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인격 살인, 성폭력의 그늘

‘짐승’에게 강간당하고, 사회에게‘왕따’당하고…

  • 글: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입력2005-07-11 1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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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폭력 피해의 기억은 영혼에 새겨진 문신이다. 살을 태우고 뼛속 깊이 사무쳐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악마 같은 느낌, 감추고 싶은 ‘주홍글씨’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큰 ‘처벌’을 받는 아이러니한 범죄가 바로 성폭력이다. 그 수법은 나날이 흉포화, 지능화, 엽기화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법과 제도는 여전히 제자리를 맴돈다.
    인격 살인, 성폭력의 그늘
    지난2년 사이에 잇달아 터진 밀양·익산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단지(斷指)사건, 성직자 유아 성추행 사건은 지금껏 우리 사회를 경악과 충격에 빠뜨리고 여론을 들끓게 하고 있다.

    ‘가해자 44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운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수사 초기부터 여태까지 ‘뜨거운 감자’다. 최근 부산지법 가정지원은 검찰을 거쳐 소년부로 넘어온 가해자 20명 가운데 5명에 대해서만 소년원 송치 결정을 내렸다. 이미 검찰의 솜방망이 처벌로 항의 촛불 집회를 촉발한 데 이어 또 한 차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일명 ‘단지사건’은 징역 7년의 중죄가 선고된 가해자가 보석으로 석방되자 이에 분노한 피해자 어머니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재판부 앞으로 보낸 사건이다. 이 일로 기소된 어머니는 1, 2심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부산에서 발생한 신부(神父)의 유아 성추행 사건은 검찰에 의해 무혐의 처분 결정이 나면서 또 한 번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성폭력 관련 단체 주도로 꾸려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새 교황 베네딕트 16세에게 사건 해결을 위한 탄원서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폭력범죄로 끓어오른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현재 국회 법사위원회에 계류 중인 성폭력특별법 개정안은 무려 7건에 달한다.



    검찰·경찰 통계에 잡히는 성폭력범죄는 한 해 평균 1만여 건, 하루 39명꼴이다. 그러나 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피해 사실을 숨긴 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범죄의 특성을 감안할 때 실제 통계에 잡히는 수치는 많아야 전체 건수의 6% 안팎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된다.

    우울증, 수치심, 극심한 불안과 공포

    인터넷 사이트 성폭행 관련 상담 게시판에는 끔찍한 공포의 순간을 떠올리며 분노하거나 속으로 고통을 삭이고 사는 피해자의 글이 적지 않다. 2년 전 하숙방에 침입한 강도에게 강간당한 여대생은 이렇게 호소했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리고, 밤길을 걸을 때면 늘 누가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인공포증뿐만 아니라 누군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는 강박증 때문에 살기가 너무 힘들다. 평생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강간당한 사실을 누군가 알아내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면 어쩌나, 범인이 다시 나를 찾아오면 어쩌나 싶어 너무 무섭고 괴롭다.”

    성폭력범죄 피해자가 겪는 심리적·정신적 고통은 다른 범죄 피해자에 비해 더 심각하다. 불안강박증, 무력감 또는 우울증, 수치심과 죄책감, 가해자에 대한 분노·적개·복수심, 자살충동, 남성혐오증, 대인기피증을 보이는가 하면 피해를 계기로 오히려 성 중독증에 빠져들기도 한다.

    한편 유아와 아동은 성에 대한 호기심 증가 같은 발달상 부적절한 성적 행동을 보이거나 낯선 사람에 대한 지나친 공포, 짜증과 까다로움을 나타낸다. 또 자주 씻거나 부모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순천향대 부천병원 김태희 교수(산부인과)는 “유아는 성폭행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의 세심한 관심과 주의가 필요하다. 아이가 낯선 사람을 무서워하고 유치원에 안 가려고 하는 등 평소와 다르게 행동한다면 성폭행 피해가 있는지 의심하고 몸에 찰과상이 없는지, 성기 주위에 상처가 없는지, 팬티에 냉이 묻어나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충고했다.

    피해자를 가해자 만든 ‘악몽’

    성폭력범죄 가운데 친족 내 강간 또는 강제추행의 경우 피해자의 고통은 더 심각해진다. 집안에 문제가 생길 것을 두려워해 피해 사실을 숨기는 동안 지속적으로 피해를 당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당한 데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상처를 더욱 깊게 한다.

    마흔 살의 한 주부는 “여덟 살 때부터 6년 간 오빠와 오빠친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참다못해 어느 날 엄마에게 얘기를 꺼냈는데 ‘절대 그럴 리 없다’며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날 괴롭힌 오빠보다 엄마가 더 미워서 어쩔 줄 몰랐다. 이제 결혼해서 아이들도 있고, 이미 20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 일이 떠오르면 지금도 분노가 끓어 미칠 것 같다”며 고통스러워했다.

    인격 살인, 성폭력의 그늘

    1992년 11월 13년 간 성폭행해 온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김보은, 김진관씨의 정당방위와 무죄석방을 촉구하는 전대협 기자회견.

    어릴 때 친아버지에게 강간당한 30대 여성은 “남자 사귀는 것도 무서워 결혼은 생각조차 않고 있다.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공포, 분노가 늘 나를 지배하고 좌절시킨다”고 했다.

    가해자를 목 졸라 죽이는 꿈을 반복해서 꾸는 피해자도 있다. 성폭행 가해자를 죽이는 일은 현실에서도 벌어진다. 지난 3월, 딸을 성추행하고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성폭행한 남편을 목 졸라 숨지게 한 주부가 구속됐다.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김부남·김보은 사건이 있다. 법정에서 “나는 인간이 아닌 짐승을 죽였다”고 울부짖은 김부남씨는 어릴 때 자신을 강간한 동네 아저씨를 21년 만에 찾아내 칼로 살해했다. 13년간 계부에게 성폭행당한 김보은씨는 그 사실을 남자친구에게 털어놓았고, 이에 격분한 애인이 김씨의 계부를 찾아가 살해했다. 법정에서 피의자는 “괴로움으로 몸을 떠는 보은이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고 눈물을 떨궜다.

    두 사건이 남긴 충격 여파로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지만 성폭력범죄는 갈수록 늘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할 위험성은 여전히 잠재해 있다.

    성폭력범죄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가 ‘1차 피해’라면 수사·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한다. 밀양 사건 이후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 피해자 진술녹화제가 의무화되고 최초로 전자법정이 열리기도 했지만 성폭력범죄 피해자와 가족은 여전히 불만스럽다.

    성폭력 수사·재판 시민감시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의 고소 이후 가해자 가족에 의해 주로 나타난 2차 피해 유형은 성폭행 피해사실 유포 위협, 신체적 위협, 합의 및 고소취하 요구 등이다.

    합의 강요하는 일부 판·검사

    구체적 사례를 보면 가해자가 지속적으로 직장에 전화를 해 괴롭히거나 사진을 찍어 얼굴을 공개하겠다고 위협한 경우가 적지 않고, 상당수 피해자는 결국 협박에 못 이겨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가해자나 그 가족이 피해자를 찾아와 욕설을 퍼붓고 폭행하거나 심지어 납치하는 등 신체적으로 위협하기도 했고, 피해자와 결혼하겠다며 고소취하를 요구한 가해자도 있다. 또한 피해자가 가해자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합의금을 받고 고소를 취하하자, 거꾸로 ‘피해자가 돈을 요구한 꽃뱀이었다’고 소문을 내며 합의금을 돌려달라, 변호사 비용으로 쓴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한 황당한 경우도 있다. 다음은 강지원 변호사의 말.

    “가해자들이야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합의를 종용한다고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일부 판·검사들이 아무 생각 없이 ‘돈이라도 좀 받는 게 낫지 않나. 지금이라도 합의해주라’는 식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돈도 필요하지만 민사소송에서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가해자를 처벌해달라고 법에 호소한 피해자에게 ‘돈을 받는 게 실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돈은 민사소송을 통해서도 받아낼 수 있다. 왜 판·검사가 재판 중에 합의를 종용한단 말인가. 피해자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은 문책해 마땅하다.”

    성폭행당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주위의 시선과 편견을 견디다 못해 다른 곳으로 이사하거나 학교, 직장을 옮기는 경우도 있다. 익산 사건의 여중생은 피해 사실이 알려진 후 전학하려 했으나 몇 군데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아 애를 먹었다. 현재 학교측의 사건 은폐 여부를 가리는 수사가 진행 중이다. 학교측이 은폐 사실을 부인한 데 대해 피해 여중생은 “선생님이 나를 배신했다. 뻔히 다 알고서 전학 보내놓고 거짓말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건을 맡은 강지원 변호사는 “성폭력을 포함한 학교폭력에 대해 대다수 학교가 쉬쉬하는 게 우리 교육계 풍토다. 이렇듯 아이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어른들이 본분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큰 상처를 입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04년 성폭력 상담 사례 2362건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성폭력범죄에 대한 피해자의 고소건수는 18.6%에 머물렀다. 대검찰청 통계에서도 25%에 그쳤다.

    이처럼 피해자가 범죄발생 신고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보복 우려’ 때문이다.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 ‘범인이 친족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그 다음이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받는 2차 피해도 신고와 고소를 꺼리게 하는 요인이다.

    한편 최근 수사·재판 과정에서 엇갈린 판결이 속출하면서 피해자와 가족들의 불만은 더 높아졌다.

    얼마 전 A(여·22)씨는 2001년 말 “빌려준 책을 돌려주겠다”며 집으로 자신을 유인한 이모(남·25)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고소했으나 이듬해 인천지검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이어 서울고검에서도 항소가 기각됐다. 대검에서 재항고가 기각되면서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을 냈지만 이마저 기각되자 민사소송을 제기, 3년간의 긴 싸움 끝에 손해배상 지급 판결을 받았다. 검찰이 무혐의로 풀어준 가해자에게 사법부가 벌금형을 내린 셈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A씨와 이성관계로 사귀면서 성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나 A씨의 성폭력 상담기록 등에 부합하지 않고, 피고가 원고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이 제한적이어서 합의에 따른 성관계로 보이지 않는다. 피고의 범행으로 원고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했을 뿐 아니라 이후 수사과정에서 받은 고통으로 일시 기억상실 등의 피해를 본 만큼 금전으로나마 위로할 의무가 있다”며 피해자에게 3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수사과정에서 동일한 거짓말탐지기 검사결과를 두고 경찰과 검찰의 판단이 엇갈린 이해하기 힘든 일도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4월 A(여·27)씨가 B씨 집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하면서다. 경찰은 두 사람의 진술이 계속 엇갈리자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한 후 “A씨가 진실을 말했을 가능성이 98.2%, B씨가 거짓말로 혐의를 부인했을 가능성이 97%”라고 결론짓고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검찰은 “거짓말탐지기 검사실에 조회한 결과 B씨의 반응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지만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심리상태에서 나온 신체반응일 수 있다”며 B씨를 무혐의 처분했다. 그 직후 A씨는 가해자의 거짓말탐지기 수사기록 공개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냈다.

    재판부 따라 유·무죄 왔다갔다

    힘겹게 기소처분을 받아 가해자를 법정에 세울 기회를 얻었다 해도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린다. 재판과정에서 판결이 뒤집히는 경우가 있고, 비슷한 사건을 놓고 재판부에 따라 판결이 엇갈리기도 한다. 피해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난 1월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는 정신지체 2급 장애인 여성 A(사건 당시 22세)씨를 성폭행한 혐의(강간 등 상해)로 기소된 B(25)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대로 징역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강간죄에서 폭행이나 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하지만, 폭행 및 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이고 폭행 경위와 피해자와의 관계, 피해자의 연령이나 지능 등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 정신지체 2급 장애인인 피해자로 하여금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므로 강간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장애인임을 감안해 가해자의 폭행이나 협박 정도가 약하더라도 형법상 강간죄로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피해자가 정신장애는 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등 평소 자신의 신체를 조절할 능력도 충분히 있다는 점 등에서 성적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해석해보면 성폭력특별법을 적용할 경우 오히려 무죄 판결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성폭력특별법상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라면 강간죄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사 사건에서 재판부가 형법이 아닌 성폭력특별법을 적용해 무죄 판결이 난 사례가 있다. 지난해 9월 부산고등법원은 한동네에 사는 미성년 장애인 A(17)양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B(남·69)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마을 어른’인 B씨가 겁을 줘서 옷을 벗게 한 후 성폭행한 점은 인정되지만 절대적으로 항거가 불능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것. 이 경우에도 가해자의 상당한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앞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형법을 적용했더라면 유죄 판결이 가능했으리라는 게 법조계 일각의 시각이다.

    현행 성폭력특별법 제8조(장애인에 대한 간음 등)는 신체적·정신적 장애인을 특별히 보호하고 이들을 상대로 성폭력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를 더욱 엄중하게 처벌하기 위해 1997년 개정됐다. 이 가운데 ‘항거불능 상태’라는 모호한 법조문이 문제다. 앞의 사례는 바로 이 법조문이 거꾸로 장애인 피해자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침묵 속 절규’, 동성강간

    미국, 호주를 비롯한 선진국은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상대의 ‘적극적 동의’ 없이 이루어진 모든 성적 행위를 강간으로 간주한다. ‘동의’는 온전한 판단력을 가진 상태에서 이뤄진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필사적 저항’이 없었을 경우 화간(和姦)을 의심받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권주희 상담부장은 “저항 과정에서 아이의 손목에 멍이 들었고, 가해자가 성폭행 당시 손목을 눌렀다고 했음에도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처분을 받은 사례가 있다”고 소개했다. 성폭행을 당한 뒤 도망치다 끌려가는 상황에서 심한 구타와 폭행을 당했지만 무죄 판결이 내려진 사례도 있다.

    권 부장의 설명이다.

    “피해자가 끌려가는 과정에서 도와달라고 소리쳤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데 재판부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진술을 믿지 않았다. 반면 증인으로 나온 목격자가 ‘두 사람이 신호등에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 점, 가해자가 피해자를 끌고 다니는 과정에서 여자친구라고 소개한 점 등을 들어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기각됐다. 심한 구타와 폭행이 수반된 성폭행에서 피해자의 신체적·정신적 무기력 상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해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내보낸 ‘침묵 속의 절규-동성강간을 말한다’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나온다. 방송은 6개월 동안 30대 중반의 남성에게 감금당한 채 지속적인 유사 성행위와 구타를 당해오다 극적으로 탈출한 21세 남성의 피해사례를 다뤘다.

    극심한 구타와 폭행, 협박에 시달리고 알몸 촬영까지 당한 피해자는 “사람들이 ‘남자가 어떻게 그렇게 당할 수 있냐’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게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방송에서 “사람이 아니라 악마 같았다. 처음엔 반항도 했지만 도저히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 자포자기 심정이 됐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호소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신승철 박사에 따르면 여성은 위험에 처했을 때 본능적으로 세 가지 방어자세를 취하게 된다. 항거, 자포자기, 타협이 그것. 이 가운데 항거는 적극적 방어기제로 소리를 지르는 언어적 항거와 신체적 항거가 있다. 그러나 여성은 두려움과 공포로 극도로 위축된 상황에서 자신보다 힘이 센 남자에게 항거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 무기력 상태의 자포자기와 타협은 위협에서 오는 극도의 공포를 완화시킴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수동적 방어기제다.

    신 박사는 “남성도 자신의 힘을 압도하는 상대가 흉기를 휘두르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면 겁을 먹고 대응을 못할 수 있다”고 했다.



    판사가 ‘믿느냐’ ‘안 믿느냐’가 결론

    한편 같은 사건에서 피해자 두 명에 대한 판결이 각각 유·무죄로 나온 사례가 있다. 서울 마포의 어린이집 운전기사 김모(남·60)씨가 3·4세 여아를 성추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 1심에서 김씨의 강제추행치상 혐의는 4세 여아에 대해서만 인정됐고, 3세 여아에 대해서는 부인됐다. 두 아이가 같은 날 거의 같은 내용의 피해 진술녹음을 했고, 동일범에 의한 피해자라는 점에서 언뜻 수긍이 가지 않는 판결이다. 하지만 3세 여아에 대한 김씨의 혐의는 부모의 재심청구로 2심에 이은 대법원 상고심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100여 건의 성폭력범죄 피해자 상담·소송 경력이 있는 강명훈 변호사(법무법인 신화)는 “진술녹화 테이프나 CD가 그 자체로 증거능력이 있는 게 아니다. 증거능력이 있더라도 이를 무죄 증거로 채택하냐 안 하냐는 재판부의 판단에 달렸다. 실제로 피해 아동의 녹화된 진술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결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때로는 피해 아동의 진술녹화 테이프를 놓고 수사기관이나 재판부마다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는 일도 벌어진다. 아동의 진술이 일관된 경우 ‘학습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의심해 유죄 증거로 채택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일관되지 못한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고 외면당하기도 한다. 진술이 일관돼도 문제고 아니어도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혼란과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다.

    신승철 박사는 “목격자가 거의 없는 곳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성폭행범죄의 경우 신체적 피해에만 초점을 맞추는 판결은 문제가 있다. 외국에서는 정신과적 진단서가 유죄 증거로 중요하게 활용되는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마 수사관이나 판사가 여성의 심리나 특성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폭력상담소 권주희 부장은 “우리 상담소가 지원하는 사건의 경우 재판 일정이 나오면 일단 재판부부터 확인한다. 판사의 성향에 따라 유·무죄가 뒤바뀌기 때문”이라고 했다. 앞에서 언급한 ‘단지사건’과 관련해 권 부장은 “1심에서 가해자에게 징역 7년이 선고됐는데 2심에서는 무죄가 됐다. ‘일곱 살 때 강간을 당해서 성기 삽입이 됐다면 어른과 달리 장까지 파열됐을 텐데 어떻게 학교엘 갔냐’ ‘아이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고 일상생활을 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것이 무죄 추정의 근거였다. 이처럼 수사·재판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선입견이 끼여들어 무혐의나 무죄 판결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가령 성폭력을 당한 후 가해자를 만났거나 피해자가 일상생활을 했다고 무죄로 추정하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는 매일 밥도 못 먹고 학교도 못 가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고정관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단지 사건은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다.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치유과정은 가해자가 법에 따라 응분의 처벌을 받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이 전문가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의 설명이다.

    “자신의 의사에 반해 일어나는 성적 피해가 성폭력인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폭행과 협박 사실을 피해자가 증명해야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예를 들면 강간의 경우 ‘처녀막 상실 진단서를 떼 와라’ ‘전치 몇 주의 상처인가’ 하는 식이다. 법과 제도는 웬만큼 갖춰졌지만 이를 운용하는 사람들의 인식은 제자리걸음이다.”

    순천향대 부천병원 김태희 교수는 병원을 찾은 성폭행 피해자 45명의 ‘응급성폭행키트’를 토대로 피해 조사결과를 분석했다. 그 가운데 강간의 뚜렷한 증거가 될 수 있는 정액 등 분비물이 발견된 경우가 60%였다. 그에 비해 특정 부위의 신체 손상은 20% 미만에서만 발견됐다. 김 교수는 “사람마다 얼굴 생김새가 다 다르듯 처녀막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손상시기를 판단하기에 애매한 경우가 있다. 또 정액이 결정적 증거물이 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정을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45명의 피해 환자에서 정액이 검출된 경우는 13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피해 발생 48시간이 지나면 증거확보가 어렵다”고 밝혔다.

    국회 법사위원회에 계류 중인 성폭력특별법 개정안 중 일부는 현재 13세 미만 아동으로 제한하고 있는 녹화진술제를 ‘심신의 장애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때의 피해자’로 확대하는 안을 담고 있다. 또 수사과정이나 재판과정에서 가해자와 대질신문이 필요하면 비디오 중계 등을 통해 진술할 수 있도록 의무화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에 대해 대한변호사협회는 최근 반대 의견을 제출했다. “피해자 인권 보호 차원에서 가해자와 대면하지 않고 비디오 중계를 통해 신문할 필요가 있다 해도, 피고인이 직접 대면을 통해 무죄를 주장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할 수 있기 때문에 출석신문과 병행돼야 한다”는 것. 논란이 예상되는 부분이다.

    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지금과 같은 가해자 중심의 수사·재판이 계속 된다면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며 “피해자의 인격과 권리 보호가 한층 더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등학교 1학년 여아를 성추행한 뒤 범행을 숨기기 위해 10여m 높이의 고가도로 아래로 던져 중상을 입힌 사건, 유치원생 여아를 강간한 뒤 토막 살해해 사체 일부를 여관 변기에 버린 사건 등 성폭행범죄는 갈수록 흉포화하고 있다. 가해자 연령층이 점점 낮아지는 것도 최근 추세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04년 상담현황을 보면 7세 이하 가해자가 30명에 달했다. 또한 8~13세 아동 52명, 14~19세 청소년이 183명으로 나타났다.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이 저학년 여아를 집단 강간한 사례도 있어 현실성 있는 조기 성교육이 절실하다. 이와 더불어 성폭력범죄 예방 차원의 대책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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