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호

영화배우 변희봉

“난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한 살 냄새 나는 영화를, 내 인생 마지막 작품을…”

  • 한상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reenfish@donga.com

    입력2011-05-23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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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배우 그만두고 고향 지키라”던 아버지의 유언
    • - 전라도 사투리 때문에 그저 묻어가던 성우 생활
    • - 1년 내내 마스크 쓰고 다니는 변희봉식 신비주의
    • - “봉준호 감독 만나 진짜 영화가 뭔지 알았다”
    • - “강우석 감독에게 술 사려고 100만원 수표 갖고 다녔는데…”
    • - “연기자의 길,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다”
    영화배우 변희봉
    “전도착했습니다. 걸어 다니고 있으니 천천히 오세요. 비가 참 좋네요.”

    약속시간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영화배우 변희봉(69)이 전화를 해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하얀색 마스크를 쓴 그가 기자를 맞았다. 한여름에도 한겨울에도 벗지 않는다는 마스크, 이유를 물었다. “안 더우세요? 혹시 감기가….” 그가 답했다.

    “사람들은 다 자기만의 취향대로 사는 것이니까요. 저는 그래요. 배우가 다 내놓고 다니는 것은 좀 그렇다, 좀 가려져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 그러나 진지하다. 꼬박꼬박 존칭을 쓰는 노신사의 화법이 인상 깊다.

    “많은 사람이 제 연기를 보면서 ‘우리 아버지를 닮았어’ 그래요. 그런데 난 그 말이 참 듣기가 싫어요. 드라마틱하지가 않잖아요. 요 몇 년 영화 하면서는 덜 듣게 됐지만, 배우는 목소리도 너무 내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그래도 불편하잖아요, 한여름에 마스크는.

    “집에서는 안 하니까, 우리 아파트에도 아직 나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리고 요즘에는 아주 기가 막힌 게 나와서, (입을 가리키며) 요기가 터져 있는 게, 얼굴도 안 타게, 아주 좋아요. 집사람하고 식당 가서도 구석자리에서 마스크 살짝 내리고 먹고 나오면 아무도 몰라봐요.”

    자리를 잡고 앉아 마스크 얘기를 하는데, 오고가는 사람들이 그에게 연신 인사를 해댄다. 오랜만에 선생님을 만난 듯 고개를 꾸벅 숙이는 사람도 있고, “야~ 변희봉이야” 이러면서 웃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변희봉은 그때마다 한쪽 눈을 살짝 치켜뜨며 인사를 대신한다, 약간 코믹한 모습으로. 생각해보니 어느 영화에선가 본 적이 있는 표정이다. ‘괴물’이었나, ‘살인의 추억’이었나….

    ▼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불편하세요?

    “불편하다기보다는 좀 새로워야 한다는 생각이 커요. 그러잖아도 훌륭한 사람이 많은데, 제가 좀 덜떨어진 거죠. 덜떨어져서 그래요.”

    괴물, 살인의 추억

    변희봉은 영화배우다. 간간이 TV에도 얼굴을 비추지만, 사람들은 이제 그를 영화배우로 기억한다. ‘미친 존재감’이니 ‘명품 조연’이니 하는 말도 영화에 출연하며 얻은 훈장. 출연 작품의 수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족적은 누구보다 넓고 깊다.

    기자가 처음 그를 눈여겨봤던 작품은 ‘살인의 추억’(2003)이다. 그보다 앞선 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 맡은 개 잡아먹는 경비도 인상 깊었지만, ‘살인의 추억’에서 맡은 형사반장 구희봉이 기자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논두렁에서 자빠져가며 송강호와 대사를 주고받는 7분30초짜리 원컷 원신이 압권이었다.

    1300만명이란 경이적인 관객을 불러들였던 영화 ‘괴물’에서는 또 어땠나. 손녀딸을 찾는 한 가족의 리더, 변희봉식 카리스마에 할 말을 잃었더랬다. 죽음을 예감하며 가족들에게 손짓하는 장면이나 괴물을 노려보는 눈빛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컷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대사가 사람들의 가슴을 때렸다.

    “늬들 그 냄새 맡아본 적 있어? 새끼 잃은 부모 속 타는 냄새 말여. 부모 속이 한번 썩어 문드러지면 그 냄새가 십리 밖까지 진동하는 거여.”

    변희봉은 ‘공공의 적 2’ ‘주먹이 운다’ ‘이장과 군수’ ‘더 게임’ 등에서도 수준 높은 코미디와 남다른 비장미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 연기자 생활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내가 사실 1965년에 성우로 이 바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성우라는 게 뭐하는 건지도 모르고 시작했죠. 라디오 드라마를 듣다가 시험이나 한번 보자 해서 봤는데, 덜컥 합격했어요. 근데 전라도 사투리 때문에 아주 안 된다고 그랬어요. 교육받는 동안 선생님들이 ‘너는 저리 가, 너는 안 되니까 저리 가 있어’ 그랬습니다. 그 수모는 이루 말로 형용할 수가 없고, 비굴함이 말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박차고 나가면 안 되니까, 일단 버텨보자 그랬습니다.”

    참고로, 변희봉은 전남 장성 출신이다. 목포와 광주를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그의 말투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짙게 배어 있다.

    ▼ 사투리가 그렇게 심한데 성우시험에는 어떻게 붙었어요.

    “뭘 낭독하는 건 제가 좀 했어요, 뭘 보고 하는 건. 하여간 (성우로) 들락거리면서 어린이 연속극, 8시 연속극 그런 거를 하고는 했는데, 뭐 숨도 못 쉬고 앉아서 세월을 다 보냈지요.”

    ▼ 초년 고생이 심하셨네요.

    “한 2~3년, 난 그 시간이 특별히 오래갔어요. 그러다 연극하시던 차범석 선생님이 ‘산하’라는 극단에서 연극을 하는데 누가 펑크를 내니까 나더러 ‘해보겠냐’고 해서 연극을 시작했죠. 그분이 목포 사람입니다. 그땐 내가 별로 희망도 없고, 그래도 묻어는 가야겠고, 뭔가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술이나 먹고 다니던 시절…, 참 질서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 성우로는 성공을 못하신 거네요, 쉽게 말하면.

    “연극을 하면서 슬슬 묻어가는 정도가 됐죠. 그러다 ‘법창야화’라는 라디오 드라마가 시작됐는데, 그걸로 좀 대열에 끼죠. 강진 갈갈이 사건, 이종대-문도석 칼빈총 강도사건, 무등산 연쇄살인사건 같은 걸 드라마로 만든 것인데, 다 전라도 사람이 주인공이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맡은 거죠. 그때부터 묻어가는 것을 벗어나서 조금은 동참하는 식이 됐다고 할까. 하하하.”

    이 손 안에 있소이다

    실제 변희봉은 1970~80년대 TV에서 주로 악역을 맡으며 활약했다. 인기 드라마였던 ‘수사반장’에서도 사이비 교주, 사기꾼, 잡범을 오래했고, 자리를 잡았다.

    ▼ 생활은 어떠셨어요? 형편은 괜찮았나요.

    “형편이랄 것도 없었어요. 성우를 하면서 3000원인가 월급을 받았는데, 그때 하숙비가 2700원인가 했으니까. 하숙집에서 수도 없이 쫓겨나고 그랬죠.”

    ▼ 많이 어려웠겠네요.

    “내가 그래도 고향에서는 밥은 먹고 사는 집 자식인데, 고향을 떠나는 순간 상상도 못하는 일이 벌어진 거죠. 부친이 아주 강직하신 분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자식을 이런 계통에 나오지 못하게 정말로 달래도 보고, 참~ 여러 가지 방법을 썼으나, 결국 미친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지요.”

    ▼ ‘딴따라’라고 집안에서 반대했군요.

    “그렇죠. 오랜 세월 그랬습니다. 들어가도 받아주지 않고, 문 딱 걸어 잠그시고, 자식 아니라고 그러셨고. 1967년에 돌아가셨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보니까 ‘아~ 아버지의 뜻을 받들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막내아들인 내가,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아버지 옆에 와 있었는데, 유언이 ‘서울 가지 마라’였어요. 어머니는 나 때문에 아주 모진 세월을 살아야 했고, 하여간 나 때문에 사방팔방이 시끄러웠습니다.”

    ▼ 아버님이 바라던 삶은 어떤 것이었나요.

    “법조인이 됐으면 하셨죠. 하다못해 농사짓기를 바라셨고요. 그런데 난 법조인이 될 능력은 애초에 없었습니다.”(웃음)

    변희봉은 좋은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조부와 부친이 모두 고향에서 면장을 지냈다. 마을의 큰일은 모두 그의 집에서 결정됐다. 요즘 말로 하면 지역유지다. 변희봉의 모친은 6년이나 절에 가서 공을 드린 뒤에야 막내아들인 변희봉을 얻었다. 그러나 변희봉이 배우라는 직업을, 그것도 주로 범죄자 같은 역을 맡기 시작하면서 산통이 깨져버렸다.

    ▼ 하여간 ‘연기자 생활은 그만두라’는 거였네요.

    “지켜라, 고향을 지켜라. 근데 도저히 그건 안 되겠어서 서울로 올라왔죠.”

    ▼ 1967년이면 사투리 때문에 성우로서 별로 비전이 없었을 땐데, 그냥 고향에서 농사나 짓지 그러셨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방송을 하면서 내가 이 바닥에 매력을 느껴버린 겁니다. 고향에 있어보니까, 도저히 안 되겠는 것이죠. 좀이 쑤시고.”

    ▼ 묻어가는 인생이지만 한번은 꽃이 핀다, 그런 생각?

    “아니, 뭐 그렇게 거창한 생각까지 할 머리도 없었는데, 뭔가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뭔가가 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그리고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 그래서 기회가 왔나요?

    “왔죠. ‘법창야화’도 기회였고. 한참 뒤 얘기지만 ‘안국동 아씨’라는 드라마나 ‘조선왕조 500년’에서 유자광 역을 맡은 것도 기회였죠.”

    1979년 방영된 드라마 ‘안국동 아씨’에서 변희봉은 점쟁이 역을 맡았다. 배역도 안 들어오고 생활이 고단해 2년이나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맡은 역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목소리를 흉내 내 맛깔 나는 연기를 선보였는데 인기가 대단했다. ‘조선왕조 500년 설중매’는 그의 출세작이 됐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명대사 ‘(세상이 다) 이 손안에 있소이다’가 이때 나왔다. 이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받았고 음료수 CF도 찍었다. 좋은 시절이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부끄러운 자식

    영화배우 변희봉
    ▼ 그러니까 연기자가 되려고 상경한 게 아니었군요.

    “아~ 그게 외가 쪽에 제약회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 취직한다고 와 있었죠.”

    ▼ 제약회사에선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한 1년 있었습니다. 근데 제가 뭔 일을 했겠습니까. 그저 숙직실 빌려주니까, 숙직실에서 자는 일, 약 만드는 데 필요한 제반 심부름, 감기약이나 헤모글로빈 넣는 통 씻어 오는 일, 씻을 데가 없으면 청계천에 가서 씻어 오는 일을 했지요. 축농증 약, 여자들 예뻐지는 약, 감기약, 임질 매독 약, 그런 거 만드는 회사였어요.”

    ▼ 근데 왜 하필 성우 시험을 보셨어요. 탤런트도 있고 영화배우도 있는데.

    “그 바닥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없었으니까요. 성우로 들어갔다가 살짝 다른 방송국에 가서 탤런트 시험을 보긴 했어요. 아무도 모르게 가서 조용히 봤는데, 바로 떨어져버렸죠. 제약회사 다닐 때 숙직실에 누워서 라디오 연속극을 듣는데 재밌어서 성우 시험을 본 거지, 다른 건 뭐 아는 게 없었어요.”

    ▼ 제약회사 다닐 때는 부친께서 좋아하셨나요?

    “그랬죠. 한 번 와주시기도 했죠. 오셔서는 얼마간 돈도 좀 주시고, 그런데 미친 나는 부친이 고향에 내려가실 때 차표도 못 사드렸습니다. 외상값이 너무 많아서 아버님이 주신 돈으로 외상값 다 갚고 나니까, 가진 돈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철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 지난 세월이 후회되세요?

    “후회하는 건 없는데, 아버지 생각하면 좀 아쉽지요. 간밤에도 선친이 꿈에 나타나셨는데, 내가 고향에 가려고 차를 타려는데 주머니에 차비밖에 없는 겁니다, 돈이 없어요. 용돈을 드려야 하는데, 좀 드리고 싶은데, 그러다 꿈이 깼어요. 가끔 그럴 때, 지독스럽게 길게 좀 (아버지) 꿈도 꾸어봤으면~ 그런 마음이 간절하죠. 나이가 들수록 그런 마음이 깊어져요. 저는 항상 생각합니다. 배우라는 걸 해서, 내 아버지와 내 가문에 누를 끼쳤던 것을 100분의 1이라도, 1만분의 1이라도 보상해야 한다고요. 겸허하게, 겸손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 그때로 돌아가신다면 다시 배우의 길을 가시겠어요?

    “지금 생각으론 못할 것 같아요. 아버님의 뜻을 따르겠죠. 제 형님이 저보다 여섯 살이 많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가 상가에 형님하고 앉아 있으니까, 형님 친구들이 와서 그래요. ‘아니 왜 변희봉씨가 여기 있냐’고. 그니까 형님도 어디 가서 제가 동생이라고 말을 안 하고 살았던 것이죠. 나를 부끄럽게 생각했으니까,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죠.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봉준호와 강우석

    부친을 추억하는 변희봉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왔다. 추억인지 회한인지 모를 눈물이, 창문을 때리는 굵은 빗줄기의 잔상이 촉촉이 젖은 그의 눈동자에 반사됐다.

    ▼ 선생님은 애드리브를 많이 하기로 유명합니다. 실제 ‘괴물’ ‘살인의 추억’ 같은 영화에서도 그것이 화제가 되곤 했죠.

    “괴물에서, 아들로 나온 송강호가 손님이 주문한 오징어 가운뎃다리를 뜯어먹은 걸 가지고 나랑 얘기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 장면도 애드리브인데, 그 장면 찍을 때 봉준호 감독이 그러는 겁니다. ‘선생님~, 저기 오징어에 대해서 설명해줄 게 있으면 마음대로 한번 해주세요.’ 그렇게 해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송강호한테 ‘(갑자기 눈을 위로 치켜뜨며) 너, 손님한테 오징어 가지고 갔냐? 아~ 그래? 근디 말이다. 오징어가 귀때기 맛 다르고, 다리 맛 다른데, 그중 가운데 긴 다리 맛이 특별히 다른 건데…’ 뭐 그런 대사가 나온 거죠. 미리 준비한 것은 아니고요, 그냥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살인의 추억에서도 논두렁에서 송강호 만나는 장면이 사실 책(대본)에는 설명이 석 줄밖에 없었어요. 그게 두 번째 시체가 발견되는 장면인데, 내가 여기서 가고 송강호가 저기서 오고, 두 사람이 만나서 시체 앞으로 간다. 그게 답니다. 근데 그 거리가 꽤 길어요. 그게 7분이 넘는 원신 원커트로 나온 겁니다. 오전 10시부터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는데, 봉 감독이 저희더러 ‘맘대로들 하세요. 그냥 맘대로들 하세요’ 그러는 거예요. 그날따라 내가 감기가 심했어요. 논두렁에서 미끄러져서 내려오면서 ‘에이~이거 뭐 상 받게 해준다더니, 말년에 이게 뭐야, 니들 정말 이럴 거야’ 그렇게 나온 거죠. 그런데 처음에는 저쪽(송강호)에서 하는 말이 안 들려요. 감독은 계속 ‘한 번만 더 합시다’ 그러고. 결국 저녁 6시40분에야 오케이가 떨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정말 오케이를 받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니까, 그때부터는 송강호가 저기서 하는 소리가 다 들립디다, 그렇게 먼데도. 송강호도 그제야 내 얘기가 들리더라는 겁니다. 애드리브란 건 서로 맞춘다고 되는 게 아니고, 서로 노력하다 보면 맞아가는 겁니다.”

    ▼ 특히 감독과 연기자 간에 믿음이 중요하겠네요. 궁합도 잘 맞아야 할 것 같고요.

    “호흡이란 게 있어요. 작품을 하면서 감독이나 배우나 모두 쭉~ 젖어가야, 완전히 젖었을 때라야 뭔가가, 그런 장면이 나오죠.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게 바로 이 작업입니다. 그게 되는 거죠, 봉 감독하고는.”

    변희봉에게 봉준호 감독은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봉 감독의 영화 세 편(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제2의 전성기, 아니 영화 인생으로 보면 40년 연기 인생에 첫 전성기가 그렇게 찾아왔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봉 감독을 만난 것이 자기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 봉준호 감독을 만난 게 선생님께는 어떤 의미인가요.

    “1970~80년대, TV를 주로 할 때부터 ‘영화를 한번 해봐야지’하는 욕망은 있었어요. 그래서 80년대엔 영화판에 나오기도 했고요. 그런데 당시는 성에 대한 것들, 저속한 코미디가 대세일 때였습니다. 그래서 얼른 꼬리를 감추고 다시 TV로 들어가버렸어요. 물론 좋은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두용 감독하고 만든 영화 ‘내시’는 좋았어요. 이두용 감독이 ‘왜 내가 당신 같은 배우를 이제 만났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하고 그랬으니까요. 근데 그분이 그 후로는 작품을 안 했어요.(웃음) 하여간 안 좋은 기억만 갖고 영화판을 떠나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봉 감독을 만난 겁니다. 봉 감독을 만나기 전에는 다 접고 서울을 떠날 생각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 봉 감독이 출연제의를 했을 때 두말 않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다 여차저차해서 하게 됐는데, 그제야 ‘아~, 이게 진짜 영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봉 감독의 천재적인 아이디어, 리더십, 자기희생에 매력을 느꼈죠. 그런 감독 많지 않습니다. 배우 연기에만 몰두하는 감독은 좋은 감독이 아닙니다. 언제나 관객을 보면서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눈으로는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도, 머리로는 관객을 봐야죠. 봉 감독은 그런 사람입니다.”

    ▼ 봉 감독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시네요.

    “그렇습니다. 또 이런 신뢰가 있으니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하면서 좋은 장면을 만들 수가 있는 거죠. 믿으니까 무조건 해봅니다. 진실을 갖고 대듭니다. 그러니까 감독이 수십 번씩 ‘한 번만 더 해볼까요?’ 해도 즐겁게 하는 겁니다. 몇 번을 다시 찍어도 상관이 없다는 얘기지요.”

    ‘플란다스의 개’가 나왔을 때 변희봉은 자기 연기를 볼 자신이 없어 깡소주를 마시고 시사회장에 들어갔다고 했다. “어차피 뻔하다”고 생각해 아예 안 볼 생각이었다고. 지하실에서 개 잡아먹는 역할을 한 것도 내내 마음에 걸렸다.

    “봉 감독에게 ‘나 보기 싫소’ 그랬습니다. 그런데 봉 감독이 하도 그러니까 결국은 갔지요. 여의도 MBC 건너편의 무슨 소주 집에서 소주를 병째 먹고 택시 타고 갔습니다. 거나하게 취했죠, 맨입에 마셨으니까. 근데 막상 보니까 영화가 근사한 거예요, 생각지도 않은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나는 그 영화가 어떤 전환점이자 기폭제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 봉 감독 작품 외에도 성공작이 많았죠.

    “강우석 감독 작품인 ‘공공의 적2’도 기억에 남습니다.”

    ▼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아~ 그래요? 영화를 다시 한 뒤 거의 초창기나 다름없을 땐데, (강 감독이) 그 영화로 성공하셔서 저한테 보너스도 두둑하게 한번 주셨고….(웃음) 그래서 사실 나는 강우석 감독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항상 제 지갑에다 100만원짜리 수표를 하나 넣고 다녔습니다. 어느 때고 내가 강 감독에게 소주 한잔은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안 돼서….”

    ▼ 강 감독이 그걸 알았다면 분명히 술 한잔 했을 텐데요.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마는, 그 분 작품은 언제고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집중력과 장악력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아주 대단합니다.”

    ▼ 지금도 갖고 다니세요?

    “그게 참~, 계속 가지고 다녔는데, 몇 년 갖고 있었는데 그만 써버렸어요. 부산에서 양복을 한 벌 해입었는데, 카드가 안 된다고 그래서 그만….(웃음) 그 후로 모친께서 세상을 뜨셨을 때 상가에서 한번 뵙기는 했어요. 영화 ‘이끼’ 때도 마음속으로 기대는 많이 했습니다, 솔직히…. 하여간 영화감독으로 정말 존경하는 분 중의 한 분입니다. ‘이장과 군수’ 만든 장규성 감독, ‘주먹이 운다’ 만든 류승완 감독, ‘더 게임’ 만든 윤인호 감독도 훌륭하신 분들이죠.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들입니다.”

    ▼ 앞으로도 그분들과 작업하실 기회가 많겠죠.

    “(웃음) 그건 모르지요.”

    “호랑이 똥 쌀 놈들아”

    영화배우 변희봉
    최근 변희봉은 ‘적과의 동침’이란 영화로 관객과 오랜만에 만났다. 2008년 주연한 영화 ‘더 게임’ 이후 3년 만이다. 6·25전쟁 당시 한 시골마을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 역시 변희봉의 ‘코믹-비장’ 연기가 빛을 발했다. 그러나 흥행에는 실패했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변희봉은 아쉬워했다.

    “정말 영화다운 영화를 못하고 몇 년을 이러고 있으니까, 기다리는 관객에게도 미안하죠. 지금도 영화가 하나 들어와 있기는 한데, 거절하면 안 되는 영화인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사실 사람이면 해줘야 하는데…. 캐릭터가 그전에 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그걸 하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죠. 나도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의 초조함 때문이겠죠. 이제 많은 작품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초조함.”

    ▼ 선생님, 지금 뭔가를 기다리시나요? 어떤 작품을.

    “솔직히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가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허할 뿐입니다. 내 남은 인생을 쏟아 넣을 작품이 온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 지금 기다려봅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인가요. 기다리시는 작품이.

    “인생 사는 얘기지요, 진한 살 냄새가 나는 사람 얘기였으면 합니다. 전에는 노년의 로맨스 같은 걸 해보고 싶다는 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모두 인생 얘기입니다. 얼마 전 이순재 선생님이 주연을 맡아 개봉한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사실은 저한테 먼저 왔었어요. 그런 영화라면 좋지요.”

    ▼ 그런데 왜 안 하셨어요.

    “솔직히 아쉽습니다. 그때 공교롭게도 저와 ‘괴물’을 했던 영화사(청어람) 대표가 느닷없이 ‘29년’이라는 영화를 하자고 해서 준비 중이었어요. 굉장히 찐한 얘기죠. 그런데 ‘29년’은 결국 제작되지 못했죠.”

    영화 ‘29년’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게 사살된 피해자 가족이 29년이 흐른 뒤 당시 최고통수권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암살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다. 만화가 강풀의 장편만화 ‘26년’이 원작. 변희봉은 당시 전두환 역에 캐스팅이 됐었는데, 투자사들이 갑작스레 제작을 포기하면서 제작이 중단됐다.

    ▼ 선생님이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하셨다면 어땠을까요.

    “제가 그 영화를 했다면 꼭 쓸 말이 하나 있기는 했습니다.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가서 세상을 보고 꼭 외치고 싶었던 소리가 있어요. (손을 번쩍 치켜 올리며) ‘야! 이 호랑이 똥 쌀 놈들아!’ 하는 얘기를.”

    ▼ 무슨 뜻인가요.

    “호랑이는 뭘 먹고 삽니까? 고기만 먹지요. 고기만 처먹고 사는, 잘사는 사람들한테 내가 외치고 싶었던 소립니다. 그 소리를 마음껏 지르고, 누구 잘난 놈만 보면 ‘호랑이 똥 쌀 놈들’ ‘너희는 배때기 따시게 사니까 뭘 몰라’ 하는 얘기를 내가 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그가 말한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변희봉 특유의 표정과 눈빛을 기억하며, ‘재밌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쪽같은 마누라

    ▼ 작품이 없을 때는 주로 어떻게 지내세요.

    “운동을 많이 합니다. 걷기, 등산, 제일 자주 가는 곳이 맛거리가 있는 시장입니다.”

    변희봉은 요즘 부인과 함께 전국을 걸어 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아예 서울을 비웠다. 부모님 산소에 간 김에 고향 근처의 장성댐에 가서 하루를 잤고, 또 산을 걸어서 넘어가선 장성 금곡마을의 편백나무 숲에서 하루를 잤다. 언젠가 방송에서 내레이션으로 소개했던 곳이다. 어린 시절 살았던 목포에서는 10여 일간 머물며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제주도로 건너가 5박6일 동안 올레길을 돌아다녔다. 하루에 보통 2만5000보를 걸었다. 변희봉은 “대본도 걸으면서 외우는데, 오래된 습관이다”라고 말했다.

    ▼ 그런데 사모님도 걷는 걸 좋아하시나요?

    “힘들어하지요. 요새 약 먹입니다. 저 혼자는 못 하겠거든요. 같이 다녀야지.”

    ▼ 약을 먹여요? 무슨 약을요.

    “힘 낼 수 있는 약, 그리고 나는 마누라가 없으면 안 됩니다. 물건 하나도 살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

    ▼ 옷 같은 건 직접 사실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마누라가 다 해줍니다. 그래서 내가 참 잘못 산 사람이에요, 따지고 보면. 요즘에는 정말 마누라한테도 미안한 생각을 갖지만, 이러다가 마누라가 막상 뭔 일이 나면 내가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가….”

    ▼ 큰일 나겠는데요.

    “정말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정말 마누라가 금쪽같다는 생각이 드는 나이가 돼서, ‘젊어서 잘해라, 나이 먹으면 안다’고 했던 어른들 말씀이 옳다는 것을 실감하지요.”

    ▼ 젊었을 땐 어떠셨어요. 좋은 남편이었나요?

    “아니죠.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마이너스통장이 시작됐을 때입니다. 돈이 없어요, 그래서 은행에 갔습니다. 근데 금세 마이너스 통장이 상한선을 넘어버려요. 그럼 그놈을 또 늘리고, 그러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보니까 8000만원이 넘은 거예요. 마누라한테 그 고통스러운 것을, 걱정을 줬던 것이 생각납니다. 변희봉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공존하면서, 아마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생각하면 참~ 미안하다….”

    ▼ 글쎄요. 별로 안 미안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중매입니다. 전라남도 해남 윤선도 집안 사람입니다. 내 형님께서 어쩌려고 그랬는지, 이 혼사를 시키셨죠. 근데 그때만 해도 내가 하도 (돈이) 없으니까, 사실은 누가 좀 (돈을) 갖고 오는 사람, 땅이라도 좀 갖고 오는 사람한테 (장가) 가고 싶은, 그런 게 많았습니다. 근데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그 시절에 저는 정말 술 외상값이 참~ 많아서 어딜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었어요. (술집 주인들도) ‘장가를 가면 얼마라도 주겠지’,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고, 근데 (부인을) 만나보니까 그게 아닌 거예요. 나한테 뭘 해준다는 게 없어요.”

    ▼ 술값 갚으려고 결혼을 결심하신 거네요, 간단히 말하면.

    “하여간 아무것도 없어요. 내일이 결혼식인데, 그쯤 되면 (처가에서) 어떻게 좀 뭐를 해준다는 얘기가 나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죠.”

    ▼ 뭐 돈을 얼마를 준다거나 그런 말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술을 엄청 먹어버린 거예요, 아주 인사불성으로.”

    ▼ 결혼 전날?

    “그리고 내 방에 들어와선 ‘결혼 안 해, 장가 안 간다’ 그랬죠.”

    ▼ 결국은 하셨잖아요.

    “광주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서울에서 온 손님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데 결혼식 끝나고 여기저기 인사를 가야겠는데, 그래서 이제 마누라 되는 사람한테 ‘돈이 얼마나 있냐’ 했더니 딱 1만7000원을 내놓는 겁니다. 내가 자빠졌습니다. 부장 집에 빵이라도 한 상자 가지고 가야 하는데, 이것저것 따져놓고 보니까 돈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인사를 다니고 나면. 정말 기구하게 살았지요.”

    ▼ 잠깐만요. 근데 선생님도 당시엔 아무것도 가진 거 없으셨으면서 사모님께는 뭘 바라는 게 좀 도둑놈 심보 아닙니까?

    “뭐 도둑놈 심보라기보다는, 그때 장인이 엽연초 공무원이셨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담배공사에 계셨는데, 그래도 딸년을 서울까지, 객지로 보내려면 어쨌든 당분간은 자기가 쓸 돈을 쥐어서 보내야 할 것 아닙니까? 설사 안 가져간다고 해도. 근데 이런 얘기를 마누라한테 다 얘기할 수도 없었고….”

    부인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 그의 얘기는 아무래도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부인 성격이 참 좋으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 딸만 셋을 두셨는데 자녀들은 다들 잘 컸나요?

    “제가 애들을 좀 엄하게 키웠어요. 후회되죠. 애들이 나중에 결혼할 때쯤 ‘니들은 왜 연애를 못하냐’고 하니까 ‘연애할 시간을 주기는 주셨어요?’ 하면서 따지고 달려들어요. 새끼들 때문에 혼이 났습니다. 지금은 다들 결혼해서 찍소리 없이 잘 삽니다. 근데 결혼을 하더니 시부모가 먼저고 전 그 뒤예요. ‘야~ 새끼들이 이렇게 변하나’ 싶고. 마누라는 ‘잘 사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라’ 그러지만 나는 ‘이것, 너무하지 않냐, 나는 뭐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특히 애들이 집에 빈손으로 올 때는 마음이 안 좋습니다.”

    ▼ 사모님에게나 딸들에게 뭘 많이 바라시네요.(웃음) 아들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실 것 같네요.

    “뭐,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은) 없지 않아 있다고 봐야지요.”

    여행을 할까, 기타를 배울까

    ▼ 오래전 어떤 인터뷰를 보니 ‘뭔가에 한번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린다’고 하셨던데, 분재에 빠져서 정신 못 차렸다는 얘기도 있고요.

    “정신을 못 차리는 정도가 아니라, 다 쏟아버립니다.”

    ▼ 어떻게 되셨는데요.

    “1970년대 말인가, 버스를 타고 행주산성에 갔다 오는 길에 나무 키우는 비닐하우스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분 삶이 감동을 주더라고요. 거기를 들락거리면서 분재를 배웠죠. 비금도 같은 곳에서 분재용 나무를 캐오면, 그걸 ‘아라끼’라 그러는데, 무조건 삽니다. 소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뭔지 모르게 빠져들어가는 거예요. 당시엔 동양철강 회장님, 호남제분 회장님, 또 무슨 일회용 종이컵 만드는 회사 사장님 같은 분들이 다 분재에 미쳐 있었어요. 좋은 나무가 나오면 서로 사려고 난리가 나고 그랬지요.”

    ▼ 그래서 얼마나 사 모으셨어요?

    “나무를 키우려고 집을 옮기고, 서오릉 근처에 1200평 땅을 사서 나무를 빽빽하게 심었어요. 소나무, 매화, 청매, 홍매 등등 해서, 한 9년을 그렇게 열심히 키웠는데 외환위기가 빵 터졌어요. (두 손을 둥그렇게 모아 나무의 굵기를 가늠하며) 이만큼씩 다 컸을 땐데요. 아주 잘 키웠지요. 아마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나무를 키운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막 수출도 하려던 때였습니다. 완전히 망했죠. 그런데 우리는 또 성격이 그렇습니다. 내가 좀 아쉬워도 그 소중한 걸 싸게 가져가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천금을 줘도 안 내놓습니다. 외환위기가 터진 뒤 연기 생활 그만두고 고향 내려갈 생각을 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방송국에서 조연급인 우리 같은 사람들 출연료부터 깎는 겁니다. 그래서 ‘아~ 더 있다가는 추잡스러운 꼴 보겠다. 언제 니들이 나 부자 만들어준 적 있냐. 난 이제 안 할란다’ 그랬습니다. 하여튼 그때 나무를 어떤 사람한테 다 넘겨버리고는 그 다음부터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 지금은 그럼 나무를 안 키우세요?

    “그렇습니다. 이제는 나무 놓았던 자리에다가 화분을 사서 채소를 가꿀 텃밭을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남이 들으면 ‘저거 웃기는 새끼 아니냐’고 하겠지만…. 내가 잠시 난에도 미쳤었는데, 집사람은 이제 나무나 난에 물도 안 주려고 합니다, 징그럽다고. 그리고 제가 기타도 배우려고 합니다. 여행을 먼저 하고 싶어서 잠시 미뤄뒀죠. 그것도 좀 고생스러운 여행을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아는 사람한테 심마니를 하나 소개해줘라 부탁도 했어요. 전라도 목포 끝에서부터 나물 캐는 사람들을 따라 한번 상경을 해볼까 그런 생각도 하고요. 진짜 세월을 만끽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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