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화나무만큼 인간에게 유익한 나무도 흔치 않다. 화사한 꽃과 그윽한 향기만으로도 모자라 다양한 약효를 지닌 매실까지 아낌없이 베푼다. 섬진강변 광양시 다압면 일대는 우리나라 최대의 매실 산지. 이른 봄날 상춘객으로 들끓던 매화마을에 지금은 농민들의 잔치가 한창이다. 초여름 문턱에서 본격적인 매실 수확이 시작된 것이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 흔히 ‘매화마을’로 부르는 이 강촌은 봄 여행의 시발지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해마다 3월 중순경이면 어김없이 이곳을 찾았다. 섬진강과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비탈의 매화밭에서 강바람에 함박눈처럼 흩날리는 매화를 봐야 비로소 겨울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했다. 온몸을 휘감아 뼛속까지 싱그럽게 만드는 매향(梅香)에 취한 뒤에야 봄빛이 찬란함을 느낄 수 있었다.
봄의 전령 ‘매화’와 여름 전령 ‘매실’
매화 만발한 춘삼월의 매화마을만 보아온 까닭인지, 녹음 우거진 유월 초순의 섬진마을 풍경은 퍽 낯설다. 사실 꽃빛 화사하고 향기 그윽한 매화에만 현혹되어 예로부터 손꼽히는 건강식품이자 귀한 약재인 매실에는 깊게 관심을 둔 적이 없었던 듯싶다. 그래서인지 몇 달 만에 다시 찾은 섬진마을의 풍정이 오히려 새롭게 다가왔다.
하동군 화개면과 구례군 간전면 사이의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남도대교를 건너 광양시 다압면에 들어섰다. 광양 땅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풋풋한 매실이 주렁주렁 매달린 매화나무들이다. 도로변, 산비탈, 민가 주변을 가릴 것 없이 죄다 매화나무 숲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매실 산지다운 풍경이 섬진강 물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국내 매실 생산량의 절반쯤은 전라남도에서 나온다. 그리고 전남 지역 생산량의 절반쯤은 광양 매실이다. 그 중에서도 매실 농사의 비중과 매실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다압면이다. 다압면의 500여 농가에서 생산하는 매실은 연간 1200t에 이른다. 광양 전체 생산량의 3분의 2쯤 되는 양이라고 한다. 단순히 생산량만 많은 것이 아니다. 다압면 일대에서 생산된 광양 매실은 서울 경동시장을 비롯한 대규모 약재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유월 초순, 섬진강 물길과 나란히 달리는 861번 지방도 주변의 매실밭에서는 매실 채취작업이 한창이었다. 다압면 고사리의 한마음농원(061-772-3479) 앞에서 차를 멈췄다.
탐스럽게 맺힌 매실을 따느라 주인 정기호(47)씨 내외의 손길이 몹시 분주했다. 정씨는 “앞으로 한 20일 동안은 정신없이 바쁘지만 그래도 매실 따는 일은 항상 모심기가 끝난 뒤에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올해는 꽃샘추위가 늦게까지 계속되는 바람에 매실의 수확시기도 예년보다 늦은 편이라고 했다. 정씨는 “도로 주변은 지대가 낮아서 일찍 따지만, 저 위쪽은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매실은 따는 시기가 아주 중요하다. 절기로 따지면 망종(양력 6월5~6일경)이 지난 뒤에 따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 전에 딴 풋매실에는 ‘산배당체’라는 독성물질이 포함돼 있어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고 매실 특유의 향도 나지 않는다. 반대로 너무 늦게 따면 살구처럼 누렇게 익어서 쉬 무른다. 그러나 적당히 익은 매실은 과육이 두껍고 향기가 짙게 배어난다. 대체로 지름이 3~4cm쯤 되고 동글납작하며 솜털이 보송보송하면서 꼭지가 너무 마르지 않은 것이 좋은 매실이라고 한다.
6월초에 따는 것이 최고
‘전통식품 분야 명인 1호’로 꼽히는 청매실농원 대표 홍쌍리씨가 오랫동안 장독에서 숙성시킨 매실절임을 맛보고 있다. 청매실농원 앞마당에는 2500여 개의 장독이 줄지어 서 있다.
섬진강가의 한적한 섬진마을을 오늘날과 같은 매화마을로 탈바꿈시킨 사람은 고(故) 율산 김오천(1902~1988)씨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머슴살이로 번 돈을 밑천삼아 17세 되던 해에 일본행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그후 일본 광산에서 13년 동안 광부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매화나무와 밤나무 묘목을 각각 5000그루씩 사서 서른 살 되던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을 주변의 야산을 모조리 개간해서 일본에서 가져온 묘목을 심었다.
3년에 걸쳐 정성껏 묘목을 심고 관리하던 김씨는 나무 키우는 기술을 더 익히고 돈을 구하기 위해 193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10년 동안 고향과 일본을 수없이 오가면서 묘목 재배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1944년에 완전 귀국한 그는 나무 심는 일에만 매달려 고향마을 주변의 야산을 매실밭과 밤나무 동산으로 일궈냈다.
김씨는 전쟁 중이던 1952년부터 매실의 상품화에 적극 나섰다. 해마다 수십 가마니 분량의 오매(烏梅)를 직접 만들어 구례, 순천, 하동 등지의 한약방에 공급했다. 당시 그의 매실밭에서는 150t 가량의 매실이 수확됐다. 그중 100t을 모두 오매로 만들어 한약방에 납품하고, 약 30t은 부산의 대선소주 공장에 매실주 원료로 팔았다고 한다.
김오천씨가 주춧돌을 놓은 청매실농원(061-772-4066, www.maesil.co.kr)의 매실 농사는 며느리 홍쌍리(63)씨가 잇고 있다. 부산에서 성장해 1965년에 김씨 가문으로 시집온 홍씨는 처음에는 생소한 시골생활로 인해 마음고생을 적잖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따사로운 봄빛 아래 만개한 매화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뒤로는 섬진마을에 고향 같은 푸근함과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되었다.
홍씨는 매실의 효능을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매실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가 매실의 효능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도 시아버지인 김오천씨 덕분. 김씨는 해마다 얼마간의 매실을 오랫동안 불에 고아서 ‘매실고’를 만들어 뒀다가 설사, 식중독, 복통으로 고생하는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먹였다. 그럴 때마다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배앓이가 사라졌다고 한다.
시아버지 뒤이어 매실 연구
홍씨는 고운 새색시 시절 관절염으로 꽤 고생하기도 했다. 관절염으로 고통이 심해지자 어느 한의사가 매실을 먹어보라고 권했다. 그때껏 매실을 그저 배앓이에나 먹는 단방약 정도로 알던 그는 자신이 손수 농사지은 매실을 먹은 지 석 달 만에 굳은 팔꿈치가 살며시 펴지는 놀라운 효능을 체험했다. 지금도 ‘매실박사’, ‘전통식품분야 명인1호’로 유명한 홍씨는 “매실은 몸속에 쌓인 노폐물이나 피로물질을 깨끗이 씻어주는 ‘인체 청소부’”라고 강조한다.
오랜 경험과 일상생활에서 매실의 효능을 체득한 홍씨는 매실의 저장성과 효능을 높이고, 언제라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매실 건강식품의 제조방법을 수년에 걸쳐 연구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농축액, 절임, 장아찌, 고추장, 된장, 식초, 매단 등 20여 가지에 이르는 제품을 개발해 시판하고 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산비탈에 심어놓은 매화나무가 저절로 꽃피고 열매 맺은 것 같을 겁니다. 그래서 매실 농사가 쉬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매실은 건강식품 아닙니까. 건강식품을 만들려면 농사도 건강하게 지어야 해요. 그래서 농약을 치거나 화학비료를 마구 뿌려대면 안 됩니다. 매화나무에도 진딧물 같은 병충해가 생기지만 그래도 농약은 안 쳐요. 대신 아주 매운 고춧가루 물을 뿌립니다. 그리고 제초제를 안 쓰기 때문에 봄부터 가을까지 사람 손으로 일일이 잡초도 뽑아줘야 하고요.”
청매실농원의 가장 큰 머슴임을 자처하는 홍씨의 말이다. 그는 매실을 가공해 건강식품을 만들 때도 더디고 일손도 많이 가는 전통방식을 고수한다. 그래서 청매실농원에는 매실을 발효시키거나 숙성하는 기계나 공장이 따로 없다.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서 모은 2500여 개의 커다란 장독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병입이나 포장작업, 증기솥으로 매실원액을 달이는 작업을 할 때에만 기계의 도움을 받는다. 오늘날 청매실농원은 상근직원만도 30여 명, 한해 매출액 40억원, 그리고 미국이나 홍콩 등지로 각종 매실 건강식품을 수출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청매실농원에서 한 해에 필요한 매실 양은 400t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 절반 가량은 자체적으로 수확한 것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절반쯤은 이웃 농가에서 수매한다. 지난해부터 이 농원은 다압면 일대에서 생산된 매실을 가장 많이 수매하는 기업이 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그러께까지는 한 매실주 제조회사에서 해마다 50~200t 을 수매했으나, 매실주 소비가 줄어든 지난해부터는 수매를 아예 중단했다. 자체 농장에서 생산된 매실도 남아도는 처지라는 것이다.
드라마 ‘허준’이 몰고온 명암
매실 값도 여느 과일과 마찬가지로, 해마다 등락폭이 심한 편이다. TV 드라마 ‘허준’이 방영되던 2000년에 폭등했던 매실 값은 2001년을 정점으로 해마다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올해에는 지난해에 비해 35% 정도 하락한 값에 거래되고 있다. 드라마 ‘허준’ 이후로 재배면적과 수확량은 크게 늘어난 반면 장기적인 불황으로 매실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다압면의 매실 재배 농가를 상대로 매실 수매를 대행하는 다압농협 김백열 전무는 “매실은 이 지역 농가의 가장 중요한 소득원인데, 해마다 값이 떨어져 큰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하품 기준으로 적어도 1㎏에 1000원대를 유지해야 농민들이 수지를 맞출 수 있다”고 했다.
원래 매화나무는 중국 쓰촨(四川)성과 후베이(湖北)성 산간지방이 원산지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이전에 전래됐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거쳐서 매화가 전래된 일본은 오늘날 세계에서 매실음식이 가장 발달하고 널리 보급된 나라로 손꼽힌다. 일본의 대표적 건강식품인 ‘우메보시’도 매실절임의 일종이다.
동양 3국에서 예로부터 집안에 매화나무를 심은 것은 혹한에도 꽃을 피우는 절개와 그윽한 꽃향기를 가까이 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 열매인 매실의 약효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 명나라의 이시진이 집대성한 약학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매실의 다양한 약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매실은 맛이 시고 독이 없으며, 간과 담을 다스린다. 또한 세포를 튼튼하게 해주며 혈액을 정상으로 만든다. 번열(煩熱·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가슴이 답답하여 괴로운 증세)을 가라앉힐 뿐만 아니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사지통증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내장의 열을 다스리고 갈증을 조절해주며, 토사곽란과 설사를 멈추게 하고 냉을 없앤다. 술독과 종기, 담도 없앤다. 자궁의 피를 멎게 하고 월경불순 등의 부인병에도 좋다. 대변불통(심한 변비)과 대변하혈, 피오줌 등을 낫게 하며, 입 냄새를 없애고 가슴앓이와 배앓이를 다스린다.’
이처럼 옛 문헌의 기록만 보더라도 매실은 자칫 ‘만병통치약’으로 오인할 만큼 다양한 효능을 지닌 약과(藥果)다. 매실은 전체의 85%가 과육(果肉)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 주성분은 탄수화물이다. 그 밖에 당분 10%와 다량의 유기산이 함유돼 있다. 매실의 유기산은 구연산, 사과산, 주석산, 호박산으로 구성돼 있는데, 다른 과일에 비해 특히 구연산의 함량이 월등히 높다.
사실 매실이 건강식품으로 각광받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구연산의 함량이 높다는 점이다.
간장 해독하고 입냄새도 없애
망종이 지난 뒤에 딴 매실은 과육이 두껍고 향기가 짙다. 이렇게 수확한 매실을 농협을 통해 서울 가락시장에 내다팔기도 하고(왼쪽), 각종 건강식품으로 가공해 판매하기도 한다.
매실에는 피루브산과 카데킨산도 함유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실 속의 피루브산은 간장의 해독작용을 도와주는 물질이고, 카데킨산은 장(腸) 내의 항균작용과 살균작용을 도와 설사나 변비를 치유하는 물질이다.
그러나 매실은 따서 바로 먹을 수 없는 과일이다. 약알칼리 식품이면서도 신맛이 너무 강해서 그냥 깨물어 먹으면 치아가 손상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다양한 가공식품이 개발됐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가공된 매실에는 크게 금매(金梅), 오매(烏梅), 백매(白梅) 의 세 가지가 있다.
금매는 매실을 쪄서 말린 것인데, 술을 담그면 빛깔이 좋고 맛도 뛰어나다고 한다. 빛깔이 까마귀처럼 검은 오매는 껍질 벗긴 매실을 짚불 연기에 그을려서 만든 것이다. 오매는 가래를 삭히고 구토, 갈증, 이질, 폐결핵 등을 치료하며 술독을 풀어주는 한약재로 널리 이용된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단옷날 신하에게 하사한 ‘제호탕’이란 음료의 주성분으로 쓰였다. ‘동국세시기’에는 ‘제호탕을 마시면 갈증이 풀리고 속이 시원하며 정신이 상쾌해진다’고 기록돼 있다. 백매는 매실을 소금물에 하룻밤 절인 다음 햇볕에 말린 것이다.
백매는 오매와 효능이 비슷하면서도 만들기가 더 쉽고 먹기도 좋다. 또한 백매를 입에 물고 있으면 입냄새가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한다.
매실의 효능을 꼼꼼히 헤아려보면 세상에 매화나무만큼 인간에게 이로운 나무가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가장 화사한 꽃빛과 가장 그윽한 향기, 그리고 가장 다양한 약효를 지닌 열매까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청매실농원의 드넓은 매실밭을 소요하노라니 심신의 피로가 말끔히 씻기는 듯하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다닥다닥 매달린 매실조차 더 고결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