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한국의 ‘뉴요커 워너비’들

‘온스타일’ 채널에 열광, 청담동 멀티숍서 ‘뉴욕 쇼핑’, 주말엔 브런치 카페로

  • 글: 백경선 자유기고가 sudaqueen@hanmail.net

    입력2005-06-28 0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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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일 아침 7시, 그는 스타벅스에서 영자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신다. 주말 오전 11시, 그녀는 친구들과 강남의 한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며 수다를 떤다. 뉴욕 스타일의 삶을 꿈꾸는 ‘뉴요커 워너비’들.
    • 최근 젊은층 사이에 급증하는 ‘뉴욕 마니아’들은 무엇을 좇고 있을까. 꿈? 문화? 허상?
    요즘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자주 얘깃거리가 되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뉴욕 맨해튼을 배경으로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캐리, 변호사 미란다, 홍보대행사 대표 사만다, 큐레이터 샬롯 등 꽤 잘 나가는 네 여성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가 그것. 네 여주인공의 성에 대한 솔직한 입담과 화려한 패션이 단연 돋보이는 이 드라마는 2000년 케이블TV를 통해 국내에 처음 방영된 후 ‘신드롬’을 일으키며 열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20∼30대 여성층에서 뉴요커 스타일을 따라하려는 붐, 이른바 ‘뉴요커 워너비(New Yorker Wannabe)’가 탄생하는 데 큰 몫을 했다(‘∼가 되고 싶다’는 뜻의 ‘워너비’는 1982년 ‘뉴스위크’에서 처음 사용했는데, 이 단어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중반 가수 마돈나의 패션을 따라 하는 여성팬을 ‘마돈나 워너비’로 부르면서부터다).

    “시즌 6에서 캐리가 러시안이랑 강가에서 데이트할 때 입은 검푸른 벨벳재킷이랑 주름치마, 분홍색 니트 모자 있죠? 그게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도대체 어디 제품인지 찾을 수가 없네요. 누가 좀 알려주세요!”

    “그 제품은 미소니에서 나온 걸로 알고 있어요. 올슨 자매도 그 모자 썼던데, 아주 예쁘죠.”

    ‘섹스 앤 더 시티’의 인터넷 팬카페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이처럼 팬카페는 주인공들의 의상과 액세서리, 헤어스타일, 주인공들이 드나드는 장소의 인테리어 하나하나에까지 관심을 갖고 따라하려는 회원들의 열기로 뜨겁다.

    ‘섹스 앤 더 시티 신드롬’



    한국의 ‘뉴요커 워너비’들
    방송국 시트콤 작가인 이모(여·29)씨는 처음엔 작품 아이디어를 얻으려 ‘섹스 앤 더 시티’를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점점 주인공들의 패션에 더 관심이 쏠렸고, 그들의 변화무쌍한 스타일을 보는 재미에 매회 녹화해서 꼬박꼬박 챙겨 보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네 명의 뉴요커를 동경하고 모방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는 것.

    “네 주인공은 캐릭터에 따라 각기 다른 스타일의 옷차림을 선보여요. 구치, 샤넬, 펜디 같은 세계적인 고급 브랜드는 물론 로버트 펑크, 나르시소 로드리게즈와 같은 신예 디자이너의 의상이나 빈티지 제품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하죠. 저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를 보는 많은 여성이 화려한 외양의 그들을 부러워하며 따라 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인지 주인공들이 걸치고 나온 옷과 구두는 값이 아주 비싸도 방송이 끝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그들이 선택한 디자이너는 풋내기일지라도 주목을 받는다.

    캐리 역의 사라 제시카 파커 스타일은 더욱 눈길을 끈다. 모피 코트를 입고 샌들을 신거나, 하늘하늘한 드레스에 중성적인 느낌의 체크 모자를 쓴다거나, 소년 같은 옷차림에 로맨틱한 빈티지 핸드백을 코디네이트하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을 조화시켜 입는 ‘믹스 & 매치 스타일’을 제대로 선보이기 때문. 실제 평범한 뉴요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캐리의 스타일은 블랙 일색이던 뉴욕 맨해튼에 새 바람을 일으키면서 뉴요커의 새로운 패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저도 캐리 스타일을 좋아해요. 하지만 그걸 따라 하려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죠. 그런 스타일이 용납되는 것은 바로 ‘철저하게 개성을 존중하는 도시’ 뉴욕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국의 ‘뉴요커 워너비’들
    캐리의 스타일은 시시각각 변한다. 어느 땐 보헤미안 스타일의 옷을 스포티하게 입는가 하면, 또 어느 땐 섹시하고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는다. 그런데 절대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어떤 옷을 입든, 심지어 트레이닝 팬츠를 입을 때조차 굽이 높은 힐을 신는다는 것.

    “캐리는 유난히 구두에 집착하는데, 특히 마놀로 블라닉에 열광하죠. 덕분에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마놀로 블라닉제 구두 마니아가 생겨났어요. 제 주위에도 몇 명 있어요.”

    잡지사 기자인 우모(여·28)씨는 마놀로 블라닉처럼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브랜드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청담동 멀티숍을 찾는다고 한다.

    “얼마 전 명동에 개장한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에 국내 최초로 마놀로 블라닉 전문매장이 들어섰지만, 그전까지는 이 구두를 사려면 청담동 멀티숍을 이용해야 했어요. 멀티숍은 숍 매니저들이 외국에 나가 직접 사온 소량의 여러 브랜드 상품을 판매하는 곳인데, 분더숍이나 쿤, 무이가 유명하죠.”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브랜드를 구입하기 위해 그는 청담동 멀티숍 외에도 인터넷 쇼핑 사이트를 이용한다고 한다. 멀티숍처럼 빠르게 최신 유행 상품이 들어오진 않지만, 멀티숍의 물건이 대부분 럭셔리하고 고가인 데 견주어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는 캐주얼하고 부담 없는 브랜드가 많아서 좋다고. 가끔은 케이블TV ‘On Style’을 보고 예쁜 것을 미리 ‘찜’해놓기도 하고 잡지를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스크랩해놓았다가 외국에 나가는 친구들에게 사다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청담동에서 ‘팜팜’이라는 인테리어 숍을 운영하는 안신재(여·34)씨는 미국 뉴욕의 디자인 명문대학 파슨스와 LA의 패션전문학교 FIDM(Fashion Institute of Design & Merchandising)에서 공부한 인테리어·패션 전문가다. 대학 2학년 때인 1990년 미국으로 건너가 12년 동안 뉴욕과 LA에서 생활한 그는 뉴욕의 패션이 LA 등 서부의 패션과는 확연히 구분된다고 말한다.

    “LA 사람들은 밝고 화사한 컬러를 좋아하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뉴요커들은 블랙을 가장 좋아해요. 뉴욕 중심부인 맨해튼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으로 치장한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죠. 뉴요커가 블랙을 좋아하는 이유는 블랙이 세련된 멋을 풍기기도 하지만 검은색 옷은 뉴욕의 대기 오염과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쉽게 더러워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해요.”

    “LA에선 자동차가, 뉴욕에선 편한 신발이 필요하다”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의 말처럼 LA 사람들은 거의 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에 여성들이 대부분 예쁜 하이힐을 신지만, 살인적인 교통 체증과 주차난 때문에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많이 걸어야 하는 뉴욕 여성들에게 하이힐은 꿈도 못 꿀 일이라는 것. 그들은 주로 편한 신발을 신고 다니는데 정장에 스니커즈를 신고 하이힐은 손에 들고 다니는 커리어우먼도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실용성, 편안함, 심플함 추구

    “뉴욕 스타일은 편안함과 실용성, 그리고 심플함을 추구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도 DKNY나 랄프 로렌, 안나 수이, 캘빈 클라인같이 뉴욕을 대표하는 브랜드죠. 이 브랜드들은 섹시한 시폰 드레스까지 심플한 벗이 나는 게 매력이에요.”

    뉴요커는 헤어스타일도 단연 심플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단정하고 층도 많이 내지 않은 스트레이트 스타일이 뉴요커에게 단연 인기인데, 전문직에 종사할수록 헤어스타일은 더욱 단순해진다. 미국 드라마 ‘앨리의 사랑 만들기’에서 변호사인 여주인공 앨리의 짧은 머리스타일이 대표적. 안씨도 오랫동안 단정한 긴 스트레이트의 헤어스타일을 고수했는데, 관리도 편하고 싫증도 덜 난다고 한다.

    한국의 ‘뉴요커 워너비’들

    뉴욕 스타일은 실용성, 편안함, 심플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뉴요커는 랄프 로렌, 캘빈 클라인 같은 브랜드를 선호하고 스타벅스에서 베이글과 커피를 즐긴다.

    실용적이고 심플한 것을 좋아하는 뉴요커라지만 이브닝 파티나 데이트라도 있는 날이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여주인공들처럼 블랙은 물론 핑크나 블루 같은 화려한 컬러의 슬립 원피스에 뾰족하고 높은 굽의 스틸레토 힐을 신는 것.

    물론 뉴요커라 해서 모두 세련되고 심플한 블랙 정장풍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소호나 첼시 주변에 거주하는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사람들은 히피풍 옷을 즐겨 입는데, 컬러풀한 구슬이 달린 액세서리와 꽃무늬 혹은 날염 원피스와 스커트 등이 대표적인 아이템이다.

    “뉴요커의 패션 스타일은 너무도 다양하고 개성이 강해 뭐라고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워요. 인테리어도 마찬가지죠. 그래도 뉴욕의 대표적인 인테리어 스타일을 꼽으라면 모던 스타일과 젠 스타일, 그리고 섀비 시크 스타일이 있어요. 이중에서 저는 특히 섀비 시크 스타일을 좋아해요.”

    1990년대 초 그가 뉴욕에 갔을 때 마침 섀비 시크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섀비 시크는 낡은(shabby) 느낌이면서 세련된(chic) 느낌을 주는 스타일을 말한다. 살짝 벗겨져 오래된 듯한 화이트 앤티크 가구와 빛바랜 듯한 파스텔톤의 잔잔한 꽃무늬 패브릭이 대표적이다.

    “유럽의 전원에 온 듯한 낭만과 여유가 느껴지는 섀비 시크 스타일은 삭막한 도시생활을 하는 뉴요커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어요. 뉴욕에서 살 때 저도 섀비 시크 스타일로 집안을 꾸며봤는데 참 좋았어요. 오래 써도 질리지 않고, 특히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설 때 화사한 분위기가 저를 행복하게 해줘요.”

    귀국 후 섀비 시크 스타일의 인테리어 숍을 낸 것도 전원풍 인테리어로 삭막한 도시생활에 신선한 활력을 얻는 뉴요커의 지혜를 널리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유롭게 즐기는 브런치

    뉴요커의 식습관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브런치다. 브런치(brunch)의 사전적 의미는 ‘늦은 아침식사, 또는 이른 점심식사’로, 아침(breakfast)과 점심(lunch)을 합쳐 만든 말이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아점(아침 겸 점심)’이다. 그런데 뉴욕의 브런치 문화가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가까운 사람들과 주말의 느긋함을 즐기며 천천히 편하게 먹는 한 끼’로 통하며 점점 확산되고 있다.

    “어학연수다 유학이다 해서 외국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 많아지면서 몇 년 전부터 브런치가 자연스럽게 한국에 소개된 것 같아요. 그러나 무엇보다 브런치가 인기를 얻은 건 ‘섹스 앤 더 시티’의 영향이 절대적인 듯해요. 그 드라마를 보면 네 명의 여주인공이 주말 오전이면 멋지게 차려입고 뉴욕의 카페 등지에서 한가롭게 브런치를 즐기며 수다를 떠는데, 그런 모습이 뉴요커의 전형처럼 보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들이 따라 하게 됐다더군요.”

    어린 시절 뉴욕을 비롯해 미국 동부에서 살았고 지금도 뉴욕으로 자주 출장을 간다는 회사원 노모(여·29)씨의 설명이다. 그는 “이젠 한국에서도 브런치를 즐길 수 있게 돼 정말 행복하다”며 “주말마다 맛있는 브런치 카페를 찾아다니는 게 낙”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뉴요커 워너비’들

    서울 청담동의 멀티숍들.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브랜드를 포함해 뉴욕의 최신 유행 상품들이 진열돼 있다. 왼쪽 사진은 뷔페식으로 꾸민 브런치 카페.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선 호텔에 가야만 브런치를 즐길 수 있었는데, 최근 들어 강남 일대에 브런치 카페가 점점 늘고 있어요. 호텔은 가격도 부담스럽고 교통도 불편해 저는 주로 강남에 있는 카페를 이용하죠. 브런치를 좋아하는 친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서로 좋은 곳을 소개하기도 해요.”

    “왜 브런치를 좋아하냐”고 묻자, 그는 한마디로 “여유 있어 좋다”고 대답한다.

    “늦게 일어나도 여유 있게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어 좋고, 또 사람들을 일찍 만나니까 오후 시간을 넉넉하게 활용할 수 있어 좋아요. 그뿐 아니라 브런치 메뉴들은 위(胃)에도, 주머니 사정에도 부담이 안 돼요. 주말 오전에 친구들을 만나면 커피숍 가서 커피 마시고, 배가 출출하다 싶으면 케이크 한 조각 먹고, 그러고 나서 또 점심을 먹으니까 브런치를 먹는 것보다 두 배는 돈이 더 들죠.”

    그는 주말이 아닌 평일 오전에는 회사 근처의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 ‘커피 빈’에서 브런치를 즐긴다. 오전 11시까지는 베이글이나 샌드위치 같은 브런치 메뉴가 5000원 정도의 가격에 제공된다.

    대표적인 브런치 메뉴로는 오믈렛과 팬케이크, 샌드위치, 베이컨, 소시지, 스크램블 에그, 달걀 프라이, 와플,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따위가 있다.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브런치 메뉴는 남성보다 여성들이 좋아한다. 강남의 브런치 카페는 이외에도 지중해식, 일식, 뷔페 같은 다양한 메뉴를 내놓고 있다.

    브런치가 알려지면서 그게 뭔지 궁금해 브런치 카페를 찾는 이도 적지 않다. 강남의 한 브런치 레스토랑에서 만난 이모(26·여)씨도 그런 경우다.

    “여기저기서 얘기를 들었는데, 도대체 브런치 메뉴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대학원 동기들과 함께 온 거예요. 그런데 다들 잘 왔다고 해요. 분위기도 좋고, 무엇보다 여유로워서 좋아요. 우리가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자주 브런치를 즐길 거예요.”

    신사동 도산공원 근처에 있는 브런치 레스토랑 ‘텔 미 어바웃 잇(tell me about it)’을 운영하는 정태영(남· 45)씨는 “요즘은 주말에 교외로 나가는 사람보다 시내에 남는 사람이 더 많다”며 “그들이 실컷 얘기하면서 음식을 즐길 수 있게끔 브런치 메뉴를 마련했다”고 말한다. 요즘은 예약을 하고 오지 않으면 보통 1∼2시간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주로 젊은 여성이 많고, 주 5일제 근무가 확대 실시된 이후 가족 단위 손님도 부쩍 늘었어요. 특히 주말에 교회를 다녀오는 가족 단위 손님이 많아요. 대체로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찾아오는데, 이는 브런치의 중심이 음식이 아니라 대화와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의 금융시장을 주무르고 문화와 예술, 패션과 유행을 선도하는 뉴요커에 대한 동경은 그들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뉴요커 워너비’를 낳았다. 하지만 뉴요커처럼 옷을 입고, 뉴요커처럼 브런치를 먹으며, 뉴요커처럼 모던한 스타일의 집에서 산다고 해서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뉴요커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이가 뉴요커의 삶을 좇으려 하는 걸까.

    뉴욕은 현실의 탈출구

    한국의 ‘뉴요커 워너비’들
    취재 결과 뉴요커 워너비는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자기 만족형’ 혹은 ‘자기 위안형’이며 둘째는 ‘자기 과시형’, 셋째는 ‘일상 탈출형’이다.

    앞서 언급한 시트콤 작가 이씨는 자신이 ‘캐리 스타일’을 좇는 것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돼보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라며 “다른 사람이 알아봐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냥 내가 좋아서 행복해서 만족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캐리 스타일을 따라 하면서 팍팍한 자신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위안을 받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날마다 새벽까지 회의를 하고, 밤 새워 대본을 쓰고, 항상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사는 제 삶이 답답하고 안타깝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럴 때 뉴욕의 멋쟁이 캐리로 변신을 시도하는 거죠. 그러면 조금은 보상이 되고 위안도 돼요.”

    잡지사 기자 우씨는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은 스타일이나 브랜드의 옷을 입고 구두를 신으면 자신이 좀더 특별해진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더구나 뉴욕은 세계의 패션이나 유행을 선도하는 도시인만큼 뉴욕 스타일대로 차려입으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앞선 느낌이 든다는 것.

    전업주부 우영선(31)씨는 주말 브런치를 즐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주말 오전에 친구를 만나 브런치를 먹으며 수다를 떨다보면 주중에 아이 보느라 받은 스트레스가 확 풀려요. 그 순간만큼은 항상 반복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나 자신이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같아요.”

    공통적으로 이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리고 현실과 대조되는, 그들이 꿈꾸는 이상향이 바로 뉴욕인 것이다.

    실체 아닌 이미지만 모방?

    그렇다면 진짜 뉴요커가 바라보는 뉴욕 라이프는 어떤 것일까. 한국에서 살다가 미국 대학으로 진학한 김모씨는 아예 영주권을 받아 10여 년째 뉴욕에서 살고 있다. 그는 “뉴욕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터”라며 “그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한국에서는 사치스럽고 여유롭게 살기를 꿈꾸며 일하는 것을 천하게 생각하지만 뉴요커는 일하며 흘리는 자신의 땀을 사랑한다”고 강조했다. 평안함을 거부하며 자기 손으로 이룬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국의 뉴요커 워너비 현상에 대해서도 그는 대뜸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나타나는 뉴욕의 모습은 이미지일 뿐이지 실체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요는 이렇다. 드라마나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이른 아침 옆구리에 신문을 끼고 한 손엔 커피를, 다른 한 손엔 베이글을 들고 거리를 바삐 걸어가는 뉴요커를 볼 때 한국 사람들은 멋과 낭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 뉴요커들은 아침 먹을 시간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아침 먹을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 진실을 알고 보면 멋이나 낭만과는 동떨어진 삭막한 풍경이다. 또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뉴욕의 미혼 남녀들이 바에서 만나 멋진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 흔하게 일어나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바야흐로 우리나라에 부는 뉴요커 워너비 바람은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자의적으로 재해석한 이미지를 모방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모방하고 싶은 대상이 있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활력소가 되는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실체는 보지 못하고 환상만 좇는 일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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