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이수탁 살부(殺父) 공판

희극과 비극이 뒤엉킨 백만장자 외아들의 패륜 드라마

  • 글: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5-07-15 15: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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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탁 살부(殺父) 공판

    ▶1935년 6월20일 이수탁의 무죄확정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호외.▲이수탁이 8년1개월 만에 살부 혐의를 벗고 무죄 석방된 후 ‘삼천리’ 1935년 8월호에 쓴 옥중기.

    인간의내면에는 파괴본능이 있다. 무언가를 가꾸고 건설하고 창조하기보다, 때리고 부수고 깨뜨려버리는 것이 본능에 좀더 가깝다. 이러한 파괴본능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 도덕이고 윤리고 법이다. 그러나 본능을 억누르는 이러한 금기들은 억압적이고 거추장스러워서, 인간은 항상 대리만족을 얻을 방법을 찾아 어슬렁거린다. 폭력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는 팥소 없는 찐빵처럼 밋밋하다. 지금도 스크린 속에서는 무수한 건물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진다. 비행기는 푸른 하늘을 유유히 날아가다가 난데없이 폭발한다.

    파괴본능의 총아는 뭐니뭐니 해도 살인이다. 아무리 성인군자 같은 사람이라도 살아가면서 한번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피할 수 없으리라. 우리가 아직 선량한 시민으로 남아 있는 것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죽일 만한 용기가 없었거나, 살의(殺意)를 추스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성욕, 식욕, 수면욕 같은 욕망은 적당히 절제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살인욕은 절제 정도로는 부족하다. 철저히 금지돼야 한다. 간절히 죽이고 싶은 경우에 한해 부분적으로 살인을 허용해도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살인의 금기는 전 인류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보편문화의 하나다. 그러나 아무리 강하게 금지한다 해도 패륜적 살인사건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옛날 사람들이 얼마만큼 윤리적이었는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 시대의 살인사건을 찾아보라. 유영철의 엽기적 살인행각이 우리 시대의 윤리수준을 보여주듯, 옛날 사람들의 윤리수준은 그 시대의 살인사건에 여실히 드러난다. 살인이라고 다 똑같은 살인이 아니다. 살인에도 품격이 있고, 그 품격이 곧 윤리적 수준이다.

    아비를 죽인 이수탁



    이수탁의 살부(殺父) 사건. ‘익산 백만장자 이건호 독살 사건’이라고도 하는 이 사건은, 비록 70년 세월의 무게에 잊혔지만 1920~30년대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도적놈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돈 때문이요 이수탁(李洙倬)이가 살부공판(殺父公判)을 받는 것도 돈 때문이다. 돈 돈 황금! 얼마나 좋은 것이냐 얼마나 위력이 있는 괴물이냐. (‘제일선’ 1933년 2월호에 발표된 채만식의 ‘황금무용론’ 중에서)

    아들이 백만장자 아버지를 죽였다니, 시작부터 어쩐지 ‘돈 냄새’가 솔솔 풍긴다. 우선 이 사건의 개요를 알아보자.

    전라북도 익산의 백만장자 이건호를 그의 아내 박소식과 아들 이수탁, 그리고 며느리 김영자가 공모하여 아편을 먹여 독살했다. (‘익산 백만장자 독살사건 1’, ‘동아일보’ 1929년 12월17일자)

    이건호라는 사람은 고약한 아들뿐 아니라 몹쓸 아내와 며느리까지 둔 지독히 불운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런데 아무리 돈이 좋다손 쳐도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뭉쳐 가장에게 아편을 먹였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아편을 먹고도 사람이 죽을까.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익산의 부호 고(故) 이건호의 유산 백만원에 가까운 황금을 중심으로 그의 첩 박소식과 그의 아들 이수탁, 이수탁의 첩 김영자가 공모하여 전기 이건호를 독살하였다는 전기 세 명에 대한 살인사건은 누보(屢報)한 바와 같이, 재작년(1927년) 5월 직접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손을 거쳐 동(同) 법원 오정(五井) 예심판사의 담임으로 무려 2년반 동안이나 죽은 지 3년이 넘은 시체를 발굴하여 해부하고, 해부한 그의 고깃덩어리를 이곳저곳으로 감정을 시키는 한편, 사건의 피고는 물론 사건에 직접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50명에 가까운 증인을 소환하여 심문하였으나 오히려 범죄를 구성할 만한 증거는 미약하여 사건 담임 오정(五井) 예심판사는 사건의 좀더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해 오는 11일 약 5일간 예정으로 동(同) 예심 복전(福田) 서기, 신(申) 통역(일본어 통역관-인용자)을 대동하고 사건 담임검사와 한 가지로 논산, 강경, 익산 방면에 출장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독살이냐? 그렇지 아니하면 병사냐? 하는 경계선에서 배회하고 있는 동 사건은 소설로도 진기한 소설의 모델이 될 만한 것이라더라. (‘이수탁 사건 현장 임검(臨檢)키로’, ‘동아일보’ 1929년 12월4일자)

    과연 범상치 않은 사건이다. 남편을 죽인 박소식은 본처가 아니라 첩이고 아비를 죽인 이수탁은 적자가 아니라 서자다. 며느리도 아들의 본처가 아니라 첩이다. 도대체 어찌 된 집안이기에 아비도 축첩(蓄妾)이고 아들도 축첩이란 말인가. 더욱 가관인 것은 이건호가 죽은 지 3년이 지나서야 세 명의 ‘시부시부범(弑父弑夫犯)’이 체포됐고, 독살을 증명하기 위해 땅에 묻힌 지 3년이 지난 시체를 파내 해부하고, 해부한 ‘고깃덩이’를 여기저기로 보내 감정했다는 것이다.

    이수탁 살부(殺父) 공판

    ‘동아일보’ 1929년 12월20일자에 실린 박소식의 40대 때 모습. 20여 년 전의 꽃다운 자태는 세월의 무게에 사라져 버렸다.

    이건호가 죽은 지 2년이 지나도록 뭐하고 있다가 그제서야 소동이 벌어졌을까.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됐다는 50여 명의 증인은 또 누구란 말인가. 이건호가 죽은 지 5년, 이수탁 일당이 시부시부의 혐의를 받고 체포된 지 2년 반이나 지났는데, 예심판사는 더 뭘 찾겠다고 현장검증에 나섰을까. 살인자가 셋이나 있는데 어째서 죽은 사람의 사인(死因)은 분명치 않은가. 무엇보다 ‘소설로도 진기한 소설의 모델’이 될 만한 이 사건에서 왠지 음모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숱한 의문을 풀기 위해 이제부터 “천치 백치에 가까운 피고 이수탁이가 황금의 왕자 ‘못난이’가 되어 이를 중심으로 자작(子爵)과 대관(大官), 변호사와 의사, 경찰서장과 협잡배, 미인과 기생, 악한과 음모자… 이 모든 100여 명의 ‘잡배’가 서로 익숙지 못한 배역이 되어 경향을 무대로 하고 총출연이 된 희극, 비극, 황금의 연쇄적 실극(實劇)을 구경하기로 하자.”(‘동아일보’ 1929년 12월17일자)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자식 손에 비명횡사한 이건호라는 인물이다. 겉으로 보이는 백만장자 이건호의 일생은 화려했다. 그리 후덕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수명이 예순을 넘어 일흔을 바라보았고 당대의 백만장자로 이름이 높았다.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넷을 두었으니 자식복도 아쉽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생전은 병이 없고 건강하여 그의 품에는 천하의 미인이 떠나지 않았다.

    수전노에 호색한, 이건호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66세를 일기로 한 그의 일생은 초년에는 돈이 없고 자식이 없어서 걱정과 탄식이었고, 만년에는 늦게 본 자식이 ‘못난이’로 돈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었다. 그의 전반생은 돈을 모으기 위해 인색과 고달픔의 연속이었고, 그의 후반생은 처첩의 갈등과 늦게 본 자식의 허랑방탕으로 탄식과 수심이 그치지 않았다.

    이건호는 빈한한 아전의 아들로 태어나 고리대금으로 누거만(累巨萬)의 재산을 모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돈 한푼에 치를 떠는, 그야말로 자기가 먹고 입는 것까지 아까워하는 말할 수 없는 수전노였다. 그같이 한푼 두푼 돈을 긁어모을 때는 살뜰한 친척도 없었고 의리와 공리도 몰랐다.

    나이 마흔에 백만장자라 하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거금을 모았으나 슬하에 아들이 없어 고민이었다. 한때는 한학자(漢學者)의 문하에 들어가 청풍명월의 시를 읊고 거문고 가야금에 정신을 팔고 술을 마시며 여생의 쓸쓸한 시름을 잊으려고도 해보았으나, 귀밑으로 찾아오는 흰털이 저물어가는 만년의 심회를 더욱 처량산란케 했다. 이로부터 그의 가슴은 자식 욕심으로, 호색축첩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건호는 일찍부터 음율을 배우기 위해 드나들던 논산의 유명한 광대 박근창의 집에서 17~18세의 꽃다운 소녀를 발견한다. 그녀는 광대 박근창의 조카딸 박소식으로, 비록 씨는 광대요 바탕 또한 무당이라는 미천한 가문에 태어난 몸이나, 호리호리한 몸매와 아리따운 자태는 누구라도 천인(賤人)으로 볼 수 없는 고상한 ‘귀족 타입’이었다. 당시 한 연재기사는 박소식의 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20의 춘광을 멀리 바라보며 장차 피려는 티없이 맑고 흰 그 얼굴은 샛별같이 반짝이는 영롱한 눈동자가 초생 반달과 같이 성근 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것이 높고 영리한 예지를 갖춘 시원한 이마에 조화되고, 도톰한 코 아래로부터 붉은 입술에 미소를 지을 양이면 홍도화(紅桃花) 빛으로 물들인 두 뺨에 우물을 그리는 그것이 한데 어울려 요모조모 천하의 요염을 한데 모아 가진 절세의 미색 그것이다. 이는 본부(本夫) 이건호를 독살하였다는 혐의로 현재 철창에 있는 피고 박소식이었던 것이다. (‘익산 백만장자 독살사건 2’, ‘동아일보’ 1929년 12월18일자)

    고와서 서러운 여인, 박소식

    17세 소녀와 39세 장년의 이 어울리지 않는 혼인은 황금의 힘을 빌려 아무런 시비와 반항 없이 성사됐다. 박소식은 영문도 모르고 부모의 명령대로 아버지 또래의 사내에게 시집을 갔으나,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귀밑털이 희끔희끔한 이건호를 남편으로 대할 때는 어린 마음에 무섭고 싫은 생각뿐이었다. 더구나 검푸른 얼굴에 취흥이 도도하여 이상한 웃음을 띠고 가만히 자기를 가까이할 때는 앞서는 공포와 불안으로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그 불안과 공포는 마치 험상궂은 악한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

    (남편의) 거친 숨소리에 (박소식은) 몸을 소스라치며

    “아 무서운 사람”

    이렇게 부르짖고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파르르 떠는 것이다. 그러나 소리를 내어 외치는 것은 아니었으니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고 속으로 부르짖는 말할 수 없는 비애의 서러운 비명이었을 뿐이다. 황금에 팔린 몸이 황금에 다시 고개를 숙인다. 움츠렸던 몸은 더 앙탈 못하고 억센 손에 그가 하는 대로 내맡기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좁은 가슴은 터지는 것 같았다. 미어지는 것 같았다. 분하였다. 원통하였다. 원망스러웠다. 이 밤이 언제나 다할꼬? 하면 날은 새었다가 다시 어두워지는 것이다. 어두워지는 밤이 원수와 같고, 깊어가는 밤이 큰 욕이었건만 그 지긋지긋한 밤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이것이 신혼 초 나이 어린 박소식에게 날마다 찾아오는 원수의 밤이었던 것이다. (‘익산 백만장자 독살사건 3’, ‘동아일보’ 1929년 12월20일자)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첩살이를 시작한 박소식의 ‘원수의 밤’은 사십 나이에 원기가 꺾이지 않고 혈기 왕성한 이건호에게는 끝없는 ‘환락과 희열의 밤’이었다. 불혹을 넘긴 이건호의 엽색행각은 본처 조건식의 날카로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더해만 갔다.

    박소식은 시집온 지 4년이 지나도록 밤이면 남편의 엽색행각에, 낮이면 시집 사람들의 천대와 시어머니 같은 큰형님(이건호의 본처 조건식)의 무섭게 타오르는 질투, 시기, 학대에 날마다 시달려야 했다. 더구나 추악하게 늙어가는 남편을 대할 때마다 거울 앞에서 보는 자기의 젊디젊은 청춘이 너무도 애석했다. 그리하여 때때로 먼 산을 바라보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산란한 마음을 수고로이 달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사에 뜻을 잃고 공연한 일에 성을 내어 얼토당토않은 일로 늙은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 앙탈을 부린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응앙! 응앙!”

    사십 평생 아들 하나 두기를 소원하던 이건호의 집에 옥동자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의 젊은 첩 박소식이 시집 온 지 4년 만에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말 그대로 고생 끝 행복 시작, 인생 대역전이었다. 박소식의 신분은 집안의 애물단지에서 백만장자 독상속자 이수탁의 어미로 일약 수직상승했다. 그 순간만큼은 몸서리치게 밉던 늙은 영감도 싫지 않게 여겨졌다.

    자식을 무릎에 놓고 젖을 먹이던 박소식은 벌써 사람을 알아보는지 어미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삐쭉 웃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는

    “이 애 좀 보세요. 벌써 사람을 보고 웃는구려. 이것 좀 보세요! 이것 보아요!”

    이렇게 급한 소리로 남편을 불러대는 것이다. 그러면 옆에서 담배를 붙여 들고

    ‘저것이 언제나 커서 사람구실을 한담! 내가 더 늙지 아니하여야 할 터인데! 그리고 오래오래 살아야 할 터인데….’

    이러한 끝없는 생각에 정신을 팔고 있던 그의 남편도 귀가 띄어서

    “뭐어! 그 자식이 벌써 웃어?”

    하고는 옆으로 달려와서 혀를 채가며 어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아이가 한번 벙긋 웃을 양이면 너무도 신통하여 입을 어린애 뺨에 대고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익산 백만장자 독살사건 4’, ‘동아일보’ 1929년 12월21일자)

    쥐면 꺼질세라 불면 날릴세라, 아이는 진자리 마른자리 골라가며 온 집안 사람들의 손에 떠들려 애지중지 자라났다. 자라면 자랄수록 커가면 커갈수록 부모의 총애는 더욱 더 커졌다.

    그러나 이수탁이 자라면서 비극의 씨앗 두 가지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하나는 어떻게 된 노릇인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자식의 얼굴이 아비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부모가 늦게 본 자식을 너무나 총애한 나머지 버릇없고 천치에 가까운 철부지로 키웠다는 것이다. 얼마나 버릇이 없었던지 평상시의 장난에도 ‘애빌 죽인다’고 할 정도였다. (‘조선일보’ 1928년 12월15일자)

    본처 조건식은 늦둥이 자식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남편에게 “여보, 영감! 아들이 귀하다 한들 그렇게도 버릇이 없이 기르면 장래 자식이 무엇이 되오? 귀여워할 때는 귀여워하여도 책망할 때는 좀 따끔하게 책망을 하는 게요, 엄히 굴 때는 좀 엄히 굴어야 하는 게지. 그게 대체 뭐요. 그저 귀해만 하니…” 하고 충고를 겸한 짜증도 내보았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아니, 그게 아직 무얼 아오! 철이 없어서 그렇지 철만 들면이야 그럴라고. 그런 게 아니야…” 하면서 본처의 말을 부인하고는 또다시 사랑하는 것이다. 아들의 청이라면 무엇이나 들어주면서.

    응석받이의 호랑방탕

    그러나 하늘의 별을 따긴 쉬워도 응석받이 철들기는 어려웠다. 이수탁은 16세 되던 때부터 주색에 탐닉하여 그 방탕함이 끝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비 이건호로 하여금 그 뒤를 치르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식의 호랑방탕에 엄청난 재산을 낭비한 이건호는 급기야 법원의 선고를 받아 자식을 준금치산자(準禁治産者)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정신을 차릴 이수탁이 아니었다. 방탕한 생활은 준금치산자가 된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급기야 십수만원(오늘날로 치면 수백억원)의 막대한 빚을 지고 진퇴유곡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됐다. 이수탁은 거듭 아비를 찾아가 구제해달라고 사정했으나 거절당했기 때문에 부자관계가 몹시 흉흉해졌다. 이에 따라 박소식과 이건호 사이도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환갑이 훨씬 지난 이건호는 은근슬쩍 젊은 홍씨를 다시 첩으로 들이는 기염을 토했다. (‘동아일보’ 1929년 12월23일자)

    급기야 이수탁의 방탕기질은 그의 어미 박소식에게 불똥이 튀어 ‘씨앗 문제’로 확대됐다.

    이수탁 살부(殺父) 공판

    어머니 박소식과 오빠 이수탁이 시부시부(弑父弑夫) 혐의로 수감되자 막내딸 이현수는 빚에 쪼들려 원산 홍등가로 팔려갔다. ‘동아일보’ 1930년 10월4일에 실린 ‘백만장자의 애녀 인육시장에서 전전’ 기사.

    1924년(이건호가 죽은 해-인용자) 2월 중 역시 이수탁의 채무로 말미암아 집안에 분란이 일어나자, 집안에서 이수탁이 이건호의 친자식이 아니요 간부(姦夫)로부터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 민적으로부터 제적을 시킨다는 소문이 이수탁과 박소식의 귀에도 들어왔다. 만약 제적이 된다고 하면 당연히 상속할 100만원(오늘날로 치면 1000억원-인용자) 재산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겠으므로, 그렇지 않아도 재산 문제가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여 기회만 엿보고 있던 두 모자는 서로 공모하고 동년 3월19일 밤에 이건호가 먹으려고 하는 탕약 가운데 아편을 넣어 먹여 독살하였다. (‘백만장자 친부 독살, 이수탁 사건 공판’, ‘중외일보’ 1930년 5월31일자)

    이수탁이 이건호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은 그가 어릴 적부터 익산 일대에 자자했다. 이 문제는 1932년 12월20일 경성지방법원 1심 재판에서도 쟁점이 된 적이 있었다.

    재판장: 피고의 소생이 몇이나 되는가?

    박소식: 아들 하나 딸 셋입니다.

    재: 이 소생들이 모두 이건호의 소생임이 틀림없느냐?

    박: 예, 모두 이건호의 씨입니다.

    재: 그렇다면 수옥, 수인, 수례 세 딸은 왜 이건호가 죽은 후에 민적에 올렸느냐?

    박: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영감이 살아 있을 때 그 애들을 민적에 올렸을 겁니다.

    재: 피고는 이건호 생전부터 이건호의 집을 출입하는 서성이와 추악한 관계가 있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박: 나는 목이 부러져도 그런 일은 없소.

    서성과의 관계를 부인하면서 박소식은 냉정을 잃고 몹시 흥분한 낯빛을 보였다 한다.(‘동아일보’ 1932년 12월21일자)

    이건호에게는 이정호라는 형이 있었다. 형제간의 우애는 그다지 깊지 않았다. 이정호가 동생의 재산을 사기·횡령하려다가 발각된 것이 화근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속셈인지 1924년 3월 이건호가 감기로 몸져눕자 반시도 동생 곁을 떠나지 않고 손수 약을 달여 먹이며 병 수발을 들었다.

    감기로 드러누운 이건호에게 마을 한방의생은 양위탕(養胃蕩), 금수육군전(金水六君煎), 지황탕(地黃湯) 같은 한약을 처방했다. 그러나 병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양의 한의 가리지 않고 용하다는 의사는 모두 찾아가 약을 써 보았으나 짙어지는 그의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게다가 평소의 천식과 해소까지 도져 죽기 전 이삼일 전부터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이건호는 1924년 3월25일 밤,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가 마신 마지막 탕약은 형 이정호가 준 처방전으로 아들 이수탁이 지어온 것을 이정호가 달인 것이었다. 설령 탕약에 독을 탔다 하더라도 누가 탔는지 입증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큰아버지 심부름을 마친 이수탁은 시정잡배와 어울려 술을 마시며 노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이건호의 임종을 지킨 것은 한때 그의 재산을 날로 먹으려 했던 형 이정호, 그리고 정부와 통하여 이수탁을 낳았다는 혐의를 받던 첩 박소식 두 사람뿐이었다.

    이건호의 병을 처음부터 보아오던 동네 한방의생 강인영씨가 끊어준 사망진단서의 내용은 간결하고 평범했다. ‘사망원인: 병사, 병명: 천촉해소(喘促咳嗽)’

    그러나 이러한 사망진단서의 내용과 달리 초상을 치르는 집안에는 괴소문이 떠돌았다. 이건호가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됐다는 것이다. 괴소문의 진원지는 이정호였다. 그는 괴소문을 퍼뜨리는 한편, 죽은 아우의 장사를 치르는 와중에 이수탁이 첩의 아들인 서자이므로 이건호의 사후 양자를 따로 정하여 상속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양자는 자기 아들을 선택하면 된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 사람들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망인의 자식 이수탁이 있는 이상 양자를 따로 세울 필요는 없다고 반대했다.

    이정호의 입으로 새어나온 독살이란 말로 집안에 풍파가 일자 박소식은 망인의 시체를 해부하자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이정호는 해부라는 말에 깜짝 놀라 그것은 자기의 일시 실언이었다고 잘못을 사과하고 사태를 허둥지둥 수습했다.

    이렇듯 이정호가 발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이수탁이라고 아비의 주검 앞에 근신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수탁은 ‘독살 의혹’에도 아랑곳없이 제 나름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수탁은 아버지가 죽은 다음날 면사무소에 상속계(相續屆)를 냈다가 각하당했다. 상주가 상중에 상속을 받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불복한 이수탁은 즉시 윤태진 변호사에게 의뢰하여 상속 수속을 밟게 했다. 박소식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장례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이건호의 의복부터 태워버렸고, 묘지 설정을 반대하고 화장할 것을 요구해 물의를 일으켰다. 묘지 설정을 막아달라고 주재소에 300원의 뇌물까지 줬다.

    이렇게 피붙이들이 두 패로 나뉘어 유산을 노리고 암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장례는 칠일장으로 성대하게 거행됐다.

    파리떼처럼 들끓는 협잡배

    100만원에 가까운 재산을 모으고 굳게굳게 지켜오던 이건호가 황천객이 되자, 그의 유산을 상속한 이수탁 주위에는 경향 각처에서 몰려온 협잡배가 파리떼처럼 들끓었다. 변호사, 경찰서장, 자작은 물론 이수탁 집의 머슴, 대서인, 이수탁의 본처, 큰아버지까지 포함된 여러 협잡꾼이 벌인 기상천외하고 추잡한 책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지 않아도 본래 백만장자 노부의 귀여움만 받고 자라나 철없고 천치에 가까운 이수탁으로서는 그 모든 책동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수탁은 본처 문수덕을 보좌인으로 하여 준금치산자의 선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상속인으로서의 권리를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까닭 없이 경찰서에 구속되는가 하면 영문 모르게 어떤 자의 집에 감금되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 그가 상속한 100만원대의 재산은 한번 손에 쥐어보지도 못하고 그만 간 곳을 모르게 됐다.

    이 어마어마한 일을 꾸민 이들이 바로 윤태진 사기단이었다. 변호사 윤태진을 중심으로 이수탁의 본처 문수덕, 이수탁의 집 하인인 조인옥과 임홍섭, 강경경찰서 추전(秋田) 서장 등 10여 명이 조직원으로 활약했다. 이수탁에게서 유산 정리를 위임받은 윤태진은 이건호의 재산을 이수탁에게 넘겨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우선 이수탁의 심복들을 조직원으로 포섭했다. 변호사답게 계약서까지 쓰는 치밀함을 보였다. 다음은 이수탁측 변호인 심상봉이 법정에서 공개한 ‘사기계약서’의 일부다.

    계약서

    一. 윤태진을 갑으로, 조인옥을 을로 하여 다음 사항을 체결함.

    一. 이수탁의 소유재산 전부를 정리함에 대하여 그 정리방법을 갑에게 의뢰함. 갑은 이를 수임하고 을에게 이수탁으로부터 취득할 금액이 10만원 이하면 35%를 10만원이 넘으면 50%를 지불한다.

    一. 을은 갑의 지휘에 따라 이수탁의 행동을 정탐하여 갑에게 밀고한다.

    一. 을은 갑의 지휘에 대하여 추호도 태만하지 않고 이수탁을 갑의 손바닥에 넣도록 진력하고, 갑의 명령에 무조건 따른다.

    필요한 인물들과 계약을 마친 윤태진이 취한 다음 행동은 이수탁을 얼토당토않은 명예훼손으로 강경경찰서에 고소하는 것이었다. 당시 윤태진은 강경경찰서 추전(秋田) 서장과 이미 줄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천치 이수탁을 경찰서에 구류시키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다. 추전 서장은 이후 윤태진이 연출한 희대의 사기극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면직됐다.

    이수탁을 감옥에 가둔 윤태진은 그의 법적보좌인 문수덕을 꾀었다. 완강히 거부하던 문수덕도 1만원의 사례금을 약속하자 순순히 손을 들었다. 문수덕에게 재산정리의 위임을 받은 윤태진은 재산정리에 이수탁의 도장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꾀어 백지 수십 장에 그의 인장을 눌러 가지고는, 그후 여러 가지 문서를 작성해 이수탁 소유의 토지를 양껏 편취했다. 윤태진 사기단의 일원이던 손현숙은 1심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재판장: 너는 이건호의 유산 중에서 얼마나 먹었느냐?

    손현숙: 토지 1만평을 먹었습니다.

    재: 어떻게 되어 먹었느냐?

    손: 고윤찬의 말이 이수탁이가 1800석 지기를 일반에 나누어준다고 말하고 주지않으므로, 날더러 이수탁의 백부인 이정호에게 가서 그것을 분배하도록 주선하라고 하므로 그 주선을 해주고 먹었습니다.

    재: 그 1800석은 누구누구가 먹었느냐?

    손: 대서인 김용두가 600두락, 그 외에는 전부 고윤찬이가 처리해서 모릅니다.

    재: 대서인은 무슨 까닭으로 먹었는가.

    손: 이전 등기수속 등을 하고 대서료로 먹었습니다.

    재: 네가 1만평 먹은 것도 많고 대서인이 먹은 것도 너무 많지 않은가.

    손: 주는 것이니까 많은 대로 받았습니다.

    재: 너는 변호사 윤태진과 이수탁의 토지를 먹기 위하여 무슨 약속이 있었다지?

    손: 계약한 것이 있습니다.

    재: 무슨 계약인가?

    손: 윤태진 변호사가 이수탁의 재산을 정리코자 하나 이수탁이가 잘 듣지 않으므로 나더러 일을 잘되게 해줄 것 같으면 자기가 얻는 토지나 재산 중에서 그 절반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수탁 사건 속개’, ‘동아일보’ 1931년 6월21일자)

    이수탁 살부(殺父) 공판

    ‘조선중앙일보’ 1935년 6월21일자에 실린 이수탁 살부사건에 대한 3심 선고공판 관련 기사 사진. 오른쪽에서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선고를 기다리는 이수탁, 아들의 무죄 석방을 기뻐하는 모친 박소식, 아들 이계원, 여동생 이수인, 재판장 밖과 안의 풍경이다.

    파리떼처럼 들끓은 협잡배 사이에 이정호도 끼어 있었다. 이건호가 시퍼렇게 눈뜨고 있을 때도 아우의 토지를 방매하여 먹고자 하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망신살이 뻗쳤던 그였다. 이제 천치 같은 조카놈만 남았으니….

    일단 그는 이수탁에게 “네 아비가 독살된 것이 틀림없으니 네가 상속한 재산 전부를 내게 양도하라”고 여러 번 협박하고 공갈했다. 이수탁이 끝내 그의 요구를 듣지 않자 협잡배와 공모해 이수탁의 인장을 위조하여, 이수탁이 상속한 1400여 석 추수의 토지를 제 명의로 이전했다. 그중 일부는 협잡배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챙겼다.

    자기가 먹고 입는 것까지 아까워하며 모은 이건호의 재산 100만원은 천치 자식을 둔 덕분에 죽은 지 불과 열 달 만에 이런 식으로 온데간데없이 흩어졌다.

    추악한 법정 드라마

    박소식은 사기당한 아들의 재산을 되찾고자 1926년 윤태진을 비롯한 협잡배 일당을 동대문경찰서에 고발했다. 이에 협잡꾼들은 자기들의 사기가 폭로될 것을 염려해 후환을 근절하려고 박소식·이수탁 모자와 안 좋은 관계에 있던 이건호의 정처 조건식을 시켜 박소식과 이수탁, 김영자가 이건호를 독살했다고 맞고소하게 했다. ‘이수탁 살부사건’이 이건호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나서야 불거진 것은 이 때문이다.

    관련자가 1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재판에 회부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예심에만 2년 반이 걸렸다. 예심기록이 5만쪽, 법정비용이 1만원에 달했다. 이는 예심재판에 관련된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는 예심재판사상 최대 규모의 사건이었다. 예심 결과 이수탁의 첩 김영자는 무혐의로 면소됐고 박소식과 이수탁은 존속살인죄로 일심에 회부됐다.

    유일한 물적 증거는 땅속에 묻힌 지 3년이 지난 시체를 부검한 감정결과서였다. 그마저도 이건호가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아편중독으로 죽은 것이라는 사실만을 확인해줬기 때문에 감정결과서도 결정적인 증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일부 증인은 이건호가 평소에도 아편을 즐겼다고 증언했다. 자기가 먹고 죽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설령 누군가가 약에 아편을 탔다 해도 이정호가 탔는지 이수탁이 탔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증인 역시 궁색했다. 검찰측 증인 태반은 이수탁의 유산을 사취한 협잡배의 일원이었다. 협잡배의 증언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또한 사건해결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이정호는 예심기간 중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고소인 조건식도 1심 재판 중 늙어 죽었다. 이렇듯 분위기는 피고에게 유리했지만 무려 3년을 끈 1심 결과는 이수탁 사형, 박소식 무혐의로 끝났다. 이건호의 사망 전후 이수탁의 행동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심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이수탁의 파렴치한 행동을 살펴보자.

    재판장이 “오경재에게서 자동차 기타 부속건물을 1만2000원에 살 때 친부의 허락이 없이 사서 급기야 대금지불을 몹시 독촉을 받은 것이 사실인가”하고 묻자, 피고 이수탁은 “친부의 승낙을 받고 샀으나 그후 오경재에게서 산 자동차 등이 오경재의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결국 소송까지 하게 된 것”이라고 답변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재판장은 “그러면 1만2000원밖에 아니되는 대금을 불과 1년 만에 4만 여원 가치의 토지로 준 것은 무슨 까닭이냐? 이것은 오경재에게 어떠한 약점을 잡혀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추궁의 한칼을 날렸다.

    피고는 이때 냉정을 잃고 “위협은 받았으나 인장위조를 하였다는 위협밖에 아니 받았다”고 진술하고 상세한 것은 정신이 몽롱하여 기억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재판장은 다시 “수십만의 재산을 친척, 기타 사람에게 나누어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것도 역시 피고의 신상에 어떠한 약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고 재차 추궁하였다. 이 점에 대하여는 “친부를 독살하였다는 위협을 받았으나 이 위협 때문에 토지를 준 일이 없다. 토지는 조인옥이 피고와 동거하던 첩 김영자에게 가서 거짓말을 하여 인장을 갖다가 토지증여증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라 하였다. (‘시체 두고 상속계 제출’, ‘동아일보’ 1932년 12월18일자)

    서로를 믿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이수탁이 무엇인가 약점을 잡힌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점은 복심재판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다음은 1934년 3월12일 경성복심법원 공판장 풍경이다.

    재판장: 피고는 16세 때부터 방탕하기 시작하여 음주작첩(作妾)까지 하였다지?

    이수탁: 그런 일은 있었어요.

    재: 피고는 익산에 살 때부터 주색에 방탕하여 그 빌린 돈은 피고의 아버지가 갚아주었다지?

    이: 준금치산자인데 누가 빌려나 주겠어요?

    재: 몇백원씩 돈을 빌려 증서를 써 준 일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이: 나 자신은 빚진 일이 없고 불량배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어요.

    재: 피고는 경시청에서 일심(一審)까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이: 그런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대답한 일은 없었어요.

    재: 피고의 말뿐 아니라 생모 박소식이도 그런 말을 했는데 어때?

    이: 내가 무슨 돈을 한푼이나 써보았어야 말이지요. 내가 빚을 짊어진 일은 없었어요.

    재: 피고는 18세 때도 전주에서 여자 하나를 역시 첩으로 데려다 그 여자와 투전노름을 하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었고, 피고의 아버지는 크게 노하여 다시는 그런 장난을 못하도록 피고의 왼팔을 칼로 찔러 약 2촌 가량 흉터를 낸 일도 있지 않은가?

    이: 그런 일은 전연 없었어요. 여자를 데려온 일도 없고 아버지가 칼로 제 팔을 벤 일도 없었어요.

    재: 그러나 이 말은 피고도 검사국에서 말하였거니와 피고의 처도 그렇게 말하였다. 피고는 그로부터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나?

    이: 천만에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이때 재판장은 피고의 팔을 조사하여 보았다. 그리고 변호사도 흉터의 유무를 자세히 조사하여 보았다.

    재: 이 흉터는 무엇인가?

    이: 어릴 때 장난하다가 다쳤지 아버지에게 찔린 일은 없었어요.

    재: 피고의 아버지는 1924년 3월19일에 죽었나?

    이: 그랬어요.

    재: 피고의 아버지는 죽기 6~7개월 전부터 전부의 재산을 합명회사로 만든다는 말이 있었나?

    이: 그런 말이 있었어요.

    재: 그 말을 듣고 감상이 어떠하였나?

    이: 아무 감상도 없고 좋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재: 그렇게 되면 그 재산이 너에게 상속이 아니 되지 않나?

    이: 삼촌, 사촌, 어머니 등 여러 가족이 있는 관계로 안전히 그 재산을 보존키 위한 것이라고 하였어요.

    재: 피고의 아버지가 생전에 다른 양자를 들인다는 말이 있었나?

    이: 못 들었어요.

    재: 피고의 백부 되는 이정호의 아들을 양자로 정한다는 말이 없었나?

    이: 이정호는 그런 생각을 하였지만 아버지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재: 이런 말을 듣고, 전재산을 비용으로 쓰더라도 소송을 하겠다고 당시 강경 한일은행에 다니는 민남식에게 하였다는데?

    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어요.

    재: 피고의 아버지는 1924년 2월19일 소송사건으로 강경지청에 다녀왔다가 앓기 시작하였다지?

    이: 감기로 앓으신 것은 사실이에요.

    재: 피고는 그때 앓는 아버지의 허리에서 현금과 열쇠를 훔쳤다가 아버지에게 발견되자 도로 내놓았다지?

    이: 훔친 것이 아니라 맡아두었다가 도로 드렸어요.

    재: 피고의 아버지는 음력으로 16일부터 갑자기 위중하였다지?

    이: 18일부터 위중하여 19일에 돌아가셨어요. (이때 피고는 울며 말하였다.)

    재: 16일 피고가 지어온 약을 피고의 어머니가 달여 먹이자 돌연히 위중하였다지?

    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어요. (이때 피고는 또 한번 울었다.)

    재: 피고는 아버지가 앓는데도 밖에 나가 술만 먹었다는데.

    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어요.

    (‘살부범 이수탁 공판’, ‘동아일보’ 1934년 3월13일자)

    이수탁은 백일하에 다 드러난 일도 아니다, 모른다고 잡아떼다가 결국 복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았다. 예심까지 합쳐 도합 세 번 죽은 셈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법정공방은 경성고등법원의 3심 재판에서 뒤집혔다.

    반전 또 반전

    “피고 이수탁의 살인사건은 증거불충분으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에 처한다.”

    예심, 1심, 복심까지 모두 유죄를 인정한 사건이 3심에서 뒤집어진 것은 변호사 심상봉이 기지를 발휘하여 ‘아편 독살’이라는 시신의 감정결과서가 증거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1심까지 변호인 심상봉은 협잡배의 음모임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지만, 복심 재판 결과마저 사형으로 끝나자 방향을 틀어 ‘아편 독살’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려 했다.

    이건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24년 3월19일이고, 그의 시체를 해부한 것은 그로부터 3년 2개월 20일 후다. 이렇게 오래된 시체를 해부해보고 아편 중독을 증명했으니 의문점이 없을 수 없었다. 심상봉이 자료를 수집한 결과 아편의 효능은 복용한 후 2년 6개월밖에는 존속하지 못한다는 것이 세계 의학계의 중론이었다. 아편 독살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무효로 만드는 논거였다.

    또한 임홍섭은 증인심문에서 “이수탁이가 지어온 약을 먹이자 이건호는 갑자기 병이 중태가 되어 피를 두 사발이나 토하고 고통스러워했다”고 했는데, 이는 의학지식으로 본 아편의 효능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의학적으로 아편의 효능은 복용 후 피를 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피의 순환을 막는 작용을 한다. 아무리 다량의 아편을 복용해도 피를 토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아편을 복용하면 수면상태에 빠질지언정 절대로 고통스러워할 수 없음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아편독살’이라는 공소 이유가 상실되는 것이었다(‘삼천리’ 1935년 8월호에 실린 심상봉의 ‘사형에서 무기로’ 수기). 3심 재판부가 도쿄의대에 의뢰한 감정서가 이를 입증함으로써 ‘이수탁의 살부 공판’은 만 8년 1개월 만에 종결됐다.

    아버지 죽이기의 의미

    3심 법정의 판결에서 볼 수 있듯, 이수탁이 실제로 아버지를 독살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수탁 살부공판’이 협잡배가 무구한 이수탁을 모함한 음모 내지 해프닝인 것만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사실상 이수탁은 아버지를 실제로 죽인 것보다 더 잔인하게 죽였다.

    인류역사상 아버지 죽이기 사건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이디푸스왕’ ‘햄릿’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한국영화 ‘공공의 적’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술작품이 아버지 죽이기 모티프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비록 실제로 아버지를 죽인 것은 아니라 해도 ‘이수탁 살부사건’만큼 지저분한 아버지 죽이기는 보지 못했다. 흔히 하는 말로 무수히 많은 ‘콩가루 집안’을 보았지만 이건호의 집안처럼 콩가루 집안은 보지 못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지난 10년간 이 땅에서는 400여 명의 아버지가 칼, 망치, 도끼를 든 자식 손에 죽어 나갔다고 한다. 아버지 죽이기 사건은 한 달에 세 번꼴로 어김없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제는 어지간히 엽기적인 사건이 아니고는 신문 사회면 한 귀퉁이조차 차지하기 어렵다.

    왜 이처럼 많은 아버지가 자식 손에 죽어 나가야만 할까. 사정이야 제각각이지만 확실한 것은 자식들만의 잘못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이여, 이건호의 삶을 반면교사로 삼아 말년에 험한 꼴 보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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