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10월 비무장지대 철책절단사건이 일어난 곳은 1977년 현역 중령의 월북사건이 발생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사상 최초의 비행기 월북사건이 있었던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과연 두 사건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사건에서 과연 누가 그토록 깔끔하게 철책을 자르고 넘어갔는지에 대한 의문 못지않게 관심을 끈 것은 사고가 난 철원군 역곡천 비무장지대가 전에도 종종 대남침투 또는 월북경로로 이용됐다는 사실이다. 군당국에 따르면 이 지역은 1970년대 이후 3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했고 1명이 귀순한 곳이다. 또한 남쪽에서는 1977년과 1980년대 초 현역장병 3명이 이곳을 통해 월북했다.
‘신동아’는 취재과정에서 이제껏 공개된 바 없는 월북사건 하나를 찾아냈다. 경남 진해에서 육군 군무원이 비행기를 몰고 월북한 사건이다. 그동안 북의 비행기가 남으로 넘어온 사건은 몇 차례 있었다. 북한 공군 조종사였던 이웅평·이철수씨의 귀순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남에서 비행기를 몰고 북으로 넘어간 사건이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기상천외한 월북사건의 진상은 군 정보기관 기록에서 최종 확인됐다.
이 사건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1977년에 발생한 최초의 현역장교 월북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증언 때문이다. 증언자는 사건 당시 보안사(기무사의 전신)에 근무했던 예비역 군 관계자다.
1977년 10월20일 육군 A사단 62연대 1대대장 유모 중령이 북으로 넘어간 사건은 일반엔 공개되지 않았으나 군내에서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가 월북한 경로는 이번에 철책사고가 난 곳에서 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이다.
당시 유 중령은 군용 지프를 타고 철책선 입구에 도착한 후 운전병과 무전병을 권총으로 위협해 그중 한 명을 자신의 월북길에 대동했다. 유 중령이 지뢰가 곳곳에 깔린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군사분계선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역곡천 덕분이었다. 폭 25m인 역곡천에는 지뢰가 거의 매설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에서 이곳을 대남침투로로 활용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27년 전의 이 사건이 새삼 화제가 된 것은, 지난 10월 이 지역에서 철책 절단사고가 나자 군당국이 일부 언론에 이 사건을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현역 중령이 월북한 사건은 당시 큰 충격이었다. 군당국은 처음에 이 사건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유 중령이 미모의 북한 여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북측 전단에 실려 한국군 최전방에 살포되자 어쩔 수 없이 공개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크게 화를 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통령의 격노는 지휘선상에 있는 장교들에 대한 대대적인 문책으로 이어졌다. 군단장과 사단장 및 사단 보안부대장이 보직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그밖에 사단 작전참모와 정보참모도 징계를 받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당시 사단 보안부대장이던 이학봉 중령의 운명이다. 군에서 그 정도 대형 사건에 연루돼 보직해임을 당하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중령은 기사회생해 장성까지 진급했다. 하나회 회원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군 주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2년 후인 12·12 사태 때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심복으로 활약한 이학봉씨는 1980년 준장으로 예편한 후 5공 정권에서 청와대 민정수석과 안기부 2차장을 지냈다.
갑종 182기인 유 중령은 전북 출신으로 여산중, 전주공고를 나왔다. 군당국 문서에는 ‘월북(행불 처리)’이라고 기록돼 있다. 당시 군당국이 발표한 유 중령의 월북사유는 도박빚, 여자문제, 가정불화 등이다.
도박빚 찌들린 군무원의 비행기 탈취
하지만 1977년 유 중령 사건 당시 보안사에 근무했던 예비역 군 관계자에 따르면 유 중령의 월북사유는 알려진 바와 다르다. 그보다 앞서 그 지역 상공에서 발생한 비행기 월북사고에 따른 문책과 관련됐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증언이다. 그는 “과거 월북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군당국에서는 무조건 빚 문제, 여자 문제 등을 월북사유로 들었다”며 “유 중령의 경우도 월북사유가 잘못 알려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의 제보를 바탕으로 당시 사건의 내막을 취재한 결과 실제로 유 중령 사건에 앞서 비행기 월북사고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주인공은 경남 진해 육군 수송기지창에 근무했던 5급 군무원 이모씨.
군당국 기록에 따르면 이씨가 L-19이라는 미국제 육군 정찰기를 몰고 북한 상공으로 넘어간 것은 유 중령 사건이 나기 8일 전인 1977년 10월12일이었다. 이유는 도박판에서 진 거액의 빚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L-19은 저공비행으로 적 동향을 관찰해 포병 관측소에 알려주는 구실을 하던 2인승 경비행기. 당시 정비기술만 있었던 이씨는 비행기를 몰 줄 아는 동료 한 명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보자에 따르면 이씨의 비행기는 서해안 기슭을 따라 저공비행으로 북상하다 유 중령 부대 관할지역 상공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그에 따라 이 지역 경계를 책임진 장교들에 대한 문책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유 중령의 월북사고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예비역 해군 장성 김모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씨의 비행기가 바다가 아닌 내륙을 통해 월북한 것은 해안과 함정의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바다 위로 날아갈 경우 격추될 위험이 높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산악지대의 계곡을 통해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당시 진해에서는 이씨의 비행기 월북사고 여파로 대대적인 문책과 간첩소탕작전이 벌어졌다. 사건 직후 진해에 입·출항하는 모든 함정은 한동안 대간첩작전에 시달렸다. 고정간첩인 이씨가 포위망이 좁혀지자 급하게 넘어가느라 비행기를 탈취했다는 둥 그의 월북행에 술집 마담이 동행했다는 둥 확인되지 않는 소문이 돌았다.
어쨌든 유 중령 사건이 군무원 이씨의 비행기 월북사건과 관련됐다는 제보자의 주장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그렇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유 중령의 병과는 보병이었다. 이를 두고 군정보기관 관계자는 “설령 비행기가 유 중령 부대가 있는 지역의 상공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포병부대도 아닌 보병부대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며 “두 사건의 발생시기가 비슷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제보자의 주장을 반박했다.
“유 중령 월북사유는 공금횡령”
이에 대해 제보자는 “당시 군의 분위기는 지금과 달랐다”며 “사고가 나면 직접적인 책임이 없어도 엄하게 책임을 추궁하는 풍토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제보 동기에 대해 “월북사고만 나면 당사자를 범죄자로 몰아붙이던 군당국의 태도에 분개했던 터에 이번 철책절단사고 이후 일부 언론에서 군당국 발표대로 또다시 유 중령의 월북사유를 엉터리로 보도하는 걸 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제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군 정보기관 관계자는 유 중령이 부대 매점(PX)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 월북했다고 말한다. 당시엔 군부대 매점을 대대장이 관리했다.
한편 장성 출신으로 유 중령 사건 당시 전방에 근무했던 한나라당 모 의원은 “유 중령이 근무에 염증을 내고 월북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시 그의 월북사유를 두고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돌았다”고 말했다.
유 중령 월북사건의 현장이자 지난 10월 철책절단사고가 난 철원 비무장지대는 원래 A사단 관할이었는데 유 중령 사건 이후로는 B사단이 지키고 있다. 군당국이 문책 차원에서 A사단을 후방으로 돌리고 후방에 있던 B사단을 끌어올린 것이다. A사단은 현재 경기 양평에 주둔하고 있다.
철원 비무장지대에는 원래 철조망만 있다가 1965년 목책이 들어섰다. 남방한계선에 3m 높이의 참나무를 줄지어 꽂았다. 아울러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수목을 다 제거하고 그 자리에 임진강에서 퍼온 모래와 부비트랩을 깔았다.
지금과 같은 철책이 세워진 것은 1969년이다. 군사분계선에서 남방한계선에 이르는 비무장지대는 지뢰밭으로 바뀌었지만, 경계임무를 위한 안전통로는 따로 마련돼 있었다. 한탄강 상류에 해당하는 문제의 역곡천은 비가 오면 지뢰가 노출되곤 해 취약지대로 평가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