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무원 고시’, 경쟁률 100대 1은 기본
- 국내 항공사, 승무원 서비스 평가 세계1위 고수
- 단아한 인상, 곧은 몸매, 깨끗한 피부
- ‘ 베푼다’ 대신 ‘해드린다’, ‘친근’ 대신 ‘공경’
- 철저한 서비스 뒤엔 군대 뺨치는 기강
- “승객과 로맨스? 거의 없죠”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한국 여승무원들. 왼쪽부터 대한항공 김영주·조윤주·김영희, 아시아나항공 정진희·정혜원·엄유란씨.
조씨는 돌발상황 대처능력 테스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개그맨 이혁재가 온몸에 문신을 한 채 옷을 벗고 돌아다니는 안하무인 승객 노릇을 했다. 다른 도전자들은 화를 내거나 쩔쩔맸지만, 조씨는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단호하게 이혁재를 막고 서서 그 자리에서 옷을 입게 했다.
“신혼여행 중인 신부가 제게 ‘왜 남의 신랑을 보고 웃냐’며 억지를 부리는 상황도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눈높이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차근차근 이야기했죠.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떨려요. 저와 나란히 최종 단계까지 갔던 친구도 패자부활전을 통해 다시 도전, 함께 입사했어요.”
항공사 승무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보여주듯 ‘꿈의 피라미드’ 대한항공 편에는 수많은 지원자가 몰렸고 시청자의 관심 또한 대단했다. 덕분에 조씨는 유명인사가 됐다. 그를 알아보는 승객도 많아 3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비행을 시작하자마자 6개월 동안 “방송에서 봤다”며 말을 건네는 승객을 심심찮게 만났다고. 스튜어디스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무척 높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는 그는 그만큼 책임도 커졌다고 했다.
“비행을 시작한 후 화장실 체크를 주로 했어요. 정말 화장실이 이렇게 지저분해질 수 있구나, 이렇게 고약한 냄새가 날 수 있구나 하는 걸 처음 알았죠. 그런데 미국인 승객 몇 분이 다가와서는 ‘당신 너무 멋지다. 어느 항공기에서도 이렇게 깨끗한 화장실을 써본 적이 없다. 또 당신처럼 늘 웃으며 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감동했다’고 하더군요. 승무원인 저도 화장실 문을 열면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승객은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에 깨끗이 청소했거든요. 그런 제 마음이 승객에게 전달된는 것만으로도 뿌듯했어요.”
인기 ‘수출상품’
실제로 어느 나라의 항공기를 이용해봐도 한국 항공사 승무원처럼 뛰어난 용모와 투철한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여승무원을 만나기 힘들다. 이는 국제기관의 서비스 평가 결과로도 나타난다. 아시아나항공은 지난해 ‘글로벌 트래블러(Global Traveler)’의 기내 서비스(Best Onboard SVC & Flight Attn)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고, 대한항공 역시 전세계 9개 항공사로 구성된 스카이팀(Sky Team)에서 매달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평가에서 승무원 서비스 부문 1위를 지키고 있다.
5월26일 서울-두바이 직항 노선 운항을 축하하기 위해 방한한 에미레이트항공의 셰이크 아흐메드 회장은 “한국인 여승무원은 최고다. 친절하고 손님이 원하는 서비스를 잘해준다”고 극찬했다. 전세계 95개국에서 승무원을 채용해온 이 항공사는 1998년부터 한국인 여승무원을 뽑아 현재 220명의 한국승무원이 일하고 있다. 이런 비율은 영국, 호주에 이어 세 번째다. 이는 한국인 여승무원이 훌륭한 인적 ‘수출상품’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기도 하다.
한국인 여승무원이 이렇게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자랑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인하공전 항공운항과 등 비행기 승무원을 전문적으로 길러내는 학과가 20여 개에 이르고, 승무원 양성학원이 넘쳐나며, ‘승무원 고시’란 말이 나올 만큼 우리나라에서 승무원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국내 양대 항공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평균 입사 경쟁률은 70대 1에서 최고 100대 1. 그만큼 인재풀이 풍부하다는 뜻도 된다.
인하공전 항공운항과 2학년 박보영(21)양은 4년제 대학에 다니다 수능시험을 다시 치러 이 학교에 들어왔다. 현실과 유리된 듯한 학문을 배우고 취업이 안 돼 힘들어하는 선배들을 보며 회의도 느꼈지만, 그가 결단을 내린 데는 어린 시절부터 항공사 승무원에 품었던 꿈이 크게 작용했다. 여느 대학생들과는 다르게 깔끔한 정장 차림에 아이라인까지 그린 완벽한 화장과 쪽찐 머리를 한 그는 “나이 들어 보이죠?” 하며 특유의 ‘승무원표 스마일’을 짓는다.
“정장을 입으면 저도 모르게 걸음걸이와 자세가 달라져요. 그래서 우리 과 학생들은 이런 옷을 주로 입어요. 또 친구들끼리도 바른말을 쓰려고 노력하죠. ‘연필 줘’ 대신에 ‘미안하지만 연필 좀 줄 수 있겠니?’라고 하는 거죠. 식당에 들어갈 때 꼭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하고, 뭔가를 부탁할 때는 ‘죄송한데요…’로 시작해요. ‘감사합니다’는 입에 달고 살죠.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내숭떠는 것 아니냐’고 면박을 주기도 하지만, 저는 승무원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자세라고 생각해요. 2년간 이런 생활태도가 몸에 배도록 노력했습니다.”
박양은 “화를 내면 인상이 망가진다”고도 했다. 언젠가 친구와 싸우고 나서 거울을 봤더니 자신의 표정이 어둡고 일그러져 있더라는 것. 그래서 일부러라도 얼굴 찌푸릴 만한 생각은 하지 않고 자주 웃으려 노력한다는 그는 실제로 이런 행동을 통해 성격도 많이 좋아지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깊어졌다고 했다.
6월8일, 서울 강서구 오쇠동 아시아나항공 교육훈련원. 여기저기서 “안녕하십니까!” 하는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곱게 쪽찐 머리를 한 예비 승무원 80명이 마주치는 사람에게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이들의 얼굴은 자신감과 책임감으로 넘쳐났다. 아시아나항공 캐빈커머스팀의 백순철 차장은 “갈수록 훌륭한 재원이 많이 들어온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용모와 인성이 당락 좌우
“전체 훈련생의 3분의 1이 해외 어학연수를 받았거나 해외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어요. 토익 800점 이상의 고득점자와 일본어, 중국어 능통자도 꽤 있죠. 또 올해부턴 국내 승무원들과 외국인 승무원들을 함께 교육하기 때문에 대다수 강의가 영어로 진행됩니다.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승무원들 스스로 영어 공부에 더욱 몰두해야죠.”
승무원이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 실력보다 용모와 인성이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 모두 키 162cm 이상, 시력은 안경 착용시 좌우 1.0, 미착용시 0.2 이상, 토익 성적 550점 이상이면 지원할 수 있다. 두 항공사의 인사 담당자들은 지원자의 용모가 당락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미스코리아나 연예인 같은 개성 넘치는 미모가 아니라 승무원 이미지에 들어맞는 ‘깨끗하고 단아하며 호감을 주는 인상’을 원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피부를 중요시한다고. 아시아나항공 캐빈서비스팀의 이수정 사무장은 “비행을 하다보면 시차가 자주 바뀌고 기압이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신체 리듬이 깨져 피부가 거칠어지기 쉽다. 따라서 민감하지 않고 타고난 좋은 피부의 소유자를 뽑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또 무릎이나 팔뚝 등 밖으로 드러나는 신체 부위에 상처나 흉터, 큰 점이 있어도 안 된다.
항공사 승무원은 유니폼을 입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마르고 곧은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세계적인 디자이너 페레가 만든 대한항공의 새 유니폼은 다소 서구적인 몸매에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유니폼 교체에 대비해 대한항공 승무원들 사이에 다이어트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비행기 200번 그리기
하지만 용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서비스직을 감당할 만한 인성과 매너다. 대한항공 인재개발실 배석준 과장은 “면접 순서를 기다릴 때의 태도, 면접을 마치고 나가는 태도, 말씨와 행동, 남에 대한 배려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면접관 앞에서는 미소지으며 예의 바르게 말하지만 마치고 나갈 땐 험한 말을 하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점들을 모두 체크하죠. 보통 1차 면접시험 때는 한 사람당 3∼5분을 할애하는데, 한 지원자는 준비한 게 많았나봐요. 무려 15분 동안 춤, 노래, 무용 등 준비한 것을 모두 보여줬죠. 물론 훌륭한 ‘무대’였지만 결과는 탈락이었죠.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승무원으로서 기본 자질이 없는 것이니까요.”
최종 임원 면접을 마친 후에도 관문은 하나 더 남아 있다. 체력·신체검사 및 수영 테스트가 그것. 체력검사에서는 쥐는 힘과 근력, 허리유연성을 테스트한다. 기내 식음료 서비스 때 잔을 쥐거나 카트나 쟁반을 나르는 데 문제가 없는지를 보는 것. 또 오랫동안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승무원에겐 허리 건강도 무척 중요하다. 신체검사에서 빈혈이나 간질환, 청각장애, 비염이나 중이염 등이 있으면 안 된다. 두 검사에서 각각 응시생의 20% 가량이 탈락한다. 25m 코스 수영장을 왕복 수영하는 수영 테스트는 비행기가 해상에 비상착륙했을 때 승객구조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과 까다로운 과정을 뚫고 입사하면 3개월간 ‘신입교육’이라는 더 큰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크게 안전·서비스·외국어 교육으로 나뉘는 신입교육을 예비 승무원들은 ‘죽음의 코스’로 부른다. 아시아나항공 6년차 승무원인 정혜원(28)씨의 체험담이다.
“안전교육이 가장 어려워요. 서비스나 외국어 교육은 입사 전에도 어느 정도 접해본 것이지만 안전교육은 생소한 내용이거든요. 비행기 구조를 다 알아야 하고 테러, 비상착륙, 화재, 환자 발생 같은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능력까지 배워야 하죠. 심지어 화학방정식도 알아야 해요. 물론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일일이 실습해서 익혀야 하고요. 한번은 안전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더니 교관이 벌로 ‘비행기 그리기’를 시키더군요. 좌석 배치는 물론 화장실, 갤리, 파티션, 비상도구 구비 장소까지 일일이 다 그려 넣어야 했어요. 하나라도 틀리면 두 배로 그려야 했죠. 그렇게 하루에 비행기 그림을 10∼20번, 1주일에 200번을 그린 적도 있어요. 덕분에 비행기 구조를 완벽하게 외웠죠.”
아시아나항공 5년차 승무원 엄유란(26)씨도 안전교육을 잊지 못했다. 그는 “비상착륙 실습훈련을 할 때면 너무 떨려서 ‘벨트를 푸시오’를 ‘머리를 푸시오’로, ‘착수’를 ‘침수’로 외치는 등 어이없는 실수를 한다”며 웃었다.
대한항공 승무원 조윤주씨는 승객과의 친밀감을 강조한 나머지 기초적인 서비스 매뉴얼을 지키지 못해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혼난 적이 있다. 승객은 승무원의 서비스가 그냥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으로 여기지만, 거기엔 일정한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접시에 냅킨을 깔 때는 항공사 로고가 위를 향하도록 해야 하고, 캔과 잔을 함께 놓을 때는 각기 정해진 자리에 놓아야 한다. 물건을 놓을 때 손놀림이나 고개를 숙이는 자세, 인사하는 각도도 모두 매뉴얼에 따른 것이다. 교육기간 내내 지적받고 또 지적받아 매뉴얼을 익힌다. 승무원으로서의 기본자세가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서다.
대한항공 6년차 승무원 김영희(28)씨 역시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점을 받은 적이 있다.
“옆자리 동기가 아침에 우유를 먹고 우유곽을 책상 위에 놓은 채 수업을 받았어요. 그런데 강의가 끝난 후 교관이 저희 둘에게 ‘따라오라’고 하는 거예요.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느냐’고 묻는데 도대체 모르겠더라고요. 교관을 ‘우유 곽을 올려놓은 것이 잘못이다. 기본적인 준비를 해야 하는 승무원이 자기가 먹은 우유곽을 치우지 않았다는 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어요. 그러면서 제게는 ‘동료가 잘못된 길로 가는데 그것을 방조한 죄’라고 했어요. 정말 황당했죠. 하지만 비행을 하면서 그때 교관님이 강조한 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아무리 엄격한 교육도 실제 경험만큼 유용하지는 않다. 한국인 여승무원의 경쟁력은 다양한 실전 경험에서 쌓인 노하우에서 나온다.
대한항공 15년차 승무원 김영주(36)씨는 “승무원 생활을 오래 하면 육감이 생긴다. 승객과 눈만 마주쳐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 그 승객이 내게 뭔가를 원해서 눈을 맞춘 것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면 승객의 요구가 뭔지 거의 다 알아맞힌다”고 말했다. 김씨는 외국 항공사와 우리나라 항공사는 서비스에 대한 마인드가 많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기내 컵라면이 맛있는 이유
한국 여승무원의 서비스엔 승객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담겨 있다. ‘친근’을 강조하는 외국 여승무원과의 큰 차이점이다.
아시아나 승무원 정혜원씨는 “승무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한번은 100% 중국인 승객만 탑승한 적이 있는데, 그날 식사 메뉴가 쇠고기와 새우 두 가지였죠. 이걸 설명해야 하는데 당시 승무원들 중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영어도 전혀 통하지 않고 정말 난감했죠. 아마 다른 항공사라면 대충 영어로 물어보고 나눠줬을 거예요. 하지만 승객은 메뉴 선택의 권리가 있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종이에 그렸어요. 승무원들이 모여 ‘쇠뿔을 어떻게 그리면 되지?’ ‘새우에 수염이 있나?’ 논의를 거듭하며 그림을 그린 후 복도에 서서 보여주고 승객들에게 선택하게 했죠. 또 한번은 채식주의자가 미리 식사를 주문하지 않은 채 탑승했어요. 생각다 못해 승무원용 음식에 들어 있는 야채를 모두 걷어서 그 승객의 식사를 만들어줬죠.”
비즈니스클래스나 퍼스트클래스에는 라면 서비스가 제공된다. 비즈니스에선 컵라면, 퍼스트에선 끓인 라면이 제공되는데, “이상하게도 비즈니스에서 먹는 컵라면이 무척 맛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단순히 기분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일까. 아니다. 여기에도 승객을 배려하는 승무원의 마음 씀씀이가 숨어 있다. 비법은 면발을 살짝 데친 후 끓는 물을 붓는 것. 번거로울 뿐 아니라 시간도 더 걸려 컵라면의 편리함은 반감되지만, 맛은 훨씬 좋아진다.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1998년 창단된 ‘플라잉 매직팀’이 인기를 끓고 있다. 식사 시간이 끝나면 늘씬한 미녀 승무원들이 등장해 프로 마술사 뺨치는 현란한 손놀림으로 승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분위기가 ‘업’되면 승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매직쇼에 동참하기도 한다. 팀원은 모두 6개월 과정의 매직 교육을 수료했다. 각종 악기도 연주할 줄 안다. 아시아나 승무원 누구에게나 매직팀의 문은 열려 있다. 하지만 이는 100% 승객을 위한 서비스 봉사 활동. 수당을 더 받는다거나 기내에서 임무가 줄어드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엑스트라 워크’지만 30여 명의 팀원 모두 승객에게 즐거운 여행을 선사한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화장 제대로 안 한 것도 ‘근무태만’
메이크업 교육을 받고 있는 아시아나항공 예비 승무원들.
“식사 서비스를 할 때 선배님이 진행하는 옆 복도는 앞으로 쭉쭉 나가는데, 제가 있는 쪽은 진행 속도도 늦고 매뉴얼대로 서비스도 못하고 정말 난감했어요. 선배들의 지적이 끊임없이 이어졌죠. ‘무엇은 어디에 있지?’ ‘이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 무시무시한 현장교육이었어요.”
아시아나항공 15년차 승무원 정진희(37)씨는 현재 비행을 총책임지는 매니저 직책을 맡고 있다. 그는 “승무원들이 기내에서 책임져야 하는 업무의 범위가 각각 달라 기내에서의 일은 지시에 의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면서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선 선후배간의 구분이 확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주먹구구식으로 ‘군기’를 잡는 건 아니에요. 승객들 앞에서 후배 승무원에게 엄격하게 대하면 오히려 지적을 받아요. 분위기를 삭막하게 만들었다고. ‘후배님’이라고 경칭을 쓸 정도로 깍듯하게 대하지만 일만은 철저히 명령과 복종에 따라 이뤄지죠.”
이미지 파워가 중요한 만큼 외모 가꾸기를 소홀히 하는 것은 근무태만에 속한다. 대한항공 승무원 김영희씨는 “여유로운 서비스는 승무원 스스로 자신이 있을 때 나오고, 자신감은 완벽한 겉모습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머리 드라이가 제대로 안 됐을 때는 아예 비행기에 오르기조차 싫어요. 잔머리카락 한올 흐트러진 것도 용납되지 않죠. 겉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괜스레 승객들이 저만 쳐다보는 것 같아 위축돼요. 손톱 하나하나까지 정돈된 모습을 갖췄을 때 서비스도 좋아집니다. 틈틈이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며 몸매를 가꾸는 것도 그런 이유죠. 또 화장을 제대로 안 하고 비행하면 지적을 받아요. 피부가 깨끗한 한 승무원이 밑화장을 하지 않은 채 색조화장만 했더니 한 승객이 ‘아무리 피부가 좋아도 메이크업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승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고 했죠. 이렇게 승무원에 대한 승객들의 관심이 지대하니 외양에 더욱 신경을 쓸밖에요.”
겉모습만 가꾸는 것은 아니다. 영어는 물론 최근에는 일본어, 중국어를 공부하는 승무원이 부쩍 늘었다. 일본인, 중국인 승객이 많이 탑승하는 만큼 일본어나 중국어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 외국어 실력은 비행을 편하게 해줄 뿐 아니라 승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1∼2년 휴직하고 일본이나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승무원도 많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대한항공 승무원 김영희씨 역시 기회가 주어지면 일본에 어학연수를 다녀올 계획이다.
비행기를 타면 이착륙 전후에 승무원이 한국어, 영어, 현지어로 하는 기내 방송을 들을 수 있다. 이 기내 방송은 승무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항공사마다 자체 기내방송자격 코드를 단계별로 발급해 이를 딴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현재 중상급 코드를 발급받은 김씨는 일본을 오가는 비행의 방송을 책임진다. 최근 들어 다양한 자격 코드를 따려는 승무원이 급증했다. 대한항공 승무원 김영주씨는 “요즘 들어 승무원을 평생 직업으로 여기면서 어학 자격증 등 회사에서 권장하는 자격증을 따거나 대학원에 진학해 항공 서비스 관련 공부를 하는 승무원이 많다”고 말했다.
곤혹스럽고 힘든 경험도 많다. 술 취해 난동을 부리는 고객을 진정시키고, 비행기 밖에서 기분 나빴던 일을 화풀이라도 하듯 억지부리는 승객 앞에서 여러 차례 머리를 조아리기도 한다. 반말을 듣는 것은 부지기수.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붓거나 여승무원을 몸종 부리듯 하는 승객도 많다고 한다. 또 ‘하늘의 꽃’이라 할 만큼 젊고 아름답다 보니 남자 승객들이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다음은 승무원들의 경험담이다.
“명함? 정중히 받고 고스란히 버려요”
“‘어이’ ‘아가씨’ ‘이봐’ 하며 반말 하는 승객, 엉덩이를 슬쩍 건드리거나 심지어 손가락으로 이름표를 누르는 승객도 있어요. 얼굴은 웃고 있지만 무척 화가 나죠.”
“일본인 승객 한 분이 거의 3분마다 저를 불러 ‘남자친구가 있냐’ ‘일본 남자 사귀어본 적이 있냐’며 사적인 질문을 계속하는 거예요. 연락처를 달라고 하기에 이메일 주소를 알려줬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부를 것 같아서요. 그분은 그날 이후로 두 달 동안 하루에 수십통씩 메일을 보냈어요. 자기 사진도 수백번은 보냈고요. 결국 메일 주소를 아예 없애버렸어요. 또 이름표를 보고는 회사로 전화해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거나 꽃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냥 조용히 무시합니다.”
“승객이 명함을 주는 경우는 부지기수예요. 교육 받을 때도 승객이 치근덕거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워요. 명함을 주면 ‘정중히 받고 고스란히 버리라’고 배웠죠. 물론 연락을 할지에 대한 판단이야 승무원 개개인이 하는 것이지만 그런 인연은 너무 가볍잖아요. 그냥 유니폼이 풍기는 이미지에 혹한 것일 수도 있고요. 실제로 그렇게 승객과 연애해서 결혼한 경우는 거의 없어요. 전혀 없지야 않겠죠. 얼마 전에 한 승무원이 현지 호텔 헬스클럽 옆자리에서 운동하던 남자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나 연애하다 결혼했어요. 하지만 그건 인연이라고 봐야겠죠.”
“유명한 개그맨이 비행기에 탔어요. 해외에 자주 다녀 승무원에게 ‘칭찬 편지’를 보내면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걸 알았나봐요. 갑자기 ‘당신은 내 스타일이야. 현지에 도착해서 식사나 같이하자. 그러면 칭찬 편지 보내줄게’ 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는 연예인이 꽤 많아요.”
“현지에서 저희가 머무는 호텔로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어서 ‘같이 놀자’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하는 승객도 있어요. 주로 비즈니스클래스 승객이죠. 그럴 땐 단호하게 대처해요. 유니폼을 벗었으니까요.”
승무원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건강을 해치기 쉽다. 시차가 뒤집어지길 밥 먹듯 하고, 서비스에 집중하느라 신경이 예민해지며, 수면·식사 시간이 불규칙한 탓에 위장병을 안고 산다. 특히 허리나 관절을 다치기 쉬운데 면세점 카트를 돌리다가 허리를 다쳤다는 아시아나 승무원 정혜원씨는 허리 신경 일부에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마취제를 투여하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승무원은 일반의 인식과는 다르게 건강관리만 잘하면 결혼이나 출산 후에도 근무할 수 있는 장수직업이다. 직장내 남녀평등은 기본. 출산휴가 2년 보장에 비행근무 후 휴일이 많아 육아를 병행하는 데도 무리가 없다. 연봉도 대기업의 같은 직급보다 한 직급 위와 맞먹는 데다가 별도로 해외체류비, 비행수당 등이 나온다. 초봉이 대략 2800만원 수준. 그러다 보니 결혼하면 퇴사하는 게 관행이던 1980년대 이전과 달리 요즘은 평균 근속연수(아시아나 항공 기준)가 6.3년으로 1996년(2.5년)에 비해 부쩍 늘었다. 이런 영향으로 2000년 이후 기혼 승무원 비율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올 6월 현재 대한항공 전체 여승무원 3708명의 47%인 1736명이 기혼자이고, 아시아나항공은 올 4월 현재 전체 여승무원 1714명 중 756명이 기혼자다. 출산 후 복직률도 90%가 넘는다.
외국항공사 준비하는 늦깎이들
그래서일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승무원을 꿈꾼다. 특히 최근 들어 국내 항공사보다 나이 제한이 엄격하지 않고 용모 평가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외국 항공사에 취업하려는 지원자가 부쩍 늘었다. 외국 항공사의 경우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다가 다시 도전하는 ‘늦깎이’ 지원자가 많다.
6월11일 오후 2시 서울 강남역에 위치한 승무원 전문 양성학원 ‘ANC’의 영어 인터뷰 강의실. 승무원을 꿈꾸는 미래의 ‘비행소녀’ 10여 명이 강사의 한마디라도 놓칠까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업을 듣고 있다. 강사는 학생들의 말씨뿐 아니라 승무원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나 손짓을 일일이 지적해 고쳐준다. 주말 수업이라 그런지 대다수가 20대 중후반의 사회인. 주로 에미레이트, 케세이패시픽, 중국동방항공, 카타르항공, KLM 등 외국 항공사 승무원을 꿈꾸고 있다.
ANC 임효정 팀장은 “외국 항공사는 승무원을 뽑을 때 외모나 몸매, 나이보다는 성격과 인성, 체력을 더 중시한다”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외국 항공사들은 키 158cm 이상이면 지원할 수 있다. 마른 체형을 선호하는 국내 항공사에 비해 조금 통통한 체형, 튼튼하고 건강한 이미지를 선호한다. 물론 피부를 중요시하는 건 국내 항공사와 같다. 한 항공사는 지원자들을 창가에 세워놓고 햇빛에 비춰 화장에 가려진 피부의 원래 상태를 테스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임 팀장은 “외국 항공사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면접”이라며 “탄탄한 외국어 실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갖춰 자신만의 서비스 마인드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이 학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도 영어 인터뷰 수업이다.
외국 항공사들 중에서도 최근 한국인 승무원 선발에 적극적으로 나선 에미레이트항공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만 30세까지 지원할 수 있는 데다 높은 연봉(초봉 연 3000만원 수준), 실속 있는 복지혜택 때문. 또 승무원들이 모두 두바이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도 외국에서 살고 싶어 하는 젊은 여성들의 심리를 자극한다. 실제로 이 항공사의 모든 승무원은 편의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집에서 무료로 산다. 2인용 주택은 70∼80평, 3인용은 80∼100평이나 되고 시설도 호텔급이다. 출퇴근 교통편도 무료. 전용 병원도 있고, 특급 호텔 부대시설도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50명 모집에 7000명 몰려
에미레이트항공의 채용 담당 매니저 릭 헬리웰은 “두바이의 치안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게 없다. 두바이는 시민의 50% 이상이 외국인이고 영어가 공용어인 국제적인 도시다. 중동국가지만 여성이 배꼽티를 입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밤늦게 혼자 다녀도 위험하지 않을 만큼 치안상태도 좋다. 또 세금자유지역이라 승무원의 급여에서 세금을 전혀 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국인 여승무원들은 근면성과 책임감에서 단연 최고예요. 사생활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죠. 원어민에 비해서는 영어실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눈치가 빨라 빠릿빠릿하게 일처리를 하는 편이고요. 또한 현지에선 한국 여승무원의 용모도 높게 평가합니다. 뚱뚱한 한국인 여승무원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을 만큼 자기 관리도 잘하죠. 그러니 한국인 여승무원에 대한 평가가 좋을 수밖에요.”
에미레이트항공 공채 1기로 1998년부터 4년간 근무해온 김민정(33)씨의 이야기다.
지난 1월 에미레이트항공이 8기 승무원을 모집했는데 무려 7000명이 몰렸다. 이중엔 명문대 출신도 상당수였다. 최종 합격자는 50명. 현재 9기를 모집 중인데, 홍보대행사에서 일하다가 올해 초 그만둔 정태정(29)씨 역시 승무원의 꿈을 갖고 원서를 냈다.
“나이가 많아서 선택의 폭이 좁지만(웃음) 에미레이트항공의 대우가 너무 좋아서요. 1시간 가량 진행된다는 영어 인터뷰가 걱정이에요. 그간 홍보 업무를 하면서 다진 인간관계 구축 기술과 리더십 등을 영어로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도 6개월간 승무원 양성학원에 다니고 운동도 하는 등 열심히 준비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겠죠.”
취재하면서 20대 초반 예비 승무원부터 경력 15년차의 시니어 승무원까지 여러 사람을 만났다. 인상적인 것은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 넘게 인터뷰하는 동안 단 한 명도 다리를 꼬지 않았다는 점. 이들은 인터뷰 내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바르게 앉아 조용한 목소리와 고운 말투로 때로는 친근하게, 때로는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인터뷰를 마친 뒤에 ‘수고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철저한 자기관리, 몸에 밴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한국 여승무원들의 경쟁력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