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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순수음악·대중음악 융합한 ‘미국식 크로스오버’ 기수 레너드 번스타인

  • 황승경 |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순수음악·대중음악 융합한 ‘미국식 크로스오버’ 기수 레너드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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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 모습을 보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건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그만큼 그의 지휘는 열정적이다. 그는 대중적이고 친근한 이미지로 클래식, 뮤지컬, 영화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뛰어넘은 거장이었고,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시리즈를 기획한 위대한 교육자였다.
순수음악·대중음악 융합한 ‘미국식 크로스오버’ 기수 레너드 번스타인
필자는 클래식을 전공하고 민간 오페라단을 운영하며 상업예술인 뮤지컬과 실용음악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종종 순수예술 종사자들로부터 “미학적 예술성이 결여된 ‘딴따라’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질타를 받기도 한다. 물론 지금은 한 대학교수가 대중가요 ‘향수’를 불러 클래식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국립오페라단에서 퇴출되던 상황보다는 나아졌다. 또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서 크로스오버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각 분야 최고의 예술가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주 장르에서 누리던 영예를 다른 분야에서도 지속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다. 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이 야구선수로 전향했지만 야구의 황제로 남지 못했던 것처럼.

그런데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은 차원이 달랐다. 여러 장르를 섭렵한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그를 첫손에 꼽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80년대 초 세계 유수의 오페라극장을 호령하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미국의 포크가수 존 덴버와 듀엣을 결성해 ‘Perhaps Love’라는 불멸의 곡을 불렀는데, 그 배경에 번스타인의 미국적인 음악미학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테너 호세 카레라스가 도밍고와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음반을 낸 것도 그 곡의 지휘자가 번스타인이었기 때문이다. 번스타인은 서양 고전음악 분야에서 당대 최고 지휘자 반열에 올랐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적인 컨트리, 블루스, 재즈의 리듬과 선율을 클래식에 융합한 가장 미국적인 작곡자였다.

1959년 번스타인은 오늘날 세계 공연예술계의 중심이 된 뉴욕 링컨센터 개관식 총감독으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더 많이 받았다. 같은 시각에 인근의 브로드웨이에서는 그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절찬리에 공연되고 있었다. 41세의 나이로 그는 이미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에서 모두 정상에 올라 있었다.

‘미국식 민족주의 음악’ 골몰

번스타인의 아버지 새뮤얼은 우크라이나의 독실한 유대교 집안 출신이다. 원래 랍비가 되려 했지만 러시아군대에 징집되지 않기 위해 1908년 미국행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망명 초기에는 어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 연명했다.

그러나 새뮤얼에겐 유대인 특유의 사업수완이 있었다. 부지런하기까지 해서 미용 관련 상품을 많이 팔아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다 동향 출신의 유대인 제니를 만나 보수적인 유대인 가정을 이뤘다. 종교적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던 이 가정에서 새뮤얼은 장남 루이스(나중에 ‘레너드’로 개명)에게 사제가 되기를 기대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랍비의 꿈을 아들이 실현해 대대손손 가문의 영혼에 등불을 밝히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또래보다 소심하고 매사에 자신이 없어 여러 사람 앞에서 설교나 강론을 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중에 그가 무대에서 지휘봉을 들고 곡의 정점에서 하늘로 펄쩍 뛰어오르며 강렬하게 카리스마를 발산하던 모습과는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다. 내성적인 데다 공부에는 통 관심이 없던 이 아이는 고모 클라라가 선물한 피아노 한 대를 계기로 적극적인 우등생으로 변모했다.

아버지는 경건한 집안에서 하루 종일 시끄럽게 피아노를 치며 몰두하는 아들이 탐탁지 않았다. 더욱이 유대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교회음악의 창작 분야를 중시하지 않았다. 번스타인이 작곡을 전공하기 위해 하버드대에 진학한다고 하자 새뮤얼의 상실감은 무척 컸다. 장남이 랍비의 길이나 가업 승계에는 전혀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명하고 입지전적인 인물인 아버지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적극 후원하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지켜보는 조력자가 됐다.

수재들의 집합소인 하버드대에서 번스타인은 음악이론뿐 아니라 철학, 미학, 문학, 언어학, 사회학,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을 최고 권위자들의 가르침으로 섭렵하는 행운을 누렸다. 당시엔 실증적 분석에 의존하면서 예술의 과학적 비평을 중시했다.

미국 음악이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맞았을 때였다. 실험정신과 도전의식을 가진 신진 음악 세력이 대두하고 있었다. 이 아방가르드적 학파들은 18~19세기 음악 사조의 한계를 혁신적으로 개혁해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려는 공통의 의식을 갖고 있었다.

번스타인은 이 음악적 신세계를 미국 문화라는 범주에 아우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산업이 급격히 발전하는 가운데 다양한 인종이 맞물려 살아가는 미국의 20세기 상황을 담은 미국식 민족주의 음악을 작곡하려 했다. 이는 그가 1939년 제출한 하버드대 졸업 학위논문 ‘인종적 요소가 미국 음악에 끼친 영향’에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그는 하버드대 시절 4년 동안 범세계적 모더니스트로 신(新) 미국 문화의 전사가 됐다.

하버드대 교수였던 그리스 출신 지휘자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1896~1960)는 번스타인에게서 지휘자의 자질을 발견하고 지휘도 함께할 것을 권고했다. 그의 강력한 추천으로 번스타인은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에서 헝가리 출신의 프리츠 라이너(1888~1963)에게 피아노, 악기 편성, 대위, 화성 등의 지휘와 작곡을 위한 실질적인 실기수업을 혹독하게 사사했다. 번스타인은 독일권에서 활동한 유럽 출신의 두 지휘자로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 음악의 정신과 전통을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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