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잭 웨더포드 지음/권루시안 옮김/ 이론과실천/528쪽/1만8000원
‘인간 대 환경’이라는 노골적인 대립 구도를 설정한다면 문제는 간단해지지만, 그런 식으로 해결될 게 아니다. 인간도 환경에 속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문제는 복잡해진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자 환경을 만들어가는 행위자다. 환경이 만들고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그 환경을 파괴한다는 게 가능할까.
혹시 ‘환경 문제’라고 하면 지레 하품부터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양해를 구한다. 사실 이 책은 환경과 무관할뿐더러 지루함과도 거리가 멀다. 적어도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보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본전을 뽑고도 남는다. 500쪽 분량에 무려 20편의 다큐멘터리가 들어 있으니까. 비록 시각적인 면에서는 카메라 영상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인디애나 존스’처럼 종횡무진이면서도 그보다 훨씬 인류학자의 풍모가 역력한 저자 잭 웨더포드의 고감도 카메라는 아프리카, 중남미, 오스트레일리아 등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곳의 역사와 문물을 소재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그럼에도 엉뚱하게 환경 문제에 관한 쟁점이 떠오른 이유는 이 책의 기본적인 논리 구조가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외견상 대립적이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야만과 문명의 긴장 관계를 테마로 삼고, 지구촌 여러 현장을 스케치하면서 야만과 문명이 구분할 수 없이 뒤섞이는 실태를 알려준다.
글로벌화한 문명, 로컬화한 야만
어원(라틴어 civitas)이 같은 도시(city)와 문명(civilization)은 역사적으로 항상 제국주의와 행보를 같이했다. 제국주의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반드시 요구되듯, 도시라는 공간은 애초부터 시장을 중심으로 탄생하고 발달한 만큼 생존을 위해서 주변에 방대한 농촌을 거느리고 수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문명이 야만(savage, ‘숲’을 뜻하는 라틴어 ‘silva’에서 나왔다)을 굴종시키며 발전했다는 논리와 상통한다. 놀랍게도 저자는 인류 최초의 신화인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그런 사례를 끄집어낸다. 숲의 야만인인 엔키두가 도시(문명 세계)의 지배자인 길가메시에게 복종하고 회유당해 도시의 상징인 창녀와 빵과 술을 알게 되는 것에서 이미 문명과 야만의 관계를 읽어냈다.
문제는 그런 식의 ‘발전’이 야만은 물론이고 문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명이 야만에 가한 상처는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도시를 오히려 야만의 소굴로 만든다. ‘야만은 위험, 문명은 안전’이라는 철석 같은 믿음이 깨어지기 시작한다.
“멕시코시티의 쓰레기장은 너무나 규모가 커져, 어떤 곳에서는 20층짜리 건물 높이에 해당하는 60m 깊이까지 쓰레기가 쌓이기도 한다. 인간은 먹을거리를 놓고 개와 독수리와 경쟁한다. 나는 오랫동안 가난한 나라들을 여행한 끝에 쓰레기장에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면 그 도시가 얼마나 잘사는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중략)… 미래의 고고학자들은 20세기를 쓰레기의 시대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사실 20세기 도시만 쓰레기장인 것은 아니다. 폼페이와 트로이처럼 지진으로 파묻힌 고대 도시를 발굴할 때 고고학자들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고대인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쓰레기장이다. 그러나 고대 도시와 현대 도시는 큰 차이가 있다. 고대 세계에서는 도시가 각 지역의 특색을 띤 ‘로컬’이었고 야만은 어디서나 큰 차이가 없는 ‘글로벌’이었던 데 견주어, 현대 세계에서는 그 관계가 역전돼 도시가 글로벌화하고 야만이 로컬화한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도시는 야만을 착취하면서 쓰레기장으로 변모하고 아울러 미디어의 전일적인 영향력에 힘입어 점점 닮아간다. 반면 세계의 전부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에는 보편적이고 비슷하던 야만은 이제 도시 문명에 둘러싸인 섬처럼 초라한 로컬로 전락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 명맥조차 언제까지 존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저자가 중남미나 아프리카의 도시들에 주목하는 것은 단지 제3세계에 대한 애정 때문만이 아니다. 그 도시들은 다른 문명과 다른 도시의 앞길을 비춰주는 전조다. 유럽의 도시들이 아직 분명한 몰락의 징후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자원을 찾아낸 덕분이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로 발을 뻗치면서 유럽의 거대 인구를 먹여 살릴 새로운 숲, 새로운 광물, 새로운 땅을 손에 넣을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제국주의는 운명의 순간을 늦출 수는 있을지언정 바꾸지는 못한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도시들이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나면 결국 달력을 장식하는 유럽의 그 예쁜 도시들도 같은 운명을 걷고 말 것이다.
부족 문화 짓밟는 문명
하지만 이런 섬뜩한 이야기를 전하는 저자의 말투는 고발이나 폭로의 분위기와 거리가 멀다. 문명과 도시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성토하려는 노골적인 의도도 없다. 현학을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박학하고, 분석적이지 않으면서도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내는 저자의 차분함은 문명이 처한 위기의 해법을 제시하는 대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의 해법 자체가 요란스럽지 않고 무척 차분하다. 문명과 야만, 글로벌과 로컬은 서로 대립하기보다 필요성을 인정하고 각각 제 몫을 다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트럭 운전사는 혼자 출발하는 법이 없다. 자신의 트럭 가득 사람들이 올라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서늘한 해질녘이 되면 길을 떠난다. 차비를 받아 용돈을 챙기려고? 운전사가 자비로운 사람이라서? 아니다. 운전사에게는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얻어 타는 사람은 교통수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트럭 운전사는 그들을 더 필요로 한다. 이들이 트럭을 밀어주어야 모래언덕과 구덩이를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없으면 운전사는 절대로 사막을 건너가지 못한다.”
여기서 트럭을 문명으로, 사막을 야만으로 보면 알기 쉽다. 문명이 야만을 올바로 상대하려면 트럭이라는 기계의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트럭은 강하지만 그 강함만으로는 사막의 부드러운 모래언덕을 넘을 수 없다. 문명이 앞길을 헤쳐 나가려면 문명 자체의 동력 외에 트럭에 올라타는 사람들로 상징되는 부족 문화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상대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이 바로 문명과 야만의 올바른 역할 분담이다. 그런데 현재 문명의 위기는 바로 문명을 생존하게 해주는 부족 문화를 문명이 짓밟는다는 데 있다.
문명을 무기가 아닌 도구로!
글로벌화와 로컬화의 대세는 잘잘못을 따진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문명은 갈수록 글로벌화하고 야만은 갈수록 로컬화한다. 이 흐름이 언젠가 멈추고 양자가 바람직스러운 균형을 이룬다면 문명은 존속할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문명은 야만을 파멸시키는 동시에 그 자체도 파멸될 것이다.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하라.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켜라.”
2500년 전의 노자(老子)와 50년 전의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딜레마를 보여준다는 점에 공통분모가 있다. 그러나 노자는 도(道)를 말할 수 없다 하면서도 말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침묵을 지키라면서도 말했다. 야만과 문명의 관계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환경의 일부이면서도 환경을 제어할 수 있는 특이한 존재다. 문명에도 이런 관계를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문명은 야만을 사납게 다스리고 윽박지르면서 발전해왔지만, 지금이라도 사하라 사막을 오가는 트럭 운전사의 지혜를 깨우친다면 야만이 문명의 생존에 필수적임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우리의 손에 문명이라는 무기가 쥐어졌다면 그걸 팽개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기보다 그 무기를 도구로 바꿔 문명에 주어진 본래의 자정 능력을 소생시키는 게 올바른 길이 아닐까. 더 늦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