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6·3사태 주역 김중태가 털어놓은 1960년대 학생운동 비화

5·16 직후 ‘우리 편이 잡았다’ 오판, 서울 문리대 학생회 핵심간부가 中情 프락치

  • 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5-06-27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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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사태 주역 김중태가 털어놓은 1960년대 학생운동 비화
    약속시간이꽤 지나서 초로의 사내가 찻집으로 들어선다. 버스를 타고 왔는데 길이 막혔다고 한다. 허름한 점퍼 차림의 그는 비에 젖은 옷을 툭툭 털며 먼저 와 있던 부인 송경숙씨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숯처럼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이 예사롭지 않은 그의 이력을 웅변한다. 비록 세월의 무게에 눌려 머리숱은 성글어졌지만, 이목구비는 여전히 또렷하고 목소리는 우렁차다.

    1960년대 피 끓는 대학생이던 그와 그 시절 태어난 기자 사이에는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강물이 흐른다. 기억과 망각의 불협화음으로 뒤척거리는 그 강물엔 한 인간의 고통이 스며 있고 역사의 아픔이 녹아 있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대명사인 김중태(金重泰·65). 서울대 운동권을 이끌던 그가 역사의 한가운데에 우뚝 선 것은 1964년 6·3 한일회담반대시위 때다. 한일굴욕외교반대 전국대학생 투쟁위원장으로 시위를 주도한 그는 구속과 동시에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반정부투쟁에 나선 그를 군사정권은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대표적인 간첩조작사건으로 알려진 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여러 차례 투옥됐다. 감옥에서 전향서 쓰기를 거부하며 버티던 그에게 중앙정보부(이하 중정)는 갖은 협박과 회유를 일삼았다. 1969년 그는 절망감에 빠져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을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중정부장 김형욱의 협박을 못 이긴 강제출국이었다. 그가 돌아온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직후인 1980년 초다.

    흔히 ‘6·3세대’라 부르는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오늘날 한국 정치권을 주름잡고 있다. 김덕룡·이재오·안상수·문희상 의원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손학규 경기지사가 대표적인 인물. 이에 비해 6·3 학생시위를 사실상 주도한 김중태씨는 활약상에 걸맞지 않게 그간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그를 현실로 끄집어낸 것은 지난 1월부터 5월까지 방영된 교육방송(EBS)의 문화사 시리즈 제3편 ‘지금도 마로니에는’이라는 프로그램이다. 1960년대 대학생들의 열정과 좌절을 다룬 일종의 논픽션 드라마인데, 여기서 집중 조명을 받은 이가 바로 김씨다. 드라마가 끝난 후 인터넷 카페에는 ‘미조(彌照) 김중태’라는 모임이 생겨났고 현재 회원이 1000명을 넘어섰다. 미조는 김씨의 호다.

    아무리 젊은 시절 얘기에 국한한다 하더라도 두 차례 만나 대여섯 시간 대화한 것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논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김씨의 학생운동 체험을 중점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군사정권이 조작한 흔적이 뚜렷한 몇몇 공안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 관계자는 여의도 모 호텔에서 김씨를 만나 민비연(民比硏)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다.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민비연 사건은 6·3 한일회담반대운동과 더불어 김씨의 학생운동 이력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이 사건으로 두 차례 구속됐다. 민비연이란 당시 서울대 운동권 학생의 학술모임이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의 약자인데, 6·3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한 혐의를 받았다.

    민비연이 결성된 것은 1963년 10월이다.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주축인 이 모임의 지도교수는 사회학과 황성모 교수였고, 김씨는 2대 회장을 지냈다. 민비연은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세미나를 여는 등 다양한 연구활동을 벌였는데, 이종률·박범진·김경재·현승일·김도현씨가 주요 회원이었다. 이중 김도현씨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뒷날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영삼 정부 때 문화부 차관을 지낸 김씨는 16·17대 총선 때 서울 강서갑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거푸 낙선했다.

    1차 민비연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65년 9월. 군사정권은 김중태씨를 비롯한 민비연 주요 회원들을 간첩혐의로 구속했다. 당시 이 사건을 크게 다룬 ‘조선일보’는 ‘정부 전복을 기도’라는 큰 제목 아래 ‘서울대 김중태군 등 11명 구속 6명 수배’라는 소제목을 붙였다(1965년 9월26일자). 김씨는 내란음모 등의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15개월 만에 출옥했다.

    2차 민비연 사건은 1967년 7월에 일어났다. 중정은 동백림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민비연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검찰에 따르면 민비연은 황성모 교수가 동베를린에서 북한대사관과 접촉한 후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만들었다는 것. 이 사건으로 서울대 제적생이던 김씨는 황 교수와 더불어 반공법 위반죄로 2년간 실형을 살았다.

    “정보부는 황성모 교수의 인민군 복무 경력을 문제삼았어요. 황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피난을 못 가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 붙들렸어요. 그는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전쟁에 참여했다가 낙동강전투 때 국군에 잡혀 거제포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 일과 독일 유학시절에 동베를린을 방문한 사실을 두고 황 교수를 빨갱이로 몬 겁니다. 사실 인민군 복무는 비자발적인 경력이고,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에 갔다오는 것은 38선 넘나드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정상참작을 해야죠. 게다가 황 교수는 동베를린에서 공산당에 가입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도 정보부는 황 교수가 거기서 서울대 후배인 정모, 임모 등 동백림 사건 연루자들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간첩으로 몰고 민비연 회원인 우리 학생들에게는 ‘간첩의 지도를 받았으니 너희도 간첩 아니냐’고 몰아붙였어요. 그래서 (민비연이) 반국가단체라는 겁니다. 내가 잡혀 들어가보니 이미 각본이 다 짜여 있더라고요.”

    친구집 전전하고 강의실에서 눈붙여

    김씨는 자신이 학내시위에 앞장서게 된 이유에 대해 “집안에 좌익 연루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 생각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이 바로 국민을 좌우익으로 갈라 단죄한 것입니다. 1960년대만 해도 남북한 국민 10명 중 9명이 좌익에 연루됐거나 우익 반동분자와 관련돼 있었어요. 좌가 옳으니 우가 옳으니 정치적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민족의 아픔으로 바라봐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남이나 북이나 모두 그렇게 하지 않았죠. 서울대 문리대에도 집안이 좌익에 연루된 학생이 많았어요. 이들은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내가 앞장섰던 겁니다. 우리 집안은 좌익과 전혀 관계가 없었거든요.”

    김씨가 태어난 곳은 일본 도쿄다. 그의 아버지는 징용으로 끌려가 사할린 탄광에서 일하다 태평양전쟁 말기 도쿄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일본으로 끌려간 부친, 즉 김씨의 외조부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모친이 사망한 탓에 부친을 수발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외조부의 영향으로 유관순 여사와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외조부는 일본에서 신학대를 나와 목사가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도쿄에서 우연히 알게 됐는데, 외조부는 아버지의 신앙심이 좋다며 사위로 받아들였다. 김씨의 부모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월 한국으로 돌아와 경북 의성에 정착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김씨 가족은 대구로 피란 갔다가 거기서 눌러앉았다. 김씨는 경북고를 다녔는데, 뒷날 대학에서의 활동을 예고라도 하듯 그때 이미 공부보다 사회활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6·3사태 주역 김중태가 털어놓은 1960년대 학생운동 비화

    1964년 3월24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한일굴욕외교 반대 시위 도중 일본 총리 화형식을 열었다. 앞에서 손짓하고 있는 이가 김중태씨.

    폐결핵을 앓던 김씨는 고교 졸업 후 절에서 2년간 요양한 뒤 1961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서울대는 ‘머리 좋고 가난한’ 학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립인 연세대와 고려대에 비하면 학비가 무척 싼 편이었다. 김씨 기억으로는 당시 서울대 입학등록금은 6500원이었고 연세대와 고려대는 2만원대였다.

    김씨처럼 지방 출신이거나 가난한 학생들은 대체로 동가식 서가숙했다. 형편이 나은 친구들 집을 전전하거나 대학 강의실에서 자는 학생이 많았다. 그런 게 흉이 아니던 시절이었다.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비교적 안정된 주거지를 확보한 경우를 빼고는 다들 그렇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대학생활을 했다.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5·16 군사정변이 터졌다. 계엄이 선포됐고 대학가엔 군대가 진주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를 어떻게 봤을까.

    “군인이 잡았다고 해서 두려워하지는 않았어요. 4·19혁명의 경험이 있었잖아요. 아무리 막강한 군이라도 학생들 힘으로 몰아낼 수 있다는…. 처음엔 좀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대세였어요. ‘가난을 청산하겠다’는 공약에 기대도 걸었고요. 일부 선배들은 ‘우리 편이 잡았다’고 반기기도 했지요. 우리 정부는 그때까지 단기(檀紀) 연호를 사용해왔는데,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루아침에 서기(西紀)를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단기 연호는 민족의 주체성,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과 관련된 것이라 이 문제를 두고 학생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지요. 하지만 가난 퇴치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봤기에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던 겁니다.”

    서울대 문리대생의 자부심

    그러나 학생들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원대복귀 약속을 어기고 군정연장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던 학생들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성토했다.

    1962년 서울 동숭동의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서 군정연장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계엄령하에서 처음 발생한 대학가 시위였다. 당시 문리대 전체 학생이 약 1000명이었는데, 500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했다. 김씨에 따르면 당시 서울대 문리대는 전국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다.

    “4·19가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고려대 학생들을 정치깡패들이 폭행한 사건이지만, 실제로 시위를 주도한 것은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었어요. 경무대 앞 시위 때 가장 많이 죽었고요. 이런 자부심이 있었기에 우리는 군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박정희에게는 눈엣가시였지요.”

    당시만 해도 군사정권은 김씨를 비롯해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을 연행해 감방에 집어넣긴 했어도 구속하지는 않았다. 김씨의 견해로는, 4·19를 통해 학생들의 힘을 목격한 군부가 학생들을 구속하는 건 벌집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서울대 문리대생이라고 다 학생운동에 참여한 건 아니다. 김씨에 따르면 정치학과 학생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고 그 다음이 사회학과, 철학과였다. 반면 외교학과 같은 데는 학구파가 많았다.

    물론 정치학과도 모든 학생이 나선 건 아니었다. 출신지역, 출신고, 집안환경에 따라 성향이 달랐는데 크게 구분하면 두 부류가 있었다. 경기고 졸업생으로 대표되는 서울 출신, 또는 이른바 ‘있는 집 자제’들은 대체로 현실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반면 시골 출신 학생들은 가난 타파에 관심이 많았고 공부도 그 방면으로 많이 했다. 김씨는 물론 후자에 속했다.

    김씨의 정치학과 동기 중에는 언론계로 진출한 인사가 유난히 많다. 성유보·이부영·권근술·이병대(동아일보), 김학준·송진혁(조선일보), 정일화(한국일보), 김문원(신아일보)씨가 대표적인 인물.

    현재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인 성유보씨는 졸업 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가 1975년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사태 때 해직됐다. 그후 월간 말지와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하고 민언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을 지내며 대표적인 재야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제적 안 당했다면 언론사 갔을 것”

    열린우리당 의장을 역임한 이부영씨도 1975년 동아투위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해직됐다. 이후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공동의장을 맡는 등 1980년대 대표적인 재야민주인사로 활동했다. 현재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좌교수인 권근술씨 역시 동아투위 사태 때 해직됐으며,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장과 사장을 역임했다. 또 한 사람의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이병대씨는 KBS로 옮겨가 기획보도실장과 해설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대한언론인회 이사를 맡고 있다.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한 김학준씨는 일찌감치 학계로 진로를 바꿨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2대 국회의원(민정당, 전국구)을 지냈고 6공화국 말기 청와대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동아일보 논설고문을 거쳐 2001년부터 사장을 맡고 있다. 김씨와 나란히 조선일보에 입사했던 송진혁씨는 중앙일보로 옮겨 편집국장과 논설고문을 지냈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정일화씨는 한국일보와 국민일보에서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현 경기도 의정부시장인 김문원씨는 신아일보 정치부장을 지냈으며 6공 때 공화당 의원(의정부)을 지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박범진 전 의원과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이종률 전 의원, 동양통신 기자로 활약한 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도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이다. 이들은 김중태씨보다 한 학번 위인데, 현씨의 경우 대학은 1년 선배지만 고등학교(경북고)로는 1년 후배다.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정원은 20명 안팎이었다. 절반에 가까운 학생이 졸업 후 언론계로 나아간 것이다. 이에 대해 김씨는 “당시는 정치학과 나와서 갈 만한 곳이 언론사밖에 없었다”며 “나도 제적당하지 않았다면 언론사에 입사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 언론인 사이엔 재학 시절 현실인식에서 공감대가 형성됐으며 대체로 학생운동에도 적극적인 편이었다.

    김씨와 친분이 있던 사회학과 동기 중에서는 박기정, 김호준씨가 언론계로 진출했다.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장까지 지낸 박기정씨는 현재 전남일보 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신문 기자 출신인 김씨는 서울신문과 문화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비(非)정치학과 학생 중 김씨와 가깝게 지낸 이로는 박재일·김지하씨를 꼽을 수 있다. 김씨와 경북고 동문인 박씨는 지리학과를 나온 후 가톨릭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현재 사단법인 한살림 회장이다.

    1970년대 대표적 저항시인 김지하씨는 미학과 출신. 학번으로는 김중태씨보다 2년 위지만 나이는 한 살 적었다. 김씨는 “김지하한테 상당히 흥미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예술가적인 기질을 타고났어요. 대낮부터 술 취해 돌아다니길 잘하고. 친하게 지낸 편인데, 수사기관에 잡혀들어가선 서로 친하지 않은 척 가장했지요. 초기엔 김지하도 행동파는 아니었습니다. 시인 기질이 있는 데다 아버지의 좌익 전력 탓에 나처럼 드러내놓고 활동할 처지가 아니었지요.”

    김중태씨에 따르면 당시 학생회는 대체로 극우 반공주의 학생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빨갱이는 다 죽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이들은 학생들의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학생회 내부에 정보부 프락치가 있다는 소문은 이들에 대한 신뢰를 더욱 떨어뜨렸다.

    6·3사태 주역 김중태가 털어놓은 1960년대 학생운동 비화

    잠적했던 김중태씨가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단식농성현장에 나타난 소식을 크게 다룬 동아일보 기사(1964년 6월3일자).

    학림다방과 쌍과부집

    5·16 이후 달라진 캠퍼스 풍경 중 하나가 정보부 프락치의 침투였다. 밀고꾼 노릇을 하는 학생 프락치도 수십명 생겨났다. 물론 정보부의 공작이었다. 정보부는 주로 가난한 시골 출신 학생에게 학비 제공을 미끼로 접근했다. 또 집안이 좌익에 연루된 학생이거나, 부유한 집안 출신이지만 부친이 비리에 연루된 학생을 대상으로 약점을 파고들면서 회유했다.

    “문리대 학생회 간부 중에 OOO이라고 있었습니다. 그는 핵심간부를 지내면서 프락치 활동을 했어요. 우리의 학내 동향에 대해 보고서를 써서 올린다는 얘기가 있었지요. 그는 졸업 후 모 기관에 들어갔습니다. 또 가짜 학생도 많았어요. 형사나 정보부 요원이 학생을 가장해 강의실을 들락거렸지요. 가짜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잘 구분되지도 않았어요.”

    캠퍼스 주변엔 값싼 다방과 술집이 많았는데, 운동권 학생들은 학림다방과 쌍과부집을 자주 찾았다. 학림다방에서는 차를 마시지 않아도 내쫓지 않았고, 막걸리를 팔던 쌍과부집에서는 외상술을 마실 수 있엇다.

    군정연장 반대시위를 주도한 김씨는 한미행정협정 촉구시위에도 참가했다.

    시위학생들은 미군 범죄자를 한국 법정에 세울 수 있도록 한미간 행정협정을 체결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 원조에 전적으로 기대던 시절이었다. 국민의 분노를 일으킨 이 사건에 대해 군사정권은 침묵했다.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자칫 반미로 비칠까 우려했던 것이다. 정부는 시위에 가담한 학생들을 북한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반미주의자로 몰았다.

    1963년 10월 치러진 5대 대통령선거. 군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어긴 박정희는 아예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7명이 입후보했으나 실제로는 공화당 박정희와 민정당 윤보선 후보의 2파전이었다. 사상논쟁까지 불러일으킨 치열한 접전 끝에 박정희가 윤보선을 15만6000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1964년 3월24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3개 대학 학생 수천명이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동시에 시위를 벌였다. 장소만 달랐지 사실상 공동시위였다. 이는 각 대학의 대표 학생들이 1963년 겨울방학 때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였다. 김중태씨의 수유리 자취방이 거사를 모의한 장소였다. 고려대는 정외과의 최장집(현 고려대 정외과 교수), 연세대는 경영학과의 정준성(전 영화진흥공사 상무이사)씨가 대표로 나섰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경제개발 자금지원을 내세워 급하게 한일수교회담을 추진했는데, 이는 국민 다수의 반일 정서를 무시한 처사였다. 협상내용도 36년간의 식민지배통치 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어업 분야에서는 한국 어민이 엄청난 손해를 입는 불평등조약이 맺어졌다.

    김지하의 단식투쟁

    3월24일 시위 때 학생들은 일본 총리 이케다의 허수아비를 태우는 화형식을 열었다. 김중태씨는 학생회 간부는 아니었지만 단상에 올라가 일장 연설을 했다. 김씨에 따르면 당시 학생회는 시위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시위대 주변에서 대세를 관망하다가 시위규모가 커지면 그때서야 가담했다는 것.

    시위가 끝난 후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된 김씨는 조사를 받은 후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졌다. 학생들은 “김중태를 석방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결국 구속된 지 한 달 만에 기소유예 조치로 풀려났다.

    박 정권이 계속 한일회담을 추진하자 학생들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시위를 준비했다. 5월20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서울시내 학생 1만여 명이 모인 대규모 연합시위가 벌어졌다. 김씨는 ‘한일굴욕외교반대 전국대학생 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시위를 주도했다. 학생들은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렀다. 이때 조사(弔詞)를 맡은 사람이 바로 김지하씨다.

    시위가 끝난 후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었다. 수배령이 떨어진 김중태씨와 지도부 학생들은 모두 잠적했다. 김씨는 가정교사를 하던 집 마루 밑 지하실에 숨어 지냈다.

    이때부터는 김지하씨의 역할이 컸다. 김씨는 단식투쟁과 민족문화공연으로 새로운 시위문화를 선보이며 학생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단식투쟁이 열흘 넘게 이어지자 재야 민주인사들의 지지와 격려가 잇따랐다.

    드디어 6월3일. 뒷날 6·3사태로 불리는 대규모 한일회담반대시위가 벌어졌다. 그 전날 김중태씨는 자수를 결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자수 목적은 학생들의 시위가 순수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박 정권은 학생시위가 빨갱이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선전했다. 김씨가 교정에 모습을 드러내자 단식투쟁을 하던 학생들은 크게 고무됐다.

    6월3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엔 1만명이 넘는 학생이 몰려들었다. 평소 시위라고는 거의 하지 않던 서울대 공대 학생들이 경기도 양주캠퍼스에서 상경했고 성균관대 등 다른 대학 학생들도 합류했다.

    “여러분은 끝까지 투쟁하라”

    자수하러 가기 전 김씨는 단상에 올라 20분가량 연설을 했다. 자수 동기와 명분을 설명하고는 “나는 들어가서 당당하게 조사를 받겠으니 여러분은 끝까지 투쟁하라”고 독려했다. 김씨가 연설을 마친 후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갔다. 김씨는 광화문에 있는 치안본부를 찾아가 자수의사를 밝혔다.

    그날 오후 광화문, 서울역 일대에서 수만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가한 4·19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한때 박정희 대통령이 미 8군 영내로 피신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오후 11시,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서울시내에 4개 사단 병력을 투입했다. 모든 집회와 시위가 금지됐고 대학은 휴교 조치됐으며 언론보도는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

    자수한 김씨는 다음날부터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계엄 상태였으므로 기소된 후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육본에서 고등군법회의 심리가 진행되던 중 계엄이 해제됐다. 당시 심경에 대해 김씨는 덤덤하게 말했다.

    “죽는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저 ‘이놈들이 참 웃긴다’고 생각했지요.”

    계엄이 해제된 후 육군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김씨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재판은 민간법정에서 다시 진행됐다. 집시법 위반으로 실형이 선고됐지만, 집행유예로 수감된 지 6개월 만에 풀려났다. 4학년 2학기. 몇 달만 ‘버티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김씨는 이미 제적당한 상태였다.

    1965년 복학한 김씨는 한일협정 국회비준에 반대하는 사회 각계 지도층 인사의 모임인 조국수호협의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9월 1차 민비연 사건이 터졌다. 지인의 집에 숨어 지내던 김씨는 주변의 밀고로 추석날 체포됐다.

    공소 사실에 따르면, 민비연은 인혁당과 관련된 학생운동 지하조직으로 남한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대학가 시위를 주도했다는 것. 인혁당 사건은 6·3 사태 직후인 1964년과 유신정권에 대한 대학가의 저항이 거세던 1974년 두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6·3사태 주역 김중태가 털어놓은 1960년대 학생운동 비화

    1965년 1차 민비연 사건으로 구속된 김중태씨(오른쪽 첫 번째)와 동료 학생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김씨와 절친했던 박재일씨.

    1심에서 검찰은 김씨에게 내란음모 및 선동죄로 징역15년을 구형했으나 재판부는 폭발물사용예비음모죄만 적용해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김씨는 1966년 11월 대법원 무죄판결로 풀려났다. 하지만 다시 제적당한 상태라 학교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1967년 초 그는 정치권에 몸담았다. 윤보선씨가 이끄는 신민당에 백기완씨와 함께 운영위원으로 입당한 것. 입당 이유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갈 데가 없었기 때문’. 당시 신민당 운영위원으로는 김대중·김영삼·장준하씨 등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요주의 인물인 김씨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해 6월 그는 또다시 체포됐다. 2차 민비연 사건의 시작이자 동백림 사건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1966년에 무죄로 판정 난 사건을 다시 유죄로 엮으려니 고문을 안 할 수 없었지요. 서울 시내 안 가본 데가 없어요.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돼 엄청 두들겨 맞고 물고문 당하고, 정보부인지 치안국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남대문에 있는 비밀조사실에도 가보고, 서울운동장과 명보극장 주변 건물로도 끌려가고…. 건물 간판은 전부 무슨 주식회사인데, 안에 들어가면 조사실인거라. 남산에 있는 정보부 대공수사실과 치안본부, 경찰서 유치장도 들락거리고, 마지막으로 간 데가 이문동에 있는 정보부 본부였습니다.”

    김형욱 당시 중정부장은 7월8일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반정부 간첩단 사건이라며 동백림 사건을 발표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화가 이응로, 작곡가 윤이상, 시인 천상병씨를 비롯해 대학교수, 예술인, 의사, 공무원, 대학생 등 194명이 연루된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줬다.

    “간 데가 없으니 온 데도 없다”

    민비연과 동백림 사건의 연결고리는 민비연 지도교수이던 황성모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간첩활동’이었다. 중정에 따르면 황 교수는 독일 유학 시절 동베를린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귀국 후 학생들을 포섭해 북한체제에 동조하는 민비연을 만들었다는 것.

    “검찰과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조사과정에 황 교수가 간첩이라고 자백했다기에 대질을 요구했는데 끝내 들어주지 않더군요. 검찰 공소장도 법원 판결문도 모두 정보부에서 작성했어요. 판사는 로봇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황 교수도 딱한 게, 법정에서 ‘저는 젊었을 때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라고 진술하는 거예요. 학문적 영역의 마르크스주의를 말한 것이지만, 적절치 못한 발언이었지요. 당시 공안검사들은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로 여기고 있었거든요.”

    황 교수는 법정에서 독일 유학 당시 북한 공작원을 만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김중태·현승일·박범진·김도현씨 등 이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은 “민비연은 순수 학술단체”라고 주장했다. 당시 중앙일보(1967년 12월16일자) 기사에 따르면 재판부는 “민비연이 북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구성됐다는 증거가 없다”면서도 “김중태가 민비연 회장이 된 후 황성모와 함께 민비연을 이용해 합법성을 넘은 학생데모를 주도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김씨는 황 교수와 더불어 대전형무소 독방에서 2년간 지냈다. 김씨의 옆방에는 죄수는 없고 늘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바로 일제 때 안창호 선생이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수감됐던 방이었다.

    출감하기 며칠 전 최대현 대검 공안부장과 이종원 부장검사가 찾아와 소장실에서 면회를 했다. 그들은 황 교수와 김씨에게 전향서를 요구했다. 황 교수는 쓰겠다고 했으나 김씨는 그 자리에서 거부했다.

    “‘공산주의에 빠진 적도 없고 공산주의운동을 한 적도 없는데 무슨 전향서냐’고 따지니 제대로 대답을 못하더라고요.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에게 했다는 말을 인용해 ‘나는 일찍이 간 데가 없으니 온 데도 없다’고 말해줬습니다.”

    황 교수는 전향서를 썼지만 김씨는 수감생활에 대한 감상문을 제출했다. 당국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이들에게 전향서를 강요했던 최대현 공안부장과 이종원 부장검사는 뒷날 각각 유정회 의원과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1969년 7월 김씨와 황 교수는 만기출소했다. 오전 5시가 출소시간이었는데, 그보다 한 시간 전쯤 간수가 와서 “기관에서 모시러 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형무소 정문 앞에 까만 지프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중정 대전분실로 향했다. 중정 관계자는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격려하고는 식사를 대접했다. 흰 쌀밥에 달걀과 베이컨이 있는 ‘고급 음식’이었다.

    “형무소에서 밀밥만 먹다가 그런 걸 먹으니 당장 설사가 나오더군요. 밥을 먹인 후에는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기다려라’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얼마 후 다른 직원이 나타나 ‘중앙에서 모시러 왔다’며 차에 태우더군요. 그 길로 중정 남산청사로 갔습니다. 얼마 후 김형욱이 나타났습니다.”

    “한 번만 더 들어오면 사형이야”

    김중태씨가 김형욱 중정부장을 만난 것은 그때가 두 번째였다. 첫 만남은 2차 민비연 사건이 발생한 1967년 7월 중정 조사실에서 이뤄졌다.

    검찰 기소가 임박한 무렵이었다. 어느날 김형욱 부장이 한옥신 치안본부장을 대동하고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이 조사받고 있는 방들을 순시했다. 이응로·윤이상씨가 있는 방을 거쳐 김씨 방에 들른 김 부장은 김씨를 보자 “자네가 그 악명 높은 김중태야?” 하고 소리쳤다. 이어 “김군은 경상도 사람이면서 왜 경상도 출신인 각하를 반대하나” 하고 혼을 내듯 다그쳤다. 이에 김씨는 “김 부장은 이북 사람이면서 왜 김일성을 지지하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왔나” 하고 맞받아쳤다. 김 부장의 안색이 붉어지더니 옆에 있던 집기를 김씨에게 내던지고는 휙 나가버렸다.

    그런 악연이 있었던지라 김형욱 부장을 두 번째 만났을 때 김중태씨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 부장은 “이제 어쩔 거야?” 하고 비아냥거렸다. 황 교수에게는 “우리 말 잘 들어야 복직될 거야” 하고 회유했다. 황 교수는 2차 민비연 사건으로 해직된 상태였다. 김 부장은 김씨를 향해서는 ‘새끼’라는 표현을 쓰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너 이 새끼, 벌써 다섯 번째 들어왔어. 한 번만 더 들어오면 사형이야, 사형! 넌 이제 갈 데도 없어. 신민당에서도 너 빨갱이라고 제명한 거 알지?”

    그러면서 김 부장은 “각하의 특별 배려”라며 미국행을 제안했다.

    “이미 여권을 다 만들어놓았더라고요. ‘미국에 가서 공부나 하라’고 하더군요. 안 나가면 죽을 거래요. 중정이 죽는다면 진짜 죽는 시절이었습니다. 법이라는 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어요. 안 나가면 죽이겠다는데, 솔직히 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빨갱이도 아닌데 빨갱이로 몰려 죽는다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미국으로) 나간 거예요.”

    김씨가 곧바로 김 부장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워낙 엉뚱한 얘기인지라 그 자리에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엄민영 내무부 장관이 김씨와 황 교수, 현승일씨를 돈암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장면 정부 때 참의원을 지낸 엄 장관은 김씨와 현씨의 경북고 선배이기도 했다.

    미 CIA 요원의 면회

    엄 장관은 ‘정경연구’라는 잡지에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는 ‘사상계’였다. ‘정경연구’는 바로 이 ‘사상계’를 견제하기 위해 공화당 지원으로 만든 친(親)정부 성향의 잡지다.

    엄 장관은 현씨에게는 ‘정경연구’ 기자로 일할 것을 제의했다. 현씨는 그 전에 동양통신 기자로 활동하다 민비연 사건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실직한 상태였다. 엄 장관은 또 황 교수에게는 “협조를 잘하면 복직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김씨에게는 김형욱 부장과 마찬가지로 미국행을 권유했다. 그는 “경북고 선배로서 얘기한다”며 “이 어지러운 시대에 자네가 이런 식으로 희생당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각하께서 특별히 배려한 것이니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라”고 설득했다.

    엄 장관의 얘기를 듣고 나서 김씨는 고민 끝에 이 땅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출국하는 날 김형욱 부장은 “박 대통령이 살아 있는 동안엔 돌아올 생각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박 정권은 왜 김씨를 미국으로 내보냈을까.

    “1964년 6·3 사태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였어요. 어느 날 외국 귀빈이 면회 왔다고 소장실에서 부르더라고요. 가보니 미국 사람이더군요. 버나드 레빈이라고, 직함은 미대사관 문화담당 정무관이었는데 실은 CIA 요원이었습니다. 질문하는 걸 보니 내가 진짜 빨갱이인지 확인하러 온 것 같았어요. 1963년에 한미행정협정과 관련해 시위를 벌인 이후 내 이름이 CIA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들었거든요. 그는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1965년엔 안국동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도 했습니다. 민비연 사건으로 수감돼 있을 때도 여러 차례 면회를 왔고요. 그가 정보부나 청와대에 내 얘기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중태는 빨갱이가 아니니 미국으로 보내 공부를 시키면 좋지 않겠냐’고. 내 추측일 뿐 증거는 없는 얘기예요. 그렇지만 박정희나 김형욱이 나한테 인심 쓸 이유가 없잖아요.”

    미국으로 건너간 김씨는 국내 대학 졸업장이 없는 탓에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새로 대학을 다녔다. 박 정권은 미국 가는 비행기 표만 줬지 학비나 생활비는 대주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씨는 돈을 벌기 위해 여러 차례 휴학하고 학교도 몇 차례 옮겼다.

    “그때 미국으로 나가지 않고 국내에 계속 있었다면 아마도 2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죽었을 겁니다. 인혁당 관련자들이 대부분 나와 알고 지내던 대구 사람들이었거든요.”

    2차 인혁당 사건은 1974년 5월 이철·유인태씨 등 유신반대 대학가 시위를 주도한 민청학련 소속 학생들의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 인혁당이 있다며 모두 23명을 구속한 사건이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판결을 확정했는데, 바로 그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박 정권의 야만성을 온 세계에 드러낸 이 사건은 유신치하에서 정보부가 조작한 대표적인 간첩사건으로 꼽힌다.

    1979년 10월 박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김씨는 한창 박사논문을 쓰고 있었다. 논문을 완성하느라 귀국이 조금 늦어졌다. 이듬해 초 그는 논문 구두심사를 남겨둔 채 귀국했다. 일단 귀국했다가 미국에 다시 건너가 심사를 받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박사학위를 따지 못했다. 21년 만에 귀국한 그를 기다린 것은 민주주의의 꽃다발이 아니라 신군부 세력의 군홧발이었다. 신군부는 그를 정치정화법으로 묶어 해외여행을 금지하고 주거지를 제한했다. 그렇게 1983년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자랑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다”

    그는 1988년에 민주당, 1992년에 국민당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했으나 두 번 다 낙마했다. 이후 정치와는 담을 쌓고 고대사 연구와 저술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대표작은 1997년 출간한 ‘원효결서(元曉訣書)’.

    그는 “학생운동의 순수성은 좌에도 우에도 치우치지 않고 권력에 아첨하지 않는 것”이라며 학생운동 정신의 변질을 비판했다.

    “4·19나 6·3 때 운동한 사람들 중에 뒷날 권력에 명예를 판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나도 미국에 있을 때 정권으로부터 유정회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았어요.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거절했습니다. 박정희가 죽고 나서 귀국하니 김종필 쪽에서 여러 차례 부르더군요. ‘정치를 안 하면 안 했지, 김종필과는 안 한다’고 딱 잘라 거절했어요. 학생운동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돼야 합니다. 지조 없이 행동하면서 권력의 줄을 잡으면 결국 출세하기 위해 학생운동을 한 게 되지 않겠어요?

    386운동권도 마찬가지예요. 요즘 행태를 보면 국회의원 하기 위해 운동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될 만하지요. 또 자기들만 도덕성을 갖춘 애국자인 양 행동하는데, 학생운동을 한 사람은 무엇보다 겸허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정부는 과거사 진상규명작업을 통해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김씨처럼 1960년대에 민주주의의 싹을 움트게 한 학생운동 선구자들은 그 대상에서 빠져 있다. 고난으로 얼룩진 젊은 날의 자신에 대해 그는 지금 어떤 평가를 내릴까.

    “학생운동 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후회할 것도 없어요. 나는 나름대로 비굴하지 않게 살아왔으니까요. 역사는 행동하는 자의 무대이지 뒤편에서 쑥덕거리는 자의 무대가 아닙니다. 그걸로 충분해요. 다만 노무현 대통령에게 역사를 정리하려면 계통을 밟아 제대로 하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민청학련이나 386이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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