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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 소전(小傳)

  • 글: 이영신 / 일러스트·홍석찬

한국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 소전(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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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 소전(小傳)
필자가 지금은 없어진 동아방송에 ‘백두산아 말하라’라는 제목으로 독립투쟁 비화를 다큐드라마로 집필하기 시작한 것이 1970년 4월1일이니 벌써 30여년이나 세월이 흘렀다. 이 프로그램은 1972년 3월31일까지 만 2년간 730회에 걸쳐 방송되었다. 그때 필자가 활용한 1차 자료가 바로 동아일보다.

다이쇼오(大正) 15년 7월분 축쇄판을 뒤적이던 어느 날 7월6일자와 7월10일자 3면에 실린 추도문이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일본 연호(年號)인 ‘다이쇼오’ 15년은 서기로는 1926년이다. 추도문의 제목은 이러했다.

‘嗚呼(오호) 徐曰甫公(서왈보공) 血淚(혈루)로 그의 孤魂(고혼)을 哭(곡)하노라’

제목만으로도 서왈보라는 사람을 추모하는 글임을 알 수 있었다. 추도문을 쓴 이는 한병도(韓秉道)라는 분이었다. 그때까지 필자는 서왈보라는 이름 석자를 대한 적도, 누구한테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 추도문은 두 번에 나누어 실었을 정도로 꽤 길었다. 대강의 내용은 이러했다.

‘서왈보는 중국군에서 활동하다가 3·1운동 후 중국 군적(軍籍)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한 독립지사로서 독립군을 양성할 뜻을 세우고 그 자금 마련을 위해 금광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베이징에 있는 남원항공학교에 입교했다.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학교 교관으로 활약했다. 둥베이(滿洲) 순무사(巡撫使) 장쭤린(張作霖)이 그를 초빙해서 휘하에 두려고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펑즈전쟁(奉直戰爭) 때는 국민군(國民軍) 편에서 활동했다. 그렇게 종횡무진, 눈부시게 활동하다가 비행기 시험비행을 하다가 추락사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필자는 동아방송에 독립투쟁 비화를 집필하고 있던 터라 새로운 인물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여간 흥분한 게 아니었다.

허술한 한국독립운동 사료

당장 서왈보라는 인물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했으니 어쩌면 독립운동사에 소개돼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김승학(金承學) 선생이 펴낸 ‘한국독립사(1965년)’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인명편에 딱 한 줄로 소개되어 있었다.

‘徐曰甫 : 만주 개별사건(個別事件)의 공적으로 (단기)4296년 3월1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 수상.’

‘만주 개별사건’이 있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문제는 이 사건의 내용이 ‘한국독립사’ 어디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다는 것. ‘한국독립사’의 허술한 편찬에 여간 실망스럽지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독립운동에 관련된 자료를 닥치는 대로 뒤적여보았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다행히 ‘한국인명대사전(靑丘文化社, 1967년)’에서 어렵사리 서왈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발견했다.

‘徐曰甫 1886(고종 23)∼1928년 독립운동가. 최초의 비행사. 평안도 출신. 원산 일본인 보통학교 졸업.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수학(修學)하고,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등과 함께 시베리아에 건너가서 사관학교를 설립, 젊은 독립투사들을 양성했다. 1909년 베이징의 육영(育英)학교에서 공부하고 1911년 유동열(柳東說)과 함께 몽골(蒙古) 등지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에 종사했고, 1914년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서 바오딩(保定)보 육군학교에 입학, 졸업 후에 중국군 육군대위로 활약하다가 3·1운동 후 애국지사들이 망명하자 이들과 함께 남만주에 들어가 활약했다. 뒤에 다시 베이징에 가서 육군 항공학교에 입학, 1년 후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가 되어 동교(同校) 교관으로 있다가 1928년 베이징을 방문한 이탈리아 비행사의 비행기를 시승(試乘)하다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기로수필(騎驢隨筆).’

‘기로수필’은 송상도(宋相燾) 선생이 일제시대에 여기저기 떠돌던 소문을 정리해서 출간한 책이다. 그러나 ‘한국인명대사전’은 ‘기로수필’ 하나만을 자료로 삼았기 때문인지 사실과 다른 내용이 적지 않았다. 우선 사망연대부터 틀렸다. ‘한국인명대사전’에는 서왈보의 사망시기를 1928년이라고 기록했는데 한병도의 추도사가 실린 것은 동아일보 1926년 7월6일과 10일자였다. 사실관계가 서로 다른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일한 증언자 권기옥 여사

필자는 서왈보와 관련된 자료 발굴에 착수했다. 그러나 서왈보 발굴 작업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1970년만 해도 만주나 중국 본토에서 독립투쟁을 했던 독립지사가 꽤 많이 생존해 있을 때라 필자는 그분들을 신발이 닳도록 일일이 찾아다녔다.

“혹시 서왈보라는 독립지사를 모르십니까? 한국 최초의 비행사라고 합니다. 서왈보라는 이름 석자는 들어보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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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영신 / 일러스트·홍석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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