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김태식의 考古野談 | 마지막 회 |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일제에 납치돼 청와대에 갇힌 ‘미남 석불’

  •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1/2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여래좌상’.[오세윤 작가 제공]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 일간 매일신보는 1934년 3월 29일자에 ‘석가여래상(釋迦如來像)의 미남석불(美男石佛), 즐풍욕우(櫛風浴雨) 참아가며 총독관저(總督官邸) 대수하(大樹下)에’라는 제목을 내건 기사 하나를 싣는다. 이런 큰 제목만으로는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음인지, 이에는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던 경주의 보물, 박물관(博物館)에서 수연만장(垂涎萬丈)’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았다.

80년 전 문체여서인지 우선 큰 제목과 작은 제목에 들어간 몇 단어가 생경하다. 즐풍욕우(櫛風浴雨)란 글자 그대로는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몸을 씻는다는 뜻이니, 간단히 말해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상태라는 의미다. 대수하(大樹下)란 큰 나무 아래라는 뜻이요, 수연만장(垂涎萬丈)이란 침을 만 길이나 흘린다는 뜻이니, 어떤 것을 제 소유로 만들고 싶어서 몹시 탐낸다는 비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저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대의(大義)를 풀어보자. 석가여래를 표현한, 잘생긴 돌로 만든 부처가 어쩌다가 경주를 떠나 조선총독 관저로 옮겨졌지만, 그곳 정원 큰 나무 아래서 별다른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비바람에 노출돼 있어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애를 태운다는 뜻이다. 이제 이 불상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이 기사를 통해 찬찬히 살펴본다. 현대에 익숙지 않은 표기법만 약간 손질하는 선에서 당시 표현을 최대한살린다.  

“석가여래상으로 경주 남산에 있던 미남석불(美男石佛)이 지금으로부터 여러 해 전에 자최(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었다. 그 얼마 후에야 미남석불이 어디로 도피한 줄을 안 총독부박물관에서는 그동안 그의 간 곳을 찾아오다가, 작(昨·지난) 27일에야 왜성대(倭城臺)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비목(榧木) 촉탁이 급히 달려가 보니, 경관힐소(警官詰所) 뒤 언덕 큰 나무 아래에 천연스럽게 좌정(坐定)은 하고 있으나,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경관힐소란 경비 초소다. 이 무렵 총독 관사 위치를 왜성대(倭城臺)라 하거니와, 이곳은 지금의 서울시 중구 예장동 2-1번지 일대 남산 기슭이다. 이곳 총독 관저로 가서 문제의 불상을 조사했다는 ‘비목(榧木) 촉탁’이란 총독부박물관 촉탁(일종의 전문위원)이던 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를 말한다. 이 대목으로 보면 문제의 경주 남산 불상은 이전에 존재는 알려졌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다가 이때 와서 재발견됐음을 알 수 있다. 한데 이 돌부처를 ‘미남석불’이라 한다. 부처가 잘생겨서 얻은 이름일 터이다. 그래서일까? 기사의 불상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극찬이다.

“이 미남석불은 시가(時價)로 따진다면 적어도 오만 원 이상은 할 것이나 지금 세상에 있어 돈 아니라 금을 가지고라도 도저히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 좌신(座身·앉은 자세의 몸)의 높이가 3척 6촌, 슬폭(膝幅·양쪽 무릎 끝까지의 폭)이 2척 9촌이오, 또 연좌대(蓮座臺·연꽃 모양 받침대)에는 천녀(天女)를 아로새긴 엄청난 것으로 신라의 유물로서 석불과 함께 다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참고자료이다.”

이 불상을 좌신(座身)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는 부처 중에서도 앉은 모습을 형상화한 이른바 좌불(坐佛)임을 미루어 짐작한다. 1척이 대략 30.3㎝요, 1촌은 약 3.33㎝니, 이 좌상(坐像)은 받침대를 제외한 불상만으로 볼 때, 기사에서 말한 높이는 110.88㎝다. 양쪽 무릎 간 폭은 90.63㎝다. 대략 앉은키와 무릎 높이가 1대 1 가까운 비율을 이룬다. 나아가 이 불상을 신라 작품으로 본다는 점도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불상이 어찌하여 총독 관저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그에 대한 신문의 답변이다. 

“이에 대하여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그 미남석불이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제1회(의미 불명) 재등(齋藤) 총독시대에 어떤 우연한 일로 관저로 올라온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물관 홀에 진열되어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와 경주의 같은 골짜기에 안치되어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한다.”

조선총독의 포로 된 ‘미남 석불’

기자도 이 불상이 옮겨진 구체적인 사연을 더는 캐지 못하고 있다. 다만 2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재임하던 시절(1919~1927)에 올라왔을 것이라는 총독부박물관 측의 발언을 전달만 한다. 아마도 이 발언은 이를 조사한 가야모토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나아가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이 불상이 당시 그곳에 전시 중인 약사여래상과 같이 경주의 골짜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약사여래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3층 불교조각실에 상설 전시 중인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 약사여래 좌상’을 말할 것이다. 이 약사여래상은 1915년 무렵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지시로 남산을 떠나 경성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총독부박물관이 인수하게 된다. 이 불상은 남산 서쪽에 위치하는 계곡 중 하나인 삼릉곡 작은 절터에 있었다. 이로써 본다면, 총독부박물관에서는 비록 단순 추정이라는 범위를 넘지는 못하지만, 문제의 ‘미남 석불’ 역시 이곳에서 봉안하던 것으로 본 셈이다.

이런 보도를 하면서 기사는 “그리하여 박물관에서는 수연만장(垂涎萬丈) 어떻게 박물관으로 가져왔으면 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미 총독 관저의 물건이 되어 있는 이상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형편이므로 총독의 허가를 얻어 박물관에 진열하여 보려고 희망하고 있는 중이라더라”고 끝을 맺는다. 하기야 박물관으로서는 그것을 옮겨오고 싶었겠지만, 다름 아닌 총독 관저에 있는 것이라 섣불리 말도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찌됐건, 우리는 저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적어도 1934년 3월 현재에는 ‘미남 불상’이 조선총독에게 사로잡힌 포로 신세 비슷함을 확인한다. 한데 더 놀라운 사실은 조선총독 관저의 장식물 중 하나로 전락한 바로 그 불상이 83년이 흐른 지금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이자 사저가 있는 청와대 구중심처에서 여전히 일반과는 유리된 채 포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있다니?

필자가 문화재 담당 기자 시절, 아마 박근혜 정부 초창기였다고 기억하거니와, 청와대 출입 사진기자를 통해 ‘미남 불상’ 촬영을 의뢰한 적이 있다. 그 기자가 청와대 대변인실에 이를 문의했더니, 예상한 대로 그곳은 접근 불가라 보여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변인실의 정확한 답변은 기억나지 않지만, 청와대 관내 사람도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곳에 있으며, 대통령 경호상 더더구나 불가능하다는 요지였다.

‘미남 불상’이 광복 이후 청와대로 넘어가게 된 과정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조선총독을 대체한 대한민국 권력이 대통령이고, 그가 집무하고 생활하는 공간이 청와대이니, 인수인계 차원에서 그리되었다고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경주가 출처임이 확실한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청와대 경내에 있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려져, 서울시에서는 이미 1974년 1월 15일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했다. 이를 지정하기 위해서는 기초 조사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다.

1/2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목록 닫기

이제는 제자리 경주로 돌려보내자

댓글 창 닫기

2017/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