 사정 및 예방 업무는 민정수석실의 사정비서관실이 맡았고, 공직기강 확립 및 인사검증 업무는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수행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두 비서관실이 민정2비서관실로 통·폐합됐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공직비리 감찰-사정 업무를 청와대 민정수석실(사정비서관 또는 공직기강비서관) 중심으로 운용하지 않고, 국무총리 공직윤리지원관실 중심으로 운용한 배경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대통령으로부터 해당 업무를 위임받은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 청와대가 아닌 국무총리실에 포진(박영준 국무차장)한 데 따른 인위적 요소가 작동했다. 이에 따라 청와대 민정2비서관실보다 국무총리 공직윤리지원관실에 힘이 더 실렸다. 또한 언론의 감시가 집중된 청와대와 달리, 총리실은 언론의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점도 작용했다. 이런 배경에서 이른바 ‘영-포 라인’의 핵심 인물인 박영준 차장은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영일-포항 출신 공직자들을 중심으로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운용하면서 공직 기강을 다잡아간 것이다.


    도덕성과 복무기강 평점

    이명박 정부에서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검찰·경찰·국세청·금감원 등에서 파견한 40여 명의 직원이 감찰활동을 벌이는 ‘관가(官街)의 암행어사’로 통했다. 당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는 검찰, 경찰, 국세청, 국정원, 금감원 등 5개 사정기관에서 직원을 파견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업무와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영-포 라인’이라는 대통령과의 지연을 배경으로 이 관가의 암행어사들은 장-차관 인사들까지 인사검증 및 감찰 대상으로 삼을 만큼 위세가 막강했다.

    실제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 매뉴얼을 보면, △대통령 업무보고 관련 중점 추진 사항 △대통령 국정철학 구현 위한 중점 업무 △장·차관의 대표정책 △국정과제 추진 성과 등 장관 취임 후 중점 추진사항을 중심으로 대통령 국정철학의 구현 정도를 점검했다. 또한 △리더십 △조직 장악력(업무파악 및 업무수행 능력, 전문성 여부, 취임 후 부처 공무원들과의 관계) △소관정책·사회 이슈 대응 능력 △대(對)국회 활동 △대언론관계 활동(기자들과의 공·사적인 만남, 언론관계 활동) △타부처 업무 조율 및 타부처 장관들과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직무역량을 평가했다. 이 밖에도 △도덕성과 복무기강 △업무 집행에서의 청렴도 △평소의 생활(출근-퇴근시간, 휴게시간 활동, 직원들과 거리감을 좁히기 위한 활동) △취미생활, 주량, 흡연 △가정생활 및 업무 추진에 있어서 업무추진비 사용 등 사찰이 아니고서는 알기 힘든 점검 항목도 포함되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이런 점검 항목에 대한 평가를 통해 총괄적으로 △국정철학의 구현 △직무역량 △대외관계 △도덕성 및 복무기강 4개 항목에 대해 별표(★)로 평점을 매겼다. 또한 점검 및 평가의 근거를 ‘자료수집 경위’라는 별도 문건으로 첨부했다. 김영한 전 수석의 메모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에서도 장차관 복무동향 등 존안 자료를 기록-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설립 동기부터가 ‘불순’했다. 촛불시위로 국민에게 두 번이나 머리를 숙이고선 뒤로 칼을 품은 이명박(MB) 대통령의 면종복배가 낳은 비극의 씨앗이다. MB의 핵심 측근인 박영준 전 국무차장은 2010년 7월 ‘신동아’ 인터뷰에서 “2008년 촛불시위가 발생하고 중앙청 공직자들도 시위에 나간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공직윤리지원관실을 부활시켰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지난 정부 10년간의 기존 인력을 쓸 수는 없어 다른 데서 지원받았다”고 해명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공직감찰 기능을 수행한 공직자들은 지원관실을 만들 때 배제했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박영준 국무차장 주도로 총리실에 ‘암행감찰단’을 만들면서 주로 이명박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영일-포항 출신의 공직자(이른바 ‘영-포 라인’)를 콕 찍어서 17개 국가기관에 파견을 요청했다는 점이다. 당시 민주당 영-포 게이트 진상조사특위(신건 위원장)에 따르면, 지원관실의 주축 인력인 노동부를 포함해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에서 파견 나온 공직자의 태반이 영일·포항 출신으로 충원됐다. 민간인 사찰이라는 불법행위에 대한 무감각과 은폐 기도라는 공조직의 비극적 말로는 여기에서 싹텄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김영한 수석 업무일지

    김영한 수석의 업무일지를 분석해보면, 청와대가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이나 세력에 대해서는 응징, 보복, 형사처벌 등의 대상으로 낙인찍고 집요하게 추적해 불이익을 주고 형사처벌을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 반대자나 비판자를 탄압하려는 사찰과 공작의 칼끝은 세월호의 아픔을 그린 화가(홍성담)에서부터,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세월호 사건을 언급한 판사(이형주)와 조작간첩사건을 무죄로 이끈 변호사(장경욱), 그리고 대통령의 비선조직(‘만만회’)을 비판한 거물급 야당 정치인(박지원)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휘둘러졌다.

    업무일지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된 단어는 ‘세월호’다. 세월호는 김 수석이 업무일지를 기록한 첫날부터 등장해 세월호 사건 이후 국정과제, 국정조사 대비, 특별법과 특위에 대한 논의를 거쳐 8월이 되자 “세월호에서 벗어나 原則대로 경제 살리기 기대감→ 報道”라고 기록한 메모가 등장한다. 세월호 정국의 장기화에 따른 국민의 피로감과 경제 살리기 기대감을 반영한 언론 보도 기획은 국정원이 작성해 민정수석실을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한 ‘2014년 하반기 국정운영 관련 제언’ 문건과도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정치에 오염된 정보

    국정원은 ‘국정운영 제언’에서 ‘비판세력-언론의 국정 발목 잡기가 부담’이라는 전제 아래 △여객선 사고 여진 지속 △인선 과정에서 대통령님 리더십 타격 △여당 내 계파갈등 및 독자노선 조짐 △경제 활성화 정책 추진력 저하 △반대세력 대정부 투쟁 지속 등을 정부의 약점으로 지적하며, 하반기 정부의 기회-위기요인 평가(SWOT)를 제시했다. 국정원이 여당의 계파갈등 같은 정치권 동향정보를 수집-분석한 것도 문제이지만, 세월호 참사를 ‘여객선 사고’로 규정한 것은 대통령의 심기에 맞춘 ‘정보의 정치화’의 산물이다.

    ‘정보의 정치화’ 또는 ‘정치에 오염된 정보’는 객관적인 분석과 합리적인 정책 대안을 도출할 가능성을 어렵게 할 뿐이다. 국정원은 ‘국정운영 제언’에서 당시 60%대이던 대통령 지지도가 40%대 후반으로 하락한 여론조사 결과를 예로 들며, ‘지지도 상승 국면에서 맞닥뜨린 여객선 사고 악재가 정국 블랙홀로 작용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고 진단했다. 이런 잘못된 진단을 근거로 국정원은 “비판 세력이 여객선 사고를 빌미로 투쟁을 재점화하려는 기도를 제어해야 한다”면서 보수단체를 활용한 적극적인 맞대응 집회와 지탄 여론 조성 같은 대국민 여론전을 해법으로 내놓고 있다. 결과적으로 ‘블랙홀’이라는 진단은 맞았다. 박근혜를 탄핵으로 이끈 원동력은 세월호 사건이었으니까.

    존안 자료는 작성자의 주관이 개입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존안 자료는 그것을 사용·관리하는 자와의 각종 인연, 특히 지연과 학연으로 얼룩진 기록이어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다른 대체재가 없기 때문에 대통령이나 고위층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들춰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총구와 돈줄, 그리고 공안(수사권, 정보력, 경찰력)의 힘을 가진 정부의 핵심 요직을 특정 지역이나 학맥이 차지하고 있으면, 존안 자료에 의한 검증 기능은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존안 자료의 존재보다 더 큰 문제는 자료의 활용 방식이다. 자료에 대한 안내가 있는 것이 아니니 보는 사람의 능력과 시각에 따라 해석된다. 공개된 자료가 아니라 당사자는 자신에 대해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열람과 정보공개를 청구할 수 없으니 당연히 정정도 요구할 수 없다. 자료에 한번 기록되면 그대로 영원히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국회 정보위원으로서 국정원의 존안 자료를 들여다본 신경민 의원(더불어민주당)의 진단이다. 존안 자료가 갖고 있는 ‘불가역적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노무현 정부의 편파 지원

    국가정보기관은 동종교배와 끼리끼리 문화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정보요원을 선발할 때 인구비례 지역할당제를 적용해 채용한다. 특정 지역 출신들만 뽑으면 이들이 패거리를 형성해 정보 수집 생산 및 분석 과정에서 정보가 왜곡(정보의 정치화)되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기관에 편중 인사가 심화되면, 3권 분립의 국가기관들이 독립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취하는 가운데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고 독재 권력이 등장하지 않도록 하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오랫동안 경험해온 권력의 후진적 작동 방식이 그러했다.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의 한 사유가 된 블랙리스트(대통령의 권한 남용)도 넓게 보면 ‘정보의 정치화’ 또는 ‘정치화된 정보’의 산물이다.

    사실 문화예술인 지원의 편파성에 대한 논란은 과거에도 있었다. 1972년 문예진흥법 시행 이후 예술 지원 분야에서 편파성이 논란이 된 것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였다. 당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을 필두로 현기영 문예진흥원장, 이효인 한국영상자료원장,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문화연대 출신의 진보진영 인사가 대거 발탁됐다. ‘코드 인사를 통한 문화계 권력 교체’라는 지적이 나왔다. 편중 지원 문제도 제기됐다. 2000년 2억5000만 원에 불과하던 민예총(회원 10만 명) 지원금은 2004년 두 배 이상(5억8000만 원) 증가한 반면에, 같은 기간 우파 계열의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회원 120만 명) 지원금은 소폭 감소(5억8600만 원→5억8000만 원)했다.

    보수우익 진영에서는 이를 ‘한국판 문혁(文革)’이라고 규정했다. 보수진영은 이미 이명박 대통령당선인 시절부터 “새 정부는 진정한 의미의 ‘우파적(자유민주적) 정신혁명’을 통해 지난 10년간 국민들의 마음을 지배했던 좌파적 이념을 털어내고 이념 선동의 도구였던 문화를 시장과 민간에 돌려주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조선일보는 장문의 사설을 통해 “정권이 바뀐다지만 문화예술계의 알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며 “‘싹쓸이 문화권력’ 씻어내 문화 다양성 되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명박 정부의 보복성 경질

    ‘노무현 정권과 함께 문화계에 진주한 좌파 예술인의 문화권력 접수는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것이었다.…(중략)…먼저 문화예술계의 돈줄을 쥐고 있는 문예진흥원 원장과 사무총장 자리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상임이사에게 돌아갔다…(중략)…이 문화혁명을 보고 한 문화계 인사는 “인민군이 남한을 무력 점령해도 이처럼 무모하고 안하무인식 인사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노하면서도 자신들의 무력을 자탄했다.’(‘싹쓸이 문화권력’ 씻어내 문화 다양성 되찾아야, 조선일보, 2007년 12월 28일)

    실제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이번에는 ‘보복성 경질’이 자행됐다. 2008년 3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이전 정권에서 임명된 산하기관장은 알아서 물러나라”며 실명까지 거론했다. 해당 인사들이 버티며 이슈화하자 표적성 감사까지 진행하는 등 후유증이 장기화했다. 또한 영화진흥위원회가 예술·독립영화 지원사업을 실시하며 공모제를 악용해 진보적 성향의 영화 단체를 솎아낸다는 반발도 거셌다.

    노무현 정부든 MB 정부든, 편파성 시비는 이어졌지만, 예쁜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는 ‘밥그릇’ 안에서의 몫 다툼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주도 아래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어, 좌파 성향의 미운 놈 밥그릇(지원금)을 빼앗아 자신에게 우호적인 예쁜 놈에게 주는 식으로 역사의 시계를 박정희 군사독재 시대로 되돌렸다. 이것은 차별과 배제라는 편파의 수준을 넘어서 헌법 가치를 파괴하는 범죄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쁠랙크리스트’이고, 군부독재 시절의 ‘청명계획’이고, 노동계 취업 배제 명단이나 민간인 사찰 명부와 다를 바 없다. 일제강점기의 토양에서 자란 그 범죄의 씨앗이 박정희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격세유전’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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